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현상읽기/ 문학

시에대한열병. 그리고 신인의 독창성
-2000년 신춘문예 시에 대하여

문흥술(문학평론가)

 

활자언어로서의 문학을 사랑하는 의미

해마다 겨울이 오면 사람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설계하면서 분주한 시간을 보낸다. 특히 99년의 겨울은 새 천년을 맞이하는 기대감으로 모두가 가슴 설레면서 하루하루를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새해도 새 천년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하나의 소식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혹시나 하면서 신춘문예의 당선 통지가 오기를 기다리는,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처럼, 문학인이 되고자 하는 많은 예비 문학도들은 해마다 겨울이 오면 신춘문예에 대한 열병을 앓는다.

컴퓨토피아의 시대로 명명되는 새 천년. 모든 것이 컴퓨터의 코드 기호로 처리되는 영상 이미지 시대에 활자언어로서의 문학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띠는 것일까?

부와 명예와는 전혀 상관없는 문학, 끝도 없이 읽고 생각하고 경험하고 쓰고, 찢고, 또 쓰는 그런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을 지내야 하는 습작 시절, 등단 이후에도 밤을 새워 원고를 쓰고 고치고 해야 하는 시간들. 어쩌면 그런 시간을 문학 아닌 다른 일들에 투자한다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이른바 그 분야에서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은데도 아무 것도 아닌 문학에 그토록 목숨을 거는 것은 왜일까?

문학은 고귀하고 성스러운 것이다. 문학은 항상 우리가 살아가는 경험세계의 모순을 비판적 상상력을 통해 간파하고 그 모순이 극복된 가능세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문학은 어둠 속에서 길 잃고 방황하는 무리들이 나아갈 올바른 좌표를 제공해주는 밤하늘의 별빛과 같은 것이다, 푸코(M. Foucault)는 문학을 고독한 왕자라 하지 않았던가?

다른 모든 것이 유행을 따라간다 하더라도, 문학은 최후까지 남아 인간의 본래적 고향을 지향하는 ‘백조의 노래’인 것이다. 그러기에 문학을 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물질적 가치를 초월한 어떤 고귀한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인이 되는 한 방법으로서의 신춘문예는 우리 나라에만 있는 것으로, 새해를 맞이하면서 벌이는 문학인의 축제이다. 신인으로 문단에 발을 디디는 이 축제의 자리에 주인공이 되기 위해 많은 예비 문인들이 해마다 가슴 졸이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신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국의 문학사적 전통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문학사적 맥락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통해 자신만의 고유하고 독창적인 문학세계를 지향해야 한다. 기성 문인의 세계를 답습하는 작품으로는 결코 신인이 될 수 없다. 신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기성 문단에서 볼 수 없는 개성적인 문학세계이다. 작품 자체가 완결성을 지니더라도 기성 문인의 세계를 흉내내면 그것은 신인의 작품이 될 수 없다. 다소 거칠더라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드러낼 때, 신인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2000년 올해 신춘문예에 등단한 시들을 보면 대게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확보하고 있다. 시대와 삶과 인생에 깊이 절망하고 고뇌하면서 자신만의 개성적인 시 세계를 확보하고 있는 신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현란한 영상이미지에 의해 점점 왜소해지고 있는 우리 문단에 조금이나마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어 다행스럽다.

 

우리사회의 일상적인 문제를 다루고있는 작품들

올해 신춘문예 당선 시들을 몇 가지로 분류할 때, 먼저 우리 사회의 일상적인 문제를 다루고있는 작품들을 들 수 있다. 김성용의 「의자」(매일신문), 이기인의 「ㅎ방직공장의 소녀들」(경향신문), 이덕완의 「건봉사 불이문」(대한매일)이 여기에 해당된다.

