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읽기/ 문학

신생의 즐거움과 위태로움
-2000년 신춘문예 소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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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진 호 (문학평론가·성신여대교수)

 

신인을 보는 즐거움

해마다 연초가 되면 사람들은 신춘문예라는 화려한 언어의 잔치를 경험한다. 탄탄한 문장과 감수성으로 포착해낸 새로운 세계를 접하면서 잔치 분위기에 한껏 빠져드는 것은 비단 문학인만은 아닐 것이다.

신진 작가의 문학이란 기성에 물들지 않는 순결함의 표상이기에 그와의 첫 대면에 설레임을 품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정서이다. 더구나 그 작품들에는 상품만의 고유의 정보를 담고 있는 바코드처럼 그 작가의 문학적 특질과 운명을 내장하고 있기 마련인 것. 첫 작품이란 새로운 문학세계의 출범을 알리는 깃대를 꽂는 일이요, 그러기에 첫 닭의 울음소리에 비견될 만큼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새로운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걸어온 삶의 이력과 세상을 보는 시선, 체험에서 우러난 지혜뿐만 아니라 그 동안 작가가 연마해온 빛나는 언어감각과 충격적(?)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또, 신인의 작품이란 그만의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당대 문단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당대 문단의 흐름을 집약한 것이기도 하다. 다양하게 구사되는 기교라든지, 외국 이론과 기법의 수용 양상이라든지, 소재의 형상화 방식 등 당대 문단에서 첨예하게 논의되는 사안들이 이들의 작품에서 경쟁적으로 구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신인들의 작품세계란 당대 문단의 흐름을 집약한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당대인들의 삶과 체험을 소재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당대인들의 정신적 편모를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오늘날, 신춘문예 폐지론이 왕왕 거론됨에도 불구하고 매년 신문사들이 현상공모를 하고 새해 첫 신문에 작품을 게재하는 것은 이런 신선한 매력과 장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문학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이라 하더라도 신년이 되면 신춘문예 시 한편이라도 훑고 지나가는 무의식적 행사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최근 문학이 위축되고 심지어 문학의 죽음마저 운위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많은 수의 응모작이 쏟아진다는 것은 사회적 관심의 분화에도 불구하고 신춘문예의 순기능에 대한 공감이 여전히 완강하다는 반증이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금년 신춘문예도 이런 여러 의의를 담은 다양한 작품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분단, 80년대, 그리고 실직

금년 신춘문예에도 우리 시대의 중요한 현안들이 다각도로 조망되고 있어서 문학이 시대의 바로미터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탈북 망명자를 인물로 하여, 이데올로기는 쉽게 포기했지만 북에 두고 온 여인에 대한 그리움만은 포기하지 못한 채 끝내 죽음에 이른다는 내용의 전유선의 「구스타프 김의 슬픈 바다」(문화일보)는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분단의 비극을 되새기게 해주는 작품이다. 속도감 있는 문체와 구성을 바탕으로, 90년대 소설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소재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새삼 돋보였고, 특히 액션 영화를 보는 듯한 긴박감과 속도는 이 작품의 중요한 장점을 이루고 있다.

편혜영의 「이슬털기」(대한매일)는 80년대의 시대적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내상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점을 새삼 환기시켜주는 작품이다. 학생운동을 같이 했으나 이제 운명을 달리한 선배의 영혼을 천도(薦度)하는 굿에 참가하면서 진행되는 이 작품에서, 특히 출산을 앞 둔 여주인공이 굿이 끝나갈 즈음 출산을 하게 된다는 암시적 처리는 80년대의 상처가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보낼 과거형이 아니라 여전히 수용하고 치유해야 할 우리 모두의 과제임을 환기시켜 준다.

