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음악

더불어 사는 마음의 자세만이 감동을 낳는다
- 테너 김영환독창회, 제14회 진주시립교향악단 정기연주회 -


홍승찬 음악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언제부턴가 연주회장을 찾으면 다른 그 무엇보다 연주자의 자세와 태도에 주의를 집중하곤 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무대에 나서는 교향악단에 주목하게 되고 다른 연주자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억제할 줄 아는 연주자에게 믿음이 가게 된다. 그리고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실력이고 가진 자의 여유에 다름 아닐 것이다.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어려운 때이다. 이런 때일수록 서로를 헤아리고 서로에게 베푸는 넉넉한 마음이 절실하지만 사정은 전혀 그렇지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세상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을 때 그 답답함을 대신 풀어나가는 것이 예술의 역할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예술가들이 나서서 넉넉한 모습을 보여야 할 때이다.

6월 30일 저녁, 예술의 전당에서는 테너 김영환의 독창회가 있었고, 7월 11일에는 멀리 진주의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진주시립교향악단의 제14회 정기연주회가 마련되었다. 얼핏 두 연주회는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싶지만 앞서 말했던 바로 그 연주자의 자세라는 면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테너 김영환 독창회

먼저 있었던 테너 김영환의 독창회는 어느모로 보나 최고의 명성에 걸맞는 것이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많은 청중들이 연주회장을 찾았고 노래마다 환호와 갈채가 끊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뛰어난 가창력, 수려한 외모에다 유연한 연기력까지 갖추고 있어 이미 최고의 스타로 자리잡은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도 싶었다. 국내 정상의 코리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독창회 반주를 맡은 것만으로도 그의 성과를 가늠하기에 충분했고 이날 연주 또한 세계적인 대가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나폴리 민요들과 이탈리아 오페라 아리아들로 꾸며진 이날 순서에서 그는 본고장 가수들보다 더 감칠맛 나는 노래를 들려주었고 발성에서 몸짓과 표정에 이르기까지 어느하나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기량을 선보였다.

문제는 오케스트라였다. 첫곡에서부터 마치 독창자와 경쟁이라도 하듯 큰소리를 내는 바람에 무대에 선 가수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고야 말았다. 연주자는 오케스트라에 자신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무리를 해야 했고 그 때문에 지친 목소리를 감쪽같이 감추지는 못했다. 먼저 국내 최고라는 코리언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반주라면 어느 오케스트라보다 뛰어나다는 자부심을 가질만큼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쌓았을 터인데 왜 이러는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오케스트라가 지휘봉 끝에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지휘자에게 더 큰 책임이 있지 않은가도 싶다. 전체적인 음량도 음량이지만 경우에 따라 소리를 죽였다가는 살리고, 내밀었다가는 뒤로 당기는 식의 유연하고 민첩한 움직임이 아쉬웠다. 지휘자 김덕기 또한 여느 무대보다 이런 종류의 무대에서 더 큰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역시 태도와 자세의 문제라는 것이다. 능력이 미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배려하고 헤아리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혹시 함께 만든다는 생각보다는 남의 잔치에 들러리 선다는 생각이 앞서지는 않았나 묻고 싶다. 물론 코리언 심포니가 창단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은 우리 음악계의 동향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전과는 달리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최고의 민간 오케스트라’, ‘진정한 직업 오케스트라’라는 업적과 명성까지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코리언 심포니의 굳건한 존립과 무궁한 발전을 누구보다 염원하는 입장이기에 혹시나 하는 작은 의구심조차도 쉽게 잠재울 수가 없는 모양이다.

제14회 진주시향 정기연주회

진주시향의 정기연주회는 기대와는 달리 앞서 언급한 김영환 독창회와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말이 시립교향악단이지 교통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연습비가 전부인 이 악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현직 음악교사이거나 주부, 혹은 다른 생계 수단을 가지고 있어 사실상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나 다름이 없었다. 사정이 이렇고 보니 의욕은 있으되 함께 모여 연습할 시간이 많지 않고 그나마도 직장이 끝난 저녁 시간이라야 가능한 실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오케스트라가 청중들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음악과 음악가, 그리고 청중들을 대하는 진지하고 넉넉한 태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남아 리허설부터 보게 되었다. 연주회 순서는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과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오케스트라를 위한 심포니아 콘체르탄테 Eb장조,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으로 꾸며졌다. 워낙 주어진 연습시간이 많지 않은 데다가 자치단체 선거를 치르느라 오래도록 공백기간을 가진 탓인지 소리는 채 정돈되어 있지 않았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태세였다. 그러나 리허설이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아 사정은 달라졌다. 시간이 지나고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놀라운 속도로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진짜 놀라운 일은 실제 연주회에서 벌어졌다. 연주회가 시작되자 리허설과는 전혀 다른 음악이 들려왔고 그것은 이 악단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여건을 감안한다면 쉽게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성과였다. 그 열악한 조건에서 베토벤의 「전원」을 별 무리없이 소화해 낸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날의 진정한 감동은 모차르트의 심포니아 콘체르탄테에서 찾을 수 있었다.

리허설 때만 해도 협연자들의 소리, 특히 중음의 비올라 소리를 가리워버렸던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어느새 부드럽게 속삭이고 있었고 그 틈에 협연자들은 그들의 기량과 호흡을 마음껏 뽐낼 수가 있었다. 협연자로 나선 바이올리니스트 피호영과 비올리스트 강창우는 이미 각자의 분야에서 국내 정상을 달리고 있는 연주자들이었지만 시종 겸손하면서도 진지한 태도로 최고의 화음을 선사했고 지휘자 이철구는 그런 협연자들이 최대한 돋보일 수 있도록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날 청중들이 평소 쉽게 들을 수 없었던 비올라 소리의 매력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말고 또 한사람의 공헌이 크게 작용했다. 바이올리니스트 피호영은 상대적으로 음역이 낮고 음색이 화려하지 않은 비올라와의 균형과 호흡을 위해 스스로의 소리를 줄이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가장 이상적인 어울림을 만들어냈고 원래 작곡가가 의도했던 대로 비올라가 특별히 주목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이렇게 서로를 헤아리고 배려하는 가운데 따뜻하고 흐뭇한 연주회의 분위기는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어 갔고 코끝을 스치는 찡한 느낌이 진한 감동으로 남아 오래도록 마음속 언저리를 맴돌았다.

테너 김영환의 독창회와 진주시립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 이 두 연주회는 이만큼이나 달랐다. 그리고 그 엄청난 차이는 흔히들 따지려고 드는 서울과 지방의 차이, 일류와 이류의 차이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공연에 임하는 연주자들의 태도와 자세의 차이일 뿐이었지만 그 작은 차이가 빚어낸 결과는 기적과도 같은 감동으로 남았다. 다시 한 번 더불어 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소리높여 예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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