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수집가를 찾아서 - 부채수집가 임동권선생


만인에게 고루 평등한 미덕
- 더위가 낳은 문화, 부채 -


사진. 글 신영란 르포라이터

부채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요즘 TV에서 사극으로 방영되고 있는 ‘대왕의 길’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정적들의 끈질긴 모함으로 부왕인 영조의 미움을 사 뒤주에 갇혀 죽기 직전인 사도세자가 궁궐 후원 풀밭에 누워 있다.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그 참담한 처지를 위로해주는 이라고는 오로지 그가 사랑하는 혜경궁 홍씨뿐이다.

때는 한여름. 붉은 한지에 비단천으로 장식한 일선을 받쳐든 시종들을 물리친 채 혜경궁 홍씨는 세자에게 손수 부채질을 해주고 있다. 살아갈 희망도, 용기도 다 잃어버린 듯이 무기력해진 남편을 위해 말없이 부채질을 해주는 그녀의 애잔한 몸짓.

이때의 부채질이 어찌 다만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것 뿐이었겠는가. 거기에는 슬픈 운명을 타고난 한 남자를 향한 어쩔 수 없는 연민과 사랑, 안타까움 등이 절절이 배어 있을 것이고, 아무쪼록 그를 비극의 수렁에서 건져 내고픈 지극한 희망 또한 담겨 있을 터이다.

이처럼 부채는 그 용도와 정황에 따라 의미를 달리하는 정서적 특성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통한 민속학자이자 부채수집가인 임동권(중앙대 명예교수) 선생은 부채의 대표적인 특성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요, 둘째는 ‘옹면’이라 하여 얼굴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가령 「춘향전」에서 암행어사 이몽룡이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며 속을 떠보는 대목에서도 자기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부채로 가린다. 셋째는 부채가 지휘봉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인데, 판소리 공연에서 습선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음의 고저와 장단을 맞추는 모습으로 예를 들 수 있다. 넷째는 무용이나 오페라 공연에서 종종 빼놓을 수 없는 소도구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고전무용 같은 경우에는 부채춤이라는 장르가 따로 있기도 하거니와 오페라 「나비부인」이나 세익스피어의 희곡에서도 부채는 아주 중요한 소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그외 부채는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는 용도로도 크게 소용되고 있으며, 특히 지체 높은 양반들이나 왕가의 행차에는 ‘일선’이라 하는 큰 부채가 차일 역할을 하였다. 단선이나 습선처럼 일반에 널리 쓰여지지 않았던 일선은 오늘날에 와서 거의 멸절되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임동권 선생은 그것을 딱 두 번 구경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안동 하회마을에서였는데 조선조때 영의정을 지냈다는 가문에 겨우 부채살만 남다시피한 일선이 보존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또 한 번은 4년 전 태국을 방문했을 때 그곳 왕의 행렬에서 아직도 일선이 사용되고 있음을 목격하였다. 선생은 이국땅에서 전통과 문명이 공존하고 있는 장면을 접하고 새삼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고 한다.

자고로 “동기가 문화를 낳는다”는 말이 있다.

