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원문화 ①

한국정원의 발달과정




윤국병 / 정원학회 상임이사

한국과 일본 등 동양문화권에서는 각종 문화와 생활풍습이 중국의 영향을 크게 입고 있으며 종합예술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정원의 경우에 있어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동양 삼국의 정원양식을 합쳐서 소위 동양식정원이라 부르고 있음을 보더라도 그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뿌리는 같다 할지라도 시대의 변천과 민족성의 차이로 말미암아 각기 개성이 뚜렷한 외모를 가진 정원으로 발전해 나가기 마련이다.

우리 나라의 고대정원은 중국의 그것을 모방하여 궁궐과 이궁의 정원으로 시작된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중국의 모방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정원 속에 자연석을 앉혀 보다 자연스러운 운치를 감돌게하는 수법 등 중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새롭고 정교한 기법을 개발해 내고 있다. 이것은 맹목적으로 남의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뛰어난 미적감각을 살려 보다 나은 것을 창조해 내고자하는 강한 의지와 의욕의 소산인 것이다.

그 뒤 중세 후기로 접어들면서 사대부계급의 대두와 함께 별서정원이나 향거정원 등 자연을 벗삼아 영풍월하기 위한 소위 무위자연적인 정원이 생겨난다. 이러한 정원은 노장사상이 태어난 중국보다 도리어 그것을 받아들인 우리나라에서 무위자연을 중시한 정원이 널리 꾸며졌다는 것은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나라에는 도처에 요산요수할 만한 아름다운 자연이 도처에 있다는데서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한편 풍수설이 널리 신봉됨으로 인하여 도읍지의 정원은 우리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생김새로 발달한다. 특히 안채 뒤에 위치하는 후정의 화계와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독자적인 발절을 해가는 동안에 우리 조상은 개발해 낸 기법을 일본에 전해주어 그들의 정원문화의 싹을 띄어 주기도 했다. 칠세기초 백제유민의 한사람인 노자공은 비조(아스까) 궁궐의 남정에 부미산과 오교를 꾸며 주었는데 이것이 일본에 있어서의 정원문화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 일본조경학자들의 견해이다. 그 뒤 도읍을 평안경으로 옮기면서 침전식정원이라는 새로운 양식이 생겨나는데 그 기법 가운데에 당산수수법이라는 것이 있다. 이 수법은 우리나라에서 개발해낸 자연석의 치석법과 동일한 것으로서 당산수의 당은 중국의 당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대 남한 땅에 있던 가라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라라고 발음한다.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일본식 정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보고 있는 치석법이 실은 우리 나라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기법명칭인 것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독자적이면서도 훌륭한 발전을 거듭해 온 우리 나라 정원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대체로 시대에 따라 각기 특색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사회사조의 변화에 연류하는 것으로서 그 변화 자체가 매우 완만한 것인 만큼 명확한 선을 긋기는 어려우나 편의상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세의 세 가지시기로 나누어 놓을 수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으며 우선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정원을 고대정원으로 다룬다. 그리고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 4백 75년간의 정원을 중세정원으로 보고 이씨조선조 5백년 동안에 축조되었던 정원을 근세정원으로 분류한다.

1. 고대한국의 정원

어떤 책자를 보면 단군 조선시대와 기자조선시대의 정원에 관한 기록이 실려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시대가 이른 것이 노을왕이 涀를 꾸며 짐승을 키웠다고 하는 내용의 것이다.

