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출판

전략적인 기획출판만이 불황의 고비 넘어 생존하는 길


한강희 문학평론가, 중앙M&B 출판대학팀

사회 모든 부문이 그렇겠지만 출판계도 IMF 한파에서 조금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사상 유례없는 출판불황의 깊은 터널이 당분간 악화상태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98년 상반기 납본 출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출판물 통계는 이를 잘 증명해 준다. 98년 상반기 출판물은 발행 종수는 늘었으나 발행 권수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경기가 위축되면서 출판사들이 치열한 생존의 자구책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으며, 한편으로 비현실적인 초판 발행부수 늘리기라는 거품을 거둬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종수가 늘었다는 점은 다행스런 일이나 부수가 격감했다는 사실은 출판업계의 어려움이 가중되리라는 전망에 다름아니다.

상반기에 출판된 도서는 1만6천1백73종 9천7백58만4천3백22권이 발행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종류는 11.7% 증가된 것이며, 권수는 14.7%가 감소한 것이다. 반짝출판, 베스트셀러 양산의 구도에서 특히 총류, 철학, 예술, 기술과학 등 모든 학문의 인프라가 되는 기초분야 서적이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불황의 늪에서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출판의 구조조정이 바람직한 방향을 찾아 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 점은 경기가 호황국면으로 회복된다 하더라도 출판의 본질 및 원칙을 살린다는 입장에서 고수해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발행 부수는 모든 분야에서 감소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타격을 받고 있는 분야는 아동물, 학습지, 예술, 철학, 어학 등의 서적이었다. 이는 교육정책의 혼선, 소비생활 중 문화비용의 절감에서 비롯된 결과라 보여진다.

불황의 골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정부나 민간 등 외부 지원 확대, 출판사 자체의 구조 개선 및 치밀한 출판 전략(기획 출판) 수립, 그리고 독서인구 저변 확대 등을 통한 출판문화 진작 등으로 가닥 잡아볼 수 있다.

정부, 기업, 출판사의 긍정적인 조짐들

최근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정부/기업/출판사 상호간에 이러한 노력들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조짐들이 보이고 있다. 우선 지난 3월 정부가 양서출판을 지원하기 위해 지원 정책을 마련한 이후 그 구체안으로 3백억원에 대한 지원 대상 출판사 1백11개사가 7월초 선정됐다. 국민은행이 대출을 맡아 각 사별로 10억원의 한도내에서 16% 수준의 금리를 적용한다. 선정된 출판사의 범위도 문학과지성사, 홍익출판사 등 단행본 출판사 뿐만 아니라 디딤돌 등 학습 참고서 출판사, 비교적 연구소 성격이 짙은 환경인권연구회, 평화문제연구소 등 비단행본 출판사를 포함시키는 등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다.

민간부문에서 이 분야에 꾸준히 관심을 보이고 있는 곳은 대산문화재단. 이미 한차례 양서 지원을 한 바 있는 대산문화재단은 2차 지원대상으로 72개 출판사, 78종의 신청대상서 중 문학 1종, 인문 1종, 사회과학 2종 등 4종을 선정해 각각 5백만원씩을 지원한다. 전문적인 학술도서가 아닌 일반독자에게 읽힐 수 있는 수준있는 교양서에 초점을 맞춰 12월까지 매월 진행된다고 한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하듯이 모든 문화지식산업의 인프라인 출판산업도 호황국면에 있을 때 재정확충, 양서발간, 기초분야 지원을 단속적으로 해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하지만 어려울 때이니 만큼 민간은 물론 정부, 학계 등 유관단체에서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두번째는 출판사의 구조개선과 기획/전략출판의 문제. 출판은 지식정보산업의 첨병으로 기획력과 정보력이 생명이다. 정보력은 인터넷이라는 ‘공통공유의 바다’를 통해 수시로 얻을 수 있지만 기획력은 단시일에 쉽게 얻을 수 없다. 기획력은 특정 공간, 특정 시간이 갖는 패러다임을 정확히 읽고 발빠르게 포착할 수 있는 편집자의 잠재력이기 때문이다. 좋은 원고를 수집하고, 번역하고, 만드는 업무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출판 풍토에서는 기존의 제도와 틀을 과감히 벗어내는 것이 급선무라 할 수 있다.

김영사에서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번역가에게 원고료 외에 2~3%의 인세를 지급하려는 계획이 발빠른 기획의 좋은 사례가 될 것 같다. 김영사는 양질의 번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출판사 의뢰작의 경우 2%의 인세를, 기획에서 번역까지 패키지화 한 경우는 3%의 인세를 인센티브로 지급한다고 한다. 외국의 메이저급 출판사에서는 이미 시행하고 있으나 국내 출판사에서 공식화하기는 김영사가 처음이다. 번역의 양에 의해 생계를 꾸려가는 척박한 번역 풍토에서 번역 작가의 수입을 보장해 주고 수준 높은 번역물을 독자 대중에게 접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번역문화를 한단계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된다.