더위는 인간으로 하여금 부채라는 도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만든 동기였다. 그러므로 각자 모양새는 조금씩 다르지만 전세계 어딜 가나 더위가 있는 곳이면 부채가 존재하게 되었다. 선생이 일본의 오키나와나 대만의 원주민촌을 여행하면서 깨달은 것도 바로 그 부채의 기원에 관한 것이었다. 그곳 원주민들은 커다란 나뭇잎을 오려서 부채처럼 쓰고 있더란다. 아마도 종이가 발명되기 훨씬 이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더위를 식히지 않았을까 하는 게 선생의 생각이었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콩고의 미개인들에게서도 발견되었다. 그들 또한 흔히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나뭇잎을 부채 대용으로 아직까지 쓰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나무와 종이로 만든 부채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선생은 그 기원을 BC 2세기까지 추정하였다. 몇년 전 경남 창원의 다호리 유적 발굴 과정에서 구멍이 여덟 개 뚫린 대나무가 출토되었다. 단선의 부챗살임을 입증하는 유물이었다. 이 유적 발굴에 참여했던 선생은 곧 우리나라 부채의 역사를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까지 선생이 사료를 통해 제시한 우리나라 부채의 기원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의 즉위식 때 공작선(공작의 꼬리로 만든 부채)을 선물했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BC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호리 유적에서 대나무로 만든 부채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견훤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부채는 예로부터 선비들 사이에서 귀한 선물로 통용되었다. 매년 단오가 되면 왕은 신하들에게 부채를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고, 선비들끼리도 부채를 최고의 선물로 쳤다. 선비들은 주로 습선(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을 많이 사용했고, 동그란 단선은 여인들의 애용품이었다. 습선은 ‘고려선’이라고도 하는데 그전까지는 단선에 국한되었던 것을 고려인들이 휴대하기 좋게 습선을 만들어 갖고 다니면서 중국에까지 전파시켰다. 습선은 단선에 비해 바람의 폭이 넓고 깊으면서도 일단 접어놓으면 크기가 아주 작아지는 특성이 있으므로 여러모로 편리하게 쓰인다. 그 아득한 시절에 벌써 그토록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발상을 할 수 있었던 선인들의 지혜에 자못 감탄이 우러나오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세계 각국에서 부채가 사용되었지만 그 안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새겨넣는 풍습을 가진 나라는 우리나라와 중국뿐이라는 사실이다. 선비들은 시원한 산수화나 더위를 잊게 할 만한 싯구를 담은 부채를 선물함으로써 부채가 갖고 있는 본래의 기능 외에 훈훈한 인정까지 얹어주었다. 하여, 선비들의 습선은 그것을 펼치는 순간 그림이나 싯구를 대할 때부터 이미 청량감을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임동권 선생은 인간미가 넘치는 우리나라 부채의 정신을 사랑한다. 때문에 고미술적 가치가 있는 소위 명품, 유명 화가나 문인들의 서화가 담겨져 있는 부채보다는 시골집 안방이나 사랑채에서 쓰던 부채들을 즐겨 모은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문화재적 가치보다는 우리 선인들의 삶과 애환이 담긴 민속학적 가치를 더 높이 치기 때문이다.

부채는 만인에게 고루 평등하다. 지체 높은 왕족이거나 무지랭이 농투산이들이거나 가리지 않고 시원한 바람을 선사해주는 게 부채의 평등한 미덕이라면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가치인가. 물론 부채에도 그 생김새에 따라서 품격이라는 게 있다. 흔히 대나무의 뿌리를 취하여 겉살의 마디가 12절 되는 것을 부채 중의 으뜸으로 친다. 대나무 한 그루에 부채 한 점 나오는 격이니 귀하기도 귀하고, 그 마디의 굴곡이며 향기 또한 은은한 것이 가히 으뜸자리라 할 만하다. 그외 마디가 7절, 9절 되는 것은 평범한 부채에 해당되며, 한지 색깔에 따라 흑선 백선 등으로 구분짓기도 한다.

부채의 겉살에 송곳으로 그림이나 문양을 넣는 ‘낙죽’은 부채의 예술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겨우 1센티미터도 안되는 그 촘촘한 공간에 미적감각을 불어넣을 수 있는 정교한 기술이야말로 우리나라 전통부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고, 이 부문의 기능보유자는 오늘날 인간문화재급에 해당된다.

선풍기와 에어컨의 보급으로 부채의 효용가치는 이미 상실되었지만 요즘도 토산품점 같은 곳에서는 흔히 부채를 구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부채들은 대부분 대나무의 몸통을 쪼개 만든 것이고, 그 때깔이나 모양도 썩 멋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지난 30여년 간 전통부채를 수집해온 선생의 ‘보물창고’에는 그래서 요즘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품으로서의 부채 같은 건 없다. 틈날 때마다 전국 각지의 골동품점이나 민가, 외국의 원주민촌 등을 찾아다니며 모은 부채가 3백여 점.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재료의 성격상 연조가 아주 오래된 것은 훼손되기 십상이라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어서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집한 3백여 점의 부채는 그 몇 곱절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골동품상에 간혹 나와 있는 부채들은 대개 고미술적인 가치를 따지기 때문에 값도 비싸려니와 수집 의도와도 맞지 않아서 애써 모으려 하지 않았고, 그 대신에 민가를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외국에서도 그랬지요. 중국의 오지 마을에 가서는 태국에서 사 가지고 간 부채를 그들에게 주고 물물교환하는 식으로 그쪽 부채를 얻었습니다. 아무래도 부채는 돈주고 사는 것보다 그렇게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선물로 인식되어온 것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양입니다.” 일찍이 소설가를 꿈꾸는 청년문학도였던 선생이 국문학과에 진학해서 홀연 부채와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순전히 스승이었던 방언연구가 방종현 교수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처음 스승은 선생에게 민요 연구를 권했다고 한다. “소설은 나 아니라도 쓸 사람이 많을 테니 그만두고, 대신에 학자의 길을 택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권하시더군요. 그래서 애초엔 스승의 뜻대로 민요를 수집하러 다녔고, 그 과정에서 이것저것 모으는 일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표주박도 모으고, 제주도 해녀들의 생활용품이나 풍물 같은 것도 모으고…”

그렇게 해서 모은 제주도 해녀들의 생활용품을 한때 재직하고 있던 숙명여대에 기증하였고, 표주박은 모양이 예쁘다고 친구들이 하나둘씩 가져가는 바람에 이제 남은 건 부채뿐이다.

