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한국 전자음악의 현황




안두진 / 연세대학교 작곡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 한국 전자 음악의 배경

예술과 사회 환경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술 지상주의에 대한 주장도 더러 있으나, 일반적으로 예술은 사회의 반영, 또는 생활의 거울이라고 이야기된다. 음악예술은 그 언어의 추상성 때문에 다른 예술 분야와는 다르게 생각할 수 도 있으나 양식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볼 때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역사적으로 과학 기술의 발전은 악기의 개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8∼19세기의 연금술 발전으로 현악기·관악기의 개량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하여 현대 관현악법의 방법이 정립될 수 있었다. 먼저 녹음기가 음악 문화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왔는가에 대하여는 새롭게 언급할 필요가 없으며, 신데사이저(Electronic Synthesizer)는 작곡가들에게 음색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심어 주었다. 녹음기와 신데사이저 이 두 악기의 발명은 전자 공학 발전의 덕이며, 20세기 음악의 새로운 지평은 이 악기들에 의하여 열려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컴퓨터 또한 예외일 수는 없어서 악기로서, 신데사이저의 제어용 기기로서 그 몫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다른 측면으로는 그 동안 서양 음악을 지배해오던 협화음의 조직이 붕괴되고, 새로 도입된 불협화음의 자유로운 구사법, 음향학의 발전, 음향기기들의 발전 등의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수용하여 태어난 음악의 한 분야를 전자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 음악은 전자 악기로 연주된 음악이면 다 전자 음악이라 할 수 있으나, 이 개념은 보다 더 정확한 미학적인 정리가 필요하게 된다. 아이메르트(Eimert, Hebert : 독일 1897∼1972)가 1954년 북독일 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을 위하여 쓴 글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 "전자 음악은 그 독특한 음향 현상으로 이제까지의 음악에 있어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단순히 전자 기기로 연주되었다는 이유로 전자 음악이라 일컫는 것은 무리이며 또한 영화나 방송국의 음향과도 엄연히 구별된다. 음악사조상 이는 부조니(Busoni, Ferryccio : 이탈리아 1866∼1924)의 음향 분할(Tontilung)이론과 세베르 크(Schoenberg, Arnold : 오스트리아 - 미국 1874∼1951)의 음색 형성(Klangfarbengestaltung) 개념의 역사적인 소산인 것이다. -중략- 우선 구성 수단으로서 전기로 만들어진 음은 음향 저장 기술과 연결제작의 방법에 의해 자유자재로 처리된다. 작곡가는 이 새롭고 무한한 음의 풍부함 속에 질서 관계를 정립하고 확고한 형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전달에 있어서의 어려움은 연주할 수 있은 한계에 다다른 최근의 난해한 음악 상황에서 기인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음악계에 전자 음악의 개념이 도입된 시기는 대체로 60년대 초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외국 전자음악의 소개이고 제대로 갖춰진 스튜디오 하나 없는 상황은 그로부터 20여년 지난 현재나 다를 것이 없다. 그래도 작곡가들의 노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외국 유학 중에나 아니면 개인이 장비를 구입하여 연구를 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개략적인 상황은 전자 음악의 첫 작품이 66년에 발표되었고, 최초로 서울대학교에 스튜디오가 기초적인 장비를 갖추고 개설된 것이 78년의 일로서 세계적인 스튜디오의 시설에 비하면 빈약하기 그지없으나 그것이 발전을 위한 첫 걸음이라 생각할 때, 그 의미는 상당히 큰 것이라 하겠다. 80년대는 70년대의 태동기에서 벗어나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시작한 시기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스튜디오나 대학에서 강의가 개설되어 있지 않은 상황은 변한 것이 없고, 몇몇의 개인들이 자신의 스튜디오를 갖추고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전자 음악의 미래를 위하여 희망적인 기대를 갖게 한다.

