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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의 외길인생을 걸어온 고독한 자유인 臨書로 압도한 南田예술의 開眼 목정균/ (전 세계일보 논설실장)
남전(南田) 원중식(元仲植). 이 사람이 누구인가를 써 보라는 것이 이 시간 내게 주어진 임무이다. 남전과 나는 인천제물포고 1년 선후배 사이이다. 남전이 나보다 두 살 아래이고 학년도 한해 밑이다. 우리는 미술반원 인중(仁中)·제고(濟高) 합쳐서 근 5년간을 항상 붙어다녔다. 그 시절의 5년이라면 평생가고도 남을 만한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 때 우리는 너무도 가난하여 늘 배가 고팠다. 오후면 허기가 져 현기증이 나고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더 큰 허기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그림에의 끝없는 동경과 갈망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듯 우리는 그림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언제나 수채화 물감 한통은 고사하고 켄트지 한 장 살 돈이 없었다. 어쩌다 미술선생님이 나누어 주던 도화지 한 장, 팔레트 판에 색깔별로 찔끔 찔끔 눌러 짜 주던 튜브물감은 가히 가뭄끝의 단비와 같은 선물이었다. 아마도 미술반원에 대한 학교의 이와 같은 배려가 없었다면 소년시절 남전과 나의 이 꿈같은 미술인생은 없었을 것이다. 서해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인천의 유서깊은 만국공원, 그 분지속에 아늑히 자리잡은 우리의 모교 인중·제고 주변은 그 어느 하나 그림소재가 되지않을 것이 없었지만 턱 아래로 곧장 발길이 닿는 중국인 거리 청관(淸館)은 이상한 마력으로 우리를 유혹했다. 동란중 포탄에 지붕이 날아가 벽면만 앙상하게 서 있는 폐허위의 붉은 벽돌집들, 중국인 특유의 그 우중충한 2층건물이 양쪽으로 늘어선 가파른 언덕길, 그리고 석양에 졸고 있는 쿠리(苦力)풍의 노인… 등은 그 시절 우리들의 눈에는 쉽사리 표현되지 않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무렵 우리는 그림실력도 제법이어서 전국규모 중고생미술대회에는 어김없이 입선했다. 그리고는 나의 졸업과 함께 우리는 소식이 끊겼다. 사실 나는 한동안 ‘원중식’이란 이름을 잊고 살았다. 그런 어느해 가을인가, 신문에 실린 국전 서예부문 입선자 명단속에서 ‘元仲植’이란 한문 이름자를 발견했다. 남전의 존재가 나의 뇌리속에서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그림 입선이라면 몰라도 서예라니…” 남전이 그동안 글씨공부를 했으리라고는 짐작 조차 못한 일이라 반가움도 반가움이려니와 놀라움이 더 컸다. 말수가 적고 고집도 센 편이었지만 꾸밈없는 소탈한 성품이어서 인간미가 철철 넘치던 네모진 그의 얼굴과 함께 가난이 시릴만큼 아프고 아름답던 고교시설의 추억이 깊게 여운을 끌며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세월은 또 흘러 불혹의 나이를 앞둔 중늙은이가 되고서야 우리는 재회했다. 남전이 공무원으로서 서울시립대학에 근무할 무렵 고대 서연호 교수의 주선으로 만났으니 실로 20년만의 일이었다. 남전을 마주하며 터져나온 내 궁금증의 첫마디는 “어떻게 그림이 아니고 서예야?”하는 것이었다. 이하는 그때이후 남전과 종종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내가 묻고, 그가 들려주기도 해서 내나름대로 기억해 낼 수 있는 이른바 「南田의 서예인생」을 주어진 지면속에 정리해 본 것이다. 남전은 1941년 경기도 부천에서 5남매중 셋째로 출생했다. 부모님의 고향이 충북 장호원인지라 따지고 보면 그도 충청도 사람인 셈이다. 그시절 한국사람 거의 모두가 그렇듯 그의 집안도 원주 원씨 몰락양반의 후예로서 별수 없이 째지게 가난하여 타향살이에 셋방살이를 전전하던 끝에 부평 부개동에 자리를 잡게되니 남전의 유소년기는 부평과 인천 사이를 끝없이 오가는 고달픈 세월의 연속이었다. 초등학교때부터 그는 미술에 재질을 보였다. 부평동국민학교 5학년때에는 크레파스를 살 돈이 없어 고아원생이 쓰던 것을 빌려가지고 인천에서 열린 아동사생대회에 참가하여 입상할 정도였으니 그시절 그의 가난은 천형(天刑)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학업성적도 뛰어나 당시 서울을 제외한 경기지역에서는 제일의 명문으로 치던 인천중학교에 입학했다. 동란직후여서 하루 두차례 밖에 다니지 않는 경인열차로 부평과 인천을 통학하자니 절반은 30리길도 넘는 거리를 걸어다니다시피했다. 