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예술을 찾아서

새천년 판소리가 우리의 예술사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것인가

판소리 전승의 현황과 실태

 

유영대(고려대 교수)

판소리의 유파

판소리는 18세기에 형성되어 20세기말까지 300년 동안 민족의 예술로 향유되어 왔다. 그 동안 판소리는 자체적으로 자생력을 가지고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성장해왔다. 애초의 판소리는 민중을 기반으로 성장해왔으나 19세기에 이르면 양반층도 판소리의 애호가가 되었으며, 따라서 민족적 예술 장르가 되었다. 대체로 판소리의 유파 형성은 19세기 초반인 전기 8명창 시대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소리가 명예와 부의 축적을 보증하는 예술이 되면서 광대들은 자신들의 법통을 강조하는 경향이 생겨났으며, 먼저 동편제와 서편제가 대립적으로 존재하였고 중고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동편제·서편제·중고제 등의 개념으로 나뉘는 것은 판소리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의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면 판소리는 양반과 서민층이 함께 즐긴 민족의 예술형태로 발달하게 되었다. 양반들이 판소리를 감상하는 수준도 대단히 높아서 판소리의 사설과 음악의 내용에 비평적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양반층의 개입에 의하여 조야한 판소리 사설이 양반들의 가치 규준을 따르는 전아한 내용으로 변모되었고, 감정을 과장되게 드러내는 창법에 일정한 제한이 가해져 우아한 곡조나 화평한 곡조가 채용되었다. 판소리의 성격이 이처럼 양반층과 서민층을 아우르게 되면서 판소리에는 상당히 엄밀하게 구분되는 유파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유파별로 기법과 미의식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있었다.

판소리를 비롯한 예술행위는 관객의 취향과 선택이라는 미의식의 작용에 의하여 변화 발전한다. 청중은 힘차고 남성적인 것이 좋다는 음악관을 애호하기도 하고, 섬세하고 슬픈 취향의 여성적 음악관을 선택하기도 한다. 마당에서 질박한 내용의 사설을 거칠게 불러대는 것에 점수를 더 줄 수 있고, 방안에서 우아한 태를 갖춰 점잖은 소리를 하는 것이 예술적 완성도가 있다는 미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

서민층에서 즐기던 판소리가 너무 처참하다거나 감정을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폐단이 있다고 양반들이 지적하면서, 판소리 음악은 일정하게 감정의 지나친 표출을 자제하는 창법을 구사하게 되었으며, 이 같은 미의식을 반영하면서 자연스럽게 한 유파의 스타일로 정형화되어 갔다. 굿판에서 불리는 소리를 ‘어정소리’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감정이 지나치게 토로되는 폐단이 있어 판소리 음악으로 담아내면 안된다는 미의식이 생겨나서 판소리 음악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처절한 정서를 진계면으로 표출해 내는 노래들은 양반의 미의식인 중용의 가치관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양반층이 요청하는 미의식을 판소리 광대들이 수용하여, 판소리 음악은 감정을 과잉되게 노출하지 않고 절제하여 표현하는 쪽으로 변화되었다. 판소리 가운데 시창(詩唱)의 빈번한 등장과, 가곡성 우조의 등장, 평조를 포함한 경기도 소리제의 편입 등은 이 같은 미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를 동편제·서편제·중고제 등 유파별로 나누어 서술한 자료로는 정노식이 지은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가 처음이다. 정노식은 20세기 전반까지의 판소리 현장을 조사하여 보고한 이 책의 ‘대가닥조’에서, 당시에 명백히 존재하던 판소리의 유파와 그들 유파의 기법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판소리는 시대를 거쳐 전승되면서 자연스럽게 유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정노식은 동편제가 ‘운봉, 구례, 순창, 흥덕 등지 이쪽‘을 기반으로, 서편제는 ‘광주, 나주, 보성 등지 저쪽‘을 터전으로, 중고제와 호걸제는 그 맥락으로 보아 ‘충청, 경기’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하여, 판소리 유파가 지역과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성립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판소리의 유파를 나누는 우선적인 기준은 전승지역이다. 특출난 명창이 사는 지역이 자연스레 판소리 전승의 중요 거점이 되었다. 요즘도 그러하지만 전통사회에서는 명성과 교육적 능력을 가진 명창이 사는 집에 학생들이 와 함께 기식하면서 오랜 시간 학습하였다. 같은 스승에게 배우다보니 배우는 이들의 소리 스타일도 거의 같게 되었다. 씩씩하고 웅장한 맛이 나게 소리를 끌어가거나, 애원처절하며 기교를 많이 부리는 일을 위주로 소리하는 것은 소리를 독자적으로 수련하여 이뤄낸 특정한 명창의 능력이지만, 이것이 일가를 이뤄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동일한 지역에서 불리는 동일한 스타일의 판소리가 된다.

