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르뽀

특수박물관을 찾아서




김광만 / 시인. 르포라이터

국기 게양대를 없앤 국립박물관

일본 제국주의가 이 나라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중앙청이 얼굴을 바꾸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문을 열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아이로니칼하게도 일본으로부터 물려받은 건물에 광복의 날을 기념하여 문을 열고 거기에는 조선통신사의 행장도와 일본 죠오몬 시대로부터 나라 시대에 이르는 출토유물 약 2백50점이 2년간 전시될 예정이라 한다. 이와 같은 유물들은 모두 한반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들로 관계자들은 이번 한국 전시를 '첫 친정나들이'로 부르고 있다.

특히 이번에 전시될 조선 통신사의 행장도는 그 크기도 크기이지만 많은 양과 함께 일본과 우리나라의 문화에 대한 감각과 관심의 차이를 읽을 수 있어 조금은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다시 말해 조선 통신사 행장도는 사진기가 없던 그 시대에도 일본인들이 완전한 기록을 위해 한 작업이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소중하게 남아 우리의 눈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2백여 년이나 계속된 통신사의 내왕에도 불구하고 우리측의 기록은 많지 않고 관심 또한 없을 때 왜놈이라 업신여겼던 이들은 몇 백년 전부터 낱낱이 우리의 얼굴과 풍습을 그려놓고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전시될 조선 통신사 행장도의 또 하나의 특색은 조선 통신사가 전혀 거쳐가지도 않은 화가산 지방에서 발견된 것이 가장 많다는 점이다. 화가산은 대판에서도 2시간 이상이나 전철을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곳인데 여기에서 발견된 조선 통신사도가 그중 귀중한 가치가 많고 또 양과 크기도 엄청나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렇게 귀중한 것이 발견된 데에는 특별한 연유가 있다. 그것은 이 화가산 지역에 있었던 제후국, 기이국에 조선인의 피를 이어받은 매계 이전직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매계는 임진왜란때 의병으로 참가해 포로가 되어 잡혀간 경남 창녕군의 이진영과 일본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가현의 스승이 된 사람이다.

이 매계는 부친을 이어 제후의 유교 선생이 되었고 이 지역에 앞선 조선 문화를 소개했으며 아직도 남아있는 '부모 모시는 글(부모장)'을 지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매계는 조선 통신사가 지나칠 때마다 먼길까지 나와 조선의 글과 그림을 정성으로 받아 두었고 이 지역 사람들은 조선 통신사의 행렬을 빠짐없이 기록해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지금 없는 문화재이다.

그런데 이러저러한 모든 유물을 전시할 중앙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에 있었던 옥상의 국기 게양대를 없앴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또한 국립, 도립, 시립박물관의 문턱이 너무 높고 제대로, 체계적인 정리는 물론, 소개 자료마저 충분치 못하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렇다고 지금 말하고자 하는 기업 박물관이나 개인 박물관이 완벽하고 손쉽게 우리 가까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더구나 그 수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국가가 세운 박물관을 제외하고 개인이 세운 박물관이나 기업 박물관에 대한 오해나 색안경이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이 글에서는 그 존재가치와 의미를 높이 사주는 편에서 얘기를 풀어가야 될 것 같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모 재벌이 세운 박물관처럼 돈의 힘으로 일찍부터 골동품을 사 모으고 때로는 국립의 어느 이름난 박물관장마저 그 재벌의 감정사가 되어 골동품 알선을 한 소문도 있었고 때로는 도굴품의 큰 구매자가 되기도 했다는 그 재벌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지금 어엿한 박물관을 사회에 환원한 셈이기 때문이다. 비록 처음은 개인의 욕심과 장삿속으로 한 두점 사 모으다가 그것이 알게 모르게 힘없는 국가의 힘을 대신한 편이 되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만 가지고 과거를 용서하자는 말은 아니겠으나 어쩌면 차라리 그런 개인 소장가라도 이제는 많았으면 하는게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조금 기다려야 할 처지이다. 이번 취재로 만나본 어느 사람 말마따나 조금 귀하거나 특이한 것이 있으면 무조건 독립기념관으로 희사하라는 반강제의 공문이 날아들기 이쑤여서, 바로 그러한 관의 개입 때문에 아직은 우리 눈앞에 신선히 나타날 개인 소장품은 당분간 없을 전망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1974년에 이미 문을 연 誠庵古書博物館과 불과 며칠 전에 (1986년 5월) 문을 연 東方民俗鍮器博物館, 그리고 韓國刺繡博物館, 교과서 박물관을 살펴보는 것도 이 시점에서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한국 유일의 고서박물관

