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판을 통해본 명창의 세계(연재 제4회)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노랫가락




유영대 / 전주우석대 교수

지난 122호에 송만갑의「이별가」를 소개한 바 있다. 이번 호에는 전적으로 그의 소리만을 채록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동편제의 거두인 가왕 송홍록이 바로 그의 큰할아버지이며, 대대로 명창의 법통을 이어왔다. 생각해보니 송홍록이야말로 얼마나 멋진 소리를 구사했던가. 송만갑의 소리를 들어보면 그 조상들의 소리도 짐작할 만하지 않겠는가. 그의 잔뜩 쇠어 있으면서도 카랑카랑한 소리가 참으로 그립다.

그의 소리를 녹음해 둔 테이프를 여러 차례 들으면서 문득문득, 이런 종류의 글은 자료테이프를 부록으로 붙여야만 참으로 의미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느꼈다. 그리고 음향도서실sound library의 필요성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실제로 이런 자료들이 도서관에 제대로 분류되어 대출이 자유롭다면 얼마나 구체적으로 우리가 송만갑을 만나고, 그리고 공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그의 소리는 판소리를 연구하는 학자나 관심있는 호사가들에게나 의미있을 터이지만, 그가 살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까지 시기의 청중들은, 송만갑이야말로 가장 의미심장하게 자신들의 기쁘거나 슬픈 심사를 대신 노래해주고, 자신들이 미처 표현해내지 못한 한을 그려내주며, 노래를 통하여 청중과 정서적 일치감을 느끼게 하여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수 중의 가수였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의미있는 가수인 조용필이나 이미자가 가지고 있는 영역만큼이나 소중하게, 당대의 청중들에게 송만갑이나 이동백, 정정렬 등은 소중한 존재였다. 오늘 우리에게 조용필이 뜻깊듯, 그때 우리 조상들에게 송만갑이 소중했었다는 사실은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는 좀 낯설게 느껴지는 송만갑을 어떻게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설사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해도 정말 소중하게 느껴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의 토막소리를 들어보기로 한다.

십장가

〈앞면〉(아니리) 송만갑이 「십장가」올씨다.

(진양조)집장사령(執丈使令) 거동을 보아라. 형장(刑杖)을 고르는구나. 이놈 골라서 저리 놓고, 저놈도 골라서 이리놓고, 그 중에 등심 좋고 손잡이 좋은 놈을 힘을 바쳐 두러메고, 춘향을 보고서 눈을 딱 부릅뜨며, 「꼼짝마, 뼈 뿌러질라」엄명 앞세워 그랬거니와, 속말로 하는 말이, 「춘향아, 정신을 놓지 말고 한 두 개만 견디어라」

「매우 쳐라」「예이-」딱-, 찍. 부러진 형장개비는 삼동에 둥 떠있고, 춘향이는 정신이 아찔, 소름이 쫙 끼치며, 아픈 것을 억지로 참니라고 고개만 빙빙 두루 놓고, 「음, 일짜로 아로리라. 일편단심 먹은 마음이 일시인들 변하리까. 가망없고 무가내오」

두째 낱을 부쳐노니, 「이부불경(이부불경)이내 심사 이도령만 생각하오나」

〈뒷면〉세째 낱을 딱 부치니「삼짜로 아로리다. 세치 형문 만난다고 삼생가약(삼생가약) 면하리까. 가망이 없고 무가내오」

네째 낱을 부쳐노니, 「사짜로 아로리다. 사람의 양반님은 사기사(사기사)를 모르시오.」

다섯째 낱 부쳐노니, 「오짜로 아로리다. 오장썩어 피가된들 옳은 춘향이 죽인 사또님 옳다할 이가 누있겠오. 가망없고 무가내오」

여섯째 낱을 부쳐노니, 「육짜로 아로리다. 육군 달랜 소진(蘇秦) 이상도 소녀는 못달래지요. 가망없고 무가내오」

일곱째 낱을 부쳐노니, 「칠짜로 아로리다. 칠척검 드난칼로 이제목을 베어주오」

여덟째 낱을 부쳐노니, 「팔짜로 아로리다. 팔도기생이 천타한들 열녀 하나가 없사리까」

아홉째 낱을 부쳐노니, 「구짜로 아로리다. 구곡간장 흐르난 눈물 구년지수(구년지수) 되오리다」

열째 낱을 부쳐노니, 「십장가로 아로리다. 십생구사 하올망정 십분인들 변하리까. 가망이 없고 무가내오」

이 음반은 니포노폰 Nippononphone 6150-1에 취입된 것으로 송만갑 소리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대표적인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음반으로는 특히〈춘향가〉의 대목들이 많은 편인데, 그 중에서도 지난 호에서 들어보았던「이별가」와「십장가」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십장가」는 변학도의 수절을 거부한다고 춘향이 형장에게 곤장맞는 대목을 그린 슬프고 절망적인 노래이다.

