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연극

눈물을 요구하는 ‘상혼’마저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야 

이상우·연극평론가, 영남대 교수 

우울하고 험한 겨울이었다.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풍문들만 들려온 시린 계절이었다. 

그런 겨울이 가고, 자연은 우리에게 이제 봄이 왔다고 푸른 싹을 틔우며 외치고 있다. 그러나 봄은 아직 실감으로 오지 않았다.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춥고 우울하다. 

이 우울함의 정체가 ‘IMF 체제’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더 이상 지쳤다 할 만큼 우리는 시대의 우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대구에서 봄을 맞으며 서울에서 찾아온 몇 편의 연극을 지켜보았다. 최근 3월에 두 편의 연극, 「불효자는 웁니다」와 「지상에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를 관극했다. 이 연극들을 보면서 필자가 느낀 것은 IMF 체제 이후 달라진 최근 연극 현상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불효자는 웁니다」는 ‘신파 가요극’을 표방한 연극이며, 「지상에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는 ‘살롱 뮤지컬’을 표방한 연극이다. 언뜻 보면, 장르 면에서 큰 차이가 나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불효자는…」의 경우는 1910년대 이 땅에 유입되어 1930년대 찬란히 꽃 피우다가 1950년대 이후 절멸된 한국 재래의 대중극 양식(처음에는 외래 양식이었지만 수십 년 동안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겪어온 연극 양식)이지만, 「지상에서…」의 경우는 서구로부터 이식된 서양식 뮤지컬 연극 양식으로서 아직 토착화의 도정에 있는 연극 양식이라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물론 지금처럼 ‘세계적 보편성’이 철저하게 전지구적으로 관철되는 시대에 있어서 어차피 전통 양식이 아닐 바에야 ‘재래 양식’이냐, ‘이식 양식’이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면도 있다. ‘신파 가요극’이든 ‘살롱 뮤지컬’이든 간에 중요한 문제는 이들의 양식적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연극들이 갖고 있는 연극 속성상의 공통점일 것이다. 그 첫번째 공통점은 이 연극들이 ‘음악극’의 형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다음은, 다분히 첫번째와 관련이 있기도 한데, 이 연극들이 진지한 연극이 아니며 연극의 ‘오락성entertainment’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연극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이 연극들이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있겠지만 그 본질적 속성은 ‘즐기는’ 연극을 추구하는 데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필자는 철저하게 오락성의 추구에 복무하는 연극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할 의도가 없다. 아니, 지금처럼 우울하고 참담한 시대에 사람들의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 줄 수 있는 ‘위안으로서의 연극’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작용, 이를테면 ‘감정의 통풍작용’도 필요하리라고 본다. 

실제로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지나간 연극 양식인 신파극과 악극(樂劇)이 판을 치는 것은 단순한 복고 취향만은 아닐 터이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산업화시대의 주역이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모두 거품처럼 가라앉고 말아 이제 고개 숙인 남자가 되어버린 50대 이후 장년층(명예퇴직, 정리해고의 실질적인 피해층)인 그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현실 도피처로서의 오락을 제공해 주기 위해 고안된 연극이 그들에게 과거의 향수처럼 스며있는 신파극, 악극이 아니겠는가. 신파극, 악극의 찬란한 부활은 IMF 체제라는 무섭고 가슴 서늘한 현실로부터 일탈하고픈 도피의 욕구와 무관하지 않다(물론 IMF 이전부터 신파극, 악극 붐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이로 인한 명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있어온 현실이다). IMF가 부과하고 있는 전국민적인 공포심과 협심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같은 시대의 우울에 상응하여 그만큼 이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도 확산될 것이고, 이러한 욕망은 또한 신파극, 악극, 살롱 뮤지컬들이 흥행하기에 썩 좋은 토양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부쩍 신파극, 악극 등이 성행하는 것, 그리고 많은 연극 공연들이 IMF 한파의 압박 속에 스스로 자진철거를 진행중임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연극의 행진은 지속되고 있다는 것 등은 이같은 사실을 반증하는 사례가 되는 것이다. 