국가나 기업이 아닌, 개인이 세운 사설 박물관은 한결같이 유달리 찾기가 힘들었다. 무턱대고 이 근방 어디겠지 하고 주소만 들고 찾아 나섰다가는 낭패하기 십상이다. 더구나 전화번호는 바뀌어 있고 114 안내 컴퓨터 전화에도 나와있지 않았다. 성암고서박물관도 그러했지만 한국자수박물관은 백미터도 안 떨어진 동사무소에서조차 모르고 있었고 동사무소직원은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의외라는 듯이 그 번지수에는 건물이 세동이나 있다는 말과 함께 어디 시내 중심에 그런 것이 있겠는냐고 반문했다.

활자, 종이, 옛 서적 등 전통 인쇄문화와 서지학에 관한 종합적인 자료를 수집, 소장하고 있는 성암고서박물관은 공화문통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중심으로 한참 헤매다가 세종문화회관 별관 옆 골목을 들어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앞 태성빌딩에서야 찾아내었다. 주소가 중구 태평로 1가 60-17이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태평로가 큰 길 양옆을 말하는 것이었고 옛 서적과 옛 교과서 등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면서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를 경영하는 여승구 사장마저도 프레스센터, 즉 서울신문사 뒤쪽 어디쯤에 성암고서박물관이 있다는 말을 들었노라고 일러주었기 때문이었다. 여승구 사장, 그는 제1회 세계희귀도서전시회도 열었고 스스로도 개인 박물관을 염두에 두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어서 설마 그 도서관을 한번도 가보지 않았을 리가 없으려니 하고 믿었던 게 탈이었다.

결국 파출소를 거쳐 번지수를 확인하고 찾아간 성암고서박물관은 의외로 가까운 데에 위치해 있었고 연륜만큼이나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또한 옛 서적을 필요로 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알음알이로 썩 잘 알려져 있는 곳이라는 것도 거기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도심의 한복판인 코리아나호텔 뒤쪽(조선일보사 후문 옆)이 되는 이 태성빌딩은 6층에다 박물관을 차려 놓았고 건물 관리 사무소가 그 곁에 있었다. 예순다섯 나이의 관장 조병순씨는 최근에 增修補註三國史記를 펴내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사람인데 이 삼국사기는 그가 수집했던 여러 본의 삼국사기를 일일이 한자 한획을 비교해 올바르게 고쳐 주석을 단 귀중한 책이다. 그래서 그간 잘못 해석되고 연결이 되지 않던 삼국사기는 그가 펴낸 이 <증수보주삼국사기>로 거뜬히 제 모습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책을 다시 쓰기 위해 삼국사기의 여러 본은 물론 삼국유사, 기타 일본서기, 고려사 등을 일일이 찾아 헤매었다.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가친에게서 한학을 배운 것이 고서에 미쳐 책귀신이 된 동기라고 말하는 조 관장은 그동안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오는 고서들을 보관해 오던 중 20여 년 전 한문 폐지 움직임과 함께 고서들이 마구 헐값으로 고물상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본격적으로 고서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본래는 건축학을 전공했던 조 관장은 당시 해외건설 붐을 타 성공적으로 진행되던 건축업을 내던지고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옛서적들을 찾아 삼남 곳곳을 뒤졌고 미국·일본은 물론 유럽까지 헌책 등을 찾아 미친 듯이 쫓아다녔다. 그 결과 10여년 동안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드디어 1974년 11월 6일 자기 건물인 이 태성빌딩에 50여 평의 한국 유일의 개인 고서 박물관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성암고서박물관은 1년여의 공사기간을 들여 조 관장이 직접 설계, 건축하였으며 50여 평의 전시장과 별도의 서고, 열람실 등을 갖춘, 작지만 과학적으로 짜여진 박물관이 된 것이다.

