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영화

저예산으로도 좋은 영화가 가능한 제작환경을 기대하며


하재봉 작가, 영화평론가

영화는 다른 예술장르와는 달리 거대 자본이 필요하다. 산업화, 대중화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뮤지컬이나 연극 같은 순수예술 장르도 많은 예산이 필요하지만, 영화처럼 구조적으로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하는 장르는 없다. 영화는 예술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산업이다. 그러나 이제 영화투자는 좀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난 몇년 동안 영상산업에 진출한 대기업들이, 케이블 TV나 비디오 시장 등을 겨냥하며 경쟁사보다 빨리 물량을 확보하려는 조바심에서 수입가를 부풀려 놓거나, 무분별하게 한국 영화 제작에 참여하면서 시장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현실은 냉엄하게 재검토되어야 한다.

우리 영화의 제작비는 해마다 상승하고 있으며, ’97년 제작된 59편의 우리 영화 평균 제작비는 13억 여원에 달한다. 이것은 전년도에 비해서 20% 인상된 액수이다. 서울 개봉관객 10만명을 돌파한 영화가 14편에 이르렀다는 것은, 우리 영화가 이제 상업적 응전력을 갖추었다는 하나의 반증이다. 그러나 영화적 완성도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던 「초록물고기」가 17만명을 동원했지만 5억원의 손실을 본 것으로 최종 집계되었고 20여만명을 동원한 「깡패수업」이 겨우 손익분기점을 맞추었다는 사실은 우리 영화의 제작구조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제작된 영화 중에서 가장 제작비가 많이 투입된 영화는 「용병이반」과 「비트」, 「깡패수업」이다. 이 영화들은 모두 20억원 안팎의 제작비가 투입되었다. 그러나 「비트」가 42만명을 동원함으로써 7억원의 흑자를 내었을 뿐, 「깡패수업」은 겨우 투자액을 회수하는 선에 그쳤고, 「용병이반」은 관객 1만명을 기록하는 참담한 실패로 14억원의 적자를 보았다. 「용병이반」과 「깡패수업」의 제작비가 늘어난 것은 각각 러시아와 일본에서 해외 올로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 영화가 한국 시장 이외의 판로를 충분히 열어놓지 않은 상황에서 20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할 만한 시장인가 하는 것은 과학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물론 거대 제작비를 투입해서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와 맞설 수 있는 좋은 영화를 생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헐리우드의 평균제작비가 5천만달러(약 600억원)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영화 최대투자액인 20억원은 헐리우드 평균제작비의 1/30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물량공세로는 헐리우드 영화와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영화의 생존전략은 어떻게 짜야 할 것인가.

우선 대내적으로 관객의 가상평균치를 산정한 뒤에, 그에 알맞는 투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 다음 해외진출을 위한 다각적인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출구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저예산 영화의 가능성이다. 영화예술이 꼭, 거대 제작비를 투입해야만 상업적 흥행을 보장하고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는 「풀몬티」처럼 스타배우 하나 없이 저예산으로 제작되어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를 꺾은 수많은 예를 알고 있다.

우리가 저예산 영화의 가능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져서 상업적 위험부담을 적게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거대 제작비의 영화에 비해서 위험도가 적은 만큼 다양한 실험적 모색이 가능하며 그런 움직임들이 한국 영화의 대안적 출구를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전망 때문이다.

저예산 영화의 현황

저예산 영화의 제작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점에서 중요하냐하면, 한국 영화의 평균 제작비를 생각하면 개봉관 관객이 30만명은 들어야 적자를 면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그 마의 벽을 통과하는 우리 영화는 일년에 한 두 편에 불과하다. 비디오 판권은 5억원이 상한선인데, 그것을 미리 계산에 넣는다고 해도 20만명은 넘어야 한다. 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제작비를 줄여야 하는데, 스타 배우들 두 세 명의 몸값만 해도 3억원을 넘어간다. 그러나 관객들은 스타를 선호한다. 스타 배우가 나오지 않으면 흥행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져 가는 것이다. 따라서 제작자들은 조금 돈을 더 들이더라도 스타를 모셔오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출연료가 총 제작비의 1/3을 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는, 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대중성, 상업성을 띌 수밖에 없다. 가장 관객들이 많이 드는 안전한 장르, 로맨틱 코미디가 쉴새없이 반복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결혼이야기」의 대성공 이후 「미스터 맘마」, 「닥터 봉」을 거쳐 최근의 「고스트 맘마」, 「미스터 콘돔」, 「패자부활전」, 「찜」에 이르기까지, 로맨틱 코미디는 한국 상업영화의 간판처럼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어서는 우리 영화가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 적은 제작비를 들여서, 조금 적은 관객이 보더라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제작방법이 도입되어야 한다. 적은 관객을 겨냥하고 만든다면 특정한 실험도 가능하고, 새로운 장르의 도전도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한국 영화의 출구가 있다. 따라서 저예산 독립영화가 중요한 것이다.