분단과 80년대의 문제와 더불어 한층 깊이 있게 천착된 소재가 IMF 이후 우리 사회의 화두처럼 회자되는 실업자의 문제였다. 송은상의 「환지통」(조선일보)이나 이영임의 「일곱 말가웃」(경향신문)은 실직자가 겪는 정신적 고통의 문제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 작품들이다. 이 두 작품은 우리가 IMF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난 듯이 보이지만, 사실 지난 2년간 우리가 겪어야 했던 상처가 의외로 깊고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노숙자들의 범람이나 실직 가장들의 자살처럼 사회적 이목을 끈 경우를 제외하고도 아직도 주변에는 빚더미에 쫓겨 친척집을 전전하거나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신음하는 경우가 많다. IMF는 종결형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인 셈인데, 「환지통」은 이런 상황에서 한 실직 가장이 겪는 정신적 상처를 기록하고 있다.

광고회사의 중견 간부로 한때 잘 나가던 카피라이터였던 화자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실직자로 전락한다.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아내는 남편의 위기의식을 헤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별거를 요구해오고 끝내 이혼에 이르고 만다. 주인공의 통증이 한층 격렬해진 것은 이때부터다. 갈비뼈 밑이 욱신거리고 아무리 긁어도 가려움증은 가라앉지 않으며, 끝내 피를 보고서야 그 통증이 완화되는 증세, 곧 환지통을 느끼는 것이다. 다리가 잘려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통증을 느낀다는 환지통(幻肢痛)이란 사실 심리적인 것이고,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그것을 작가는 잃어버린 꿈을 잊지 않기 위해서 벌이는 심리적 노력과도 같은 것으로 설명한다. 화자는 한때 시인이 되고자 했고, 광고회사에 입사하면서는 시와 같은 카피를 쓰겠다는 일념으로 근무했었지만, 실제 생활이란 외국의 잡지나 위성방송을 모방해서 적당히 광고문구를 만드는 게 고작이었고, 심한 경우 좀더 벗기라는 간부들의 눈치를 요령껏 수용해야 하는 수모의 연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통증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이는 일상의 무력 속에서 시와 같은 카피를 쓰고자 했던 주인공이 지난 시절의 꿈을 잊지 못하고 스스로를 환기하는 일종의 무의식적 암시로 제시된다.

집에서 소일하던 이 화자가 산책길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여자 역시 동일한 질병의 소유자다. 그녀는 남편이 7년 전 뺑소니 차량에 치여 한쪽 다리를 절단한 뒤 보인 환지병 환자의 아내였던 관계로, 그 병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다. 화자는 이 여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점차 자신의 환지병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는데 어느 날 사라진 여자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가 뜻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의 남편이 7년간 앓다가 사실은 작년에 죽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그녀 자신이 환지병 환자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 환지병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작가는 실업자의 정신적 고통이 보이지 않는 환부로 신음하는 환지병처럼 깊고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데 작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인간의 꿈과 그것이 스러질 수밖에 없는 일상적 삶의 비극적 국면을 동시에 환기시켜내고 있다. 카피를 쓰겠다는 꿈을 갖고 광고회사에 취직했으니 그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던 화자나,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않기 위해서 환지병 환자가 된 여자는 모두 꿈을 잃고 무위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현실의 논리에 쫓겨 하루하루를 살지 않을 수 없는 현대인 모두를 대변하는 인물이며, 그렇기에 환지통이란 이 시대를 사는 사람 모두의 상처이기도 하다. 실업자들이 겪는 정신적 상처란 사실 우리 모두가 겪는 환지병과도 같은 셈이고, 그런 점에서 이 작가는 한 개인의 고통을 시대의 고통으로 치환하는 능숙한 수완을 보여주었다.