은은한 한지 냄새와 함께 잘 정돈된 고서, 고문서들이 유리 진열장에 소중히 간직되어 옛 빛을 잃지 않고 있는 이 박물관에는 약 3만여 점의 고서적과 약 2만 5천 점의 고문서, 약 1만5천 점의 기타자료가 소장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국보가 3점, 보물 16점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이 희귀본 자료들 중에서도 국보 149호로 지정된 <東萊先生校正北史詳節> 卷六과 <高麗本三國史記> 7권(44권∼50권)은 대표적 희귀 소장본 중의 하나이다.

총 4천5백여 종의 방대한 고서들 중에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 많은데 국보급과 맞먹을 고서들을 살펴보면 <북사상절>외에도 고려 때의 <初雕大藏經版>, <御製秘藏詮> 卷六과 <비장전>, 사이에 새겨진 목판화 4점, 그리고 <팔만대장경>의 제작을 총 지휘, 감독하던 守基스님의 <화엄경>과 <화엄경>의 표지 뒤에 그려져 있는 變相圖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국보들 중에는 앞서도 잠깐 언급을 했던 고려본 <삼국사기>가 있는데, 이 <삼국사기>는 우리 한국 고대사 연구의 절대적인 기초자료였던 正德本보다 훨씬 오래된 것으로서 조 관장이 15년전 고서점가에서 구입하여 10여년 간의 연구와 5년간의 집필을 통해 거의 완벽하게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이 정덕본에다 왜곡시켜 놓은 144군데를 포함 1,904개의 오자, 18,269개의 탈자 및 누락된 곳을 바로잡았다)

<어제비장전>의 목판화 4점 역시 국내미술사에 처음으로 공개된 자료로써 단절되어버린 고려시대 회화사의 한 공백을 메우는데 커다랗게 기여한 것들이다. 위로는 菩提를 구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들에게 고루 평등한 법(光)을 나누어 주고있는 승려들을 묘사한 이 목판화들은 北宋本에 그 각인의 바탕을 두면서도 섬세하고 정교한 독자성을 잃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 판화의 이러한 독자적인 기법은 고려 전기의 우리 미술은 물론 인쇄문화와 불교문화 및 불교문화사 연구에 종래의 소홀했던 측면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한 것들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희귀본 하나하나가 발전되기까지는 한달 동안 전국 10만km를 헤매는 정열과 그에 따른 인고의 피와 땀,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행운이라는 걸 묵과할 수 없다. 10만km라는 이 거리는 지구를 두바퀴 반을 도는 거리이고 그 덕에 코로나 택시 몇 대를 폐차시켜야 했지만, 휴지공장의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녹아 없어질 뻔한 목판 <삼국사기 고려본>이나 김 인후의 초상을 담은 동판화 등은 코로나 몇 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우리 모두의 귀중한 유산들이다.

그래서 이곳에만 있는 학술적으로 뛰어나고 귀한 보물들에 대해 국내외의 고서적 관계 학자는 물론 우리나라를 연구하는 수많은 일본·중국의 사학자들은 감탄과 부러움을 함께 느끼고, 일본에서 왔다는 어느 학자는 벌써 몇 개월째 발을 묶고서 이곳을 찾고 있다.

