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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HOUSE
세상을 바꾸는 예술 아티스트리

전시

  • 서민정 개인전_Fired White 2012.06.29 - 2012.07.13
    서민정 개인전_Fired White 2012.06.29 - 2012.07.13
    전시기간
    2012.06.29~2012.07.13
    관람료
    오프닝
    장소
    작가
    부대행사
    주관
    주최
    문의
서민정 개인전_Fired White
2012.06.29 - 2012.07.13
서민정




창조적 파괴의 의미

이진명

 

Ⅰ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 헤르만 헤세의 이 유명한 말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창조와 창신(創新), 그것은 기존의 이스터블리쉬를 파괴해야만 비로소 생성된다. 내가 축적 해왔던 가치 체계를 좀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해 나아가는 끊임없는 삶의 역동적 과정(dynamic process of life), 그것이 헤세가 말하는 창조적 파괴이다. 이 창조적 파괴는 고정된 실체(substance)를 불허한다. 그것은 매 순간 인식을 전환시키고 마음을 다잡아 고쳐나가는 메타노이아(metanoia), 즉 개심(改心)의 지난한 여정에서만 꽃피우기 때문이다. 존재론(ontology)은 존재(being)가 무엇인지 정의하려는 인간의 시도다. 따라서 존재론은 어떤 존재 X의 주어(subject)에 술부(predicate)를 대입시켜 입언(立言)하려는 고매한 노력이다. 이것은 존재를 정의하여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키려는 위대한 시도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또한 위대한 거짓이다. 존재를 개념에 가두어 재단하고 마는 지적 오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첫째, 이 개념에는 시간이 철저하게 누락되어있다. ‘S는 P이다.’의 예는 전형적인 서구 철학의 목표다.‘바나나는 노랗다.’ ‘흙의 성분은 무엇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다.’ 마치 이런 것들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바나나는 영원히 노랄 수 없으며, 흙의 성분은 지구 구석구석마다 각기 다르다. 철학이 이토록 무용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존재(being)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실체(substance)가 있다고 무비판적으로 학습된 수천 년 과오의 집적체 일지도 모른다. 존재보다는 관계를 사랑하는 것, 세계 내 모든 사물들의 관계와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역동적 사태와 느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해왔던 미완의 영구적 책무였다. 내가 서민정 작가를 만나고 놀란 부분은 적잖이 많다. 첫째, 작가는 예술이 메타노이아의 끊임없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지각하고 있었다. 둘째, 파괴를 통한 창신(創新)이 문명사의 구조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셋째, 실체(substance)라는 미명을 찾아 헤매는 사상사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 통쾌함이 분명히 있었다. 이제는 서민정 작가의 대체적 시리즈가 어느 정도 우리에게 각인되었고 국내 미술계 내부에서도 유명해졌다. 더욱이 개념과 방법이 안정화되었다. 죽은 새에 유약물이 구석구석 완전히 입혀지고 고온의 가마에 입실되어 새로운 질료로 재 탄생되는 이질적 형식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더욱이 익숙하지 않아서 두려움을 야기시키는 이 이질적 긴장의 과정이 영상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그런데 이 영상은 다큐멘터리가 전혀 아니다. 극화된 형식미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영상이다. 사실 이 ‘대상의 연소를 통한 재탄생’의 시리즈는 생명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2006년 작가는 독일 군복 자켓을 구했다. 군복을 사진으로 남겨놓은 후, 군복 위에 유약을 입힌 후 가스가마에 연소시켰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불은 순화(purification)의 의미를 지닌다. 의미의 순화(purification of meaning)는 감정의 정화(purgation of feelings)로 까지 도약할 때 절정을 이룬다. 군복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서열과 위계, 가치의 보존과 여타 다른 공동체에 대한 물리적 폭력, 강제, 힘 등을 연상시킨다. 힘과 강제의 이미지는 백색 도자기로 전혀 다른 의미체로 변용된다. 나는 작가의 모험이 극을 이룬 시점을 바로 군복을 도자기로 바꾼 이 ‘Fired White’라는 작품이 완성한 연도로 파악한다. 바로 한해 전 작가는 ‘삶을 지속하기 위하여(Überleben)’라는 설치작품을 제시했다. 수액키트에 장미꽃송이만을 밀봉하고 잎과 줄기는 공기에 노출시킨 작품이다. 작가는 꽃봉오리에 생생한 삶을 지속시켜준 반면 나머지요소는 시들어 사라지게 하는 기묘한 장관을 연출했다. 작가는 삶의 영원성, 안티에이징이라는 초보적 사유에서 일년 만에 대상의 형질변경(形質變更)을 통한 일반의미의 변용(transfiguration)이라는 고차원적 사유로 도약한 것이다. 이 생명의 지속문제와 일반의미의 변용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내밀하게 착종(錯綜)되어 보다 진화한 것이 죽은 새를 도자화시킨 2009년 작품 ‘유물(The Remains)’이다.