「일곱 말가웃」은 은행의 중견사원이었던 주인공이 빚보증을 잘 못 서서 파산한 이후 겪는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과 동일한 소재이지만, 은행원에서 쌀집주인 즉, 화이트칼라에서 옐로우칼라로 존재의 변신과정을 내밀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 작품에서는 실직자의 정신적 상처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감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실직 후 아내는 가출을 해버렸고, 아이들은 형수에게 맡겨져 있다. 큰형님의 도움을 받아 작은 방 한 칸 달린 쌀집을 연 것이 2년 반이 되어가지만 그는 아직도 자신의 변신을 낯설어하고 있으며 동네 사람의 눈에도 “이런 동네에서 장사나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2년 반이라는 시간과 쌀가게에 쏟은 정성은 어느 덧 그를 쌀집 주인으로 변신시켜 놓고야 만다. 육체적인 일이란 뼛속까지 젖어야 하는 법, 쌀집주인으로서의 몸과 삶을 만들어 가는 일은 쌀을 재는 것만큼이나 정확한 것이다. 그에게 모든 것이 쌀저울의 눈금으로 환산되어 이해되는 것은 이 부지불식간의 변신을 상징하는 셈이다. 가출한 아내의 심리와 미친 여자를 대응시키면서 아내에 대한 이해와 그리움을 부조해내는 과정도 저울의 눈금을 통해서 감각된다.

 

그녀가 소주를 반쯤 마시고 어깨로 숨을 고르는 모습이 꼭 참새와 같았다. 비에 젖은 참새. 나는 그녀를 안아다 전자 저울 위로 올려놓는다. 그녀의 키가 나와 똑같아진다. 00:00으로 죽어 있던 숫자들이 재빠르게 살아나서 푸르르 몇 번 떨더니 56:45로 오르락내리락한다. 일곱 말 가웃. 그녀는 일곱 말 가웃이었다.

 

여자의 몸무게마저도 말(斗)로 환산되는 이 무의식적인 변신, 삶이란 이렇듯 의식과 무의식마저 압착해 오는 현실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을 이렇듯 평이하게 포착하는 작가의 역량은 상당한 것이다.

 

욕망, 광기, 탐미주의

시대적 상처를 다룬 작품과 더불어 금년 신춘문예의 주요한 흐름으로 부각된 것은 현대사회의 비정함이나 개인들 속에 잠재된 탐미적 성향과 병적이기까지 한 욕망과 살의(殺意) 등을 다룬 작품들이었다. ‘문신(文身)’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한 인간에게 내재한 광기와 욕망을 밀도 있게 그려낸 천운영의 「바늘」(동아일보)이나 불우한 환경에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친구를 소재로 한 김종은의 「후레쉬 피쉬 맨」(한국일보), 두 인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현대인이 겪는 정신적 불모 상태를 문제삼은 오영섭의 「조롱」(중앙일보) 등이 그런 경우들이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둔 앞 항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 부류 작품들은 개인의 내면에 주목하고 있는 셈인데, 특히 관심을 끈 작품은 「바늘」과 「후레쉬 피쉬 맨」이었다.

「바늘」은 ‘문신’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활용하여 인간의 내면에 잠복된 광기와 욕망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로, 금번 신춘문예 소설 중에서 가장 문제작으로 다가왔다. 문신하는 일을 직업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은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곱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둥그렇게 붙은 목과 등의 살덩이”의 외모를 가진 여자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목소리에다 말더듬이 증상까지 가졌다. 이런 여자가 문신 새기는 일을 하게 된 동기는 한복 만드는 일을 하던 어머니가 출가(出家)하면서 고아나 다름없이 세상에 버려졌기 때문이다. 바늘은 출가하기 전의 어머니가 옷감에 수를 놓는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여자가 육체에 수를 놓는, 곧 문신의 수단이 되었다. 여린 옷감을 아름답게 수놓던 ‘바늘’이 그 대상을 육체로 바꾸면서 피의 냄새와 인간의 광기와 욕망, 공격성을 함축하는 메타포로 변하는 것이다.