열람만 가능한 이 박물관에는 한달 평균 50여명이 다녀간 셈이다. 재작년에 개최된 ICOM(세계박물관 협회)총회 때에는 세계의 박물관 관계자들이 이곳을 단체로 다녀갔고 작년 5월에는 이 협회의 기관지 <뮤지움(museum)>에 특집으로 이 박물관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전시장에는 활자 및 인쇄자료 등이 대표적인 것만으로 1백여 점 전시되고 있는데 고서들은 입구에서부터 활자의 주조연대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癸未字本>은 歷擧三場文選對策이 <庚子字本>은 주로 세종조의 것인 漢書(班固撰)가 甲寅字本은 <補註李太白詩>가 丙辰字本은 중국 쪽의 역사기록을 주체적으로 계수한 <資治通鑑綱目>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각 주조연대의 대표적인 고서들이다. 아무튼 이렇게 고서들을 시대 순으로 정리해 놓음으로써 전문가들이 아니더라도 고려조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활자의 변화와 책의 형태, 책 크기의 변화 등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한편 서책들과는 달리 책자의 본래 의미를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는 竹簡과 두루마리로 된 책(卷)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희귀한 전시품인데 죽간은 길이 20cm, 가로 0.4cm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대쪽에 사서삼경의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당시에 종이가 귀했던 관계로 종이장보다 더 얇게 깎은 이 죽편에 사서삼경의 구절들을 일일이 붓으로 써넣어 이를 죽간통에 넣어 책 대신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이는 선비들이 오늘날의 카드처럼 이 죽간을 사용했으며 죽간통 하나에는 1만개가 넘는 죽편이 담기게 되고 죽편1만개는 사서삼경의 모든 구절을 기록하고도 남는 분량이었다고 하니 가히 경이적인 집중력이라 할만하다.

活字는 木활자 10점, 銅활자 21점, 鐵활자 10점, 陶활자 21점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고활자는 고려시대의 도활자 18개로써 이는 국내에 몇 안 되는 희귀한 것들이다. 활자 중 특이한 것들은 금속활자들로써 활자 밑부분에 다리가 있어 활자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식자하던 다른 활자들과는 달리 밀랍을 녹여 만든 석자판에 다리를 꽂아 교정과 교열을 손쉽게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깝게도 임진왜란 이전의 금속활자들은 국내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 까닭은 임진왜란 당시 가등청정에 의해 금속활자들이 깡그리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고려시대의 금속활자가 국립박물관에 단 1개(몇 년 전 출토) 남아 있는데 그것도 다리가 없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조 관장은 이 고려 때의 금속활자를 추적해 일본, 유럽 등지를 헤매었으나 찾을 길이 없었고 단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박물관에서 1개를 발견했으나 찾아오지는 못했다고 한다.

또한 이 박물관의 한구석에는 영원히 없어져버릴 시련에서 돌아와 우리 앞에 한없는 감격으로 서 있는 은인장 하나가 있다. 이 도장은 바로 세종대왕의 三拱之印의 하나인 宣賜之記(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책에 찍는 직인이며, 국왕의 상징인 옥쇄 다음 가는 소중한 보물이다)인데, 이것의 발견 또한 극적이다. 많은 서책의 권두에 붉은 날인으로만 남아, 대강의 모습만을 짐작케 했던 선사지기가 발견된 것은 청계천변 어느 헛간에서 망치대용으로 사용되다 그야말로 '행운'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온 몸에 못대가리와 부딪힌 곰보자욱의 이 은인장의 출현은 반가움에 앞서 슬픔을 주었고, 그 슬픔에 앞서 또한 역사의 참뜻을 깨우쳐 주었다. 또한 이것은 조병순 관장의 피나는 노력이 바로 이러한 것으로 꽃피우고,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우리 시대에 이러한 박물관이 있어야 하는 당위성도 여기에 있게 된 셈이다.

"예초에 영리적인 목적과는 인연이 먼 일이었어요. 자료들을 모으다 보니 이것이 개인이 혼자 소장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학자들이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공개해서 우리 문화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과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박물관을 일요일과 공휴일을 빼놓고는 연중무휴로 개방해 놓고 있으나 국내학자들의 이용률은 그리 놓은 편이 아니라고 조 관장은 안타까워했다. 오히려 일본 동경대학 교수들이 장기체류를 하면서 우리 자료들을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며 국내 학자들은 안병희, 손부기, 천혜붕, 임창순 교수 등이 이 박물관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분들이라고 한다.

성암고서박물관은 도시 한가운데 있으나 옛것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보물 창고이다. 단지 귀하고 값나가는 물건이 정리 보존되어 있어서라기보다 단절되어버린 옛 역사의 맥과 전통을 이어주는 회랑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암고서박물관은 바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역사적 셈이다. 더구나 이 맥을 한 개인이 잇고 있다는 점에서, 그 모든 것에 앞서 혼신의 힘을 쏟아 역사를 붙들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고마움과 경건함을 가져야 될 것이다.