외국의 경우 전자 음악의 연구는 막대한 투자 비용으로 인하여 초기에는 방송국에서 그 이후는 대학의 연구소에서 주도하여 연극되어진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개인의 관심과 투자에 의하여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큰 차이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2. 국내 전자 음악 작품 현황

70년대 전자 음악을 시도했던 작곡가들은 주로 그들이 유학했던 구미의 대학 스튜디오에서 작품을 제작하여 국내에서 발표했다.

우리나라의 전자 음악 시대의 문을 연 사람은 강석희로서 66년 당시의 명동 국립극장에서 '원색의 향연 (KBS studio에서 제작)'을 발표하였다.

다음 작품은 역시 명동 국립극장에서 73년 11월 작곡발표회를 하면서 발표된 나인용의 '전자 음악과 플류트를 위한 십자가의 환상(미국 유학시 North Carolina Univ. studio에서 제작)'으로 이 곡은 전자 음향 외에도 환등기로 슬라이드를 영사막에 비추도록 된 믹스 미디어적인 것이 시도된 작품이다.

78년 서울대 스튜디오의 개설 후 첫 작품은 다음해인 79년 아시아 작곡가 연맹 서울 회의 기간 중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진규영, 허영만, 장덕산이 작곡한 테이프를 중간 휴식시간에 들려주는 형태로 발표되었다.

70년대의 중요한 작업중의 하나는 76년부터 시작된 범 음악제(Pan Music Festival)에서 강석희와 가야금의 황병기가 한 즉흥 연주가 있다.

이상이 70년대의 기록으로서 이들에 대한 어떤 평가는 작품성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한국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공로에 대한 평가도 항상 함께 따라야 할 것이다.

80년대 들어서 전자 음악은 상당한 진전을 보인다. 우선 서울대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진규영, 허영만, 장덕산은 외국의 스튜디오에만 의존했던 작업을 국내 스튜디오에서도 부족하나마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시킨 작가들이다. 이들의 작업을 이어받아서 서울대 스튜디오의 황성호는 기술자 공정실을 만나 이차대전 후 전자음악 태동기의 작가와 기술자의 관계와 같은 협조체제를 갖추었으며, 또한 그는 도이치(Deutch, Hebert)저 신데사이저 입문(단대출판부)을 번역했다. 황성호의 작품으로 81년에 발표된 「율 - 1」은 접합 마이크를 부착한 클라리넷과 신데사이저와의 실황 연주용 작품이고, 다른 작품으로는 「전농 - 초」, 「야경」등이 있다. 황성호를 비롯한 서울대 스튜디오 팀이 유학을 떠난 후로는 잠시 작품발표가 주춤하다가 김영식이 귀국 후 그의 작품「환상곡」, 「시조」가 발표되었다. 그 이후 85년이 되어서야 다시 작품의 수에서 증가를 보이는데, 85년의 주요 작가를 보면 강석희가 독일에서 작업을 하여 그곳에서 작품을 발표했는데 발표된 작품으로는 「Inventionen fur Orgel & Tonband」, 「Penthsilea von Kleist」, 「Music Theatre Study」등이 있다.

안두진은 전자 음악을 주제로 하여 작곡 발표회를 마련했는데, 이 음악회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신데사이저를 제어한 실황(Live)연주로 진행되었다. 이 연주회의 작품으로는 컴퓨터에 의하여 제어되는 신데사이저와 플루트의「Duet」, 포도주잔을 문지를 때 나는 투명한 소리와 신데사이저, 첼로의 앙상블인 「그림자」, 김춘수 시인의 시「가을 저녁의 시」에 피아노, 보코더에 의하여 변조된 음성을 내는 해설자, 컴퓨터에 의하여 제어되는 세 대의 신데사이저, 그리고 테너를 위해 만든 작품, 그리고 피아노와 신데사이저를 위한 이중주 「Capriccio」등이 연주되었다.

다음 전자 음악 연구 단체인 뎐농패는 전자 음악발표회를 개최하여 황성호, 유병은, 장정익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유병은의 「Study No. 1」, 장정익의 「춘향」은 주로 테이프 편집에 의한 유학시 제작한 작품이고, 황성호의 「설-스키타이」,「전설」은 Utrect의 Institute of Sonology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86년도 들어서 발표된 작품은 현재까지 8월에 발표된 최동선의 「동방의 빛과 영광」한 작품뿐이다.