그러면서도 이 노래에는 여유가 있다. 춘향은 곤장을 맞을 때마다 그 맞는 숫자에 운을 맞춰 자신의 결심을 이를 악다물고 노래한다. 「일편단심으로 이서방만을 위하여 수절할 것이며, 아무리 강하게 밀어붙여도 자신을 달랠 수는 없다」고 항변한다. 게다가「오장이 썩어서 피가 된들 정당한 춘향이를 죽인 사또더러 옳다고 말할 사람 아무도 없다」며 도리어 호령조가 된다. 매를 한 대 한 대 맞을수록 더 확고하게 자신을 지켜가는 춘향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것은 춘향이 자포자기적인 처지에서도 지니고 있는 교양과도 같은 여유이자 광대들의 현실에 대한 야유라고 할 수 있다. 〈진양조〉로 불리는 느릿하며 절망적인 속도가 매맞는 현실의 고통의 길이를 나타내며, 「딱」하고 짧고 높이 질러대는 매 때리는 소리가 그 아픔의 높이를 그리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춘향의 노래가 나오는 것이다.

집장사령의 이중적인 태도도 아주 흥미롭다. 그는 춘향을 이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또가 보는 데서는「꿈쩍마라. 뼈부러질라」라고 엄포를 놓으나, 몰래 춘향에게는 「춘향아, 어쩔 수 없다. 정신놓지 말고 한 두 개만 견디어라」 라고 말하여 자신의 의사를 전한다. 춘향이와 결국은 같은 패거리라는 사실을 넌지시 말하고 있으면서, 변학도의 포악함을 더욱 더 잘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십장가

(중모리) 스물치고 짐작헐까. 삼십도으 맹장허니 옥모화엽의 맑은 눈물 옥같이 지는 양은 쌍수용용(雙水湧湧), 옥같은 두 다리으 유수같이 흐른 피난 사람의 자식을 볼 수 없네

수십명이 귀경을 하다가 오일쟁이 하나가 나서면서,「제기를 붙고 발기를 갈 녀석, 이런 매질이 또 있느냐. 집장사령을 눈익혀 두었다. 삼문밖 나오면 급살을 주리라. 저런 매질이 또 있느냐.」

매질하던 집장사령이 돌아서 발 툭 탁 구르면서, 「못하것네, 못하것네, 집장사령 노릇 못하것네. 이놈의 역이 아니면 역이 없느냐. 우리집에 돌아가서 농사역을 허여를 보리라. 이런 노릇이 또 있느냐.」

춘향모친이 발 동동 구를 적으, 여러 오입쟁이 각자 흩어지며, 「나 돌아간다, 내가 돌아간다. 저런 거동 차마 볼수가 없구나. 떨떠리고 돌아서는디 가는 허리(?)로 내가가네. 이런 일은 다시는 오지마라. 사람을 치면은 저렇게 치느냐. 저런 형상은 볼 수가 없네」

이 「십장가」는 바로 앞에서 들어본 부분에 이어지는 대목으로, 콜롬비아 40145B면에 취입되어 있다. 춘향이 매열 대를 맞고나서 이어서 스무 대 가량 더 맞고 난 후의 처절한 형상을 둘러싸고 「남원읍내 오입쟁이」와 집장사령, 춘향 어머니의 태도 등을 심감나게 그리고 있는 중요한 음반자료이다.