소박하나 귀중한 기교 동방민속유기박물관

삼각지와 해방촌, 잠수교의 길이 만나는 사거리에서 이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동방공예사라는 유기점이 있다. 이곳에서 옷가게, 안경가게들 사이를 비집고 돌아들어가면 <동방민속유기박물관>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야말로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여러 가게들과 문을 함께 쓰고 있고 (다시 뒷골목으로 전용문을 내고 있는 중이다.) 조금은 이상한 분위기, 혁필을 영어로 쓰고 있는 한복 입은 할아버지, 비좁은 가게 구석에 돌사자 앉음대가 있고, 화장실 표시마저 한복 입은 남녀로 표시되어 있는, 이곳이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방민속 유기박물관>의 입구이기 때문이다.

이 박물관은 여러모로 특이하고 중요한 구실, 또 박물관의 새로운 존재위치마저 설정해 주는 듯이 거기에 있는데 그것을 설립자 이희재씨는 "손자에게 들려주던 할머니의 옛날 얘기 같은 포근한 정"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민속유기는 언제나 은은하고 따뜻한 질화로 같이 우리 곁에 있어왔고 그러한 겨레의 체취와 슬기가 오늘날까지 밝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빛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바로 외국인들이 늘 드나드는 상점에 함께 박물관이 있다는 것은 더욱 이 박물관을 돋보이게 하는 점이다. 우리네 할머니처럼 수다스럽지 않고 아늑하게 우리의 것을 소개하자는 의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평당 가격이 천만 원이 넘는 이 금싸라기 땅에서 서른여 평을 선뜻 '옛 물건"을 단지 보이기 위해 내놓는다는 것도 그러하지만 녹이 슬고 파묻혀 이제는 거의 눈도 거들떠보지 않은 우리의 민속 유기를 처음으로 체계화시켜 전시케 하는 것은 큰 결단이 아니면 안 되는 때문이다.

유기는 우리말로 놋쇠 그릇을 이르고 놋쇠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거나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데 철이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비철금속이라고 한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은 청동이고 구리와 아연의 합금은 황동이다. 사람이 지구 위에서 맨 먼저 이용한 금속이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연장을 만들어 쓰던 시대가 청동기 시대인 만큼 청동과 사람과의 역사는 깊디깊은 것이다. 역사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청동 합금법이 들어온 때는 기원전 109년에 전한의 한무제가 이 땅을 정복하여 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 등 사군을 설치하고 나서부터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때에 비로소 전한의 청동 합금법이 이 땅에 건너오게 된 모양이다.

그 이후로 청동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볼 수 있는 신라와 고려의 번성한 불교문화의 한 조각인 불상과 종을 만드는 데에 널리 쓰였다. 그러나 청동과 황동인 놋쇠가 언제부터 살림살이 곧 밥그릇이나 국 대접이나 숟가락이나 요강이나 대야 같은 것을 만드는 데에 쓰여졌는지를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지금도 절에서 쓰이는 불기들이 거의 놋쇠인 점에서 그 역사의 깊음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놋그릇을 만들려면 먼저 <마련>이 필요하다. 마련이란 어떤 주물을 만드는 데에 드는 쇠를 말한다. <안성맞춤>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안성의 놋그릇이 유명해진 것도 이 마련의 질이 다른 곳보다 좋았기 때문이라 한다.

주발, 대접 한 벌 마련이 구리하고 상납하고 섞어서 두근 정도여야 되고, 언제나 징, 꽹과리 같은 방짜를 만드는 데에 드는 쇠가 제일 좋은 놋쇠이다. 놋쇠는 빛깔에 따라 상쇠와 중쇠와 하쇠로 나뉘는데 상쇠는 주석이 많이 들어가서 빛깔이 희고 중쇠는 아연이 섞여서 빛깔이 노랗고 하쇠는 잡쇠를 섞어서 빛깔이 붉다.