이상과 같이 작가와 작품으로 살펴 본 우리나라 전자음악의 실태는 아직 초창기의 시도적이고, 실험실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연도별로 발표된 작품수를 비교해 보면 70년대는 몇 년에 한편씩 발표되던 작품이 80년대 들어서는 해마다 몇 편씩 작품이 발표되고 있다. 85년의 경우는 14편의 작품이 발표되었고, 그 중에 전자 음악만으로 짜여진 발표회가 두 번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로 이 발표회는 우리나라 전자 음악의 가능성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실제로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다 보면 짧은 작품 하나를 만들더라도 거기에 드는 시간과 노력이 상당히 많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수공업적인 작업과정과 장비의 부족에서 오는 표현의 한계 때문에 때로는 불만가운데서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하여간 작업과정을 통하여 태어나는 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인고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85년에 갑자기 발표된 작품의 수가 늘어난 이유는 한동안 작업이 뜸했던, 강석희가 독일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작품을 발표했고, 그 동안 유학에서 돌아온 작가들의 유학시 제작된 작품이 발표됨과 아울러, 다른 작가들도 그 동안 구입한 장비들이 작품을 만들 수 있을 만큼 갖춰졌기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 것이 많아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의미를 부여해야 할 일은 장비의 구입에 관한 일로서, 언제까지고 남의 나라 스튜디오를 빌어서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것을 이제는 우리 이 스튜디오에서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장비가 어느 정도 갖추어진 작가들은 앞으로 계속하여 작품을 발표할 것으로 기대된다.

3. 국내 전자 악기 보급 현황

작가는 스튜디오에 설치되어 그가 사용하는 장비의 특성에 의하여 작품의 성질까지도 지배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작품이 하나 만들어 질 때 같은 기능을 가진 악기라 할지라도 제조회사에 따라서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작가는 악기 선택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렇다면, 악기의 설계 방식이 아주 다를 경우는 어떻게 될까? 70년대 주류를 이루었던 아나로그 방식의 전압제어 기기들과 80년대 들어서 개발된 디지털 기기들의 음악적인 처리 방식은 아주 차이점이 많다. 아나로그 방식의 전압 제어 기기들은 주로 테이프 스플라이싱에 의한 수공업적인 작업이 주가 되는데 반하여 디지털 기기들은 기기 내부에 컴퓨터가 장비 되어져서 악기 상호간의 데이터 전송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컴퓨터의 자동 제어 기능을 이용하면 테이프를 이어 붙이는 횟수를 훨씬 줄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채널 녹음기를 이용하여 녹음기까지 컴퓨터가 제어하도록 프로그램을 짜면 수공업적인 작업을 거의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기술의 진보가 전자음악의 기본적인 미학에는 어떠한 변화를 줄 수 없을 지리도 작품제작에 있어서 기본적인 구상의 방향에서부터 수공업적인 시대와는 달라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장비를 살펴보면 주로 일본 제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표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음원으로는 아날로그 방식의 Roland System 100M과 디지털 방식의 Yamaha DX- 7을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작년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다음세대의 악기라고 할 수 있는 Digital Sound Samoling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미국 Ensoniq의 Mirage도 음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Roland 의 System 100M은 대형 스튜디오용으로 쓰기에는 부족하나 개인이 소장하기에는 큰 부담없는 쓰기에는 부족하나 개인이 소장하기에는 큰 부담 없는 기종으로 대형 기기에서 갖추고 있은 기능을 거의 포함하고 있다. Yamaha의 DX-7은 디지털 방식으로 전압 제어방식이 아닌 주파수 변조 방식에 의하여 소리를 만들기 때문에 소리는 자연음에 가까운 소리를 만들 수 있으나 제어방식이 아주 다른 관계로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그 기능을 다 알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스튜디오 장비보다는 상업적인 취향이 더 풍기는 점도 고려하여야 한다. Ensoniq제품의 Mirage는 앞으로 당분간 신데사이저 설계의 기본 방향이 될 Sound Sampling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지금까지 이론적으로만 가능했던 보다 정교한 형태의 소리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꼽히고 있다.