공부도 잘했지만 미술에 대한 열정이 더 커서 고3이 되고서도 입시준비는 하지 않고 미술반장으로서 후배들을 독려하며 개교기념전을 기획, 출품할지경이니 담임 고태흠 선생으로부터 꾸지람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음먹은대로 서울농대 농학과에 합격했다. 그는 농학자를 꿈꾼 것이 아니라 이땅의 가난을 걷어 낼 일꾼으로서 농업인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의 이같은 결심은 ‘유한흥국(流汗興國)’을 부르짖던 교장 길영희 선생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무렵 제물포고를 찾아오셔서 이나라 농업문제와 농촌의 현실을 가슴저리게 분석하여 들려 주던 서울농대 유달영 교수의 감동적인 강연이 직접적인 자극이 되었다. 그날이후 남전과 유달영 선생은 평생의 사제지간이 되었다. 특히 유교수의 배려로 받게된 양영(養英)장학금은 남전 농학도로서 학업의 계속은 물론 서예의 길로 정진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남전이 검여 유희강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검여가 인천박물관 관장 재직시에 박물관 주최로 연 경기도내 중고생미술전에서였다. 이 미전에서 제고2년생 남전은 검여로부터 2등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러나 남전은 검여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마침 이천농고에서 갓 전근해 온 서예가이자 국어담당 유인식 선생으로부터 검여가 서예의 대가라는 평을 들은 것도 그 한참뒤의 일이었다. 남전이 검여를 뚜렷이 의식한 것은 농대 입학 직후(1960년)의 일이다. 그해 여름방학, 남전은 그동안 숙제로 삼아왔던 검여를 찾아가 서예를 배우기로 했다. 남전은 농대동기들로 서예반을 구성하고 이미 고2때부터 검여의 지도를 받아온 윤국병(「한국일보」편집국장을 거쳐 현재는 「소년한국일보」 사장재직)을 앞세워 박물관으로 찾아갔다. 이들의 청을 듣고 난 검여는 “좋지!”하면서 흔쾌히 승낙했다. 그날부터 박물관 지하에 공간이 마련되고 글자익히기가 시작되었다. 여름방학 한달동안을 꼬박 이들은 붓잡는 법으로 시작해서 점찍기, 가로긋기, 내려긋기를 끝없이 반복한 끝에 ‘길 영(永)’자 하나 쓰기로 방학 한달을 다 보냈다. 용케도 탈락자는 없었다. 당시는 붓도 종이도 몹시 귀했다. 윤국병이 인사동 구화삼방에서 지필묵을 사서 조달했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휴지는 아주 훌륭한 연습지가 되었다. 검여는 신문·잡지류의 인쇄지는 시선을 산만하게 한다고 연습지로 못쓰게 했다. 방학수업을 마치면서 남전은 스승께 포도 한 바구니를 수업료로 올렸다. 그리고는 염치불구하고 「체본(체本)」을 써 달라고 청하니 검여는 싫은 기색도 없이 체본 두점을 써 주었다. 하나는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고 또 하나는 ‘학필구정(學必求精)’이란 글이었다. 남전은 스승의 이 소중한 글씨를 농대 기숙사 예산으로 표구하여 넓은 홀에 걸어놓고 매일 감상하였다. 가을학기부터 남전은 매주 토요일 혼자 인천으로 올라와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도화동 검여댁을 찾았다. 당시 국전 초대작가였던 검여는 출품작업을 겸하여 자기공부에 열중하고 있으면서도 주말마다 찾아오는 남전을 싫은 내색 없이 맞아주었다. 주말외출을 피하시는 것도 남전때문인 듯 했다. 찾아오니 받아줄뿐 남전에게 남다른 기대나 애정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수업에 정성을 다하는 이 우직한 제자를 눈여겨 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비로소 검여는 안진경 서첩을 꺼내주며 반복해서 그것을 쓰게 했다. 그로부터 남전은 주말마다 안진경서법을 익혀나갔다. 이를 밑천으로 2∼3학년 두해동안 봄·가을 두차례씩 모두 네 번에 걸쳐 교내미술전을 열고 수채화와 함께 글씨까지 직접 배접하여 출품했다. 1962년 3학년 봄전시회에는 검여도 초청했다. 50대 원숙기에 들어선 스승의 눈에는 남전의 이 치기어린 전시작품이 가당치도 않았으련만 별 말씀이 없었다. 그해 검여는 인천박물관 관장직을 물러났다. 2년 임기제 관장직이 연임 끝에 만료된 것이다. 이어 11월 초부터는 검여의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인사동 통문관 맞은편 일본식 목조건물 다다미방을 빌려 연구실 「검여서원」을 연 것이다. 당연히 인천과 서울을 오르내리는 남전의 서울수학이 뒤따랐고 「안진경서법」 익히기도 여전히 계속 되었다. 저녁이 되어 검여가 퇴근을 하고 나면 남전은 서실정리겸 뒤에 남아 스승이 쓰다가 구겨버린 글씨들을 빼놓지 않고 주어모아 하나 하나 정성스레 펴놓고 검여가 쓰던 방식대로 되풀이 연습을 했다. 