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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현전 시대에서의 예술과 수용(심혜련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2021-12-29

코로나19가 장기화 됨에 따라, 비대면은 일상화가 되었고, 삶은 매체공간을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되었습니다. '직접현전'을 중심으로 한 예술체험들은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했지만, '원격현전'에서의 예술은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했을까요? 심혜련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와 함께 원격현전 시대에서의 예술과 이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 편집자 주


 

심혜련 /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과학기술과 관련해서 동시대를 규정하는 일은 이제 전혀 낯설지 않다. 특히 예술과 관련해서 ‘∼’ 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수식어는 벤야민(Benjamin) 이후 과학기술과 예술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할 때, 흔히 사용되는 관용구가 되었다. 일찍이 벤야민은 과학기술과 예술의 긴밀한 관계를 간파했으며, 또 이러한 관계를 중심으로 예술의 의미, 가치 그리고 역할 등에 대해 관념론적으로 분석하는 것에 반대했다. 예술의 자율성을 중심으로 한 예술에 관한 탐구가 가지는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동시대의 과학기술에 기초한 새로운 예술에 대한 분석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나온 결과물이 바로 그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im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1936)이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사는 시대를 ‘기술복제’ 시대라고 규정하고, 새로운 예술의 등장과 이 기술로 인한 기존 예술의 변화를 작품의 생산과 수용 과정을 중심으로 분석한 후, 이를 ‘아우라의 몰락(Verfall der Aura)’이라고 선언했다. 사진으로 복제된 예술, 원본과 복제 간의 구별이 없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인 사진 그리고 지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영화의 등장을 이렇게 선언한 것이었다. 


그 이후 벤야민의 이 글은 과학기술과 예술의 관계, 새로운 예술의 등장 그리고 아우라와 예술의 관계 등을 이야기할 때, 여전히 중요한 텍스트로 다루어지고 있다. 논쟁의 중심에는 기술복제된 예술의 특징, 가치와 기능 그리고 새로운 예술과 아우라의 상관관계에 대한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서, 기술복제로 인해 또는 기술복제가 전제된 예술에서 아우라의 몰락과 잔존의 문제, 더 나아가 아우라의 의도적 복원과 회귀를 둘러싼 문제들이 제기되곤 했다. 그러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에서 아우라의 유무를 따지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벤야민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사유한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과학기술 시대의 예술에 관해 물어야 한다. 그가 그랬듯이 말이다. 우리는 어떤 과학기술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의 예술의 특징과 수용방식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벤야민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여, 지금을 ‘원격현전(telepresence)’ 시대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현재 우리의 상황을 규정할 수 있는 많은 과학기술이 있지만, 코로나 19 이후의 삶은 매체공간을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았지만, ‘원격현전 시대’에서 살아가고 또 살아남아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새로운 규범을 받아들여만 했다. 아니, 아감벤(Agamben)의 지적처럼, 규범을 넘어 ‘합법적 정지상태’에서 얼굴 없는 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경험을 했다. 비극적 상황이긴 하지만, 받아들여만 했다. 더 큰 비극은 우리는 코로나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직접적 대면의 시대 대신 비대면 또는 매체에 의해 매개된 대면이 등장했다. 펜데믹 이후 ‘사회적 인간’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삶의 형식, 바로 ‘원격현전’이다. 물론 원격현전이 펜데믹 이후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인간은 늘 멀리 있던 것들을 가까이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또 인간의 지각이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있는 것들을 지각하려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원격현전이 모든 생활 영역에서 전면에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원격현전에 대한 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것이 우리의 존재 방식과 사유방식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원격현전이 중심이 된 사회가 언젠가는 구현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면화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구현된 원격현전사회. 여기서 과연 예술은 어떻게 변화했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까? 변화된 예술은 어디서 어떻게 수용될 수 있을까? 펜데믹 이후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이 예술에 기대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앞으로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물음들은 바로 이러한 것들일 것이다.




