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리뷰·연극 

연극보다 더 연극적인 어느 망명자의 삶'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이상우·연극평론가, 영남대 교수
 

소설이나 시를 극화한 연극은 많다. 그러나 수필을 극화한 연극은 흔치 않다. 그 흔치 않은 경우에 해당되는 연극이 바로 극단 길라잡이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홍세화 원작/임진택 각색·연출)이다. 그러면 왜 수필은 연극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흔치 않을까. 연극(희곡)의 구조적 기초는 ‘사건 event’에 있다. 다른 말로 ‘허구적인 이야기 구조’가 있어야 성립되는 장르라는 것이다. 이는 소설에서도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시에서도 소설만은 못하지만 나름의 사건이 있다.) 

물론 수필에도 일정한 사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사건의 유무가 아니라 사건의 성질이다. 즉, 연극이나 소설의 사건처럼 수필에는 예술적으로 가공된 이야기(허구)로서의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필은 수필 그 자체로는 감동적이지만 연극이 되기는 어렵다. 

난데 없이 문학개론서와 같은 이야기가 여기서 왜 필요한 것일까.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흔치 않게 수필을 극화한 연극이고, 또 그러한 과정에서 빚어진 몇 가지 특징들을 잘 보여준 연극이라는 점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이 이 연극을 관극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초점이 된다고 생각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동명(同名)의 수필은 몇 해 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어 이 미 많은 독자들에게 열독된 바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의 저자인 프랑스 망명자 홍세화의 삶이 매우 진실되고 극적이기 때문이다.(그의 대단히 뛰어난 문장력도 한몫을 한다.) 비록 수필로 씌어진 것이지만 홍세화의 삶이 연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연극보다 더 연극적인 삶’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대목이 있다. 제 아무리 연극적인 삶을 소유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해도 그것이 곧바로 연극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불가피하게 다소간의 예술적 가공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민은 진실성이 생명인 수필에 극적 흥미를 제고시키기 위해 어떻게 예술적 가공을 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 하는 것은 이 연극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아닐 수 없다. 

연출가 임진택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척 고심했을 것으로 안다. 아니, 어쩌면 예상과는 달리 큰 고민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임진택, 그는 누구인가. 「나는 빠리의…」의 주인공인 홍세화와 서울대 문리대 연극회의 절친한 선후배 사이로서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 그에게 있어 홍세화의 치열한 삶은 이미 그 자체로서 완벽한 연 극이며, 거기에는 더 이상의 어떤 예술적 가공도 필요치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관객에게도 그럴까. 원작 수필을 감동적으로 읽었던 관객조차도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이 이야기에서 잘 짜여진 어떤 연극적 사건을 기대할는지 모른다. 

이 연극은 홍세화가 참석하지 못한 홍세화의 수필집 출판 기념회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거기서부터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재불 망명자 홍세화에 관한 이야기가 회고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강의 극 줄거리는 원작 수필에 들어있는 몇 개의 삽화들로 재구성되어 있다. 문리대 연극회 시절의 학생운동 체험과 프랑스에서의 망명 생활이 두 가지의 큰 줄거리 축이 된다. 

전자에서는 반정부적인 연극 공연을 준비하다가 공연이 취소되던 일, 학생시위 대열에 참가한 일, 지하 민주화운동 조직에 가담한 일 등이 극중 장면들로서 제시된다. 후자에서는 빠리에서 망명자가 되는 과정에서 겪은 좌절, 망명자의 신세로 택시운전사가 되어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장면화된다. 이것들은 대개 원작 수필에서 흥미롭고 주요한 핵심적 삽화들을 가려 뽑아 재구성한 것들인데, 물론 이는 섬세한 예술적 구성력과 감각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한 임진택의 예술적 재능은 여기에서 충분히 발현되었다고 보인다. 사실 뚜렷하게 처음과 중간과 끝의 일관된 이야기 구조를 지니지 못한 수필을 갖고 이 정도의 극적 사건을 구성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이 작품에는 허구적인 극 사건이 대개 갖기 마련인 긴밀한 극적 구성력이 다소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앞서 지적한 대로 이 연극이 예술적 가공의 노력보다 주인공의 삶 자체가 갖는 진실성의 부각에 더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 연극은 드라마적 짜임새에 의한 밀도 높은 재미는 다소 미흡한 감이 있긴 해도 삶의 진실성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감동의 맛이 있 다. 연극 공연 도중에 간간히 스며있는 민족극 특유의 건강한 재치와 활력이 극에 활기를 주기도 한다. 

또 이 연극에서는 주인공 홍세화와 그 부인 역에 전업 배우가 아닌 이현우, 이화원 교수를 기용하여 참신함과 더불어 극적 진실감도 배가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특히 오랜 아마추어 배우 경력을 지닌 이현우의 연기는 빠리의 번민하는 지식인 망명자 역을 무리없이 잘 소화하고 있다. 고동업을 비롯한 다른 전업 배우들은 일인다역의 활기찬 역할 변신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목(임진택) 역을 맡은 배우는 시대의 우울함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보다 희극적인 연기를 보여주면 좋을 것 같다. 

끝으로 이 극의 중요한 대도구인 택시를 비롯하여 실내 장식용 소도구들이 그다지 정교하게 만들어지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기왕이면 좀더 정성을 들여 예쁘게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은 일 같지만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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