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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기술융합지원 선정작 리뷰]스펙트럼의 바깥 - 천영환 <뉴랜덤다이버시티>

202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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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현 평론가


우리는 무한히 펼쳐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은 다양한 필터를 통해 세계의 일부만을 인식한다. 먼저 감각기관부터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의 감각기관은 세계의 모든 것을 감지해내지 못한다. 시각적인 것만 해도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400-700nm 정도의 범위 안에 있는 인간의 가시광선에 맞는 파장들뿐이다. 청각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개인차가 있지만 약 20-20,000Hz 이외의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인간의 신체적 조건이 받아들일 수 있는 스펙트럼 바깥의 것들은 다른 장치의 도움 없이는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인감의 감각적 틀거리에 의해 잘려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필터에는 감각기관과 같은 신체적 문제뿐만 아니라 언어의 차원도 있다. 구조라고 불리는 언어적 체계는 우리가 감각한 것을 일정 구간으로 잘라서 조직화한다. 눈이 400-700nm 범위 안의 파장을 인식했다면, 언어적 구조는 그 스펙트럼의 일정 구간을 잘라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등으로 이름 붙여 그것을 인식한다. 일정 구간의 파장을 빨간색으로 수렴시켜 이름 붙이기 때문에 사실 똑같은 빨간색이 아니더라도 언어적 구조에서 그 차이는 무시된다. 문제는 문화권에 따라서 언어적 구조가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노란색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영어권에서는 그냥 yellow로 쓸 것을, 한국어로 사유하는 사람들은 노랗다, 누렇다, 노르스름하다, 노리끼리하다, 누리끼리하다, 노르께하다 등 훨씬 다채로운 방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이름 붙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적 다채로움을 넘어선다. 우리의 사유 또한 언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 <뉴랜덤다이버시티>, 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것은 감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슬픔’이라는 언어를 통해 어떤 개념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어떠한 감정을 ‘슬픔’이라고 규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감정은 절대적이지 않다. 세계의 구조에서 독립된 자율적 존재로서의 뇌 같은 것은 없다. 뇌는 몸에 종속되어 있고, 몸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다. 나아가 세계는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우리는 그 구조를 따라 생각하고, 심지어 느끼기까지 한다. 감정이라는 것도 신체 내부에서 터져나오듯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조를 따라 만들어진다.


천영환의 <뉴 랜덤 다이버시티>는 이러한 감정의 구조에서 시작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특정한 언어로 수렴될 수 없는 상태를 가시화하는 것을 예술 작업의 형식으로 끌고 간다. 그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하나의 낱말로 수렴될 수 없는 엄청나게 복잡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과학적 관점에서 뇌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영환은 뇌파 분석 같은 방법론을 예술적 형식에 도입하는 것을 시도한다. 어떠한 감정적 상태를 단일한 언어로 규정하지 않고, 뇌파 분석에서 나타나는 데이터 값을 통해 언어로 코드화되어 있는 감정을 말 그대로 디코딩하는 것이다. 작가는 뇌파 분석을 할 수 있는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 장치를 통해 관객들이 스스로 선택한 이미지를 볼 수 있도록 하고, 그때 발생하는 뇌파를 분석하는 장치를 고안했다. 나아가 전시는 그렇게 도출된 데이터 값을 색채로 변환하여 관객들에게 다시 돌려준다.


▲ <뉴랜덤다이버시티>, 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러한 방법론은 감정을 색으로 물질화하면서도 기존의 상징적 색채와 연결을 끊어낸다는 점에서 일단 흥미롭다. 우울은 푸른색, 사랑은 붉은색 같은 상징적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주사약을 담는 병처럼 생긴 작은 유리병에는 색을 담은 액체와 함께 알파, 베타 등등의 데이터값이 적혀 있다. 관객들은 그렇게 천영환이 만든 시스템을 통해 색채로 번역된 자신의 뇌파 데이터를 받게 된다. 인간의 감정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기계가 파악한 기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색채는 그것에 형식을 부여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색채뿐만 아니라, 향이나 맛으로 그 값들을 바꾸어내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포착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감정을 또 다른 방식으로 형식화했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감정을 기계를 통해 읽어내고, 그것을 형식화하는 작업은 컴퓨터와 인간 사이의 (불)가능한 번역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그리고 뇌파 분석 또한, 컴퓨터가 특정한 방식으로 인간의 동요를 구조화하는 방법이다. 그것도 뇌의 움직임에만 집중해서 말이다. 심지어 그것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도록 숫자값으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또 잘려 나가는 스펙트럼의 바깥이 있을 것이다.


▲ <뉴랜덤다이버시티>, 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시장에는 사물을 인식하는 컴퓨터 장치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그 장치는 사물을 정확히 판독해내며 기술적 경이로움을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계속해서 오류를 보여준다. 관객들이 들고 있는 전시 팜플렛을 자꾸만 스마트폰으로 판독하는 식이다. 기술적 문제는 미뤄두고,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기계가 자신이 파악한 것을 인간의 구조로 바꾸어내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사물을 판독하는 알고리즘은 수없이 다양한 사물들의 스펙트럼에서 특정 구간을 포착해 하나의 언어로 수렴시키는 일을 한다. 기계가 인식한 것을 인간을 위해 번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계는 오역을 반복하고, 그를 통해 인간과 다른 기계의 감각에 대한 상상이 시작된다.


소위 포스트휴먼 연구자들이 번역이라는 개념에 천착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구조를 횡단하는 것은 단지 다양성을 가시화하는 문제가 아니다. 구조의 바깥은 불가능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다만,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의 서로 다른 감각 사이를 건너 뛰면서, 구조의 작동을 인식하고, 하나의 구조에서 인식되는 스펙트럼의 바깥을 상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혹은 더 넓게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그렇게 전혀 다른 존재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작동하고 있는 구조를 비로소 성찰할 수 있다.


글/ 권태현
편집/아트앤테크 플랫폼 운영진

※ 외부 필자의 원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식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미술에 대한 글을 쓰고 전시를 비롯하여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쉽게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에 항상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예술 바깥의 것들을 어떻게 예술 안쪽의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을지 탐구한다. 정치적인 것을 감각의 문제로 파악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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