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리뷰/ 문학

사회 속의 숨은 자아




김수복 / 단국대 교수

지난 5·6월의 문학 움직임 중에서 관심을 끄는 현상은 개성적인 시집들의 속간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문학과 사회와의 긴밀한 관계 양상을 해석학적인 세계관으로 인간 존재의 대응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시집들이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이들의 작업들을 개괄하면<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홍영철의「너는 왜 열리지 않느냐」, 최승자의「기억 속의 집」, 정인섭의「무진일기」, 기형도의「입 속의 검은 잎」, 이창기의「꿈에도 별은 찬밥처럼」등이다. 이들 중에서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은 그의 짧은 삶의 궤적이 던져준 충격과 함께 폭발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그의 시세계에 대한 진지한 의미 탐색이 거듭 증폭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도 그의 시에 대한 지속적인 탐색이 이루어지리라 기대된다.

기형도에 관한 추억과 그의 시에 관한 내밀한 해석들을 종합해 보면, 그는 비범한 천성을 지닌 시인이며, 그의 시는 김 현의 이해에서 지적된 바대로 그로데스크 리얼릭즘의 부정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김준오가「부조리의 시학」으로 기형도 시의 부정적 현실인식 체계를 이해한 바와도 상관된다.

그리고「시운동」의 추모 특집에서 기형도에 관한 일련의 논의들이 정리, 수록됨으로써 기형도에 관한 시적 위상을 의미화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기형도에 관한 상당한 이해의 글들에서 시사되는 바와 같이, 그의 시는 90년대로 넘어가는 전환적인 국면에서 현실이 담고 있는 추악한 거울 속에 비춰진 인간 존재의 자기 모습을 그대로 표출시키면서 인간에 대한 내성적 화법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부정적 세계관에 비춰진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에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자기 상황에 대한 냉정한 어법이 기형도 시에는 핵심적인 축도로 담겨있다. 이러한 그의 냉정한 어법은 우리의 현실이 더욱 척박해질수록 그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우리의 시적 감성을 식혀가면서 존재의 근원적인 인식을 각성시킬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선도 도시적 황폐한 정황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인간의 묶여진 정신을 껴안고 자유로운 정신으로의 초월적 인식도, 그의 시가 던져놓은 냉정한 어법을 극복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그의 시는 앞으로의 우리 시가 전개될 흐름을 예감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좀 더 깊숙이 그이 어두운 내면적 인식세계를 파고 들어가 보기로 한다.

기형도의 「위험한 가계(家系)·1969」는 그가 유년의 어둠을 성장해 오면서,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자면서, 어머니에게 「아주 큰 꽃을」보여주기 위해,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라는 자아 성숙과정의 내면적 의식을 피력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집안의 가난과, 아버지의 풍병, 그 가난을 묵묵히 안고 있는 어머니, 공장에 다니는 누이 등의 가정적 어둠 속에 있는 어머니, 공장에 다니는 누이 등의 가정적 어둠 속에서「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것을 보며,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우는 유년을 지나오면서, 가족과 그 가족을 에워싸고 있는 가난과,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어둠을 지켜보면서 자아를 각성해 가는 성장의식을 주조로 엮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자아를 지키는 내면적 정신은 점차 현실적 움직임들을 객관화하고 현실의 모습들을 리얼하게 비춰내면서 사회적 의미를 담아내기 시작한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의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시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안개」일부분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 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물 속의 사막」일부분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것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입 속의 검은 잎」일부분

이들 인용 시행은 그의 시들에서 임의로 옮겨본 것에 지나지 않지만,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움직임의 단편적 정황들임은 부인할 수 없다. 위의「안개」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자욱 끼는「샛강」을 배경으로 「두꺼운 종잇장 위에/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일어나는 정황들을 몽타쥬 수법으로 그려가면서 황폐한 삶의 현실적 정황을 담아내고 있다. 그곳은 출근길의 여공들이 깔깔거리며 지나가기도 하고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는 곳-한밤중에 여직공이 겁탈 당하고, 취객이 얼어죽기도 하는-, 공장의 검은 굴뚝들이 일제히 총신(銃身)을 하늘로 향해 젖어 있으며「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는」삶을 살아가는 현실적 공간의식이 객관화된 표현이다. 여기에는 기형도의 내면적 시선의 냉정한 의식이 깔려 있다. 그는「샛강」의 안개 정황을 통해 우리 삶의 현실과 부조리한 정황을 투시하면서도 그 속에 자아의 판단이나 감정을 삽입하지 않는다. 부조리한 세계를 부정적으로 현실화하면서 내면적 정신으로 예리하게 숨겨져 있다. 그의 시속에서 현실을 해석해 내고 현실의 부정적 세계관을 표출하는 내적 자아가 겉으로 노정되지 않고, 문맥의 심층에서 감정을 통제학 세계를 조정하는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숨겨진 자아는 「물 속의 사막」에서 장마비가 내리는 정황 속에서도「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정신적 자아의 태도를 지니면서「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고 인식하는 세계관을 지닌 자아이다.「물 속의 사막」이라는 역설적 제목에서도 합의되어 있듯이 기형도의 숨겨진 자아는 현실의 부조리한 세계를 반어적으로 헤쳐내고, 닫힌 세계에 대한 역설적 관계를 제시하면서 내면적 자아를 견고하게 지키고 있다. 그것은「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는 역설을 통하여 범람하는 부조리한 의식들로부터 자아를 지키고자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의 현실적 초월을 꿈꾸는 숨겨진 자아의 모습은「입 속의 검은 잎」에서도 80년대 초 우리 사회의 닫혀진 삶 속에서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고 폐쇄된 사회 정황 아래서 자아를 지키는 시적 화자의 모습으로 점철되어 나타난다. 그것은「정거장에서의 충고」에서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라고 집과 거리의 현실적 관계로부터 인간 존재의 초월에의 꿈을 지닌 모습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기형도 시를 지탱하는 숨겨진 자아의 의식은, 현실과 인간 존재의 관계망 속에서, 현실의 부조리한 세계를 절제된 정신으로 현실과의 얽혀있는 삶의 진실된 의미를 찾아내는 데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자아의 태도는 그의 유년기의 성장 의식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으며, 그러한 유년기의 의식은 점차 사회적 긴장의식을 수반하면서 인간 존재의 동일성 회복을 위한 태도로 성숙되어 있음이 발견된다. 그것은 그의 시가 사회적 정황을 부조리하게 그려내면서 객관화된 자아를 내적으로 통제하고 조절하는 상상력의 힘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바람이 그치고 찡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시작 메모에서 처절하게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