집장사령의 무자비함을 꾸짖는 오입쟁이와, 무고한 여자 매질하는 일을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외치는 집장사령의 모습이 좋은 대조를 보이면서 문제의 핵심이 변학도에게 있음을 오히려 강조하고 있는 흥미로운 연출 수법이 돋보인다. 집장사령이「이놈의 역이 아니면 역이 없느냐, 우리집에 돌아가 농사역을 하여를 보리라」라고 외치는 대목은 중요한 의식의 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오입쟁이가 내는 소리는 특히 〈경드름〉이라고 하는 특이한 선율을 사용하여 맛을 낸다. 흔히 서울 사람의 말씨를 연출할 경우, 판소리에서는 언제나 이 〈경드름〉을 사용하여 인물의 특성을 규정지워 준다. 이밖에도 「어사와 장모가 만나는 대목」에서 어사는 〈경드름〉을 사용하고, 월매는 계면성음으로 이어나가 아주 조화로운 연출솜씨를 보여주기도 한다.

옥중가

(아니리) 〈춘향가〉 「옥중가」송만갑이 합니다.

(진양조) 옥방형상 살펴보니 앞문에는 살만 남고 뒷벽에는 외만 남아 동지섯달 찬바람에 「우루루 지엄위」 앞덜이에 풍질헌다.

동풍이 눈을 녹여 가지가지 꽃이 피었으니 각색화조 두견화는 나부(나비)보고 웃난 모양은 반갑고도 설거워라. 눌과 함께 보자 하느냐.

꽃이 지고 잎이 피니 녹음방초 시절이라. 꾀꼬리는 북이되어서 유상세지 늘어지니 구십춘광으 짜는 소리는 아름답고 설거워라. 눌과 함께 듣자는거나.

단옥장춘은 연연이 푸르렀고 촉포혼백은 서런 마음을 자아내어 공산의 두견이는 은은한 삼경달에 피가나게 슬피 울어서 임의 귀에 들리고저.

이 음반은 일축 K188A에 실린 것으로 역시 송만갑의 대표적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동편제 춘향가〉의 경우, 「십장가」에서부터 「옥중가」까지의 진행은 일품이라고 할 수 있다. 춘향이 매를 맞고 옥중에 갇혀서 지내는 동안의 경험을 노래한 것이 바로 이 「옥중가」이며, 동편제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부분이 바로 「옥중가」가 아닌가 한다. 그런 점에서 송만갑의 「옥중가」가 이한 대목만 남아있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다.

이 대목에서도 높이 질러대는 송만갑 소리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옥에 갇혀있는 절망적인 심사와 옥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무심한 듯 묘사되는 계절의 변화가 한데 어우러져 춘향의 절망감이 배가된다. 짤막한 노래이지만 겨울에서부터 봄을 거쳐 여름, 가을까지가 다 드러나 있다. 옥바깥의 자연의 변화만으로 말하자면 아름답지만, 함께할 이가 없기 때문에 설겁고 서러운 것이다.

이 기나긴 옥중의 시간의 변화를 이렇게 간단하게 보이고 있다. 이보다 훨씬 뒤에 이서방이 옥중의 춘향이를 만나러 갈 때 옥중의 장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유명한 「초경 이경」대목이며, 거기에는 춘향이가 갇힌 옥에 밤이면 나타나는 귀신들의 소리를 묘사한 「귀곡성」도 등장한다. 이 「귀곡성」은 원래 송홍록이 창안했다고 하는데 그 소리의 완성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전한다.

송홍록은 어려서 백운산에 들어가 10년을 소리공부를 하였으며, 드디어 소리가 어느 정도 완성되어 산을 내려가려고 하였다. 그의 장기는 바로 이 「옥중가」였다. 공부를 마치고 하산하기 전날밤 삼경 무렵에 초립동 세 사람이 그를 찾아와서는 영상대감이 부른다고 하면서 큰 기와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영상대감은 홍록에게 「네가 옥중비가를 잘 부른다 하니 한번 들어보자」고 말한다. 대감이 홍록의 소리를 듣고나서는, 「과연 천하의 명창이다. 그러나 귀곡성이 미진하구나. 내가 귀곡성을 가르쳐줄 터이니 따라서 배워라」라고 말하고 들려주는데, 몸이 오싹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홍록은 그날밤에 「귀곡성」을 그대로 방창하여 배우고, 산해진미로 대접도 잘 받고 비단금침에서 잠을 잤는데, 깨어나 보니 황량한 벌판에 다 허물어진 옛 무덤 구석이었다고 한다. 배운 내력이 이러한지라 송홍록이 촉석루에서 바로 이 「옥중가」를 부르면서 「귀곡성」을 내자, 촉석루에 갑자기 바람이 일며 촛불이 일시에 꺼지면서 하늘로부터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 대목을 송만갑이 직접 부른 것이 현재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새타령

〈적벽가〉〈화룡도〉송만갑이가「새타령」을 합니다.

