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예술의 힘
예술의 힘
예술의 주요한 덕목은 기존의 것보다 ‘좋은 것’을 창작하거나 ‘더 나은 형식’으로 창작활동을 수행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좋은 것’과 ‘더 나은 형식’을 구성하는 실질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예술인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수익성과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며 대량생산으로 복제되는 제조업의 상품이나 일반 용역의 성질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4년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며 “내 어깨를 잘라 버리고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라고 말한 미켈란젤로, 높은 보수를 제시하며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신체를 훼손하겠다는 세도가의 협박에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른 최북,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라는 문장을 놓고 며칠간 고심하다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는 문장으로 수정한 소설가 김훈 등, 이처럼 예술적 성취를 위해 기꺼이 다른 것을 포기한 예술인과 관련된 수많은 예화는 우리가 예술에 기대고 예술인의 사유에 감응하게 하는 이유를 어림하게 합니다.
문제는 예술에 내재된 이러한 성질이 각각의 시대를 조율하는 경제적 질서와 상응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습니다.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 다시 말해 ‘시는 빈한한 이후에 더욱 좋아진다’는 아주 오래전 구양수의 언명이나 생전에 자신의 가치를 승인받지 못하고 곤궁한 상태로 세상을 떠난 고흐와 이중섭의 삶처럼 시대와의 불화를 통해 고유의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고자 하는 예술인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 종료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삶의 조건에서 예술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만일 예술인이 동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기존의 질서와 타협하고 그에 순응한다면 예술은 그들과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기존의 지배적 논리와 사유에 포섭될 우려가 있습니다.
문화예술진흥기금을 포함한 문화예술 재원을 조성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헌법은 헌법의 내부에 개정 절차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헌법이 스스로의 완결성을 부인하고 언제든지 더 나은 가치가 있다면 이를 채택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마찬가지로 문화예술에 대한 공적 지원은 시대를 지배하는 논리의 오류 가능성을 승인하고 이와 불화하는 사유와 표현을 우리의 체계에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문화예술 재원은 예술인에게 자유로운 예술활동의 토대를 구축하게 하고 사회 전체의 다양성을 증진함으로써 우리가 더 나은 세계를 모색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 문화예술진흥기금을 포함한 문화예술 재원의 현황은 그리 밝지만은 않은 상황입니다.
문화예술 재원 확대와 다원화를 위한 제언
<에이스퀘어> 12호에서는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경제위기와 이에 따른 예산의 감축으로 문화예술진흥기금의 고갈 및 문화예술 재원 조성의 다원화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재원 조성을 확대하고 활성화하기 위한 공공과 민간 영역의 전략과 노력 그리고 사례를 평문과 대담, 통계 등의 다양한 형식으로 검토하며 공적기금을 통한 문화예술 진흥의 필요성과 한계를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이와 별개로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각 예술 분야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 자체를 예술의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만나보았습니다.
SQUARE에는 ‘문화예술 재원 조성 현황과 발전 방안’이라는 주제로 다섯 편의 글을 담았습니다. 윤소영의 ‘문화예술진흥기금의 안정화를 위한 실천적 노력과 전략’에서는 문화예술진흥기금이 자체 수입보다 일반회계나 복권기금 등, 타 기금의 전입금에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정부의 재량에 의해 수시로 변동이 가능한 불안정한 재원이라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노력으로 입법을 통한 타 기금 수익금의 전입 근거와 비율을 제도적으로 규정하는 한편, 공연 관람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지 않는 합헌적인 모금제도의 설계,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6개 기금의 일부를 융합 계정으로 전출하는 방안의 도입, 특정 목적의 제한에서 자유로운 특별회계 신설 등의 현실적인 방안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최재호의 ‘현대차 정몽구 재단과 예술의 동행-사회 혁신을 위한 창조적 파트너십’에서는 공간의 성질과 사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문화예술의 힘을 적시하며 미술관 후원을 통한 기업 이미지 제고, 음악을 통한 소멸 위기 지역의 부흥, 노사화합 및 협력기업과의 상생 등을 예시로 제시하며 기업과 문화예술의 동행이 가져오는 전 사회적 효과에 대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기업이 창조적 파트너십을 통해 문화예술 후원 활성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세제 혜택의 확대, 우수 문화예술 후원자 국가 인증 시스템 설계 등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김태진의 ‘세종문화회관의 재원 조성 전략-상생을 위한 만남과 협업’에서는 기관의 특성상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비영리 문화예술기관이 안정적인 재원을 조성할 수 있는 전략으로서 다른 기관보다 재정자립도가 높은 세종문화회관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또한 이를 가능하게 한 요건으로 전문성을 지닌 재정 조성 부서를 구성하고 협력이 1회성으로 그치지 않도록 기업 및 홍보 대행사 등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기관 고유의 브랜드와 입지 조건을 활용한 문화예술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기관과 후원자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김재중의 ‘문화예술 민간 기부 활성화를 위한 제도 개편의 필요성’에서는 문화예술의 공적 지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한정된 재원을 분배해야 하는 공공 재정의 한계를 보충하고 공공이 담보하지 못하는 개성적이고 특색 있는 예술활동에 지원하기 위해 민간 재원의 유입을 유인하는 제도 개편의 필요성에 대해 논합니다. 공익 목적의 문화예술사업에 참여하는 기업에 세제 혜택을 줌으로써 메세나 활동을 획기적으로 촉진한 프랑스의 제도를 국내에 도입할 것을 제안하며, 그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수혜자의 편향과 같은 문제점을 예견하고 균형 배분을 위한 절차도 함께 마련해야 함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김정수의 ‘문화예술 공적기금의 명암-공적 기금의 의의와 과제’에서는 정부의 문화예술 지원 관련 지원 예산 및 문화예술진흥기금의 역사와 현황을 살펴보고 이를 기초로 소비자 주권 차원에서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공적 지원이 오히려 과잉 공급이 되어 문화예술의 발전을 저해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경제와 산업의 논리에 온전히 포섭될 수 있는가는 차치하고라도 고유성과 비대체성을 본질로 하는 예술이 과잉 공급 상태에 있다고 진단한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보조금의 사용에 대한 경각심과 자생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이 요청된다는 의견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PRISM에서는 기업의 메세나 활동을 수치와 통계로 확인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자료 ‘기업 문화예술 지원 현황 조사’를 분석하여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 현황을 살펴보았습니다. 김세연은 ‘국내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10년간의 추이 및 현황 분석’에서 메세나 활동에 대한 기업의 높은 관심사와 이에 상응할 수 있는 문화예술별 지원 분야를 분석하여 현재 기업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를 알아보고 분야별 지원의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최근 ESG 경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지역 소멸의 위기에 대응하여 지역 메세나 활동이 증가하는 추세를 확인할 수 있는 통계 수치도 수록하였습니다.