「불효자는…」, 「지상에서…」 등을 보면서, 이 우울한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연극에서 요구하는 것이란 현실을 잊고 실컷 환각 속으로 몰입할 수 있게끔 해주는 어떤 강렬한 감정과 감상, 즉 ‘격정(激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격정에 몰입되는 순간 사람들은 무서운 현실을 괄호 속에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불효자는…」는 물론이려니와 최근 공연된 악극 「눈물젖은 두만강」 또한 그같은 격정의 연극에 속한다. 그리고 ‘토종 창작극’임을 표방하며 공연 예정에 들어가 있는 「눈물의 여왕」도 풍문을 듣건대 같은 계열의 연극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러한 작품들이 하나같이 민영 방송국이나 대기업 영상사업단 등에서 기획한 연극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격정’에 혼을 빼놓고 환각의 세계에 몰입한다는 것은 결국 또 하나의 거대한 혼, 즉 ‘상혼(商魂)’에 사람들의 순진한 영혼이 먹혀들게 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다. 

「불효자는…」은 전형적인 신파 줄거리에 의존한 작품이다. 가난한 시골 청년(진호, 이덕화 역)이 서울의 일류대학에 진학하여 부잣집의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집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되어 고향에 남긴 옛애인(옥자)을 배신하고 이로 인해 어머니(나문희 역)에게 씻지 못할 불효를 저지르게 된다는 이야기가 이 연극의 극 줄거리이다. 출세/사랑, 욕망/정의, 위선/효 사이의 갈등과 쟁투가 격하게 일렁거리다가 결국 바다와 같이 넓은 어머니의 사랑과 용서로써 눈물어린 화해의 결말로 극은 끝을 맺는다. 

우선 이처럼 ‘잘 짜여진’ 극의 논리세계에 빠져들면 어느 정도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고 작정했던 사람도 저도 모르게 이윽고 감상에 젖게 되고 만다. 그 뿐인가, 가슴을 후벼파고 감정을 콕 찌르듯 누선(淚腺)을 자극하는 대사의 무차별 공세를 받다 보면 저도 모르게 이성의 혼을 잃고 격정에 빠져들게 된다. 사실 많은 관객들은 신파극이 그렇고 그런 체루극(涕淚劇)이라는 걸 뻔히 알고도 거기에 모른 척 속아주는 것이다. 아까 상혼에 순진한 혼을 잃는다고 했는데, 사실 사람들은 이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돈 내고 혼이 빠지는 경험을 하기 위해 신파극, 악극을 보러 가는 것이다. 

「지상에서…」(오은희 작/배해일 연출/최종혁 작곡)는 어떠한가. 소극장 규모에 맞는 친숙하고 작은 뮤지컬을 지향하는 ‘살롱 뮤지컬’ 연극인 이 작품은 한 마디로 순정 만화의 이야기 같은 극 줄거리를 갖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오랫동안 관계가 틀어진 두 모녀는 시한부 삶을 사는 순수한 청년의 개입과 그의 죽음을 계기로 마침내 서로 화해하게 된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일에 바쁜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는 쓸쓸하게 돌아가셨고, 이로 인해 딸(최정원 역)은 어머니를 혐오하고, 어머니(우상민 역)는 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시한부 생을 사는 청년(서영주 역)을 간호하는 호스피스 역할을 떠맡는다. 어머니의 청에 못이겨 딸은 청년이 그리워하는 옛 친구의 역할을 대신하다가 그를 사랑하게 되고 어머니를 용서하게 된다. 그러나 그 청년은 모녀를 화해시키고 해변에 휠체어만 남기고 바다로 사라져 버린다.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의 전형적인 극 줄거리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관객의 심금을 울릴 만한 감상성을 지닌 연극, 그런 의미에서 순정 만화적인 극 줄거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뮤지컬의 명콤비인 오은희, 배해일의 작품치고는 좀 격이 떨어지는 작품인데, 신파극, 악극 못지 않게 눈물과 감상을 자극하는 연극이라는 점에서 「불효자는…」와 맥이 통한다. 물론 그 맥은 ‘격정의 연극’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시대의 우울함 속에 ‘격정의 연극’은 눈물과 감상을 요구하면서 우리에게 현실을 잊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성’이 아닐까. 

IMF 체제 이후에 다가올 장벽 없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대비해 이제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문화적 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일 것이다. 체루극과 순정 만화극에 마냥 눈물을 뿌리고 있을 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의 시간은 많지 않다. 세계적 연극과 경쟁해서 버틸 수 있는 예술적 경쟁력, 문화적 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을 모색하는데 우리 연극계가 보다 힘써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상혼’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상혼’마저도 연극적 경쟁력을 높이는 데 슬기롭게 이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4월호 목차

 

지난호보기   

98년3월  
98년1월   
97년12월   
97년11월   
97년10월   
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