마련이 준비되면 그것을 도가니에 담아 화로 속에 넣고 녹인다. 이때에 쇠를 담는 도가니는 높은 열에도 녹거나 타지 않는 흑연으로 만들어졌다. 해방 전에는 이 도가니를 백토와 솜과 흑연가루를 반죽하여 손수 곱게 찧어서 빚어 썼지만 요즘에는 손쉽게 돈을 주고 사서 쓴다. 쇠가 녹는 온도는 대개 천도쯤에서 천팔백도쯤 사이에서 녹는다. 또한 놋그릇을 만드는 과정 가운데에 유일하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쓰이는 것이 틀에 채워서 본을 뜨는 흙이다. 이 흙이 유기공업을 수공업일 수밖에 없도록 하는 문제이다.

주물틀은 요강이든 놋대야든 무엇이건 간에 오목 본을 뜨는 암놈과 볼록 본을 뜨는 수놈이 있다. 요즘은 들고 놓기에 가벼운 양은 틀을 쓰지만 30년 전쯤에는 옹기 만드는 흙에다 삼을 잘게 썰어 넣고 떡메로 친 다음에 빚어서 썼다. 이 틀에 담은 흙은 밀물과 썰물의 차가 심한 바닷가에서, 이를테면 인천 같은 곳에서 가져온 앙금처럼 고운 흙이다. 이 일이 끝나면 암틀과 숫틀을 맞추어 넣고 쇳물을 붓는다. 쇳물이 녹아 있는 빛깔을 보아가며 붓는데 그것도 순전히 경험으로 얻은 눈짐작으로 한다.

이와 같은 놋그릇과는 달리 질 좋은 놋쇠 주물을 두드려 펴서 만드는 방짜가 있다. 다시 말해 쇳물을 틀에 부어서 그릇을 만드는 것과 작게 주물한 것, 즉 <바둘>을 불에 달궈가며 메로 쳐서 그릇을 만드는 방짜가 있게 되는데 이 방짜의 방법은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뿐이라 한다. 옛날에는 방짜로 놋그릇과 여러 가지 일용품을 만들었으나 (바로 이러한 것들이 지금은 이 박물관의 중요한 전시품들이다) 지금은 주로 풍물에 쓰이는 꽹과리와 제금, 징 등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방짜 쇠는 정확하게 구리 한 근에 주석 넉량 닷돈의 비율로 들어가는데 그 밖의 잡쇠가 한 냥이라도 들어가면 방짜 쇠로 못쓰는 엄격함이 있다. 또한 바둘을 달궈가며 쇠메로 쳐서 늘리는 일 즉 <도둘질>도 밤 열한시에서부터 새벽 다섯시까지 밖에 못한다. 그것은 세 사람이 들어가며 쇠메를 내리치는 도둑질이 빛깔을 보아가면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낮에 봐서는 빛깔을 똑똑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방짜든 주물 놋그릇이던 이것들이 살림살이로서의 목숨이 끊어진 지는 오래다. 그리고 요즘처럼 편리해진 세상에 새삼스럽게 손이 많이 가는 놋그릇을 찾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놋쇠에서 생겨나기 마련인 청녹이 사람의 몸에 해롭다 하여 더욱 그 맥은 끊겨 버렸다. 더구나 이른바 스텐 그릇들이 선을 보이고(50년대 한창이었다), 30년대의 태평양전쟁으로 일제가 공출해간 수많은 그릇들 때문에 그나마도 찾아보기 힘들게 된 셈이다. 거기에다 6. 25로 여기 저기고 흩어져 버렸다.