AROUND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문화예술 후원’이라는 주제로 김상미 블루버드씨 대표, 김정미 한화생명 CSR전략팀 부장, 박찬종 두산아트센터 팀장, 조현상 다크서클즈 컨템포러리 댄스 대표를 초청하여 이정은 필더필 이사의 진행으로 대담을 진행하였습니다. 지속가능한 후원의 필요성과 해당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파트너십이 생성되는 과정, 후원 사업의 성과 관리와 후원의 활성화 방안 등에 대한 현장의 생생한 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술 활동과 기업과의 연결고리가 궁금하신 분이라면 일독을 권합니다.
이번 호 SCENE은 지속 가능한 예술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공공과 민간의 노력에 대한 두 개의 인터뷰를 준비하였습니다. ‘예술단체를 넘어 아트컴퍼니로-자생력을 위한 연희예술극장의 도전’에서는 여타의 극장들과 차별화된 운영 방식, 고유의 기획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단체의 자생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극단 이방인과 연희예술극장의 신재철 대표를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경계를 횡단하는 예술인들의 크루이자 그들의 협업으로 다양한 형식의 예술 활동이 이루어지는 ‘아트 컴퍼니’로서 연희예술극장의 장소성을 중심으로 초대권 없는 공연, 마니아 관객층 구축, 실험을 겸비한 홍보 마케팅을 통해 예술단체 운영의 새로운 방식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문화예술 후원의 새로운 가능성-아트 포레스트 페스티벌’에서는 최근 10주년을 맞이한 ‘예술나무운동’의 이력과 이를 기념하는 ‘아트 포레스트 페스티벌’을 소개하고자 해당 사업을 주관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정책·후원센터의 이제승 센터장과 성윤진 차장을 인터뷰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술영재 지원사업, 문화예술 후원인증제도, 크라우딩 펀딩 지원사업 등 문화예술 후원의 총량을 늘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 센터의 주요 사업 내용과, 축제의 형식을 빌려 참석자에게 예술나무운동의 취지를 대외적으로 홍보하고 후원의 가치를 인식시키는 아트 포레스트 페스티벌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FLOW에는 ‘장르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힘-문화예술 디지털 아카이브’라는 주제로 수많은 예술작품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궤적을 추적하고 기록하는 디지털 아키비스트의 이야기를 수록했습니다. 단순히 작가와 작품의 기록을 영상으로 보존하는 것을 넘어 대중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다양한 형식의 실험을 시도하며 문학과 독자의 의미 있는 만남의 순간을 모색하는 윤솔지 작가티비·다큐멘터리 감독의 글, ‘국립극단 디지털 아카이브’와 ‘남산예술센터 디지털 아카이브’의 구축에 관여하며 공연과 관련된 종합적인 지식 정보를 데이터로 제공하여 공연 연구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정주영 아트앤데이터 대표의 글, 아카이빙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의미를 재정의함으로써 아카이빙이 단순한 자료의 나열이나 전시의 장식이 아닌 후대에게 유의미한 교본이자 길잡이로서 공동의 지적 유산으로 남기를 바라는 조주리 독립 큐레이터의 글을 통해 최근 문화예술계 아카이빙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 편의 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완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우리 시대에 문학과 정치경제학은 양립 불가능한 선택지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도표와 수치를 통해 인간을 환원적으로 바라보는 정치경제학의 세계관이 포섭할 수 없는 영역을 재현하는 ‘다양성의 중재가’가 문학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술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의 예술은 시대를 지배하는 논리를 반복하고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논리의 완전성에 의문을 품고 누락된 부분을 보충합니다. 정치와 경제의 논리로 포섭하지 못하는 영역이 바로 예술의 영역입니다. 위대한 예술이 시대와 불화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불화를 통해 우리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들이 확장될 수 있을 때 가능한 미래의 수를 예측할 수 있는 어느 영화의 주인공처럼 우리가 맞이할 수 있는 미래의 경우의 수는 더욱 증가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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