(중모리)산천은 험준하고 수목은 창적한디, 민학에 눈쌓이고 천봉에 바람 쳐서 앵무 원학(猿鶴)이 끊어져서, 새가 어이 울랴마는 적벽의 객사원귀(客死怨鬼) 고향이별이 몇해런고.

「귀촉도, 귀촉도」불여귀(不如歸)라, 슬피우는 저 촉혼조(蜀魂鳥),

여산군량 소진을 하여 촌비(村扉) 노략 한때로구나. 「솟텡, 솟텡」저 흉년새.

백만웅사(百萬雄師) 자랑터니 금일 패군이 어인일고. 이리로 가면「뻑뻐꾹」, 저리로 가면 「뻑뻐꾹 뻐꾹」.

자칭 영웅 간 데가 없고 각기 도생 꾀로만 한다. 「꾀꼴 꾀꼴 꾀꼴」저 꾀꼬리는 초평대로(草平大路)마다허고 심산총림(深山叢林)을「보그야 꽉꽉 까옥」

가련타.

주린 장졸(將卒), 냉병(冷病)인들 아니 들랴. 병에 좋다고 「쑥꾹, 쑥꾹, 쑥꾹, 쑥꾹, 쑥꾹」

장요는 활을 들고서 살이 없다고 설워 마라. 살간다「수루루루루」

반공에 둥둥 높이 떴다가 동암풍을 내가 막아주랴고 저 바람막이.

이 소리는 일축 K188B에 박아져 남아있는 것이다. 이 음반에도 송만갑 소리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잘 알고 있듯이 이 대목은 적벽의 대전에서 패전한 조조의 군사들이 화용도로 패주하는 길목에서 불린다.

〈적벽가〉는 우조로 불리우는 제왕 장수들의 웅혼한 기상을 보여주는 대목과, 전쟁에 강제로 참여하고, 패한 군사들의 슬픈 정황을 겹으로 보여준다. 특히 전반부의 「군사서름타령」과 후반부의「새타령」은 가장 아름다우며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억울하게 죽은 병사들이 원조(怨鳥)가 되어서 이 대목에서처럼 슬프게 울음을 우는 것이다.

특히 「새타령」은 실제 새들의 소리와 꼭 같게 내는 성대 묘사가 가장 돋보이는 특징이다. 송만갑의 바로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소리의 모방은 착각을 유발시킨다. 소쩍새 우는 소리도 그럴듯하거니와, 그 새가 바로 촉나라로 돌아가고 싶어서 운다는 이름의「귀촉도(歸蜀道)」라면 얼마나 가슴 아픈 사연인가. 그러기에 우리도 소쩍새는 피울움을 운다고 말해왔다. 여기에 채록한 것은 실제로 송만갑이 불렀던「새타령」의 역 절반정도가 아닐까 추정할 수 있다. 그 뒷대목을 들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원래 이날치가「새타령」을 빼어나게 잘 불렀다고 하며, 그 예로 그가「새타령」을 부를 때는 인근의 새들이 몰려왔다고 전해온다. 그리고 현재 음반이 남아있는 것으로 이동백의 것과 임방울의 것이 출중하다.

심봉사 자탄가/심봉사 아이 어르는데

<앞면>(아니리)「심봉사 자탄가」올씨다.

(중모리)이때어 심봉사는 집안이라고 들어오니, 부엌은 적막허고 방안을 횅비었는디, 가련한 심청이가 배가 고파 「응애, 응애」우니 심봉사가 어린 애기를 바듬고서, 「아이고 내 새끼야, 배가 얼매냐 오직 고프면 네모습 이로(?)일꺼나」

천지가 사정없이「꼬끼오」,「닭아, 우지를 말아라. 어서 어서 날이 새면은 내 새끼를 젖을 많이 얻어 맥이려허니 우지를 마라, 우지 마라」

그렁저렁 날이 새니 동네가의 물소리 시원히 돌리거늘 어린애를 품에다가 안고서 더듬더듬 나가면서, 「여보시오, 부인네들, ○○○○는 틀리오나 초칠만에 모친을 잃고, 젖을 구할 길이 없아오니 이 애 젖좀 먹여주오.」

젖있는 부인네는「그 애 이리 가져오오」, 젖없는 부인네는「나는 과연 젖이 없오.」

이집으로 들어가며, 어찌하여 하처시(?)요, 이집으로 들어가며 그집으로 들어가,「여보, 부인. 춘삼월에는 진리오나(?) 심학규가 죽을 지경에 이렀으니, 이 애 젖좀 먹여주오」

<뒷면> (아니리) 「심봉사가 딸 주방에 데려가서 이르는데」올씨다.