어찌 보면 쇠붙인 덕택으로 다른 유물에 비해 많이 남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앞서 말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거의 없어지고 새로 개조된 연탄사용의 부엌 때문에 아예 찬장에서는 유기물들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더구나 새로운 합금의 개발로 보이기가 무섭게 용광로로 들어가는 신세를 못 면하게도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신세의 민속유기들이, 누구도 돌아보지 않을 때 한점 두점 모이게 된 것이다. 물론 하는 사업 자체가 놋쇠와 청동을 이용한 공예품 사업이지만 옛 추억이 서려있고 함께 삶을 이어온 이 유기들이 연탄 물결에 밀려서 한낱 시대의 유물로 전락하면서 주물 도가니 속으로 사라져 갈 때 말없는 아픔을 느꼈다. 처음엔 아쉬운 마음에서 추억을 줍듯이 한점 두점 모으게 되었다가 급기야는 이것이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러기 20여년, 건물의 옥상과 집안 구석구석에는 다소곳이 녹이 쓴 유기들로 가득 찼고 그때 마침 온 나라안에서는 세계적인 잔치 86, 88로 설레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외국인과 많이 만나본 이 회장은 무엇보다 먼저 서둘러야 할 것이 우리를 올바르게 소개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실을 헐고 새로 이 박물관을 만들고 있을 때 주위 사람들은 이 비싼 땅에다 하필이면 그걸 만드냐고 질책이었고 그런 일은 나라에서 할 일이라고 한결같이 말했다. 그렇지만 이 이태원 바닥에서 살면서 우리 것에 대한 느낀 것도 많았고 두 딸과 사위들은 유명한 미술가로 길러 놓은 입장에서는 천금을 주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결정해 버렸다.

더구나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한결같이 이태원이 쇼핑상가로만 남아, 마치 일본과 같이 제2의 경제동물의 낙인이 찍힌다는 것이 그에게도 도저히 자존심을 허락지 않은 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서, 쇼핑을 즐기면서 사이사이 쉬기도 하고 우리의 높고 귀한 전통문화와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게 된 것이다.

아직도 체계가 없고 욕심껏 모으다보니 석영으로 만든 <옥 다듬이>와 목기, 떡살 등도 섞여있고 시대별 분류도 안 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환상적이다>, <가장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고 사인북에 적어 넣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걸음을 막 걷기 시작한 이 박물관의 장점이자, 큰 성과이다.

이 박물관에서는 제기와 놋주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양이 소장되어 있고 이조시대의 방짜합, 사리반, 약탕기, 징 등도 상당 수 있다. 여기에다 20여년 전 일본 것이면 무조건 녹여 없애 버리던 때에 일본 화로들을 간신히 구해놔 수십점 확보해 놓으므로 써 일본 놋그릇과의 비교를 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도 특색이다. 그에 비해 중국 것은 미처 손을 못대 청시대의 아편 빨대하나밖에 없지만 기회 닿는 대로 구해 놓아 이곳이 명실공히 유기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다하도록 하는 일과 유기의 역사 및 변천사를 집대성해 가는 것이 첫 목표라고 김두천 관장은 말했다.

우리는 금속이면 무조건 차갑다는 관념을 갖고 있는데 비해 외국인은 놋쇠를 <따스하고 부를 갖다주는> 금속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벌여논 동방공예사도 잘 되는 편이다. 그는 여기에서 벌어 이 박물관에 순수하게 투자하겠다고 말했는데 얼마전 뉴욕에서 본 <옥 다듬이>의 강렬한 추억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뉴욕 맨하턴의 보석상가에서 만난 한국 방짜는 보험을 든 고급 다이아먼드를 은은한 그의 품에 안고서 이것 보란 듯이 놓여 있어서 그를 전율케 했다. 석영으로 만든 다듬이는 포천에서 어렵게 만났다. 그 <옥 다듬이>는 일흔살 먹은 함경도 할머니가 피난 나오면서도 그것 하나만 가져올 정도로 아낀 보물이었다 한다. 너무나 귀하게 여기고 서너번 뒤돌아보는 그 할머니로부터 데려온 이 다듬이를 안고서 이 회장은 전통이 무엇이고 손때 묻은 우리의 유산이 무엇인가를 가슴깊이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유기 그릇들을 언제나 대가댁 맏며느리같이 너그럽고 소박하고 담담한 멋을 풍기는 예술품으로 인식하고 있다. 거기에다 혼신의 힘을 쏟아 치는 놋장이의 무수한 매자욱이 이루는 한 점 방짜 유기에서 현대의 어느 추상미술보다 심오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도 했다.