이른바 「사법(師法)」 익히기 독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남전은 여기에 만족치 않고 검여가 캐비넷을 돌릴 때마다 번호를 슬쩍 외어두었다가 몰래 캐비넷을 열고는 그날 스승께서 무엇을 썼는지 훔쳐보곤 했다. 4학년 말, 휴학기간중 드디어 검여의 국전출품 하명이 떨어졌다. 그때 남전의 안진경익히기 반복연습은 무려 2백회도 넘어 있었다. 그해 가을 남전은 서예입문 4년만에 국전 초입선에 성공했다. 그리고는 곧장 군에 입대했다. 남전은 인사동시절의 서실 벗인 김진삼을 못내 잊지 못한다. 남전에게 있어 진삼은 농대제일의 친구요 검여에게는 경동중학 교사시절의 제자였다. 돈암동 한약방집 아들이라 생활에 그리 쪼들리지 않던 진삼은 성품이 원체 어질고 넉넉한 진국이라 검여는 남전보다 진삼을 오히려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남전이 군에 있는 동안 스승의 개인전(1964년 6월) 뒷바라지를 도맡아 했던 그 진삼이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보로 날아 왔다. 농대 서클들의 단체생활을 위해 흙벽돌로 지은 가건물에서 그해 가을 벼베기를 끝내고 친구들과 잠을 자다 연탄가스에 그만 불귀의 몸이 되고 만 것이다. 스승께서 손수 「金振三之墓」를 쓰시며 애통해 하시던 모습, 아니 그보다 매일 남전 몫까지 도시락 두 개를 싸와서 주린 배를 채워주던 인사동시절 진삼의 그 애틋한 우정을 남전은 지금도 애상(哀傷)에 잠겨 회상하곤 한다.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하며 68년 졸업까지 남전은 세차례 더 국전에 입선하였고, 그해 8월에는 뇌졸중으로 스승이 쓰러지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검여가 좌수서(左手書)로 재기하며 76년에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8년여를 남전이 어떻게 스승을 간병하고 그림자처럼 따르며 받들고 모셔왔는가는 서관의 너무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어 여기에 새삼 토를 다는 것은 부질없는 군더더기 일뿐이리라. 남전은 생전 남을 비판하는 일이 없는 검여의 그 겸허한 자세에 무한한 인간적 매력을 느낀 듯 했다. 스승이 살아계셨다면 서단이 이렇듯 어지럽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 남전이 늘 입버릇처럼 뇌이던 현실 진단이었다. 이순(耳順)을 눈앞에 둔 지금에 와서 남전은 비로소 자신의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99년 12월 11일부터 20일까지 열흘간 예술의 전당 서예관을 장식한 「제1회 원중식 서법전」이 그것이다. 여기에 전시된 150여점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들은 그 대부분이 동해와 설악이 앞뒤로 한눈에 바라보이는 속초 조양동 서실의 소산이다. 오랜 고뇌와 방황과 모색 끝에 금년 여름부터 국향이 질무렵까지 불과 6개월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그의 작품은 마치 활화산이 폭발하듯 쏟아져 내렸다고 함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남전의 이 무서운 집중력은 이미 10년전 공무원생활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강원도 인제의 심산유곡 미산(美山)자락에 수련과 배움의 터전을 건설(1990년)하면서부터 발현·분출된 것이니 「남전 서예인생」에 있어서 중간결산에 해당하는 이번 전시는 지심(地心)에서 끓던 붉은 용암이 마침내 분화구를 찾은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남전은 이것이 ‘시작의 시작’일뿐 결코 성취를 뜻하는 어떤 ‘결산’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전시의 명칭을 「서법전(書法展)」이라 한 것도 그 무게를 전적으로 ‘임서’(臨書)에 두고 있음을 직유하는 것이다. 남전은 자신이 이제까지 익히고 공부해 온 모든 것, 스승 검여로부터 배운 모든 것, 그리고 적어도 중국의 수(隋)대 이전, 육조이전에 완성되었던 모든 것들 …, 중점을 두고 공부하고 반드시 복습하고 넘어가야 할 서법·서체들의 자형(字形)만이 아니라 필의(筆意)까지를 빠짐없이 섭렵함으로써 선인들이 걸어갔고 도달했던 그 진수를 낱낱히 체현하고 철저히 내면화·자기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문자의 기원을 이루는 갑골문으로부터 종정(鐘鼎)·주문(주文)·전(篆)·예(隸)에 이어 당·송이래 정립·체계화되어 정자로 완성·집대성된 초·해·행(草·楷·行)에 이르는 그 모든 것들을 남전은 글의 내용에 따라 때로는 대선지(大宣紙)를 연폭(聯幅)한 초거작으로, 또 때로는 작은 지면에 글자크기의 변화로써 중·소품으로 다양하게 펼쳐놓았다. 