涀는 담장을 가지지 않는 금수를 키우는 자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동서양을 가릴 것이 없이 정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은 거의 모두가 수렵지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涀는 바로 수렵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로부터 시작하여 알맞는 자리를 구획지어 담장을 둘러치고 연못을 파 나무를 심어 금수를 키움으로써 정원의 형태를 갖추게된 것이 원이다. 따라서 涀는 정원의 원시적인 형태인 것이다. 중국에서 涀가 생겨나는 연대는 대체로 주나라 초기로 보고 있으며 기원전 7백년경의 일이다. 이에 대해 노을왕이 涀를 꾸몄다고 하는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3천 9백년 전이다. 말하자면 주보다 1천 2백년 가량 앞서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2천 6백여년전에 기자조선의 의양왕이 궁궐 후원에 청유각이라는 누각을 세워 군신과 더불어 큰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신빙성이 적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고대의 범주에서 제외되고 있다.

중국과 우리 나라의 정원의 꾸밈새에 별 차이가 없는 것이 고대이다. 말하자면 고대에 해당되는 시기에는 주로 중국의 정원기법을 받아들이는 단계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가 있으므로 삼국시대를 고대 전기, 통일신라시대를 고대 후기로 대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

고대 전기의 정원

삼국시대의 정원으로서 그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은 공주의 임유각지와 부여의 궁남지의 두 가지뿐이다. 북한 땅에는 해방 당시까지만 해도 평양의 북쪽 교외에 안학궁의 후원지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어떠한 상태가 되고 있는지 알아 볼 길이 없다.

궁남지는 무왕 때에 조성된 이궁의 연못이라고 하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대부분 논으로 변하여 원형을 찾아 보기가 어려우나 주위 지형의 기복상태로 보아 자연형의 소위 곡지였었던 것으로 보인다. 곡지는 중국정원의 전통적인 지당기법이다. 또한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도 고대 중국의 그것과 상통되는 점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시대의 정원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정원기법 도입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공산성 밖 금강가의 벼랑 위에 꾸며진 임유각지의 네모진 연못, 즉 방지와 안학궁의 후원지에 남아 있었던 치석법 등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기법이 개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비단 중국기법의 도입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은 그 슬기로운 기상을 살려 새롭고도 독특한 기법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가운데서도 방지는 좁은 부지의 활용상 가장 무리가 없는 생김새이다. 뿐만 아니라 물가에 앉혀지기 마련인 누정 등 직선적인 꾸밈새를 가진 정원건축물과도 잘 어울린다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방지는 이씨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정원 지당의 주된 형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결과가 된다.

고대 후기의 정원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정원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듯하며 유적은 물론 문헌상에 있어서도 정원에 관한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현재 경주에 남아 있는 안압지와 포석정의 유지는 모두가 통일신라시대에 꾸며졌던 것들이다.

포석정의 유상곡수연지는 고대 중국의 계욕의 유풍을 이어 받은 것인데 그 꾸밈새는 중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우아하고도 정교한 곡선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안압지는 연전의 발굴작업에 의해 그 전모가 밝혀진 바와 같이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다양한 꾸밈새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정자리와 대안의 가산 그리고 황용사지의 구층목탑과의 관계 위치를 살펴 볼 때 정토사상을 바탕으로 한 극락세계의 재현에 힘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물가에는 크고 작은 자연석이 조화있게 배치되고 있었는데 이 치석기법은 고구려에서 개발해 낸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안압지가 축조된 것은 고구려가 망한지 7년째 되는 해이다. 삼국이 통일되었다고는 하나 이 무렵에는 아직 백제의 유민들이 도처에서 봉기하여 국내정세가 매우 어수선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신라는 그에 대한 대책의 하나로서 고구려의 유민들에 대한 유화정책을 펴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안압지의 축조에도 많은 고구려 기술자들이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가 수많은 치석이라는 형태를 낳게 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고대 후기에는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정원기법이 보다 세련된 양상을 보일 뿐만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독자적인 기법의 활용으로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한국정원의 성격은 기법정착시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중세 한국의 정원

중세로 다루어지는 고려시대도 정원의 발달 양상을 볼 때 전·중·후기의 세시기로 나누는 것이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고려정원의 발달과정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 유적지의 거의 모두가 휴전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어서 직접 눈으로 살펴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해지고 있는 몇 가지 문헌에 의지할 밖에 별도리가 없는데 그 내용 또한 상세하지 못하여 마치 안개 속에 드리워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고려시대의 정원이다.