제작쪽에서도 입장은 마찬가지다. 비교적 컨셉이 분명하고 타깃도 제한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지난해 같은 시기에 비해 꼭 내야할 책만 겨우 출간되고 있는 정도다. 출판사들은 제작환경이 위축된 상황에서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출판 시장 자체가 부도국면으로 치달을 우려가 높다는 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출판사들은 실직자를 위한 가이드물, 정보관련서, 복고조의 문예물이 손익분기점을 통과할 만한, 다시 말해 기본 부수는 팔릴 상품이라 예측한 듯하다. 최근 출간된 이들 도서의 경향을 살펴보자.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는 도서들

실직관련 도서는 IMF 초기보다는 구조조정, 대량해고 등 현실적인 문제를 구체적 사례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공장이여 잘 있거라』(황금가지)는 1986~1987년 대량해고를 감행한 미국 지앰 산하 뉴저지주 린든 공장 노동자를 해고된 자와 해고되지 않은 자의 삶을 시간적인 추이로 지켜보고 있다. 독자들에게 훌륭한 반면교사가 될 것이란 게 편집자의 고백이다. 『당신은 나의 작은 영웅입니다』(명진출판)는 어렵고 힘든 시대일수록 꼭 필요한 지침을 실제 실직자들의 창업사례 등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말 뿐이었던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금언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IMF 충격, 그 이후』(삼성경제연구소)는 구제금융 한파 이후 사고 - 생활방식, 소비와 마케팅, 문화의식 등 우리들의 삶의 패턴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조목조목 짚고 있다. 이 외에도 구본형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 한스 피터의 『세계화의 덫』이 있다. 한편 정보관련서는 인터넷 웹진 등 구체적인 매뉴얼을 운용하는 방법에 무게중심을 둔 서적들이 거의 예외없이 모든 출판사에서 봇물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다.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듯 모든 책들이 구제금융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실사구시적인 내용과 접근법에 의해 출간되고 있다. 그런데 문예물의 경우는 꼭 그렇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직간접적으로 위축된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나 오히려 본격성이 짙은 중견작가의 작품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있다. 문예물의 경우는 김주영의 『홍어』,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 김진명의 『하늘이여, 땅이여』, 김원일의 『사랑아 길을 묻는다』, 양귀자의 『모순』, 김완식의 『일본열도』, 이윤기의 『뿌리와 날개』 등을 꼽을 수 있다. 출판물의 속성상 인문교양물은 ‘좋은 책’이라면 스테디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신영복의 『더불어 숲』, 김정환의 『상상하는 한국사』, 심지연의 『산정에 배를 메고』, 박석무의 『나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등이 랭크돼 있다. 최근 유행이 되다시피 한 저자의 지명도, 반짝스타의 유명세만을 업은 한탕주의 기획풍토는 출판의 생존을 위해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전략적인 기획출판만이 불황의 고비를 넘어 출판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다.

서울대 출판부가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면서 기존의 전문서적 출판이라는 대학출판부의 매너리즘을 벗고 특정 분야 전공자를 필자로 섭외하면서도 쉽고 간결한 문체로 대중에 접근하고, 비주얼한 편집 체제, 불필요한 각주의 과감한 생략, 각 분야마다 연구사 참고문헌 찾아보기 등을 실어 연구자나 일반 독자 대중이 공유하는 고급 교양서를 목표로 기획의 폭을 넓힌 것도 마케팅 개념을 도입한 전략출판의 전범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새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례적으로 교육부장관이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관하는 출판경영자 세미나에서 출판관련 기조특강을 하고, 저작권관련 세미나가 진행되는 등 캠페인성 홍보와 이벤트도 활성화되고 있다.

한편 출판관련 각종 단체에서 우량도서를 선정해 독서인구를 유입, 출판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점도 고무적인 일이다. 주로 독서층이 넓은 여름 시장과 어린이/청소년층을 겨냥해 선정하고 있다. 피서지에서 읽을 만한 추천도서, 여행/레저 가이드북, 납량/추리물 등은 일간지 출판면 특집으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출판을 살리는 길은 위의 몇가지 사항을 해결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정부의 지원이나 출판사 내부의 전략과 각성도 중요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사는 일이다. 책을 사서 읽어야 책이 팔리고, 책이 팔려야 출판사에서 책을 낼 수가 있다. 도매상들의 연쇄부도를 막아, 출판사의 한탕주의식 악덕제작 풍토를 막고 위축된 출판문화를 일신시키기 위해선 책을 사서 읽어야 한다. 당장 읽지 않더라도 우선 사고 보자. 지금 책을 사는 일은 우울하고 황량한 시절, 갑자기 닥치게 될 마음의 부도를 막는 일과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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