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예술인에게 듣는다   /  요석 김성태

늘 겸허하게 예술가의 기대와 자존심 지켜온 음악의 거목
요석(樂石) 金聖泰박사

만난사람 : 이세기 (대한매일 논설위원)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이렇게 시작되는 '이별의 노래'는 쓸쓸하게 깊어가는  가을철이면 누구나 한번쯤 불러보는 노래다. 그외에도 '산유화' '못잊어'  '동심초'등등 요석(樂石) 김성태박사의주옥편들은 가슴속에 파고드는  애상미와 청순한 서정성으로  인해 음악애호가들의 끝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펜던트 타이에 베레모를 쓴 단정한 모습으로 그는 그가 선택한 시어와 멜로디를 정확하게 기억할 뿐 아니라 1930년대 당시 우리 음악계 상황을 연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또렷하게  증언해 주고 있다. 요석과의 인터뷰는  처음에는 10월초 힐튼호텔 훠시즌에서 부인 윤선항여사와 요석의 4녀이자 풀루티스트인 김기순교수(이화여대)와 함께 한 자리였고 다시  그 3일후 요석댁의 부근 한 커피숍에서 이루어졌다.
요석은 널리 알려지다시피 한국인으로서는 일본에 유학하여  최초로 작곡을 전공한 음악가다. 우리 고유의 민속을 소재로한 새로운 음악 어법과 현대음악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교두보가 되었고 4도 화음을 시도하여 예술가곡의 방향을 제시하는가하면 음악이론 정립에 공헌한  지대한 업적을 이루고  있다. 올해로 음악인생  65년을 맞는 연로에도 불구하고 식을줄 모르는 정열과 낭만으로  그는 여전히 혁혁한 현역을 지킨다. 요석이 음악을 하게된 동기랄까. 음악수업을 하는 과정은 지금과는 비교가 될수 없는 음악 황무지였다.
요석은 1910년 11월 9일 지주이며 상업을 하던 기독교  가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가 세운 광희문 교회에 다니면서 찬송가와 풍금소리에 매료되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에 접근하여  그때도 플랫이나 샵을 읽었고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경신학교 시절에는 축구선수로 활약했고 연희전문 상과에 진학하게 된것은 축구 특기자로서 스카우트된 케이스였다. 대학에 와서는 낮에는 축구를 하고 밤에는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생활을 한동안 계속했다고 말한다.
"내가 연전에 다니던 시절에는 음악과가 없었어요. 당시 우리나라의 음악적  배경은 해방전까지 음악전문 교육기관은 이화여전 음악과 뿐이었지요. 취미와 특별활동으로 음악부가 있었는데 연희전문에서는 미국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부임했던 현제명(玄濟明)선생이 음악부를 만들었어요.  연전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조직해서 1년에 두 번 전국 순회 연주를 다니기도  했지요.  나는 음악부의 17회 회원으로 관현악단에서는 제1바이올린 주자로, 남성합창단인 그리(Glee)클럽에서는 테너를 맡앗었지요. 그리고 하기 음악강습회에서 채동선선생의 강의를 듣고 나서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빌헬름  클라테가 지은 화성법과 일본어로 번역된 S 야다손의 화성법을 구해서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연전 졸업후 경성보육학교 음악주임으로 가면서 홍난파(洪蘭波)선생을 만나 현제명·홍난파 두 거
두 밑에서 음악적 훈련을 받고 악단 생활을 체득하게 된것이지요."
요석은 연희전문 졸업반이던 34년, 동요 20곡이 수록된 '새야새야 파랑새야'  작곡집을 상재(上梓), 초기에는 주로 동요를  작곡했다. 그가 작품집으로 동요집을  펴내게 된것은 소파(小波)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사랑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지면서 동극 동요단체가 활기를 띠게된 시대적 배경때문이라고 할수 있다.