고려 전기의 정원

고려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태조 왕건으로부터 제11대 문종 말까지의 약 1백 60년간이다. 이 시대에는 정원의 발달과정에 있어서 별로 볼 만한 것이 없다. 말하자면 침체기로 볼 수 있는 시기이다. 각종 문헌을 더듬어 보아도 이 시기에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동지에 관한 것 몇 가지 뿐이다.

동지는 기록내용으로 보아 궁궐터인 만월태의 동쪽에 꾸며졌던 후원의 연못으로 생각된다. 왜구들로부터 노획한 배를 띄워 임금이 보시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꽤 규모가 컸던 것으로 생각되며 규모가 크다면 그 생김새는 곡지의 형태를 취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 중기의 정원

중기에 해당되는 시기로 접어 들면서 고려의 정원은 새로운 국면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하나가 제 15대 숙종 4년에 궁안에 꾸민 화원이다. 이 화원속에는 고려 후기에 모란꽃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사루라는 건물이 앉아 있어서 이국적인 정서가 넘쳐 흘렀다고 한다.

화원은 당나라 때 사람인 이적지의 망춘궁응제시 속에 「화원사망금병개」라 보이는 것처럼 궁궐 한에 수많은 건물 사이에 꾸며 놓은 규모 작은 정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궁궐 후면에 규모 큰 후원을 꾸미는 한편 여러 전각에 의해 둘러 싸인 좁은 공간을 잘 살려 여러 개의 화원을 꾸며 왔으며 원나라 때부터 쓰여 온 북경의 자금성 안에는 어화원이라 불리는 화원을 비롯하여 세 개의 화원이 남아 있다. 화원은 몇 그루의 측백나무와 석가산 그리고 수많은 꽃나무로 초화류로 아름답게 꾸며졌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 생각된다.

화원의 조성은 숙종의 뒤를 이은 예종과 의종때에 성황을 이룬다. 의종은 고려사에 그 인품을 경조무인군치도라고 평해 놓은 것처럼 성격이 대단히 경박하고 정치에 관심이 없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놀이에만 몰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궁궐에 인접한 민가를 철거시켜 가면서 화려한 화원을 꾸미는 따위의 망동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고려 중기의 궁궐정원은 중국 궁궐의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여 꾸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정원의 성격은 통일신라시대에 정원기법이 정착되어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고자 했던 것으로부터 일보 후퇴하여 모방에 그치는 양상을 나타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같은 시기에 이자현이라는 이가 강원도 춘성군의 청평사에 꾸며 놓은 문수암 정원을 보면 모방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자현이 꾸민 정원은 자연을 그대로 살리면서 경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치석과 방지, 그리고 경관을 즐기기 위한 자리로서의 아정이 인위적으로 곁들여졌을 뿐이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 치석기법이다. 치석이라는 것은 이미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 개발해 낸 정원기법의 하나이다. 안압지에서도 이 기법이 구사되었음을 볼 수 있었으나 그 곳에서는 비등한 크기로서 두 가지의 이질적인 색채를 가진 암석이 쓰여 다소 자연적인 운치가 결여된 느낌을 준다. 이에 비해 문수암정원의 치석은 그 부근의 냇가에 산재해 있는 암석과 같은 석질의 것으로 꾸며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크기도 매우 다양하여 전혀 인위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이것을 보면 6세기초에 개발된 것으로 보이는 치석기법이 고려 중기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한편 주위 경관과의 조화를 한층 더 중요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고려 중기에 있어서의 정원의 성격은 모방과 발달의 양상이 서로 엇갈리는 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궁궐 안에서는 주로 모방 위주의 화려한 정원이 꾸며졌고 민간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보다 자연스러움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정원축조기법이 발달해 나간 것이 고려 중기 정원의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고려 후기의 정원

고려 정원의 역사에 있어서 후기에 해당되는 시기는 대체로 제23대 고종 중엽으로부터 고려가 망할 때까지로 본다. 이 기간에는 몽고의 병환을 피하여 61년 동안이라는 긴 세월을 강화로 도읍을 옮기지 않으면 안될 정세에 놓여 있었다.