동편제는 지역적으로 전라도 섬진강의 동쪽인 운봉·구례·순창·흥덕 등지에서 발원하였으며 송흥록이 중시조라 하였다. 동편제에는 송흥록제와 김세종제, 정춘풍제 등이 있다. 송흥록제는 전라도 섬진강의 동쪽인 남원·구례 등지를 중심으로 발전해간 유파이다. 송흥록은 ‘모든 가조(歌調)를 집대성’하여 판소리를 완성했으므로 가왕(歌王)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김세종제는 동편제의 다른 가닥으로 분류되는데, 주로 고창의 신재효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승집단에서 기왕의 판소리 사설과 음악의 내용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수정한 것이다. 「김세종제 춘향가」는 기왕의 「춘향가」보다 양반적 취향이 많이 가미되어 우아하고 섬세해진 변화된 모습이 특징이다. 이 소리는 보성의 정응민 집안을 토대로 널리 퍼져 있다.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인 광주·나주·보성 등지에서 전승되는 유파의 소리를 지칭하며,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으로 삼은 것이다. 박유전은 헌종 무렵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으며 한양에서 대원군의 총애를 받는 등 크게 활약하다가 만년에 보성군 강산리로 옮겨 살았다. 판소리에 장식과 기교를 덧붙여 서편제를 발전시킨 인물이다. 박유전의 소리는 정창업, 이날치, 정재근 등으로 전승되었다.

중고제는 헌종 때부터 20세기 전반까지 경기·충청 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의 판소리 유파로서 지금은 그 계승이 끊어진 판소리 유파이다. 모흥갑이 경기도 진위 출신이고, 방만춘이 충남 해미 출신이라는 점에서 중고제 명창으로 추정된다. 모흥갑은 평양 연광정에서 판소리를 할 때 덜미소리를 질러 내어 십리 밖까지 들리게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할만큼 성량이 탁월했던 명창이다. 중고제는 염계달과 김성옥의 법제를 표준으로 삼아 전승되었다. 중고제의 음악적 특성은 ‘비동비서(非東非西)이지만 동편에 가까운’ 중간이라고 하며, 비교적 동편제에 가까운 소리 스타일임을 알 수 있다. 중고제는 김성옥과 염계달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김성옥은 진양조의 창시자로 유명한데, 서른 살 무렵에 죽었으며, 그의 소리는 아들인 김정근에게 전해졌다.

 

판소리 전승의 실태

동편제나 서편제, 그리고 서편제의 전승양상이 보여주는 것처럼 판소리는 전승지역에 굳건하게 뿌리를 두고 발전해 나왔다. 그러나 명창이 사정에 따라 이사를 하여 사는 지역이 바뀌기도 하고, 이사한 명창을 따라서 필요에 의하여 이사를 다녔기 때문에 유파의 구분은 자연스레 이전의 지역적 기준보다는 명창 자신의 기준에 의하여 유파를 나누게 되었다. 동편제나 서편제가 전승지역보다 ‘소리의 법제’에 의하여 구분되었다. 특히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가문을 중심으로 유파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송판 적벽가」라든지 「박유전제 심청가」, 「김세종제 춘향가」 등은 가문으로 계승된 소리의 계보이다. 이로 보자면 사승관계(師承關係)야말로 유파를 형성하는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이 명백하다.

판소리에서 ‘제’는 법제 또는 제작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소리 스타일’을 의미한다. ‘제’의 큰 범주로는 동편제·서편제·중고제의 유파로 나눌 수 있지만, 작은 범주의 ‘제’로는 ‘바디’를 포괄하여 지칭한다. 이 작은 범주의 제도 유파와 마찬가지로 자체적 전승력을 가지고 있다. 제는 바디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가 「정정렬제 춘향가」, 「박유전제 심청가」라고 지칭할 때 이 경우 이 춘향가와 심청가는 짧은 소리대목이 아니고 완창하는 판소리 한 마당을 지칭한다. ‘바디’는 어느 명창이 짜서 부르는 판소리 한 마당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판소리는 일제 때의 시련기와 그 이후에 힘든 쇠퇴기를 지내다가 1960년에 들어와 새롭게 변모되었다. 1962년에 중앙국립극장의 전속단체로 국립창극단이 창설되었으며, 국가 재정의 뒷받침을 받으며 창극을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 1964년에는 판소리를 중요무형문화재로 보호받게 되었다. 「춘향가」와 「심청가」는 1968년에, 「수궁가」는 1970년에 지정되었으며, 「적벽가」와 「흥보가」는 1971년에 각각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74년 이들 개별적으로 지정되던 것이 판소리로 묶이게 되었다. 판소리 명창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제도적으로 판소리를 보존·전승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현재 무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전수되고 있는 판소리의 현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수궁가」는 유성준이 보유했던 동편제가 정광수와 박초월 두 계통으로 명맥이 전승되고 있다. 정광수제 「수궁가」는 김영자가 보유자 후보로, 정영미가 보조자로 지정되어 있다. 박초월제 「수궁가」는 남해성과 조통달 두 사람의 보유자 후보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춘향가」는 현재 「김세종제 춘향가」와 「정정렬제 춘향가」, 「김연수제 춘향가」가 지정되어 있으며, 특히 새로운 계통으로 「김소희제 춘향가」가 포함되어 있다. 「김세종제 춘향가」는 성우향이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어 있다. 「정정렬제 춘향가」는 김여란이 보유하였다가 박봉례가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어 전수되고 있다. 「김연수제 춘향가」는 보유자 오정숙과 보유자 후보 은희진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김소희제 춘향가」는 신영희가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어 있다.