"동요 '새야새야 파랑새야'는 내가 동대문밖  이문동에 살던 7살때까지 동무들과 즐겨 불렀던 노래에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채보하는데  걱정을 많이 했으나  이 구전민요는 나의 잠재의식속에서 익숙하게 흘러나왔어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모두 고향에 내려간뒤 텅빈 기숙사에  혼자 남아서 밤새도록 쓴 것이지요.  줄판에다 줄을 긋고 필경으로 직접 프린트해서 출판을 했어요.  3음으로된  음계, 그 위에 간결한 가락은 8마디로 이루어졌는데 4박자 5박자로  마디마디 엇바꿔서 이루어진 것이 박자구조의 특징입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3음 음계는 2음씩 따로따로 4도 화음과 5도 화음을 이룰수 있고 또 3음을 다 합쳐서 한  화음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에요. 그 화음의 음향은  동양적 음향이거나 이를  좁히게 되면 한국적  음향으로 느낄수 있음을 몸소 터득한 셈이지요.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던 '새야새야'는  아름답고 간결한 가락의 구조로 민족의 가슴에 스며들 듯이 흘러들게 된 것입니다." 그는 연희전문 3학년이 되던 33년,  중앙보육학교 출신인 부인 윤선항여사를  만나 결혼했고 음악에대한 집착 때문에 대학졸업후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경유학을 감행, 그가 일본 유학에 연연하자 부인은 시집올 때 해온 패물을 팔아 유학비를 마련해주었다고 돌아본다. 음악가가 된것과 교수가 된  것은 '순전히 아내의 배려때문'이었음을 그는 여러 자리에서 반복해서 밝히고 있다.   "그때 아내가 이를 이해하고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은행원이 됐거나 어쩌면 축구선수가 됐을지도 몰라요."    일본 동경고등음악학교(현재 국립음악대학)  유학시절에는 탁월한 음악이론가이며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郞)의 수제자였던 하라 타로(原太郞)로부터  작곡에대한 정식 수업을 받았다. 작곡과 지휘법을 공부하면서 그때의 혹독한 수련은 결국 철저한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작곡에 임하는 완벽주의의 습성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이른바 이론적인 뒷받침없이는 작품을 쓰지 않는 보수적인 성향을 띠게 된 것이 그렇다.  그 무렵에 쓴 작품은 피아노 독주곡인 '피아노를위한 4개의 2성부 인벤션'과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전주와  푸가', 그리고 가곡 '말' '산넘어 저쪽' '바다3' '호면'등이다.
이 가곡들은 37년, 일본 오사카  공회당에서 개최된 제1회 채선엽 독창회에서  선보였다.
이때 발표된 가곡에 대해 평론가 신정숙은 '반주부에 대한 독자성을 배려한 최초의 작곡가'임을 전제,  '그의 몇편의 가곡에서 발견할수 있는 시의 가락과 반주부의 균형감, 가곡구성을 위한 치밀한 노력의  흔적에서 본격적인 예술가곡 창작의  면모를 볼수 있다'고 평가한다.  평조와 4도 5도 화음을 곁들인  이 가곡들을 가르켜 음악계는 '한국 최초의 예술가곡의 효시가 되는 작품'으로  주목했고 일본의 '창가' 밖에 모르던 일제치하에서 '예술가곡'이라는 형식을 사용한  그의 노래들은 메마른 민족의 가슴에 촉촉한 정서를 심어주고 시름을 달래주었다. 그것은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에 속하는  브람스와 H 월프 .R 스트라우스의  예술가곡들을 열심히 분석 연구한 결과 얻어진 수확이며 그는 서구의 음악을 철저히 소화해서 한국적 분위기가 풍기는 독자적인 세계를  성취하게 된 것이다.  작품의 신중함과 기법의 신중성은 브람스에 가깝다고 해서  음악계는 그를 '한국의 브람스'로 부르기도 했다.  한국의 초기 양악사는 한국 가곡사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석의 작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장르 역시 가곡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요석의 음악은 그것이 성악곡이건 기악곡이건 간에 음악의 내용은 그것이 성악곡이라 할지라도 정밀한 형식적 구조속에 담겨져 있다. 예술성 위주의 기악적인 작품에서는 보다 절제된 서정성과 소박미를 구가하여 작품마다에 투철한 작가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동경유학후 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던  경성보육학교에서는 별도의 음악전담 교수를 채용할만큼 동요작곡에 집중적인 열의를 보이고 있었어요. 보육학교에서 훈련받은 유치원 교사들이 동요를 보급함으로써 유치원은  중요한 서양음악의 교육기관이기도 했지요. 내가 이 학교의 음악주임으로 부임한 것도 이러한 주변적 상황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후 경성  후생 실내악단 제1기 단원으로 입단해서  국민가창지도대의 일원이 되어 같은 작곡가인 이흥렬과 함께 활동했고 한편으로는 경성방송국 양악 책임자로 있던 홍난파선생과 국악 책임자 이혜구박사를 도와서 음악프로그램을 방송하기도 했어요. 그때  방송국에서 홍난파선생은 소편성의  관현악단을 맡아 지휘했고 나는 합창단을  맡아 지휘했습니다.  '가정가요'라는 프로그램에서는 가정에서 부를수 있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어요. 그때 만든 가정 가요중에는 파인(巴人) 김동환의 시에 붙여 만든 '즐거운 우리집'이 널리 불려졌어요."  요석의 가곡은 밝고 화려하고 애잔하여 가을에는 가을 노래가, 봄에는 화사한 노래들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의  가곡은 소월의 시를 즐겨 선택하여  1946년에 작곡된 '산유화'는 성악가들이  독창회를 열때마다 단골  레파토리로 선정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유년기에 몸에 밴  민요적 동요와  우리의 가락이 바탕이  되어  로맨틱하면서도 '한(恨)'의 정서를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서사시는 작곡하지 않는다. 반드시  서정시만을 고집하는 것은 음악은  아름다워야 하며 서정시는 청결한  미감을 던져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요를 쓸  때도 허튼소리는 철저히 배제한다. 과작이라도  아름다움을 끌어낼수 있어야만  음악임을 강조하고 있다.
