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읽기 - 연극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 ’90년대 셰익스피어 공연 결산

 

이현우(연극평론가, 순천향대 교수)

90년대 뜨겁게 번져간 셰익스피어 열기

80년대 까지만하더라도 셰익스피어를 한다는 것 만으로도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기성극단에서 하는 셰익스피어 공연은 1년에 한편 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셰익스피어 붐이라고 할 만큼 많은 수의 셰익스피어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필자가 집계해본 바로는, 전문적인 연극집단에 의한 셰익스피어 또는 셰익스피어 관련 공연물은 90년대에 들어서 서울에서만도 75편(이 중에는 필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해 누락된 공연이 있을 수 있다)이나 제작되었다. 이 중에서 90년에서 94년까지의 90년대 전반기 5년 동안에 20편의 셰익스피어 공연이 이루어졌고, 이후 99년까지의 후반기 동안에 무려 55편의 셰익스피어 공연이 있었다. 연도별로 살펴보면 더욱 의미가 있는데, 95년에 10편, 96년에 3편, 97년에 12편, 98년에 13편, 그리고 99년에는 15편의 셰익스피어 공연물이 무대위에 올려졌다. 한마디로 90년대의 한국 연극계의 가장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가속도가 붙은 채 빠르고 뜨겁게 번져간 셰익스피어에 대한 관심 내지는 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연극계에 하나의 모범을 제시해...

그런데 사실 90년대의 셰익스피어 붐은 비단 우리 만의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공통된 현상이라고 까지 할 수 있는데, 특히 헐리우드에서의 셰익스피어 붐은 대단한 것이어서, 케네스 브라나의 「오셀로」, 「헛소동」, 「햄릿」,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로미오 + 줄리엣」, 이언 맥컬린의 「리차드 3세」, 알 파치노의 「리차드 3세를 찾아서」,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햄릿」, 케빈 클라인의 「한 여름 밤의 꿈」 등이 90년대에 연이어 제작되더니, 급기야는 셰익스피어 자신을 소재로한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어제 오늘의 셰익스피어가 아닌데도 이렇게 9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그리고 우리에게 까지 셰익스피어 르네상스가 도래하게 된데에는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우선은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 극문학이 갖는 지역적,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는 보편적 가치를 생각할 수 있겠다. 본격적인 지구촌 시대를 맞아 소위 보편어 universal language로서의 셰익스피어는 어느 문화권에서든지 가장 유용한 의사소통 수단 중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셰익스피어에게는 셰익스피어 나름의 공연 문법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실행하지 않는 이상, 보편어로서의 셰익스피어는 제 기능을 다 발휘할 수 없다. 텍스트로서의 셰익스피어 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시적 언어와 영화같은 잦은 장면전환이다. 시란 이미저리를 통한 정서와 사고의 압축이고, 그것은 곧 압축된 극적 에너지를 의미한다.

언어에 실린 그 충만한 에너지가 영화 같이 미분된 많은 장면들을 관통해 하나로 묶어나가는 것이 셰익스피어 극이다. 따라서 셰익스피어 극이 무대위에서 효과적으로 형상화되기 위해서는, 시적 언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구사, 또 그에 따른 배우의 에너지가 충만한 연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처럼 끊어짐이 없는 빠른 장면전환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     

아쉽게도 90년대는 거의 80편에 이르는 셰익스피어 공연물들 중에 셰익스피어의 이런 공연 문법이 인식되고 적용된 공연은 손에 꼽힌다. 91년 최형인의 「한 여름 밤의 꿈」,  95년 오태석의 「로미오와 줄리엣」, 95년 김광보의 「오필리어, 누이여 나의 침실로」, 그리고 한국판 햄릿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윤택의 「문제적 인간, 연산」(95년), 97년 이승규의 「실수연발」, 99년 김아라의 「햄릿 1999」 정도를 열거할 수 있겠다.  

최형인의 「한 여름 밤의 꿈」은 셰익스피어적 방법론에 충실함으로써 성공한 가장 전형적인 예인데, 그는 스스로 원작을 현재적이며 길게 늘어지지 않는 일상적인 구어의 우리말로 새롭게 번역하였으며, 경험은 없지만 열정있는 젊은 배우들이 거침없이 연기할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그들의 에너지로 무대를 가득 채웠다. 또한 관객의 상상력에 기댄 거의 평면에 가까운 무대를 통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 여름 밤의 사건을 전혀 복잡함이 없이 빠르고 힘차게 전개시켜 나갔다. 최형인은 셰익스피어극의 언어, 셰익스피어 배우의 에너지, 셰익스피어 극의 빠른 전개 등 셰익스피어 극의 가장 중요한 세가지 속성을 자신의 연출 무대에 효과적으로 대입, 실현해 냄으로써, 여러 가지 빈약한 제작 여건을 극복하고, 적어도 셰익스피어 공연을 위한 방법론적 측면에서는 우리 연극계에 하나의 모범을 제시해 주었다.