’97년에 제작된 59편의 영화 중에서, 10억원 미만의 제작비로 만든 영화는 「바리케이드」, 「산부인과」 등 모두 12편에 불과하다. 임순례 감독의 「세 친구」, 김응수 감독의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불법체류자의 삶을 그린 윤인호 감독의 「바리케이드」 등이 그것이다. 모두 5억원 이내의 제작비로 만들어졌지만, 소재나 주제 면에서 기존의 충무로 영화들이 도전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국내에서 저예산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몇 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우선 90년대 초반부터 영화생산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독립영화의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을 들 수 있다.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6개에 불과하던 대학의 영화관련학과(연극영화과, 방송연예과)는 98년 22개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양산된 영상인력은 영화제작 현장에 충족될 수 없는 데다가, 기존의 충무로 제작관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영화적 세계를 창조하려는 젊은 열정이 맞물리면서 독립영화 제작운동을 활성화시켰다. 각종 단편영화제에 출품되는 제작편수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것과 독립영화 집단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반증이다.

또 기존 체제 내에서는, 90년대 초반부터 박철수 필름에서 제작된 영화들의 일정한 예술적 성공이 저예산 영화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301·302」나 「학생부군신위」 등의 영화가 국내 흥행에서는 실패했지만 해외영화제 등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고 또 완성도를 인정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악어」,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처럼 독립영화로 출발한 저예산 장편영화가 만들어져 극장 개봉이 되었고, 영상산업에 진출한 대기업들이 전략적 차원에서 지원한 「세친구」, 「바리케이드」, 「억수탕」 등의 저예산 영화가 개봉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제작된 저예산 영화가 대부분 흥행에 실패하자, 제작자들과 극장주들은 역시 스타 배우가 출연하고 거대 자본을 투입한 영화가 그래도 흥행의 안전성을 보장한다고 믿게 되었다. 영화예술의 다양한 표현방법을 찾을 수 있는 저예산 영화는 숨통이 막히게 될 위협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여고괴담의 성공

영화 시장 최대 성수기 중의 하나인 여름방학을 맞아 격렬하게 벌어진 영화전쟁 속에서 「여고괴담」의 성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여름마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대리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리 영화시장에서, 의외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여고괴담」은, 지난 5월 30일 개봉해서 이미 두 달을 넘기며 상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 관객 60만 전국관객 200만을 돌파하고 있다.

「여고괴담」의 놀라운 흥행 성공은, 한국 공포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충실하게 이행하면서도 그것이 현대적 감성과 맞닿아 있게 그리고 있다는 점과, 우리 학교교육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귀신이라는 소재에 접목시켜 발언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특히 학생층 관객의 폭발적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은, 우리 학교교육이 아직도 영화 속에서 보여진 것처럼 획일적 입시 위주의 교육 속에서 인간성 상실의 구태를 못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단편영화 「과대망상」으로 클레르몽-페랑 등 주요 국제단편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던 박기형 감독의 짜임새 있는 연출과 영화 속의 촬영 공간으로 선택된 낡은 학교의 긴 복도 등이 갖는 절묘한 효과, 그리고 신인들인 최세연, 박진희, 윤지혜 등의 실감있는 연기도 흥행전선에 한몫을 했다.

그러나 영화 외적인 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고괴담」이 저예산 영화 최초의 승리라는 것이다. 일반 제작비의 반도 안되는 6억 5천만원의 순제작비로 「여고괴담」이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스타 배우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석규, 박중훈 등 충무로 흥행의 보증수표로 통하는 스타 배우들의 영화도 중요하지만, 기획이 적절하고 연출이 짜임새 있으면 스타없이도 얼마든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며 흥행에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여고괴담」은 보여 주고 있다.

「여고괴담」의 흥행 성공을 통해 저예산으로도 다양한 시각을 담아낸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제작환경이 조성되기를 기대한다.

목록으로

지난호보기

98년7월
98년6월
98년5월
98년4월
98년3월
98년1월
97년12월
97년11월
97년10월 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