(중중모리)심봉사 좋아라고 능청을 다듬고 집으로 돌아와 심청이를 물팍에다 뉘어놓고, 「아이고 내 자식, 배불렀다. 네 배가 장차 이러허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내 새끼지 내 새끼지, 아이고 내 자시 배불렀다. 니가 얼매나 복이 없으면 너의 모친 잃어」

(자진모리)「어허 둥둥 내 자식. 내 자식이 내 자식. 내 아들은 도굿내, 아롱칭구(?) 그렇지. 덩기둥둥으 둥둥. 어허둥둥 내 아들. 날아가는 저 학이야. 내 새끼지 내 새끼지 내 새끼. 저리 보아도 내 새끼. 남전북답을 당당헌들 은근한 내 새끼. 저리 궁글 높은 골 바랄보아도 내 앞이라 어허둥둥 내새끼. 내 아들이지 내 아들. 딸 없다 고생하며 부귀다남을 헌다더라.

보선밭에 뉘없다(?) 어허둥둥 내 새끼. 내 아들은 도굿내, 어룡이 둥둥 그렇지. 날아가는 저학이야. 애들 처음을 검치말고 자박자박 걸어라(?). 어허 둥둥 내 자식.」

심봉사 거동봐. 심청을 업고서 다섯○○이 어둡지마는 어쩔줄을 모르니, 어슬렁 오는디, 심봉사 속모르고 의상을 가듭고서(?) 「둥둥둥 내 딸, 어허 둥둥 내딸. 어서어서 자라나. 아비 귀염을 흠씬 받고 자박자바 자라거라. 어허 둥둥 내 딸. 내 아들이지 내 아들, 니가 어서 자라나 니 어머니대를 이어라. 어허 둥둥 내 새끼. 앞을 이루다. ○○○○○어허 둥둥 내새끼. 내아들은 도굿대. ○○○ ○○○ ○○○어허 둥둥 내새끼」

이 음반은 일축 K176B면에 실린 것으로 역시 송만갑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송만갑은<심청가>에도 능숙하였으며, 제자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칠 때는 언제나「진국명산」과 <심청가>부터 가르쳤다고 한다. 물론 그 이유를 짐작하건대, 단가 「진국명산」이 가지고 있는 효라고 주제가 한데 어우러지면 봉건사회의 지배이념과 쉽게 한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소릿대목에서도 송만갑은 아이우는 소리나 닭우는 소리의 성대묘사도 일품으로 들려주고 있다. 아이우는 소리를 들어면 처절하고 슬픈 정황이 훨씬 진지하게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적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음반의 특징으로는 심봉사를 묘사하면서 사용한 낮은 수리성의 선율을 들 수 있다. 대체로 송만갑 소리의 특징은 높이 질러대는 세세상성이나, 여기서는 그것이 한번도 쓰이지 않았으며, 낮게 깔리는 음색으로 심봉사의 정서를 잘 표출하고 있다.

원래 송만갑은<심청가>를 잘 불렀으나, 상처한 뒤부터는 심봉사가 심청이의 젖을 구걸하는 내용과 자신의 처지가 일치되는 것 같아서 나이 들어서는 일체<심청가>를 부르지 않았다고 전해온다. 이 음반이 그의<심청가>녹음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박타령

<앞면>(진양조) 시르렁 시르렁 톱질이야.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년의 가난이야. 잘살고 못사는 일은 묘쓰기으 매였는그나? 삼신 제왕님이 아래에 떨어줄적으 명과 복을 점지허나? 에이 여루 당거여라.

시르렁 시르렁 시르렁 당거주여라. 여보게 마누래, 예, 톱소리를 어서 맡소, 톱소리를 맡자헌들 배가 고파 못맡겄네. 배가 정 고프거들라컨 치매끈을 졸라 매소.