 

극장에 사무실에 학교에 어디에 어디에 있는 의자란 의자는

모두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얼굴은 없고 아가리에 발만 달린 의자는

흉측한 짐승이다 어둠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감각과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지니고 온종일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리는

의자는 필시 맹수의 조건을 두루 갖춘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이 짐승에게는 권태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아니 죽음은 있다

안락한 죽음 편안한 죽음만 있다

먹이들은 자신들의 엉덩이가 깨물린 줄도 모르고

편안히 앉았다가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려 한다

(……)

-김성용, <의자>

 

이 시는 의자를 통해 삭막한 일상의 한 단면을 조망하고 있다. 극장, 사무실, 학교 등에서 우리는 수많은 이들과 만난다. 그런데 물신화되고 개인화된 오늘날 그런 만남은 진정한 인간적 유대감을 상실하고 있다. 공동체로서의 유대감을 상실한 파편화되고 도구화된 만남만이 있을 뿐이다. 스쳐 지나가듯 무심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신도 상처를 받으면서,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낀다. 이런 일상의 부정적 측면을, 우리가 흔하게 접하면서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의자를 매개로 해서 그것을 네 발 달린 짐승에 비유하여 시적 의미를 부여하는 감각은 참신하다. 그러나 그 참신함이 또한 시선의 협소함을 초래하고 있다. 말하자면 너무 일상의 사소한 측면에 치중하다보니 시 세계가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소재에 삶과 인생과 사회의 중심 주제를 함축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깊이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목화송이처럼 눈은 내리고

ㅎ방직공장의 어린 소녀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따뜻한 분식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제 가슴에 실밥

묻은 줄 모르고

공장의 긴 담벽과 가로수는 빈 화장품 그릇처럼

은은한 향기의 그녀들을 따라오라 하였네

걸음을 멈추고

작은 눈

뭉치를 만들었을 뿐인데,

묻지도 않은 고향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늘어놓으면서 어느덧

뚱뚱한 눈사람이 하나 생겨나서

어린 손목을 붙잡아버렸네

그녀가 난생 처음 박아 준 눈사람의 웃음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네

(……)

-이기인, <ㅎ방직공장의 소녀들>

 

근로소녀는 70∼80년대 민중시와 노동시에 자주 등장한다. 이들 시는 거대한 이념을 전파하고 과격한 선전구호를 외치기 위한 방편으로 비참한 삶을 영위해 가는 근로소녀를 등장시킨다. 그런데 이 시에 나타나는 근로 소녀들은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춥고 가난하고 외롭고 힘들지만, 인간적인 훈훈함과 순수함을 잃지 않은 여공들의 모습을 부드럽고 온화한 시선으로 포착하여 맑고 깨끗한 이미지로 차분히 형상화하고 있다. 어떤 큰, 그러면서 훤소한 목소리가 아니라, 일상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의 고단한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감싸안으려는 시인의 시선이 차분하게 제시될 때, 독자들은 잔잔한 감동과 공감을 얻는다.

 

(……)

라면 혹은 김밥을 주문한 분식집에서

생산라인의 한 소녀는 봉숭아 물든 손을 싹싹 비벼대네

오늘도 나무젓가락을 쪼개어 소년에 대한

소녀의 사랑을 점치고 싶어하네

뜨거운 국물에 나무젓가락이 둥둥

떠서, 흘러가고 소녀의……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고 분식집 뻐꾸기가

울었네

(……)

 

추운 겨울 야근을 하는 소녀들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꿈과 사랑을 잃지 않는 측면을 쉽고 일상적인 이미지로 압축시킨 이 부분을 읽노라면 뻐꾸기의 울음이 시인의 울음이자 독자의 울음으로 전이됨을 느낄 수 있다. 점점 삭막해져가고 황폐해져 가는 우리 시대에 시가 쓰여지고 읽혀질 수 있는 측면이 무엇인지를 확고히 정립할 때, 좋은 시는 쓰여질 수 있다. 다른 여러 측면들이 있겠지만, 비인간화 시대에 있어서 따뜻한 인간미를 추구하는 것은 서정시의 오랜 전통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시인은 서정시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확보할 터전을 마련하고 있다. 다만 마지막 부분은 부드럽고 따뜻한 이 시의 전체 분위기와 관련하여 불필요한 사족으로 여겨진다.