여기에 물론 인물의 심리적 전이과정도 아울러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연약하기에 쉽게 상처가 나는 인간의 살갗에 문신을 하러 오는 사람들의 심리를 통해서 확인된다. 문신이라는 인위적인 상처내기가 갖는 의미란 무엇인가. 여자에게 문신을 하러 오는 남자들은 대부분 ‘단단한 외피’를 얻으려는 사람들이다. 문신은 무력한 인간이 자신을 무장하는 도구로써 사용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히면서 거기에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는 배경에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전쟁터와 같은 곳이라는 데 있다. 무력한 개인은 세상이 주는 시련과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욕망한다. 그들에게 문신은 일종의 심리적 부적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전쟁이 좋아. 전쟁은 강하거든. 강함은 힘에서 나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 운 건, 힘이야.” (중략) “당신 집에서 나온 남자들은 들어갈 때보다 훨씬 더 당당 한 표정이지. 왜 그런 표정인지도 알아. 지난달에 당신 집에서 나온 남자가 내게 팔 뚝에 새겨진 장검을 보여줬어. 그 사람도 알고 있는 거야. 무기들이 가진 힘을.” (중략) “그때 난 알았어. 내가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거세를 하거나 강 해지는 것.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해? 강해지는 것밖에 없어. 넌 그 걸 해줄 수 있잖아. 내 몸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가득 채워 줘. 칼이나 활 미사일 비행기 뭐든.”

 

여자에게 문신을 부탁하려 온 남자의 이런 진술은 일견 부질없어 보이는 피부장식에 불과한 문신이 어떤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는가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여자 또한 자신을 버린 어미와 그 어미를 출가하게 만든 스님에 대한 뒤틀린 반항심과 공격욕구를 바늘이라는 도구를 통해 용해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말더듬이인 여자가 문신을 완성하면서 어눌증을 해소하는 것 또한 이와 관계가 있다. 여자가 전쟁기념관에서 보여주는 살의는 간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륵암에 머무를 때 새끼 고양이를 변소간에 던져서 죽이는 장면과 함께 피해자의 억눌린 정서가 가해자의 공격적 정서로 뒤바뀌지는 위태로운 순간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바늘에서 칼로 이어지는 메타포가 함축하는 그 위험하고 위태로운 광기의 정서는 현대소설에서 아직까지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현파 스님의 죽음과 어머니의 자살 역시, 다소 석연치 않은 점이 있긴 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어머니의 느닷없는 출가의 배경에는 현파 스님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나중에 현파 스님의 죽음을 놓고 자신이 살해했다고 주장하다가 자신도 자살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남긴 유품에 끝이 모두 잘라진 바늘들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스님의 살해도구로 바늘이 쓰여졌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면 어머니는 왜 스님을 죽였고, 또 자살을 하게 되었는가. 합리적으로 보자면 어머니가 스님을 살해하고 또 자살한 원인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어머니는 스님을 따랐고, 그래서 출가까지 하게 된 인물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원인은 다른 데 있다. 곧 고양이 새끼를 죽인 것과 동일한 살의가 어머니에게도 발동한 것. 즉 화자가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변기통 속에 던져 넣은 것은 고양이로부터 받은 ‘여리고 아름다운 감정’ 때문이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과 순간적인 살의가 합작하여 새끼 고양이를 죽이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 탐미주의의 다른 한편에는 스님에 대한 관능적인 욕망이 작용하고 있다. 스님의 복숭아 빛 맨 머리를 보면서 성적 충동을 느낀다거나 어머니의 자살 소식을 듣고 여자의 하얀 알몸을 떠올리는 주인공의 심리에는 인간의 욕망 속에 꿈틀거리는 관능을 단적으로 표상하며, 이런 심리의 연장에서 어머니의 살인과 자살이 이해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이 작품은 일종의 병적 탐미주의를 이면에 깔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작품 전반에서 구사되는 관능적인 이미지와 상징, 살기와 죽음의 이미지들은 이런 작가의 병적 탐미주의를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인 셈이고, 그런 점에서 이 작품에서 일본 소설의 그림자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뛰어난 문장과 감각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병적 탐미주의가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고, 그것이 자칫 서사의 균형을 파괴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병적 탐미주의의 참담한 실패를 우리는 이미 20년대 문학사에서 생생하게 본 바 있지 않은가.