「심청가」는 현재 보성소리인 「정응민제」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소릿제는 보유자 성창순과 보조자 이순자에 의하여 한가닥이 전승되고, 보유자 조상현이 다른 가닥을 보존하여 전승시키고 있다.  「흥보가」는 김정문이 전승시켜온 동편제가 유일한 전승의 유파이다. 박녹주와 강도근이 이 유파의 보유자였으며, 박녹주에게는 보유자 후보로 한농선과 박송희가 있어 이 소리를 보존해 오고 있다.

「적벽가」는 「박봉술제 적벽가」와 「서편제 적벽가」, 「중고제 적벽가」가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박봉술제 적벽가」는 보유자 후보인 송순섭과 김일구에 의하여 전수되고 있다. 「서편제 적벽가」는 보유자 한승호가 전승시키고 있다. 「중고제 적벽가」는 보유자 박동진과 보유자 후보인 강정자, 조교인 김양숙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한편 판소리 고수의 전승 방식을 담당한 고법의 무형문화재로는 보유자였던 김명환과 조교인 정회천이 있고, 보유자였던 김영수와 조교인 장덕화가 한 짝을 이룬다. 현재 보유자는 김성권과 정철호가 있으며, 보유자 후보로 김청만이 있다.

이상이 현재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는 판소리 및 고법의 전승 실태이다. 오늘날 전승의 가장 본질적인 단위는 춘향가로서 「정정렬제 춘향가」, 「김세종제 춘향가」, 「김연수제 춘향가」 등이 있으며, 심청가로는 「박동실제 심청가」, 「정응민제 심청가」가 있다. 흥보가는 「김정문제 흥보가」와 「김연수제 흥보가」가 있으며, 수궁가의 경우 「유성준제 수궁가」와 「정응민제 수궁가」, 「김연수제 수궁가」가 있다. 적벽가는 「정응민제 적벽가」와 「박봉술제 적벽가」, 「김연수제 적벽가」, 「박동진제 적벽가」 등이 공고한 전승력을 가지고 전승되고 있다.

 

 

 ·김세종제 「춘향가」 - 정응민- 성우향  - 김수연,  김영자

성창순 - 이추월,  김명자

조상현

 ·정정렬제 「춘향가」 - 김여란 - 최승희, 박초선

 ·박동실제 「심청가」 - 김소희 - 신영희, 김동애, 안숙선, 이명희

한애순, 장월중선

 ·정응민제 「심청가」 - 박춘성, 안채봉, 성우향

성창순 - 안숙선, 박양덕, 김수연, 김영자

 ·김정문제 「흥보가」 - 박녹주 - 한농선 - 김영옥

박송희 - 정순임

 ·김정문제 「흥보가」 - 박초월 - 남해성, 최난수, 김경숙, 전정민

 ·유성준제 「수궁가」 - 정광수 - 박초월 - 김영자, 안숙선

 ·정응민제 「수궁가」 - 정권진, 조상현 - 정회석

 ·박봉술제 「적벽가」 - 송순섭, 김일구

 ·정응민제 「적벽가」 - 정권진

 ·박동진제 「적벽가」 - 강정자

 ·김연수제 다섯바탕 - 오정숙 - 이일주, 조소녀, 민소완

 

이상에서 살펴본 것이 20세기 후반의 판소리 전승 현장의 모습이다. 현재 전승되는 유파의 가닥이 충실하게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체계적으로 전승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이는 빠른 시일안에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이 유파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지는 않으나 전승될 가치가 있는 지방연고의 판소리 유파가 있다. 이들을 보호·육성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새로운 천년의 판소리

지금까지 300년 전통의 판소리의 전승 내력에 대하여 간략히 정리하였다. 판소리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전승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전승의 기반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졌을 때 무형문화재라는 제도에 의하여 일정하게 보호받은 측면이 있다. 물론 판소리 자체에 내재한 끈질긴 생명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이 정도라도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다. 그 이후에 대학에 한국음악학과가 생기고, 이곳에서 판소리 교육을 담당하게 되면서 상황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판소리에 관한 일반의 인식이 어느 정도 긍정적인 것으로 확산되었다. 90년도 초반의 영화 「서편제」 열기는 판소리가 가진 강인한 특성이 비로소 우리의 고유한 미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이 즈음의 판소리는 19세기의 왕성한 민족예술적 정수를 담은 것으로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의 자생적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이 판소리를 어떻게 새로운 천년에 적응시켜서 향유하느냐의 문제이다. 앞으로의 판소리가 우리의 예술사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