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읽기 - 출판 |
굴절된 증언에서 읽는 역사
김기협(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 기록문화의 부재... 비록 부정확하고 부정직할지라도 필요 작년 봄 마포구청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삶의 체험’ 수기를 공모한 일이 있다. 이 행사가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매우 중요한 뜻을 담을 수 있는 행사라고 생각했다. 우리 역사학계에는 현대사가 큰 공백으로 남아 있다. 정치학계나 경제학계에서 20세기 후반의 정치사와 경제사를 정리한 연구실적은 꽤 많이 나와 있지만 현대사의 개별적 측면들일 뿐이지, 전면적으로 바라보는 역사학계의 연구는 20세기 후반에 닿는 것이 아직 거의 전무한 상태다. 현대사 연구가 부진한 이유로 폐쇄적 정치상황이 오랫동안 의식돼 왔다. 첨예한 냉전대결의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 등 현대사의 여러 요소들을 엄정하게 다루기만 해도 반공법이나 보안법에 걸리게 돼 있었다. 이 질곡은 억압적 독재정권 때문에 더 심하게 작용했다. 이 상황은 근년에 많이 풀렸다. 민주화도 크게 진전됐고, 남북간의 대치가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적 냉전구도가 해소된 이제는 경제적·군사적 대결만이 일부 남아 있을 뿐이지, 이데올로기 대립은 별로 의식되지 않는 상황으로 옮겨왔다. 정치적 질곡이 풀리고 나니 현대사 연구 부진의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기록문화의 빈곤이다. 학술선진국의 경우 역사학의 다른 시대 연구가 문서자료, 특히 공적 자료에 집중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는 것과 달리 현대사 연구에는 사적 자료나 증언의 비중이 크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이 방향에서 활용할 자료가 매우 적다. 사적 자료와 증언이 빈약한 중요한 원인 역시 정치적 질곡에 있었다. 그 질곡이 크게 줄어든 지금에 와서 연구의 활성화보다 기록과 증언의 활성화가 더 앞서는 과제다. 그런 점에서 마포구청의 행사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역사전개에 뚜렷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들보다 서민의 입장에서 역사의 굴곡을 받아들이고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이나마 열심히 수행해 온 증언을 확보해 놓는 것이 장래 역사학자들에게 20세기사에 대한 총체적 접근의 길을 열어주는 일일 것이다. 공공기관의 촉진에 힘입지 않고도 개인적 회고록의 생산은 꽤 늘어나 왔다. 환갑이나 7순을 기념해 조촐한 회고록을 만드는 일이 많다. 가족제도가 결속력을 잃어가는 산업화 과정 속에서 기족에 근거한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바닥에 깔려 있는 이 현상은 문화적·학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회고록이 흔히 가지는 문제는 객관성의 결여다. 기억의 정확성부터 저자 개인의 기억력에 일방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저자가 자신의 행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 기억하는 사실에 빼거나 덧붙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정확하거나 부정직한 기록이라도 탐구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전해받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 부정확한 기록은 다른 자료와의 대조를 통해 그 부정확한 내용을 교열하면서 정확성을 높일 여지가 있다. 그리고 부정직한 기록은 곡필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경우 정직한 기록과 부정직한 기록의 범위를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곡필의 의도 자체가 하나의 의미있는 역사현상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최혜숙씨의 회고록을 보며 그런 예로 최근에 면밀히 살펴본 회고록 하나가 있다. 숙명여고 교사와 단국대·홍익대 교수를 역임한 최혜숙씨의 「역사의 파도를 헤치고」다. 연대기적 회고의 내용을 담은 200쪽 가운데 90%는 저자가 12세의 나이로 고향 해주를 떠나 숙명여학교에 진학하던 1936년부터 동경유학과 교사생활, 신혼생활을 거쳐 전쟁의 와중에 남편을 잃은 뒤 어린 아들을 데리고 교직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1953년까지 십여년의 기간에 집중돼 있다. 일제 말기에서 해방 후 격동기를 거쳐 전쟁기를 포괄하는 이 기간에 대한 개인의 일관된 기록이라면 현대사의 자료로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동년배 한국여성으로 최고수준의 교육을 받고 고등교육 담당자로 성장해 가는 저자의 의식을 통해 그 시기의 시대상 뿐 아니라 한국현대사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까지 살필 수 있는 서술이다. 그러나 이 서술에는 상당한 굴절이 드러나 보인다. 예컨대 1940-43년간의 동경유학시절의 서술을 보면 민족주의를 기조로 하는 시대개관이 당시의 체험과 개인적 소감에 덧칠되어 있는 느낌이다. 동경의 길거리에서 빈곤한 동포의 초라한 꼴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일본인 교사와 급우들의 친절과 교양에 감탄하고 방학이면 “귀국해서 멋진 양장을 한 채 해주시내를 누비고 다니던” 것을 “학창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의 편린”으로 남긴 소공녀의 모습에서는 저자의 진정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피상적이고 도식적이다. 부정확성의 문제도 상당하다. “상하이 어떤 곳에서는 ‘이곳에는 일본인과 개는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팻말을 세웠을 정도”라든가,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8월 15일까지 남하 진주한 곳이 삼팔선이었다”든가, “(김구 주석을) 암살한 사람은 안두희로 50년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서야 밝혀져서 이승만정권에게 사주되어 저질러진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든가 하는 대목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저자의 사회의식이 별로 강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 부자집 아가씨의 행복한 유학생활 묘사 중간 중간에 “식민통치는 정말로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웠지만” 하는 식으로 본인이 별로 겪어본 흔적이 없는 문제의식이 뜬금없이 끼어들어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민족주의가 강박관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국 지식인으로서 젊은 시절 민족문제에 대해 별 고민 없이 행복만을 추구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데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불건강한 강박관념 해소시키기도 지금도 사회의식 없이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고 60년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세상을 잘못 사는 것이라고 단죄할 권한이 역사가에게는 없다. 역사가는 이 사람들의 존재와 행태를 사회의 바탕으로 인정해야 현실적인 시대상을 그릴 수 있다. 애국지사와 매국노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없었다. 저자처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 지도층의 주된 배경이 되어 있다. 이 책은 상당한 굴절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저류(底流) 하나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그 굴절로부터 이 사회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강박관념을 확인할 수 있다. 눈으로 물체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명백한 인식작용에도 굴절은 작용한다. 한 줄기 한 줄기 빛의 가닥이 진실을 옮겨주는 것이 아니지만 그 가닥들이 모여 안정된 이미지를 빚어 준다. 굴절된 증언이라도 많이 모이면 역사의 이미지가 그로부터 떠오를 수 있지만, 그나마 없으면 암흑 뿐이다. 그리고 증언이 많아지면 서로간의 교열을 통해 굴절이 줄어들 수 있다. 그것이 이 사회에서 불건강한 강박관념을 해소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