이로 인해 강화궁궐의 조영공사가 실시되기는 했으나 피난살이인 만큼 그 규모는 행궁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정원 또한 볼 만한 것이 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경으로 환도한 뒤에도 끊임없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궁궐정원으로 공민원 때에 니현의 팔각전화원 하나가 축조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민간정원은 이것과 크게 양상을 달리한다. 고려 중기 말엽에 새로운 관료층이 등장한다. 이 계층이 소위 사대부로 불리는 무리로서 그들은 학문적인 교양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의 실무에도 능한 학자적인 관료이다. 그들은 몽고의 세력을 등에 업은 신흥 권문세족이 대두한 뒤 더욱 더 활발히 정치무대로 진출한다.

사대부는 주로 지방의 향리 출신으로서 자기의 향리에 작은 규모의 농장을 가진 중소지주이거나 자영농민이었다. 중앙의 정치무대로 진출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대체로 청렴결백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뜻에 맞지 않은 일이 있을 때에는 깨끗이 관직에서 물러날 줄을 알고 있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향리로 되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자연을 벗삼는 생활을 즐긴다. 이러한 생활태도를 소위 야에 묻혀 산다고 하며 여기에는 소위 노장사상이라 일컬어지는 생활철학이 깊게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요산요수하는 생활을 즐기자면 그것을 위한 자리, 즉 정원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고려 후기에는 많은 향거정원과 별야정원이 생겨난다. 이러한 정원은 산속의 경치 좋은 자리를 골라 자연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 생활을 즐기기 위한 최소한의 시설을 곁들이는 수법으로 꾸며진다.

이 때에 시작된 향거정원은 이씨조선조로 접어들면서 더욱더 성황을 이룬다. 한편 풍수지리설이 일반의 택지 선정에 영향력을 미쳐 후세 후정에 즐겨 꾸며졌던 화계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시설물이 생겨난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고려 후기 정원의 성격은 한마디로 한국 고유수법대두기라고 할 수 있다.

3. 이씨조선조의 정원

고려시대의 불교의 폐단을 거울삼아 이씨조선조에서는 유교를 국교로 삼는다. 유교는 기원전 중국 주나라 때에 공자와 맹자에 의한 체계가 갖추어진 수기, 치인을 위한 교리이다. 이 교리의 근본원리는 우주의 본체를 태극이라 하고 여기에서 음과 양의 이기 이원이 생겨나 이 이원으로써 인생을 해석하는 것이다. 음과 양의 이기 이원을 이론적으로 다룬 것이 바로 음양설인데 뒤에 오행설이 가미되어 음양오행설이 된다.