선생은 여지껏 두 번의 부채전시회를 가졌다. 한 번은 국립박물관장인 최순우 씨의 권유로 신세계백화점에서 의상연구가 석주선 여사 등과 함께 가진 공동전시였다.

“그때 잊을 수 없는 일이 뭐냐면, 아, 글쎄 전시회가 한창 진행중인데 저녁에 뉴스를 들으니 신세계백화점에 불이 났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제일 걱정되는 게 내 부채였습니다. 내가 다리품 팔아가며 어렵게 모은 부채들…. 혹시라도 다 타버린 건 아닐까 마음은 조마조마한데 남자가 돼가지고 불난 집에 그걸 물어볼 수가 있나요? 해서 마음만 졸이고 있다가 이틀 정도 지난 다음에 최관장한테 넌즈시 물어봤더니 다행히 불은 이층에서 났고 부채는 옥상에서 전시를 했기 때문에 무사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듯이 껄껄 웃는 선생의 표정이 꼭 소년 같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낡아빠진 부채 꾸러미에 불과할지 몰라도 평생 자신의 분신처럼 모아온 소장품들 아니었던가. 이에 대해선 석주선 여사도 선생과 똑같은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여사는 선생처럼 이틀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백화점에 불났다는 소식을 듣기 무섭게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부채의 안전 여부를 확인했다는 후문이었다.

두번째로 국립박물관에서 부채전시회를 열었을 때에는 다루는 이들의 관리 소홀로 그만 아까운 부채 한 점을 망쳐버렸다. 선생이라면 부채 한 점을 들고 나갈 때에도 거의 품에 안고 가다시피하지만, 그 귀함을 미처 깨닫지 못한 이들이 함부로 다루는 바람에 그런 불상사가 빚어진 것이다. 오래된 종이는 자칫 손만 대어도 부서질 염려가 있는 데다가 전시장의 강한 조명에 의해서도 손상될 염려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채는 특히 신중히 다뤄야 하는 것인데, 전시장에서는 대개 관람객들의 시선만을 의식하고 부채의 보존에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선생은 두번 다시 부채전시 같은 건 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의 장교부인클럽에서 우리나라 전통부채 순회전시와 강연을 요청해 왔을 때에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쪽에서 부채가 훼손되었을 경우 금전적으로 보상해 주겠다고 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시장에서 부채가 훼손된 일보다 더 가슴아픈 일화도 있다. 한번은 모 그룹에서 달력에 선생의 부채 사진을 넣겠다며 허락을 구하고는 자료 사용비조로 돈도 주겠다고 했다. 선생은 이때 자료 사용비 같은 건 필요없으니 대신에 부채 사진첩이나 찍어 달라고 했다. 그들은 선생의 제의를 선선히 받아들이곤 곧 작업에 들어갔다. 3백여 점의 부채를 일일이 고르고 사진 찍는 동안에 선생은 그야말로 노심초사하였다. 행여 부채가 다치지는 않을까. 한번 망가지면 두번 다시 구할 수 없는 소중한 문화유산들…. 그러나 얼마 후에 사진이 인쇄되어 나온 달력에는 선생의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있었고, 난색을 표하는 선생에게 그들은 달력 재작업을 하자면 직원 여섯명이 사표를 써야 한다며 한사코 양해를 구했다. 결국 그 말에 마음이 약해진 선생은 부채 소장자의 이름이 잘못 찍힌 달력을 시중에 유통시키도록 허락하고 말았다. 그랬건만 그들은 선생과의 약속인 부채 사진은 커녕 그 뒤에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었다. 따지고 보면 괘씸한 사람들이었지만 선생은 오늘날까지 그 일에 대해선 가급적 잊고 싶은 마음뿐이다. 고작 얄팍한 상술 하나로 노학자를 속여먹은 그 사람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으리라.

이제 선생의 꿈이 있다면 언젠가 적당한 기관이나 단체를 찾아 자신의 보물들을 기증하고 더불어서 그 자식 같고 분신 같은 부채 한점한점을 예쁜 화집으로 만들어 간직하고 싶은 바램이다. 그 소박한 바램을 듣고, 잡지에 넣을 사진을 찍기 위해 부채를 내달라고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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