시르렁 시르렁 시르렁 시르렁 실근 톱질이야 당거여라.

이 박을 타커들랑 아무 것도 나오지를 말고서 밥 한 통만 나오너라. 평생으 포한이로구나, 에이여로 당거주소.

시르르르릉, 시르르르르릉, 톱질이여 당거여라.

<뒷면>박을 흥보가 탁 타 놓으니, 박통 속에서 왼갖 돈과 쌀이 막 나달아 오는디.

(휘몰이)흥보가 좋아라고 흥보가 좋아라고 부어내고 보면 그뜩, 부어내고 보면 그뜩, 도로 하나 그뜩허고 돌아섰다 톡톡 털고 돌아보면 도로 하나 그뜩허고.

(아니리)어찌 퍼붓어 놨던지 쌀이 일만 구만 석이요. 돈이 일만 구만 냥이지. 흥부가 돈꾸미를 들고서 돈타령을 허는디 가관이든가 보더라.

(중중모리)흥보가 좋아라고 박흥보가 좋아라고. 얼씨고 좋구나. 돈봐라 돈봐라. 얼씨구나 좋다. 돈 좋다 돈좋다. 얼씨구나 돈받라. 이놈아 돈아.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느냐. 얼씨구 돈 돈, 잘난 사람도 못난 돈 못난 사람도 잘난 돈. 양산군으 수레바꾸체로 동글동글 생긴 돈. 생살지권을 가진 돈.부귀공명이 붙은 돈. 이놈으 돈아. 아나 돈아.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느냐. 얼씨구 돈봐라. 야이 자식들아 춤을 춰라. 아따 이놈의 돈이, 얼씨구나 돈봐라.

여보아라 큰자식아. 건너 말 건너가서 너의 큰어머니 오시래라. 경사를 보아도 형제 볼란다. 얼씨구나 얼씨고. 지화자 지화자 좋네. 얼씨구 좋구나. 지화자 좋네. 얼씨구나 좋네.

(진양조)또 한 통을 디려 놓고. 아들아 톱질이야. 이 박통에 나오는 보화는 행님 갖다가 들릴란다. 흥보 마누래 기가 맥혀. 「나는 나는 안탈란다. 동지섯달 치운 날으 자식들을 앞세우고 우박밖에는 나오던 일을 누군들 잊어도 나는 못잊겠네」

이 음반은 콜롬비아에서 찍어낸 것으로 이 또한 송만갑의 대표적인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동편제 흥보가> 는<송판 흥보가>라고도 부르며, 송만갑에서 김정문을 거쳐 오늘날에는 명창 강도근으로 이어진다.

이 「박타령」은 우리의 조상들의 가난한 현실의 모습과 그것을 이겨내는 환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뜻깊은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흥보는 가난의 대명사이면서 기실은 가난한 우리들의 삶이라 하겠다. 이 대목 속에 들어있는 「가난타령」은 제목부터가 흥미롭다. 오죽하면 가난한 현실이 노래의 대상이 되었을 것인가. 그러나 가난은 타고나는 것이라는 운명론적 세계관과 자포자기적인 체념이 노래 속에 담겨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돈과 쌀을 부어내는 모습은 어떠한가. 아마도 죽자고 끝까지 부어내는 일만 하라고 하여도 우리는 즐거이 그 일을 하 것이 아닌가. 그 모습도 신나게 그리고 있다. 원래는 이 대목이 훨씬 더 길지만 3분짜리 sp음반에 취입하기 위하여 대폭 잘라낸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명고수 송영주의 증언에 의하면 명창 전도성은 흥보가 돈과 쌀에 포한이 져서 박속에서 나온 돈궤와 쌀궤를 보고는 덜어내는데, 그 대목을 30분 가량 하여서 온몸이 땀에 젖어서야 덜어내는 대목 부르기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한편「돈타령」도 아주 구체적으로 당대를 반영하고 있다. 엽전의 둥그런 형용과 대단한 부자였던 맹상군의 수레바퀴를 유비시키면서 부귀공명과도 연결시킨 것도 재미있으며, 절규하듯 「생사지권을 가진 돈」을 말하는 것도 참 절실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이「돈타령」이 생겨날 무렵에는, 양반들은 돈을 세는 것이 수치로 여겨져서 입밖에도 별로 내지 않을 때일성 싶어서 더욱 민중들의 현시감각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송만갑의 연출도 아주 흥미롭다.