「후레쉬 피쉬 맨」은 「바늘」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대 사회의 병리적 측면을 보여준다. 고교시절 체육시간에 야구를 하다 볼을 잘 못 던져 코피를 터뜨린 일을 계기로 친구의 호스피스 노릇을 자처하게 된 화자에 의해 한 청년의 비극적인 생애가 소개된다. 상처가 잘 낫지 않는 등, 원인을 알 수 없는 친구의 질병, 즉, 일종의 불치병으로 표현되는 그 병이 사실은 외로움과 그리움에서 비롯된 정신적 질병이었다는 것이 작품 후반부에 밝혀지는데, 스무 살의 청년에게서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가려고 하는 건강한 삶의 자세가 아니라, 지극히 비관적이고 자폐적인 삶의 초상이 발견된다는 점에 이 작품의 의미가 있다.

자기 집 지하실에 방치되어 살다가 결국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이후에 자학적인 생활을 하다가 대학 1학년 때 짧은 생을 자살로 마감하고 마는 소설의 인물은 육체적으로 스무 살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발육이 정지된 불구적 영혼이었다. 자신을 생선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이 세계는 수산시장과 냉동상태로 표현되는 비정한 세계였던 것. 유독 심하게 추위를 타고 몸에 일부러 상처를 내면서까지 그가 확인하려고 했던 것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4살 때 넘어져 무릎에 피가 났을 때 보여주었던 부모의 애정과 관심, 그리고 그때 느꼈던 단순하고도 행복했던 그런 감정들이었던 것이다. 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화려한 세계의 한 편, 어두운 골방 안에서 모기장을 쳐놓고 고독과 결핍에 시달리며 4살 때의 기억으로 퇴행하려 했던 한 청년의 초상 앞에서 현대 사회가 갖고 있는 우울한 음화 한 장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렇듯 이 부류 작품에서는 현대를 사는 개개인들이 지닌 내적 욕망을 인간 일반의 욕망으로 치환하여 보여주는 능숙한 솜씨가 돋보인다.

 

새로운 문학과 신생에 대한 기대

올해 소설들은 대체로 기법의 현란한 실험에 몰두한다거나 사이버 공간으로 몰입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정통적인 기법과 구성으로 주변 일상의 문제를 찬찬히 천착하는 치열한 정신과 문제의식이 유독 돋보이며, 그래서 평이하게도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감동의 정도는 한층 깊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인들의 작품에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백 편의 응모작 중에서 선발된 작품이기에 상대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제를 천착하는 집요함이나 소재를 이해하고 전달하는 표현 방법에서 매끄럽지 못한 경우도 발견된다. 삶을 스냅 사진 찍듯이 포착해내는 게 단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세상살이의 흐름이라거나 고통의 근본원인 등에 대한 질문이 내재되어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치유하려는 진지한 모색 역시 목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부 작품에서는 그런 진지한 노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대신 기술적 훈련에 힘입은 문장과 감각만이 빛을 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심한 경우는 주제가 무엇이고 작가의 궁극적 의도가 무엇인지조차 모호한 경우도 있다. 현대소설의 특징 중의 하나인 ‘모호성’이 지나쳐 몇 번을 읽고도 의미를 해독할 수 없는 작품이란 사실 누구를 위해서 쓰는 것인지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R. 페더만의 말대로, 작가가 된다는 것은 감각적 재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사는 것이고, 언어를 통해서 역사를 구성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90년대 소설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작품이 현실과 관련을 맺지 못하고, 오히려 대중매체가 투사하는 현실의 이미지와 관련을 맺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런 흐름은 매체 발달에 따른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긴 하지만, 그것이 문학사적으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문학의 존재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 문학은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한 자의식적 성찰을 통해서 변화를 추구하고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는 장르이고, 그렇기에 작가라면 시대 변화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문학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신생의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금년 신춘문예가 대체로 만족스러웠던 것은 이런 질문이 작품 전반에서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90년대 문학을 반성하고 새로운 문학을 대망하는 새로운 세기의 첫 수확이었다는 점에서 금년 신춘문예에 거는 기대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우리 문학의 미래는 이들의 향후 진로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