작곡하기전 시집을 읽고 시의 타이틀에서부터 시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시적인 면과 인상적인 면을 섬세하게 검토해서  시가 내면에 삼투되어 녹아  흐를 때 비로소  
가장 자연스러운 정수의 음률을 조성해 나간다. 98년까지 50편이 넘는 가곡을 발표했고 그중에는 연가곡 '꽃앞에서'가 포함된다.     "나는 시를 좋아해요. 시집을  밤새워 읽고 내가 스스로  선택하지요. 나도 한때  시를 쓰고 싶어했으니까… .  내가 좋아하는  시인은 정지용이고 소월의 시는 순수한 감성과 민요적인 요소가 넘쳐서 시 자체가 음악이라고 할수 있어요. 시에다  음만 올려놓으면 그대로 노래가 되니까.  '동심초'의 경우는 중국의 설도(薛濤)란 기생이 쓴 시인데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었어요. 그외 이은상,  박목월 김용호 서정주등 서정성이 짙게 자연을 노래한 시들이  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이별의  노래'는 6.25때 학교가 대구로 피난가 있을 때 부산에서 서울대학이 개강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부산에 내려갔다가 한  허름한 부두의 여관방에서 쓴것이지요.  오선지가 없어서 흰 종이에 오선을 그려서 날밤에 완성했어요."
동요와 가곡뿐 아니라 국내에서 실내악이 무엇인지  모르고 음악양식에 어두었던 시절에 일본에서 귀국한 요석은 1939년 '현악 4중주 C 단조'를 작곡, 44년에는 관현악곡인 '코리안 카프리치오(한국  綺想曲)'을 작곡 하는등  왕성한 작품활동의  길을 열었다. '한국 기상곡'은 황해남도 용연(龍淵)지방에 있는 몽금포항의 정경과 어로 생활을 그린 몽금포타령에서 기초한 것으로 민요를 도입한 하나의 패턴을 형성한 기념비적인 작품의 하나로 손꼽힌다.   동양적인 신비감과 한국적인  애틋한 시정이 전편에 흐르는 이 명곡은 지난 50여년동안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관류하는 국악적인 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또 그동안 국내  작곡가의 작품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주된  곡의 하나로 한국 작곡가로서는  처음 독일  보트앤  보크(Bote&Bock)악보 출판사와 악보대여 보급계약을 맺어 출판되었다.
교향곡과 가곡외에 1943년 만주 신경교향악단 시절  극영화 '사랑과 원수'로 만주영화주식회사로부터 영화음악상을 받았다. 이후 49년에 '여성일기' '꿈'(55년) '유전의 애수'(56년) '대원군과 민비' '흙'(60년), '오발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61년) '김약국의 딸들' '굴비'(63년)  '로맨스 빠빠' '이 생명 다하도록' '동심초'등 수많은 작품을 작곡해서 영화음악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중  '흙'의 경우는 1960년  최우수 아시아영화음악상을 수상, 그외 '대통령 찬가' '개천절의 노래' '독립  행진곡'등 의식가와 국민 가요등 이루 헤아릴수 없다.
