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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으로 다시 쓴 부토, 자비에 르 르와와 예술을 ‘한다는 것’에 대해

글 : 이경미(연극평론가)


‘페스티벌 봄’은 현대무용 연극 미술 음악 영화 퍼포먼스 등 현대예술 전 장르 간의 상호 교류를 근간으로 하는 실험적 창작예술제로서, 해마다 국내외의 예술가들을 초청해 현대예술에 대한 진지하고도 새로운 실험들을 선보이는 국제적인 다원예술축제이다. 올해에는 3월 22일부터 4월 17일까지 국내외 총 23개의 작품이 참가하였으며,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국립극단 소극장 판, 아르코 예술극장, 그리고 씨네코드 선재 뿐 아니라 세운상가 일대의 공간 등지에서 새로운 예술에 목마른 국내관객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프랑스의 안무가인 자비에 르 르와(Xavier Le Roy)가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페스티벌 봄’에서 관객을 만났다. 생물학을 전공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그는 음악에 담겨진 감정의 흔적에 몸이 어떻게 감응하며 그것은 어떤 정신적, 육체적 떨림으로 가시화하는가를 계속적으로 탐구하기로 유명한 예술가다. 지난 해 봄 페스티벌에서 그가 선보였던 '봄의 제전'에서도, 그는 슈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봄의 제전'을 어떻게 완벽하게 보여줄 것인가를 화두로 삼지 않았다. 그가 보여주었던 것은 한 명의 무용수 더 나아가 예술가로서, 음악과 자신의 몸을 섞어 몸이 음악이 되고 음악이 몸이 되어, 끝내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몸으로 슈트라빈스키를 새롭게 쓰는 그 순간을 찾기 위한 진지한 예술적 고민의 과정 자체였다.

르 르와가 올해 다시 '다른 상황의 산물'이라는 작품으로 봄 페스티벌을 찾았다. 이번에도 역시 무대는 텅 비어 있다. 커다란 뒷벽 하나 가득 흰색 천이 드리워져 있고, 무대 중앙에서 약간 왼쪽으로 노트북 컴퓨터 한 대가 놓여있을 뿐이다. 공연이 시작되면 이 무용수가 텅 빈 무대 위에서 음악도 없이 아주 느린 춤을 춘다. 그 느린 동작이 점차 몸의 관절 하나하나로 퍼져가면서 마치 그의 몸은 낱낱이 해체되는 듯 기하학적이다 못해 잔혹하게 일그러진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비틀거리다가 일어서는 그의 몸과  얼굴표정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 내뱉는 소리와 합쳐지면서 서서히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로 변하고 있었다. 그건 부토였다.
하지만 일종의 프롤로그라 할 수 있는 이 짧은 ‘공연’이 끝나자, 르 르와는 다시 지극히 일상적인 한 명의 예술가의 모습으로 돌아와 무대 앞에 선다. 그리고 관객을 향해 또박또박,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혹시 이 세계적인 무용수가 추는 완벽한 부토를 보려했던 관객이 있었다면, 이 순간부터 그의 기대는 무너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몇 분을 제외하면 공연 내내 르 르와는 ‘춤’을 춘 것이 아니라, 처음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이 작품은 2009년 한 통의 이메일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무대에 놓인 노트북 컴퓨터로 그 당시 받았던 이메일의 내용을 그대로 읽어준다. 메일을 통해 동료가 르 르와에게 제안했던 것은 ‘2시간 작업 후 부토 춤 추기 또는 부토 무용수 되기’였고, 그는 그 댓가로 1300유로를 받기로 되어있었다. 이 부분에서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 데에는 부토가 주는 매력도 매력이지만, 자신이 프랑스정부로부터 받는 예술가 연금과 비교해 볼 때, 공연료의 일부를 다른 스탭들에게 나눠준다고 해도 실제 그가 받을 수 있는 액수가 공연시간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는 계산 역시 작용했다고 말하는 솔직함도 보여준다. 그러나 문화적 정서가 다르고 몇 번 공연을 관람한 것을 제외하고는 부토를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는 그가 어떻게 부토를 출 수 있을까? 그것도 진정한 죽음의 세계를 담고 있는 부토를 말이다.

모름지기 무용이라면 마땅히 음악이 있어야 하고, 그 음악에서 찾아낸 서사에 따라 움직이는 무용수의 몸이, 그리고 그것을 비추는 조명이 있어야 하건만, 그것들을 걷어버린 자리에서 르 르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다. 거기에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기까지 예술가이자 한 인간으로서 그가 거쳐야 했던 수많은 탐구와 고민의 흔적들이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고스란히 배어난다. 구글 싸이트에 들어가 부토와 관련한 인터넷 정보부터 찾아봐야 했던 것, 그래도 여전히 부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에  순간순간 의문과 절망, 망설임 그리고 무엇보다 소위 ‘대충’이라는 유혹이 그를 사로잡곤 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부토라는 무용 뿐 아니라, 그 무용의 근간이 되는 심오한 정서들을 몸으로 익히기 위한 일련의 진지한 예술적 탐색 속에서, 어느 덧 부토라는 하나의 텍스트는 삶과 죽음에 대해 그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이미지들로 확장되고, 결국 그는 그 모든 이미지에 직관적으로 자신의 감각을 연결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이제 그의 몸은 처음부터 이미 있었던 무용을 보여주는 도구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예술가 자신의 경험과 직관이 깊숙이 배어 체현되는 물컹한 삶의 덩어리가 된다. 공연 마지막 부분에서 그가 추는 부토가 더 이상 단순히 부토가 아니라 아주 다르게, 그러면서 관객의 감각에 깊숙이 파고드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한때 예술이 보여줄 수 있었던 보편적 서사는 이제 사라졌다. 텍스트에 대한 완벽한 재현은 모든 예술이 그렇듯, 무대가 한때 품었던 열망이었지만, 이제는 오래 된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모든 현대 예술가가 그렇듯이 르 르와는 예술이, 예술가가 함부로 삶을 이야기할 수도, 이야기해서도 안되는 시대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완벽한 무용공연을 보고자 했던 관객에게 두시간의 런닝 타임은 어쩌면 지루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 동안 예술이 추구했던 화두가 삶과 인간에 대한 것이라면, 바로 그 절박하지만 여전히 모호한 화두를 담기 위해 무수한 시간을 고민하고 절망하는 예술가의 진지한 탐색의 과정 역시 그 자체로 예술이 되지 말란 법이 있을까. 그것도 현란한 예술적 수사나 미학적 담론에 기댄 것이 아니라, 예술가 본인의 삶 속에서 그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경험하고 고민했던 모든 기억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면 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매번 무용이라는 관습적인 틀을 깨는 르 르와의 작업이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서 모든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르 르와는 자신의 몸에 하나하나 새롭게 새겨넣은 부토의 정신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보여주었고, 관객 역시 그런 그의 부토에 가슴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기사입력 : 201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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