 

아쉬움을 남긴 작품들

한편 95년에 한꺼번에 쏟아진 오태석의 「로미오와 줄리엣」, 김광보의 「오필리어, 누이여 나의 침실로」, 그리고 이윤택의 한국판 햄릿 「문제적 인간, 연산」은 90년대 셰익스피어 관련 공연물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예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 공연들은 셰익스피어의 시적 언어를 우리의 3.4.3.4 또는 7.5조의 시적 리듬에 실어 되살려내려 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 이 공연물들은 셰익스피어 언어의 시적인 힘의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밖의 다른 셰익스피어적 방법론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연구한 흔적이 역력했는데, 압축된 시적 언어에 걸맞는 에너지가 가득한 연기와 기관차 같이 빠른 장면 전개를 공통적으로 실행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은 셰익스피어적 방법론 위에 한국적 현실 내지 문화적 코드를 유효적절하게 삽입한 한국적 셰익스피어였다. 그만큼 그들은 현재의 우리 관객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 것이다. 셰익스피어 극은 근본적으로 윗층 갤러리의 고상한 관객들 뿐 아니라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피트의 하층민 관객들과 밀접하게 맞닿아 같이 호흡하고 같이 환호하던 거친 연극이다.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현재의 우리 관객들을 수용하려는 ‘한국화’의 작업 역시 역설적으로 오히려 더 셰익스피어적인 것일 수 있다. 요컨대, 95년의 이 세 셰익스피어 공연은 우리 나라에서 셰익스피어를 어떻게 무대화할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해법을 제시한 셈이다.

97년 부터는 제 5 회 젊은 연극제의 셰익스피어 페스티발, 그리고 98년, 99년의 셰익스피어 상설무대 등으로 이어지며 본격적인 셰익스피어 열기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언제나 도전이다. 그리고 많은 도전들에도 불구하고 97년 이승규의 「실수연발」, 99년 김아라의 「햄릿1999」 등 만이 비교적 셰익스피어적 방법론에 충실했고, 또 공연 자체로도 성공적이었던 프로덕션으로 기억될 만 하다.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대부분의 셰익스피어 공연물들의 경우, 도전에 앞선 셰익스피어에 대한 치밀한 연구와 사전 준비가 여전히 아쉽다.  

최근 11월 말과 12월 초에 걸쳐 셰익스피어가 은퇴하기 직전에 쓴 두 개의 희비극이 잇달아 무대에 올랐다. 이윤택의 「태풍」과 임경식의 「겨울동화」가 그것인데, 한껏 다라올랐던 ‘90년대의 셰익스피어 열기를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 두 개로 마감한다는 것이 묘한 아리러니를 느끼게 한다. 이 두 개의 프로덕션은 모두 음악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는데, 「태풍」은 문자그대로 뮤지컬 연극이었고, 「겨울동화」는 몇 개의 모놀로그를 노래로 바꾼 정도였다. 셰익스피어가 은퇴 직전에 쓴 이들 희비극들은 인생에 대한 그의 초월적 철학관이 강조되면서 연극의 제의적 기능이 강조된 까닭에, 다른 셰익스피어 극에 비해 극적인 긴장감이 떨어진다. 그러한 면에서 음악적 효과에 많이 의지하려는 연출 의도는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태풍」은 일반적인 뮤지컬의 포맷을 답습하느라 주인공 프로스페로 보다는 미란다와 페르디난드의 사랑이야기가 강조되면서 원작의 깊이가 많이 훼손되었고, 「겨울동화」 역시 너무 쉽게 관객에게 다가가려는 강박관념 같은 여러 가지 극적 기교들이 작가의 만년의 인생관이 녹아든 「겨울이야기 The Winter’s Tale」를 정녕 「겨울동화」의 수준으로 내려앉혔다. ‘90년대의 셰익스피어 붐을 결산하기에는 두 작품 모두 아쉬움이 많이 남는 무대였다.

 

2000년대 셰익스피어 붐을 기대하며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37개나 되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 몇 개의 작품에 대한 편식증이 강했던 국내 연극계에서 거의 공연이 되지 않던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들을 무대화했다는 것 자체가 위안과 희망을 준다. 90년대에 공연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햄릿」이 17편, 「리어왕」이 13편, 「맥베스」가 11편, 「로미오와 줄리엣」이 6편, 「오셀로」가 5편, 「한 여름 밤의 꿈」이 6편 등으로 전체의 77% 정도를 차지한다. 「태풍」은 92년 장수동이 연출한 공연에 이어 두 번째이며, 「겨울동화」는 전문극단에 의해서는 처음 공연되었다. 편식증의 치료가 2000년대의 보다 풍요로운 셰익스피어 공연을 전망케 해준다.  

‘90년대의 셰익스피어 붐은 위대한 고전적 극작품들을 우리 관객들에게 부지런히 소개해주고 친숙하게 해주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셰익스피어의 공연문법을 확인하고, 제시해주었다는 것, 또 셰익스피어의 일부 극작품에 대한 편식증을 극복하고 다양한 작품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히기 시작했다는 것을 수확으로 얻었고, 이것은 우리 연극계가 이제야말로 셰익스피어를 본격적으로 무대화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0년대의 새로운 셰익스피어 붐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