다시 벤야민으로 돌아가 보자. 벤야민이 기술복제와 관련해서 예술의 특징을 ‘아우라의 몰락’이라고 했지만, 상황은 벤야민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변했다. 예술이 기술로 복제됨으로써, 기존 예술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 아우라적인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또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 한 예술들은 더욱 아우라에 연연해 하기도 했다. NFT(non fungible token)의 등장은 또 다른 원본성과 그에 대한 아우라에 대한 갈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원격현전 시대에 예술의 수용도 극적으로 변화했다. 일단 매체공간에 접속해야만 한다. 접촉 대신에 등장한 접속의 세계에서 다양한 예술들이 펼쳐졌다.

접속된 세계의 경험을 좀 더 실제처럼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었다. 실제의 경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고 이는 성공했다. 접속된 공간에서 펼쳐진 다양한 예술은 또 다른 차원의 예술체험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관객의 선택과 참여의 폭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비록 접속된 세계에서의 만남이지만, 예술가들과 만남과 협업을 통한 작품에의 참여는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접속의 공간’만이 아니라, ‘접촉의 공간’도 변화한다. 서로 혼종화(Hybridization)된 것이다. 우리는 기존에 ‘실제’ 공간에서 하던 많은 것들은 ‘거기’에 있는 ‘가상’ 공간에서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상과 실제는 빠른 속도로 ‘혼종화’되었다. 현실은 ‘가상 같은 현실’이 되고, 가상은 ‘현실 같은 가상’이 된 것이다. 이 둘이 서로 더해지면서, 서로서로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예술은 현실은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 시대에 예술은 원격현전에 적합한 형태로 또 때로는 비판적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문제는 ‘현전’과 ‘현전에 대한 갈망’이다. 기본적으로 원격현전은 기술적 플랫폼이 전제된 존재 방식이다. 직접 가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직접 현전’을 중심으로 한 예술체험들은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공연예술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사실 공연예술은 그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기술과의 결합을 중요하게 여겼다. ‘총체예술작품(Gesamtkunstwerk)’이라는 개념도 공연예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며, 기술과의 결합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와 몰입감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기술과의 결합을 통해 현장에서의 몰입과 감각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현전감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접속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매체 공간에서 펼쳐지는 공연예술은 진짜 현전이 아니라, 일종의 ‘유사 현전(Pseudo-presence)’이기 때문인 것이다. ‘마치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환경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한 공간에서 구현된 예술을 수용하고자 접속하는 수용자들은 안다. 그 공간이 가상이며, 그곳에서의 현전은 단지 ’현전 효과‘임을 말이다. 알고도 즐기는 것이다. 여기서 굳이 가상이니, 실제이니 하는 구별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 한쪽으로 몰린 경험은 다른 한쪽으로의 경험에 대한 욕구를 가져온다. 즉, 접속된 세계는 접촉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가져왔다. 복제된 이미지, 음원 그리고 다양한 영상으로 접하게 된 예술들은 다시 진품과 지금과 여기에서의 현전을 통해 체험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가상현실, 증강현실 그리고 메타버스(metaverse)를 활용한 다양한 플랫폼이 등장하고, 이를 중심으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몰입감을 가져오는 예술체험장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기 위해서 말이다. 원격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사회에서 ‘부재하는 몸’ 대신 현실 공간에서의 몸의 체험과 그 장소에서의 일회적 현존재에 대한 체험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진 것이다. 

원격현전의 공간에서 난무하는 많은 ‘가짜’와 ‘혐오’의 늪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또한 커지고 있다. 접속 또는 접촉을 중심으로 한 예술이든 상관없다. 이 우울한 시대에 예술은 우리에게 많은 말들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위로든, 웃음이든, 각성이든 또는 날카로운 비판이든 말이다. 아도르노(Adorno)와 호르크하이머(Horkheimer)가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심미적 야만’의 시대가 우리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예술이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싶다.



글/ 심혜련

편집/ 아트앤테크 플랫폼 운영진

※ 외부 필자의 원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식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매체를 중심으로 철학, 미학 그리고, 예술 등에 관심을 갖고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다. 요즘 21세기 매체현상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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