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읽기 -문학

20세기의 문학 유산 (遺産) - 활발한 문학전집 간행

 

하응백(문학평론가)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 소설은 대하 장편 소설의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김주영의 「객주」, 이병주의 「지리산」, 박경리의 「토지」, 김원일의 「불의 제전」, 한승원의 「동학제」, 임철우의 「봄날」, 최명희의 「혼불」, 이문열의 「변경」 등등의 소설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하 장편소설은 1990년대로 그 전성기를 마감하는 듯 하다. 그것은 거대 서사 담론이 시대적 유효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시대적 환경 변화에 따라 작가와 독자 모두가 10권 분량이나 되는 긴 소설을 쓰고 읽는데 지쳐버린 것이다. 물론 유사 환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이 그 정도의 분량으로 제작되고 있기는 하나, 이러한 소설들은 문학적 밀도라는 측면에서 앞서 거론한 소설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미시 욕망의 대두가 90년대 문학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며, 이는 문학이 역사학(정치학)에서 생물학으로, 혹은 사회에서 개인으로 관심을 이동했다는 뜻이다. 그러한 가운데 90년대 말에는 2000년대를 맞이하면서 조용하면서도 의미있는 작업이 진행되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한국문학의 뼈대를 형성한 기성 작가들의 문학 전집 발간이다. 2, 3년전부터 활발하게 간행되기 시작한 문학전집은 해당 작가에게는 자신의 문학을 정리하고 정본(定本)을 확정한다는 의미에서, 독자 혹은 문학 연구자들에게는 확정된 문학을 한꺼번에 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대단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작가나 시인이 전집을 발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문학적 성과를 인정받은 시인이나 작가에게 한정되는 것이다.

 

문학적인 전집의 발간은 문화적 대의 명분

1999년에만 해도 「박완서 단편전집」, 「한승원 중단편전집」, 「조정래 문학전집」, 「김원우 중편전집」, 「마종기 시전집」 등이 간행되었다. 계속 간행 중인 전집도 있다.  총 28권으로 기획된 「이청준 문학전집」(열림원)이나 몇 권으로 마무리 될 지 모르는 「박완서 장편전집」과 「이제하 문학전집」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다 1994년에 간행된 「이문열 중단편전집」, 1997년에 간행된 「서영은 문학전집」, 1998년에 간행된 「황동규 시전집」과 「김원일 중단편 전집」과 간행이 준비중인 「황석영 문학전집」, 「김주영 중단편전집」 등을 합치면, 최근의 활성화된 전집 발행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한 작가나 시인의 문학 전집은 해당 작가나 시인의 모든 문학적 궤적을 수용해야 한다. 발표된 문학 작품 뿐만 아니라 사신(私信)이나 일기와 같은 2차 자료도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작품의 경우도 작가나 시인이 스스로 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최후의 확정본을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 한 작가의 문학전집은 당대적 의미보다는 사후적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1999년 연말 작가 박완서는 「박완서 단편전집」 발간을 축하하는 모임에서 “내가 전집을 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죽고 난 뒤, 나의 소설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어, 내 소설을 모아서 간행해 준다면 하고 바랬을 뿐이다. 지금 전집을 발간하고 보니 쑥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라는 내용의 인사말을 했다. 작가 박완서의 이러한 인사말은 공연한 겸손이 아니라, 최후의 확정본이어야 한다는 전집 간행의 원칙을 염두에 둔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 작가의 모든 소설을 전집에 다 수용하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다. 예컨대 「조정래 문학전집」의 경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대하 장편 소설 「태백산맥」은 제외되어 있다. 현재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12권 분량의 작품을 전집에 포함시키기는 어려운 것이다.

전집의 간행에는 문학적으로 대단히 의의가 있는 일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문학적 원칙의 어려움보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더 많다. 그것은 바로 전집 발간에 드는 출판 비용 때문에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집을 왜 발간하는가 하는 자본 논리적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특정 작가에 대한 보답인 경우도 있고, 출판사와 작가와의 특수한 관계에서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어디에 있건 간에, 보다 큰 차원에서 본다면 문학전집의 발간은 문학적 유산을 후대에 남겨야 한다는 문화적 대의 명분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바람직한 도서정책 필요

문제는 이러한 전집이 독서 시장에서 외면당하기 십상이고, 공공 도서관 또는 대학 도서관의 구매 서적 대상에서 제외되기 일쑤라는 점이다. 공공 도서관(일부에 불과하지만)에서 발송된 도서기증 요청서를 받아본 문인이나 출판사는 의외로 많다. 도서를 구매할 예산이 충분하지 않으니 책을 기증해 달라는 것이다. 책을 기증하는 일이야 좋은 일이겠지만, 책의 인세나 책의 판매로 살림을 살아야하는 문인이나 출판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기증 요청서는 참으로 딱한 일이다. 실제 국립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 같은 대형도서관을 제외하고 서울시 혹은 지방에 산재해 있는구나 군 단위의 지역 도서관에서, 위에서 언급한 문학전집이나 고전적 향기가 나는 책들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작은 도서관일수록 대중 소설류가 잔뜩 진을 치고 있다. 흥미 위주의 대중 소설은 공공 도서관에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런 책들은 개인이 사서 보든지, 하다못해 도서 대여점에서 빌려보면 그만인 것이다. 가치없는 책을 구매하기 위해 사용되는 국가의 예산은 한푼이라도 아까운 것이다.

문화 관광부나 간행물윤리위원회 등에서는 일정 기간을 정해서 우수한 도서를 추천하고 있다. 이런 제도가 더욱 실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도서 선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원칙론과 함께 선정된 도서가 공공 도서관 도서 구매에 반영될 수 있는 또다른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하기야 어디 공공 도서관만 문제랴. 전국에 200여 개가 넘는 대학 도서관도 대개는 한심한 실정이다. 대학 도서관에서조차 무협지류의 대중소설과 유사 판타지 소설이 판을 치고 있고, 그러한 책들이 대출 빈도가 높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현실을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학생이, 국민이, 좋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탓할 것만도 아니고, 가을이 되면 독서 캠페인을 벌일 것도 아니고, 문학이 죽었다고 엄살부릴 일도 아니고, 노벨 문학상 타령만 늘어놓을 때도 더더욱 아니다. 좋은 책을 선별하고, 그 책들이 가까운 곳에서 쉽게 찾아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독서 정책이다. 한국 근대 문학 100년을 대표하는 작가나 시인들의 정수(精髓)가 담긴 문학전집들이, 좋은 발간 취지에도 불구하고 창고의 어둠에 묻혀 있을까 우려해서 하는 말이다. 새로운 천년의 문학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문학의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 아니라, 과거의 문학을 제대로 정리하고, 갈고 닦아서 빛나는 구슬로 꿰어 놓아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결국 20세기의 유산을 후대에 남기는 일이다. 최근 활발한 문학전집 간행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