<동방민속유기박물관>은 우리의 넉넉함을 세계인의 눈앞에다 벌여놓은 자신감과 자존의 박물관이다. 모든 한국문화가 일본으로부터 왔으리라 믿었던 이들 외국인들은 (특히 저학력의 외국군인들) 모두들 이 공간에 발을 들여놓고는 기쁨과 찬탄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한국의 역사를 바로 알고 가는 산 역사의 장소가 된 셈이다. 앞으로 이 박물관은, 어쩌면 아직까지도 유기 역사 전시관 정도이지만, 60여 평으로 늘릴 참이라 한다. 그러나 이 60여 평은 세계로 뻗어나가는 가장 넓은 박물관이 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이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의 특색 때문이기도 하고 관람객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박물관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곳을 방문한 세계인의 가슴가슴마다에 가장 강한 한국의 인상을 심어줄 터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체계가 없는 교과서박물관

5천5백여 점의 교과서가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 교과서 박물관을 찾아 고속도로 톨게이트 근방의 교육 개발원을 찾아갔지만 거의 정리가 안되어 있는 상태였다. 대개 개화기 이후를 교과서의 효시로 잡고 있는데 이곳은 1973년 이후의 교과서들을 모아놓고 있었다. 앞서 얘기했던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 사장 여승구씨도 교과서를 많이 수집해 놓고 있지만 창고에서 아직 낮잠을 자고있는 형편이었다. 그는 <한국 문학서지 박물관>을 세울 요량으로 3만여 점을 모았는데 그 절반은 귀중한 문학서적이라고 했다. 삼청동의 중앙교육연수원에도 교과서가 많을 것이라 하여 알아보았지만 시설은 안되어 있고 지방 연수원생들의 논문집과 작품집이 상당량 수집 소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편 서울대 도서관 규장각에도 오래되고 중요한 교과서가 (일종의 서당 학습자료로부터 멀리는 대학의 시초인 태학의 자료까지) 있는 모양이지만 거기까지는 가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정에서도 눈치를 챘겠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국립이나 시립 박물관을 벗어나 체계적인 박물관을 갖지 못한 형편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여러 요인이 있고 여기서 거론될 성질의 것이 못된다.

문화재는 아무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값어치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널리 정신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과거와의 맥을 이어주는 유일한 이음줄이기도 하다. 더욱이 사람됨의 바탕이 날로 거칠어져 가고 마음들이 스산함을 더해 가는 현대의 삶에서 문화재는 메마른 마음을 적시고 흔들리는 삶의 자세를 간잔지런하게 하며 너그러움을 일깨우는 힘과 의지가 된다. 그러나 문화재를 소중하게 간직하는 일은 마음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정부의 기구 안에도 문공부에 문화재관리국을 두게 되었고 또 문화재 보호법을 마련하여 문화재를 함부로 다루거나 허가 없이 밖으로 내보내거나, 예로부터 땅속에 묻힌 것을 몰래 파내는 일을 엄한 벌로 다스리고 있다. 비록 개인이 간직한 재산이라도 그것이 문화재인 경우에 임자가 함부로 못하게 국가가 간섭하고 또 이를 모든 국민이 양해함은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는 우리 선조들의 귀중한 전신활동으로 남겨진 유산이고, 비록 사유재산이라도 그것이 지닌 공공의 성격 때문에 겨레의 공통되는 재산이기도 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존과 수집이 꼭 나라에서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개인의 희생과 투자로 더욱 빛이 나고 기회를 갖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획일적인 관의 개입이 배제되어야 한다. 더구나 거기에다 모든 역량을 투자할 재산과 역량마저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말이다. 본래 문화재의 귀중한 것 대부분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창조성에서 나왔듯이 그것의 보존 또한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간수되어지고 알려져야 된다. 단지 관은 그러한 정신과 유물들이 손상없이 보존되도록 다른 차원의 협조가 있어야 된다. 그래야 만이 아직도 개인의 품에서만 잠자고 있는 보물들이 비로소 그 얼굴을 내놓고 우리에게 과거의 얘기를 찬찬히 들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문화재는 언제나 숨을 쉬고 있는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