일축 K172B면에 실린 송만갑의 박타령은 단편으로, 지금 들어본 콜롬비아 음반과는 약간 사서의 배치를 색다르게 박아 넣었는데 그것도 이 자리에서 채록해서 비교하여 보기로 한다.

(아니리)송만갑이가 박 한 통을 탑니다.

(진양)시르렁 실근 톱질이야. 에이 여루 톱질이로구나.

여보소 마누라, 우리가 이 박을 타서 박속을 끌여 먹고 박아지는 팔아서 목심이나 살아나자. ○○○○하지말고 이박을○○○박을 타소. 에이 여루 당거주소.

실근실근 톱질이야.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 년의 가난이야. 어이하면 잘사는거냐. 가난도 필자가 있냐. 가난도 사주가 있나. ○○○ ○○○○ ○○○몹씰년의 가난이야. 에이여루 톱질이로구나.

시르르르렁 실근 시르렁 실근. 실근실근 당거주소. 강상의 떳는 배는 칠천석을 실고 간들 내 박 한통 타는 거나. ○○박을 타라. 에이여루 당거주소.

시르르렁 실근 시르렁 실근 톱질이로구나. 여보소 마누라, 자네가 한번 원을 바쳐.

가자가자

(진양조)가자 가자. 어서 가자. 이수를 지내여 백로주를 어서 가자. 삼산을 바라보니 청천외으가 멀어있고, 일락장사추색원(日落長沙秋色遠)허니 부지하처조상군고(不知何處弔湘君), 한곳을 바라보니 오호창파 연월안으 돛대치는 저 사람은 월범여(越范嵎) 아니런가. 함외장강공자류(檻外長江空自流)는 등왕강이 여그로구나.

(중중모리)백마주를 바삐 지내여 적벽강을 당도허니 소자첨 범주유 동해상 달떠온다. 두우간에 배회하야 백로횡강을 함께 가. 소지노화월일선(笑指蘆花月溢船) 추강어부가 무인배. 기경선자(騎鯨仙子)간 연후 공추월지단단(空秋月之團團). 자래 등에다 저 달을 실어라. 우리 고향을 어서 가. 환산농명월(還山弄明月) 원해근산이 좋을시고.

토끼란 놈이 좋아라. 관대장자(寬大長者) 한 고조(漢高祖) 국량 많기가 날만 허며. 운주결승 장자뱅이 조화 만히가 날만. 만고간응에 조자룡이가 ○○허기가 날만허랴.

예 듣던 청산두견 자주 운다 저 새소리. 타향 수국에 갔던 벗님이 어디 돌아있다 고국산천을 돌아오니 어찌 이리도 반갑나.

백색 해변을 당도하야 바짝 내려서 산천으로 쭉 기어 이리저리 가니 저 ○○가는데.

이 대목이 실린 음반은 콜롬비아 40219로 B면이다. 이 대목은 자라의 꼬임과 자신의 욕심으로 수궁에 갔던 토끼가 그곳에서 죽을 위기를 극복하고 자라의 등을 타고 육지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육지와 바다의 접경지역에서 그 감회를 읊은 것으로 이 대목은 유장한<진양조>에서 시작하여<중중모리>로 끝맺으면서 죽음에서 벗어난 토끼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앞부분에서는 자신이 살던 육지를 보면서 익숙한 고향의 경치를 여유를 가지고 완상하듯 노래부르며, 이어서 빠른 장단의 중중모리로 불리는 뒷부분에서는 토끼가 자신의 계교와 용기로 수궁에서 빠져나왔음을 상기시키면서 뻐기는 내용이 이어진다. 송만갑의 연출 솜씨가 특히 돋보이며, 원래는 이보다 긴 내용이나, 축약하면서도 그 정황을 제대로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완숙한 경지를 엿볼 수 있다.

<수궁가>에는 바다-육지와 관련된 세 개의 더늠이 있다. 지난 번 김창환의「토막소리」를 분서하면서 소개한 바 있는「고고천변」은 자라가 용왕에게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수궁에서 처음 육지로 왔을 때의 감격을 노래한 것이며, 자라가 토끼를 꼬여 수궁으로 들어갈 때는<심청가>에서 따온 유명한「범피중류」가 불려지고, 마지막으로 자라 등에 탄 토끼가 용궁을 탈출할 때 바로 이 「가자 가자」가 불리는 것이다.