특히 금세기에 들어와서 돈황탐험대에 의해 발굴된 「한목간 (漢木簡 : 한 대의 죽간)」의 묵필은 이제까지 금석문으로만 익혀온 옛서법의 필의를 새롭게 터득하는 ‘남전예술’의 일대 개안을 가져왔고 그것이 이번 전시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공개되었다. 일찍이 임서를 중시하며 청대 고증학파의 거장·대가들과 교유하며 각고면려(刻苦勉勵)하여 조선서예의 최고봉으로서 독창적 경지에 오른 추사(秋史) 조차도 여기에는 접할 수 없었으니 남전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고 있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가히 짐작이 갈만하다. 게다가 남전은 이번 기회에 왜 글씨는 백지위에 먹으로만 써야 하는가에 대한 원초적 질문에 자답하기 위해서 다양한 실험을 했다. 선지가 아닌 색지(色紙 : 감·청·홍) 위에, 또 반드시 먹이 아닌 석채(石彩 : 주·청·녹)와 금은동의 분액(粉液)으로 서필의 회화적 조형을 시도한 것이 그것이다. 남전생애의 이 첫 「서법전」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하늘을 찌르며 육박해 오는 ‘남전 임서’의 수천년 거목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듯한 장관에 압도당하면서 마치 한자문화의 거대한 숲속을 숨조리며 소요하고 난 듯한 감동에 젖게 했으리라. 결국 남전은 이 「서법전」을 통해서 후학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준엄하게 묻고 ‘임서’로써 스스로 그 답을 주고자 했다. 요컨대 공부하는 자세와 방법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어떤 개성적 진보나 창조도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온몸으로 가르치려 했던 것이다. 이번의 다양한 실험에도 불구하고 남전은 “다시 먹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또 그는 “나는 검여가 될 수 없다”고 자탄하면서 “제2의 검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앞으로의 남은 과업이라고도 했다. “스승께서 50대에 이룩한 경지에 나는 70대에나 근처까지 따라갈 수 있을런지…”하며 겸손하여 마지 않는 남전은 스승 검여에 비하여 20년은 뒤져 있다고 솔직히 자평했다. 남전이 이렇듯 자기를 폄하하며 겸손함은 무엇보다 구식 한문수학을 하지 못한데 대한 생태적 한계를 의식한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하나는 농학도로서 학문에 있어서나, 서예가로서 예술에 있어서나 또 공직자의 길에서나 도제적(徒弟的) 삶을 살면서 몸에 밴 배움의 자세와 구도자적 탐구정신 때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어쨌거나 남전은 자신이 진실로 참이라고 믿고 추구하는 세계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인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다. 남전, 이사람은 험난하고 고달픈 서예의 외길 인생을 걸어온 고독한 자유인이다. 그는 이제 비로서 스승께서 지어준 아호의 글 뜻대로 ‘남녘 밭’(南田)을 일궈내고 씨뿌려 거둬들일 때가 된 것이다. 이러한 남전을 어찌 이나라 서단의 단순한 지킴이라 하겠는가. 나는 남전이 추사이래 한국의 서예를 크게 꽃피울 제일의 농군이 되었음을 확신한다. 바야흐로 창공을 향하여 창조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 남전의 비상을 자못 기대해 본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괴테의 명언대로 결코 “서두름 없이, 그러나 쉬임없이…” Ohne Hast doch ohne Rast 정진해 나갈 것이다. 끝으로 남전의 기나긴 고행의 뒤안길에서 남모를 인고의 세월을 오로지 그 뒷바라지로 살아온 부인 강석인(姜錫仁)여사의 내조의 공에 대해서 남전을 아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예술의 길에서만은 고집불통의 진짜 인간 남전을 아우겸 친구로 두고 있는 나의 행운과 끝없는 행복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음을 부기해 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