"당시 연주장은 주로 부민관과 명동에 있던  명동 공회당이었고 관객은 이화여전 학생등 당대 지식인들이 주류를 이루었지요.   지금의 조선호텔 건너편 상공회의소 자리에 있던 하세가와(長谷川)란 공회당에서 자주 연주를 가졌지요.  아끼는 작품의 하나인 '한국 기상곡'은 44년 만주  신경 봉천에서 직접 지휘해서  연주했고 48년 8월, 서울 교향악단 정기공연에서 역시 나의 직접 지휘로 한국 초연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한불 친선음악회에서 콩트의  지휘로, 69년에는  독일에서 서독 라디오 방송교향악단의 크레머의 지휘로 연주되었고 프랑스 미국 일본 동남아등에서 지금도 간간히 연주됩니다."  영화·연극음악에 이어 50년에는 무용음악 '흥부와 놀부'를  작곡했고 이 곡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오케스트라인 조선교향악단에 의해 역시 작곡자의 직접 지휘로 초연되었다. 기악곡 총  10편중 69년에 작곡한  '풀룻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는 현재 이화여대 음대에 재직하고 있는 막내 여식 김기순을 염두에 두고 작곡한 것이다. 그해 10월 서울 국립극장과  시민회관에서 개최된 제1회 서울 음악제에서  초연된 이 곡은 신고전주의 기법, 전통적 음계에 바탕을 둔 선율구조, 론도형식의 도입, 4도화성의 자유로운 구사등 현악합주를 위한 모음곡과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경향과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활동은 작곡가로서 합창과  관현악단 지휘자와 음악정책의 입안  내지 자문 역할에 이르기까지 한국  음악계의 전분야에서 다양하고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음악교육에 헌신하면서 서울대 음대의  설립, 음악 교과과정의 확립등  음악교육 행정의 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한 공로자다.  "일제말에는 음악활동이 위축되어 정치 사회등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음악가들도 사분오열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어요. 이때 악단  건설에 열망을 가진  음악계의 중심인물로 등장한 이가 현제명씨였지요.  현제명선생은 음악교육을 위한  음악전문학교 설립과 교향악단 창단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1941년부터 보성전문(현재 고려대) 출강등  음악교육가로 활동의 폭을 넓혀가면서 정규 음악교육 기관의 설립을 절감하고 그는  연전 시절의 스승이었던 현제명과 의기투합하여 경성음악학교 설립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전신인 경성음악학교가 설립된 것은  1945년 12월, 3년제 본과 및  사범과를 두었고 초창기에는 중구 예장동에 있던 경자유치원을 교사로 사용했다.   "유치원 원아들에게 맞는  책걸상에 어른들이 앉아  공부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제1회 신입생 수는 93명이나 되었어요.  현제명선생이 초대 교장으로, 그리고 작곡에는 내가,  피아노에 김원복, 성악에 김천애 이인범, 바이올린 김생려, 관악에 이유성등 전공별로 교수진을 포진해서 다음해 5월에는 제1회  정기공연을 가졌습니다. . 같은해 8월에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따라 서울대학교에  편입되어 예술대학 음악부로 개편되었어요. 나는 부교수로서 교무과장  보직을 맡아 학사전반에 걸친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축구를 하고 상과를 공부했기 때문인지 모든 일에 진취적이고 긍정적이며 실용주의적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요석의 성격은 매사에 치밀하고 계획적인 면이 많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다.
그의 평생의 '좌우명'은 언제 어디서나 '중용(中庸)'을 지키는 일이다.  "중용(中庸)의 길은 내 즐겨 걸어온 길이다. 남을  앞지를 이유도 없고 뒤질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뛸 필요도 없고 늦출 필요도 없었으니 그저 알맞게 걸어왔을 뿐이다. 중용의 자세, 중용의 생각, 중용의 실천, 이것은  내 삶의 어제를 즐겁게 했고 오늘을 편안하게 하고 또 내일을 보람있게 하리라. 중용의 길은 내 즐겨 걸어온 길이다."
동경고등음악학교 시절에 예과  1년, 본과 3년으로된  학과과정에서 입학  성적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학교측이 예과 1년을 면제하고 본과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을 때도 그는 그의 실력이 독학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기초가 허술할것이라는 자각으로 학교의 호의를 물리치고 전과장을  그대로 학습과정을 거쳤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론과 뮤즈가 살고있던  '파르나소스 신전으로의 계단'을 연상시킨 예로써 이 신전에 이르는 길은 고되고 험하지만 그 계단을 다 오르고 나면 최고의 경지와 최고의 기술의 완성에 이른다는 의미가 포함되기도 한다. 그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새벽 3시이전에는 잠을 자본적이 없을 정도로 학업에만 매달렸을 뿐 "남과 경쟁하지 않았고 늘  만족하지 않았으며 앞서 생각지도  않고 뒤지지도 않았다."고 확언한다.
