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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편의 인문정신

 

 

오세영(시인/서울대교수)

당당함인가, 솔직함인가

해마다 입시철은 돌아오고 그 때마다 온 나라는 열병을 앓는다. 당사자인 입시생은 말할 것 없고 그외에도 각급학교는 고사실시로, 정부는 그 관리로, 학부형은 뒷바라지로 온통 북새통을 이루는 한날이 지나가기 마련이다. 직업이 교수인지라 필자 역시 이 때가 되면 어떤 형태로든 대학입학고시에 참여하게 된다. 예전에는 출제위원으로 몇주씩 호텔에 감금되는 곤욕을 치렀으나 나이가 든 탓인지 요즘에는 벌써 수년째 면접위원으로만 불려다니고 있다.

최근에 들어 대학의 구술시험은 옛날 보다 그 비중이 커졌다. 학력평가가 단순한 필기시험 중심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모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필자가 봉직하고 있는 학교에서는 과거에는 형식적으로 치루어졌던 구술시험이 지금은 당락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해졌다. 이와같은 변화는 물론 누구보다도 입시생 자신들이 잘 알고 있으므로 면접고사에 임하는 그들의 태도 역시 많이 달라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작년의 일이다. 필자는 관례대로 전공 구술시험 위원으로 발탁되어 국문학과를 지망한 전 응시생들을 면접하게 되었고 모두 67명인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한가지, 좋아하는 시를 한편 외워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필자가 기대했던 것에 비할 때 너무나 참담했다. 전체 학생 중 완전하게 한편의 시를 외울 수 있었던 학생은 4명, 외우려고 시도하다가 도중에 실패한 학생이 8명, 나머지 55명의 학생은 아예 처음부터 외울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외울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그 55명의 학생들이 보여준 태도였다. 하나 같이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아니 당당하게 외울 수 없음을 천명(?)했던 것이다.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당당한 것과 부끄러운 것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부끄러운 일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행동이다. 국문학과의 면접시험에서 시 한편 외울 수 없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것은 부끄러울 일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당당하거나 떳떳한 일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생이 아닌 일반 교양인의 경우라 해서 예외 또한 아니다.

 

경제 생산에 맞춰진 교육정책

필자가 응시생들에게 시 한편 외울 것을 주문했던 것은 앞으로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할 계획이라면 최소한 한국문학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며 한국문학에 관심을 가졌다면 적어도 좋아하는 시 한편 정도는 외울 수 있어야 하는 학생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이 산산히 부서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자면 그것이 어디 국문과에 지망하는 학생들에게만 국한되는 문제이겠는가. 문명국가의 교양인으로서 모국어로 쓰여진 시 한편 외울 수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일인 것이다. 항차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할 학생이 그러하다면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문제는 이 통탄할 일이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상례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국문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조차도 시 한편을 외울 수 없을 지경이 된 우리 국민의 교양 수준은 아마도 여러 가지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가깝게는 자신의 적성을 외면하고 무작정 일류대학을 지망하는 사회풍조와 대학입시에만 매어 있는 중·고등학교 교육, 멀리는 물신 숭배로 치닫는 국민적 가치관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한 나라의 문화와 가치관을 선도하는 국가 정책이라 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정부는 국민 교육과 문화 행정을 통해서, 산업의 균형있는 배치와 경제 생산의 정당한 배분을 통해서, 정의로운 이념의 실천을 통해서 국민적 삶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지금처럼 모든 가치를 경제 생산성에만 두고 경제 생산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들은 폐기시키거나 위축시키는 정책으로 나아간다면 그리하여 한편의 시를 짓고 그것을 읽는 일을 장려하기 보다 한 개의 컴퓨터를 더 수출하는 일에 골몰한다면 근시안적으로 국민 소득 몇 달러를 높이는데 이득을 얻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시를 통해 알게되는 인간성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은 잃어버리게 될 것이 뻔하다. 유복한 동물적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 모르나 가난하더라도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인문학 혹은 인문정신이란 원래 경제 생산의 효용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인간의 정립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인문학에 실용성과 경제생산성을 강요한다면 앞으로 국문과는 작명연구소로, 철학과는 운명연구소로 그 학과명을 바꾸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실로 한국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천시하는 정부 정책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르네상스의 위대한 인문정신 없이 오늘날과 같은 서구 물질문명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 보다 훨씬 앞선 가령 프랑스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도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200편 이상의 자국의 고전을 외워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