Ⅱ 에딩턴 경(卿)은 아인슈타인의 라이벌 물리학자인데 그 유명한‘나의 두 테이블(My Two Tables)’이라는 에세이를 남겼다. 여기에서 인상적인 것은 대상의 실체(substance)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닌가 역설한 대목이다. 육중한 테이블은 너무나 탄탄한 구조를 지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에딩턴 경에 의하면 테이블 표면의 수많은 전자들은 공기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하며 거꾸로 공기입자는 테이블 안으로 침입하여 전자들을 끊임없이 부추긴다고 한다. 그 단단한 테이블마저 수시로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주역(周易)’은 변하지 않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서구는 플라톤 이래로 변하지 않는 실체(substance)가 있다고 강요했다. 부정적 지상에 대한 천상의 숭배, 현상에 대한 실체의 중시,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 등등 다이커토미(dichotomy)가 서구인식론의 기본적인 틀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죽은 새를 태움으로써 오히려 죽은 새의 이미지를 영원히 포착한다. 여기서 불가능해 보였던 실체라는 관념의 아련한 존립가능성이 생성한다. 이러한 기적은 예술이라는 세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또 한가지 에딩턴 경의 설명 아래서 부식과 변화의 속도와 정도가 가장 더딘 물질을 꼽으라면 그것은 도자기다. 그러니까 작가는 시간을 정지시키려는 의도를 분명히 지니고 있다. 또 한가지 서민정 작가의 작업을 통해서 문명이라는 괴물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다. 문명은 질서이고 질서는 문명이다. 이를 코스모스(cosmos)라고 한다. 그런데 이 코스모스나 문명, 질서는 스스로를 지속시키려고 애쓰면서 경직화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형식화되고 무미건조해진다. 이 경직화를 막아주는 것은 혼돈, 즉 카오스의 세계다. 혼돈이나 카오스는 코스모스를 침탈하고 파괴시키면서 또 다른 질서,문명, 코스모스를 배태한다. 화이트헤드(A. Whitehead)의  유명한 말이 있다. ‘증기와 민주주의(steam and democracy)’라는 말이 있고, ‘야만인과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있다. 후기 로마제국의 타락과 부패는 위대한 한 문명의 경직화이다.
게르만의 침략은 로마를 파괴시켰다. 이를 화이트헤드는 “무분별한 작인(作因)들(senseless agencies)”이라고 말한다. 이 무분별한 작인에 의한 파괴행위는 자각된 열망(conscious aspiration)을 부르게끔 되어있다. 이 열망에 의해 설득이라는 기제(mechanism)의 창조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기존과 전혀 다른 제3의 조건으로 수렴한다. 야만인의 침략은 타락한 로마제국을 기독교의 세기로 전환시킨 위대한 작인이다. 증기의 발명은 기존의 질서를 파괴시킨 폭력이다. 증기를 통한 부의 축적은 자본주의와 시민계급, 제국주의를 낳았다. 이 파괴에 대한 자각적 열망은 민주주의의 발전이다. 파괴와 창조라는 이질적 요소가 사실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며 새로운 도약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죽은 새, 웨딩드레스는 둘 다 경직된 가치다. 죽은 새는 엔트로피가 끝을 간 것이며, 웨딩드레스는 20세기의 진부한 티슈 소설의 주제에 불과하다. 위계와 강령을 생명으로 삼는 군대의 군복 역시 경직된 가치다. 작가의 ‘Fired White’는 불타 사라졌기에 오히려 새로운 순백으로 태어나는 정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Ⅲ 서민정 작가는 한국에서 일본, 일본에서 독일로 거취를 이동하면서 작업을 지속시켰다. 작가는 분명히 성과 인종, 국가를 초월해서 통용될 수 있는 형식을 보유했다. 독일 개인전에서 웨딩드레스를 도자화하는 역량을 보여준 것이 2008년이었다. 성(divinity)과 속(secular)이 구분됨 없이 뭉뚱그려진 동시대의 우울을 토드리(tawdry)한 웨딩드레스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상도 없다. 그 치렁치렁한 드레스가 도자기로 변화하여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 새로운 존재양태를 사람들은 천양지간의 다양한 해석을 내렸다고 한다. 고도의 아름다움은 이 도자기를 다시금 바게트 빵으로 파괴하는 이벤트를 영상화한 작품 ‘Polterabend’이다. 폴터 아벤트란 결혼 전날 밤 그릇을 바닥에 깨며 액운을 쫓는 독일의 축귀 풍습이다. 바게트 빵과 작품이 모두 파괴될 때까지 진행된다. 일상
생활의 단란한 행복은 작가에게 의미가 아니었다.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의미가 무엇이며 생과 사, 성과 속이 어째서 세상에 존재하는지 물을 따름이 다.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미분화된 심미적 시 공태(undifferentiated aesthetic continuum)로 파악한 것이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비슷한 분위기를 추구하는 글로벌 정신 속에서 자본의 공동체가 경직되지 않고 생명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개성을 창신 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임을 작가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은나라 탕 임금은 세수그릇에 ‘구 일 신 일일신 우 일 신(苟日新日日新 又日新)’이라고 쓰고 썼다고 한다. 이것은 ‘진실로 새로워지려 하면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라’는 뜻인데, 나는 작가의 두 가지 방법적 거류인 폭발(explosion)과 연소(burning)가 말하는 숨은 메타포가 바로 이것이 아닌 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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