정교수에 취임후 60년 10월에 현제명의 후임으로 서울대 음대 학장직에 올라 9년동안 학장직을 수행. 33년간 음대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교행정외에 제자들을  교육시키는데도 엄격하고 철처했던 것으로 소문나  있다. 문하에는 김만복 김형주  최영섭 김달성 이성만 이성재 정회갑 원경수 윤해중 이상만 김정길 서경석 서우석 이귀자 문호근 김명숙 정치용 나운영 홍연택 김용진등 이남수등 기라성같은 현역들이 배출되었다. 이론가로서 요석의 화성법과  대위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편화되고표준이 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제자들에게게도 엄격하여 화성이나 대위법  작곡이론이 몸에 배지 않으면 작곡을 함부로 시키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신고전주의를 표방하고 완벽주의를 주장하면서도 한 시대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염두에둔  창작가이다. 그래선지  음악을 지망하는 후학들에게 기초부터 탄탄히 연마할 것을 힘주어 강조하기를 잊지않는다.  "우리 음악계는 총체적으로 정통적인 서양음악의  이론체계와 실기체제를 제대로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우리 음악계의 긴급한 요제는 양악의 아카데미즘과 음악문화의 조선적 이해와 감성을 섭취하고  소화하는 일입니다. 이를 완료하기까지는  음악에대해서 진실하게 학문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해요.  예술의 어원이  기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예술없는 기술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기술없는 예술도 있을수 없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요. '민족음악'  운운은 예술로서의 음악이  있은 다음의 일이에요. 현대음악기법도 좋으나 정통음악형식이 기초임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나로서는 신고전주의 형식주의를  사랑하고 바르토크와 힌데미트를  사랑합니다. 쉔베르크등의 12음기법등 지나친  실험주의도 큰 역할을  하겠지만, 연주가들은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루 선택하되 베토벤  브람스에서 바하에대한 현대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작곡가들은 늘 새것을 써야해요."  가족은 1933년 중앙보육학교출신인 윤선항씨와의 사이에 2남4녀,  83년에 금혼식을 가졌다. 성악과 첼로를 전공한 자녀도  있었으나 56년 미국 인디애너 주립대  수학후 귀국길에 막내인 기순에게  풀루트 하나를 사다주었고 그가  교수와 연주자가 되어 지금 유일하게 그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요석이란 아호는 소전 손재형(孫在馨)이 그의 60회 생일 때 지어준 것이다.
"음악이라는 악(樂)은 요산요수(樂山樂水)에서 비롯된 말로  요석은 국악기중 돌로된 편경을 가르키는 것이지요. 즉  악기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끝없이  흘러나온다는 뜻이에요."  7년전에 새로지은 서초구 삼성동의 요석 빌딩에서 아래층은  아들 가족들이 머물고 5층은 스튜디오,  4층에서 부부가 살고 있다. 아침마다  부인과 삼성동 자택부근을 산책하는 것이 전부. 구순을 넘긴 지금도 밤새 시집을 넘기며 시를 고르고 구슬을 꿰듯 악상을 정리한다.
그는 수많은 활동을 했으나 음악과 관련되지 않은 활동은 하지 않았다.  91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을 거쳐  현재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한달에 한번씩 동요작가 15인과 작곡가  15인으로 이루어진 동요 동호인에 참여하여 새로운 동요작곡을  선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미발표된  곡들을 모아  동요
100곡집을 낼 계획.  인터뷰를 끝내면서 요석은 자신이 작곡한 '이별의  노래' 중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대목은 아무리 불러도 일품이라고 스스로 감탄하기도 한다. 더함도 보탬도 없이 늘 겸허하게 예술가의 기개와 자존심을 지켜온 이 음악의 거목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하지 않을수 없었다.
 
 *참고
김성태박사 약력
1935년 연희전문학교 상과 졸업
    39년 일본 동경고등음악학교(현재 일본 국립음대) 작곡부 졸업
    56년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 대학원 수학
    67년 한국방송윤리위원회 위원
    69년 연세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
    73년 한국문예진흥원 이사
그외 83년부터 (株) 예음대표이사, 54년부터 대한민국 예술원회원.
<수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장(6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64년)
3·문화상(81년) 5.16민족상(85년)
<저서> 樂石樂書 1-6권, '화성법', 번역서 '20세기화성법'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