악세사리 계통은 거의 Roland제품을 사용하고 있는데, Echo, Reverbrator, Delay 등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녹음기는 소리를 듣는 사람에게 직접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기재가 된다. 음원으로 쓰이는 장비가 아무리 좋다해도 녹음기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면 음질은 좋지 않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 작곡가들에게서 가장 취약점으로 나타나는 것이 녹음장비로서 대체로 Teac제품을 쓰고 있는 실정이나 보다 좋은 장비로 대치되어야 할 것이다.

전자 음악 작가들이 장비의 문제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는 바는 아니나 개인이 구입할 수 있는 경제력의 한계, 국내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기종의 다양성 등에 제한을 받다보니 자신의 창의성을 살릴 수 있는 기종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모든 장비 전량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에서 그 정도의 기재를 갖추고 있는 것만 해도 상당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 전자 음악 연구 단체 현황

전자 음악을 연구하는 단체는 현재 작곡가로 진규영, 장정익, 유병은, 황성호, 안두진, 기술자로 김광철, 공정실, 양태현이 구성원으로 되어 있는 '뎐농패'와 서울대 작곡과 학생모임인 '전자 음악 연구회'가 있다. 뎐농패는 초기 서울대 스튜디오 구성원이 주축이 된 것으로 85년 12월 3 & 5 예공간에서 전자 음악 발표회를 가졌으며, 수시로 전자 음악 감상회를 주최하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전용 스튜디오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장비를 갖춘 회원들의 특강으로 모임을 지속시키며, 전용 스튜디오를 갖추기 위한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다. 이 모임은 작곡가와 기술자가 공동으로 구성원이 되어 있으므로 작곡 뿐 아니라 장비면에서의 연구도 병행하고 있다. 안두진과 양태현은 공동작업으로 Pitch to Voltage Converter를 개발했고, 공정실은 디지털 Sampling 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며, 자신이 개발한 MIDI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다. 김광철의 분야는 Sound Processing으로 제어기기 개량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서울대 전자 음악 연구회는 학생들의 모임으로서 전자 음악의 기초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서울대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범 음악제(Pan Music Festival)는 해마다 구미의 전자 음악을 소개하고 있다. 음악제 시작 첫해부터 계속 이어진 전자 음악 프로그램은 테이프를 연주하는 것외에도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웍겼을 하고, 작곡가들을 초빙하여 직접 실황 연주를 하게 하기도 햇다. 범 음악제는 82년 두 번의 음악회를 독일 전자 음악으로, 83년은 이태리 전자 음악의 밤으로 기획되었었고, 특히 84년은 두 번의 음악회를 실황 연주로 마련했다. 범 음악제는 유럽의 전자음악을 소개하여 국내의 작곡가들에게 직접적인 자극을 주었다는 것에 그 공로가 있다 하겠다.

5. 맺음말

제대로 갖춰진 스튜디오 하나 없는 상황에서 전자 음악을 연구하는 작곡가들이 이룩한 일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것이겠으나 외국의 경우와 같이 스튜디오의 개설에 방송국과 대학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보다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그들에게 제공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한 개인이 투자하여 마련하는 장비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점으로 인하여 보다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면 그것처럼 아까운 일이 없을 것이다.

자기가 숨쉬고 살아가는 사회와 생활을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고자하는 작가들의 노력이 있고, 그 노력이 전자 음악이라는 모양의 그릇에 담겨 있다. 아직은 그릇이 완전하지 못하여 내용물이 제대로 담기지 못하고 있으나, 머지않아 우리나라의 전자 음악도 완전한 모양을 갖춘 그릇에 담겨져 우리 삶의 아름다움을 모든 이에게 전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