조선조 중엽으로 들어서면서 정원의 연못은 거의 빠짐없이 방지축도형으로 꾸며진다. 방지라는 것은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삼국시대에 백제에서 시작된 지당방식인데 조선조에 와서는 거의 모든 연못이 이 형태로 꾸며지고 있으며 연못 한가운데에 둥근 섬을 앉히는 것이 기본형으로 되고 있다. 이 꾸밈새를 소위 방지원도라고 하는데 이 형태는 고대 중국에서 생겨났던 우주관의 하나인 천문지방설에 근거를 둔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땅덩어리를 네모난 생김새를 가진 것으로 보는 한편 하늘은 땅을 덮는 둥근 덮개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방지원도는 바로 여기에 따른 것으로서 네모난 연못의 윤곽은 땅을 뜻하고 둥근 섬은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 유교의 근본원리인 음양설이 곁들여져 땅을 음으로 보고 하늘은 양으로 보기 때문에 방지원도의 꾸밈새는 바로 음양의 결합을 뜻하는 형상이 된다. 말하자면 방지원도는 자손의 번영을 뜻하는 형상인 것이다. 방지원도와 동일한 음양의 결합상태를 나타낸 것으로는 고대 동경의 손잡이 부분의 장식무늬로 쓰인 것이 있고 청나라 때에 꾸며졌다고 하는 북경교외의 천단의 꾸밈 또한 이것과 같다. 그것에 담겨진 뜻 또한 방지원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사내 자식을 간절히 원한다. 그 근본원인이 유교에 연유됨을 생각할 때 지당의 생김새인 방지원도는 바로 유교의 영향에 의해 생겨난 형태임을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방지방도형의 연못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지신을 모셔 제사지내는 지단의 원형인 방택으로부터 연유된 것으로 생각된다. 방택의 꾸밈새는 네모진 연못속에 흙으로 네모난 제단을 쌓아 올린 것이다. 지신은 생산의 기반인 땅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그 신을 섬긴다는 것은 바로 풍요를 기원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 제단의 형태를 본떴다고 생각되는 방지방도의 꾸밈새에도 방지원도의 경우와 같이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원의 꾸밈새는 민족성과 시대사조의 흐름에 따라 나라마다 또한 시대마다 달라지기 마련인데 방지원도는 그 가장 두드러진 예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이 기법은 딴 나라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우리 나라 고유의 기법인 것이다.

한편 이씨조선조에는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한다. 묘지와 함께 양기로 불리고 택지의 선정에 있어서도 풍수지리설이 가리키는 바에 따라 후면에 언덕을 등진 양지 바른 곳을 고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건물 후면에 경사지가 생겨나는데 그 사면은 기후와 토양조건으로 인해 쉽게 침식되어 비올 때마다 흙이 쓰러져 내린다.

이것을 막기 위해 고안된 것이 계단식으로 사면을 다듬어 놓은 기법이다. 장태석을 쌓아 여러 여러층의 평지를 꾸며놓으면 이 자리는 바람이 잘 닿고 양지바르기 때문에 꽃나무가 화초가꾸기에 가장 알맞는 자리가 된다. 그래서 이 자리에 키 작은 꽃나무를 심고 괴석을 앉혀 작은 석연지에 맑은 물을 담은 것을 놓아 보면 더할 나위 없는 아담한 정원이 생겨난다. 이것이 소위 화계라고 불리는 후정정원이다. 규모 큰 화계일 때에는 이곳에 굴뚝을 세워 연기를 뽑는 한편 화계를 장식하는 한 구조물의 구실도 시킨다. 이 경우에는 장식적인 요소가 가미되어야 하기 때문에 굴뚝을 전돌로 쌓아 올리고 꼭대기에는 기와를 얹혀 지붕의 형태를 꾸며 놓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굴뚝을 연가라 부르는데 그 벽면에는 십장생이나 쌍희자 무늬를 새겨 장식효과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꾸며 놓는다. 이 자리에 심어진 나무로는 매화나무도 심어졌는데 그 배치는 주로 홍동백서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자리는 일반적으로 외문남자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안채 뒤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대문밖 출입이 여의치 않았던 아녀자들을 위한 유일한 정원 구실을 하는 자리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사랑채에는 사랑채대로 아담한 정원이 꾸며졌고 또한 대문 밖에는 배수시설로서 하나의 방지가 꾸며진다. 물이 있고 보면 주의에 나무를 심어 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고 그러다 보면 물가에 아담한 정자도 앉는 결과가 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것이 사대부저택의 바깥 정원이다.

이상과 같이 이씨조선조가 되면서 딴나라에서는 물론 근세 이전에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갖가지 특수한 정원기법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씨조선조의 정원의 성격은 한국고유수법 확립시대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