진국명산

(중모리) 진국명산(鎭國名山) 만장봉(萬丈峰)이요. 청천삭출금부용(靑天削出金芙蓉)은 거벽(巨壁) 흘립(屹立)하야 북주(北主)로 삼각(三角)이요, 긔암(奇岩)은 두긔(斗起) 남안(南案) 잠뒤(蠶頭)로다. 좌룡(左龍)은 낙산(駱山), 우호(右虎) 인왕(仁王), 서색(瑞色)은 반공(蟠空) 응상궐(凝象闕)이요, 숙기(淑氣) 종영(種英) 출인걸(出人傑)이라. 미재(美哉)라, 동방(東邦) 산하지고(山河之固)여. 성대태평(聖代太平) 의관문물(衣冠文物) 만만셰지금탕(萬萬歲之金湯)이라. 년풍(年豊)코 국태민안(國泰民安)커날 인유이봉유(麟遊而鳳遊)하고, 면악(緬嶽)등림(登臨) 취포반환(醉飽盤桓)허오면서 감격군은(感激君恩) 허오리라. 남산(南山) 송백(松柏) 울울창창(鬱鬱蒼蒼), 한강유수(漢江流水)는 호호양양(浩浩洋洋). 주상전하(主上殿下)는 차산수류(此山水流)겉이 산붕수갈(山崩水渴)토록 성수무강(聖壽無疆)허사 천천만만세(千千萬萬歲)를 태평(泰平)으로만 누루소서.

우리도 일민이 되어서 갹양가를 부르리라. 부긔공명은 세상사람으게 모두 다 전하고 저물거든 기산대하처(其山大河處)으 명당을 가려서 전후좌우 유정한 친구 벗님 명기 명창 풍류대인 좌우로 늘어서 일모도궁(日暮途窮)토록 떵쿵 풍악치고 남녀 기생들이 늘어앉어「한잔 더 먹소, 덜 먹소」늘어앉아 거드렁거리고 놀아…

이 음반은 콜롬비아(40145A,B면은 앞에서 검토한 십장가의 마지막 부분인 오입장이 대목이다)에서 발행한 것으로 1920년대 후반에 취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송만갑은 특히 진국명산을 박아 놓았는데, 소리마다 약간씩 맛이 다르다.

일축 K172 A면에 실린 단가「진국명산」에서는 앞에 아니리로「송만갑이가 단가합니다」라고 박아 넣은 다음 시작하고 있으며, 소리의 맛도 약간 다르다. 「진국명산」의 내용은 한양 산세의 빼어남과, 나라의 태평을 기구하는 것으로 특히 송만갑과 장판개가 잘 불렀다 한다. 한편 일제 때는 이 노래가 「민족의식과 독립심을 고취」하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하여 부르지 못하게 금지 당한 적도 있다.

사설의 전반적 내용이 경복궁이 있는 한양의 지세를 찬양조로 노래하다가 「주상전하도 만만세」라는 대목에 이르면 잃어버린 왕조에 대한 복벽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고 해석할 만하다. 그래서인지 일제말기에는 총독부에서 이 단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고, 꼭 부르려면 일본말로 번역해서 부르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들의 철저한 검열이 새삼 지독함을 느낀다. 이 검열을 뛰어넘어서 생존하지 못하였던 것이 우리들의 판소리이기도 하다.

단가는 소년·청년·장부·백발기 나름대로의 역할과 할 일을 당당하게 노래하기 때문에 우조로 부른다. 박녹주가 70이 넘어 불렀던 「백발가」가 아직도 새삼스러운데 그 기상, 호령하는 맛이 새롭다. 이「진국명산」을 부르는 송만갑의 서슬도 대단하다. 어찌보면 정말 잃었던 나라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 때문에 이 단가만을 고집스레 그가 선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든 아주 시원한 목이 자랑스러운 단가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송만갑의「토막소리」들을 감상하였다. 송만갑이 부른 것으로 미처 레코드를 입수하지 못한「사랑가」「백구타령」「천자뒤풀이」「농부가」「어사출도가」「토끼화상」「고고천변」등의 소리대목들도 다음 기회에 보완하기로 하며 다음 호에는 이동백의 토막소리를 검토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