(……)

같고 다름이 하나인데

이곳에는 모두가 둘이라니

 

민통선 철조망이 반세기 동안

녹슨 풀섭에서 가람을 두르고 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독경 소리가 풀향기에 섞인다

깨진 기왓장에 뒹구는 낡은 이념들

초병들의 군화 발자국 절마당에 가득한데

목맥일홍나무에서 떨어지는

자미꽃의 핏빛 절규는

나무아미타불탑 위의 돌봉황에 실려

북으로 가느가 갔는가

 

적멸보궁 터진 벽 뒤로 날아가는

하얀 미소를 보며, 아내와 난

보살님이 준 콩인절미를

반으로 나누어 먹는다

-이덕완, <건봉사 불이문>

 

현재 우리 시단에서 유행하는 기행시의 형태를 취하면서 분단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거의 완성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곧 기성 시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시적 안정감과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세련미로 인해 신인다운 패기와 독창적인 측면이 결여되어 있다. 특히 주제적 측면에서 깊이의 부재가 문제이다. 분단 문제는 우리의 시대적 역사적 전망과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전제될 때, 다루어질 수 있는 주제이다. 분단으로 인한 아픔의 흔적은 우리 삶의 곳곳에 내재되어 있다. 그런 문제들에 대한 실천적 삶과 이론적 측면이 상호 융합되면서 절실함과 치열함이 획득될 때 시적 울림도 큰 반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분단문제, 여성문제, 도시문제 등의 제반 측면을 모두 다룰 수는 있다. 그러나 시적 깊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분야에 치열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시의 경우, 한 측면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행해질 때, 시적 세련미와 완결성도 한층 돋보일 것이다.

 

시 쓰기의 어려움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

두번째 부류로는 대중소비사회에 있어서 도시의 일상의 무미건조함과 시 쓰기의 어려움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다. 정진경의 「알타미라 벽화」(부산일보), 조정의 「이발소 그림처럼」(한국일보), 김규진의「집 속엔 길이 없다」(문화일보)가 그것이다.

 

(……)

그날은 아마 빨간 딱지로 표시된 일요일이었지요 아직 떨어질 수 없는 홍조 띤 잎새를 배경으로 벤치에 앉은 굽신한 등이 눈에 들어왔어요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털갈이 중인 비둘기들 땅콩 모이로 더 여문 살이 오르고 있었어요 철제다리 너머, 잎새든 깃털이든 상관없는 바람이 불고 벤치와 벤치 사이 깃털 같은 흙먼지가 벤치의 발목을 잡고 놀았어요 빨간 딱지로 표시된 일요일이라고 지루한 평화라고 말하는 듯했어요알타미라 벽화였어요 황소 눈알 같은 슬픈 껌벅임이 들리는 듯했어요

-정진경, <알타미라 벽화>

 

(……)

밤이 지나고

문 밖에 아침이 검은 추를 끌며 지나가고

빈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회색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잠에 들어 두 편의 꿈을 꾸었다

풀은 흐리고

새는 고요하고

해는 타오르지 않고

티베트 상인에게서 사온 테이블보를 들추고

식탁 아래 몸을 구부렸다

자꾸만 어디다 무엇을 흘리고 오는데

목록을 만들 수조차 없었다

허둥지둥 자동차를 타고 되짚어 가는 꿈은 유용하다

탱자나무 가시에 심장을 얹어두고

돌아온 날도

나는 엎드려 자며 하루를 보냈다

삶이 나를

이발소 그림처럼 지루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조정,<이발소 그림처럼>

 

「알타미라벽화」는 백화점의 온갖 상품들, 그리고 가을날 일요일의 ‘지루한 평화’를 차분한 어조와 유연한 리듬, 참신한 이미지로 다루고 있는 시이다. 일요일 할 일 없이 공원에서 소일하는 노인, 그리고 살찐 비둘기, 황량한 바람, 철제다리의 벤치가 대비되는 장면은 즉물화되고 무미건조하며 비인간화된 도시의 삶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한 편의 풍경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발소 그림처럼」은 도시의 획일화되고 무의미한 일상을 단조롭고 적막하게 묘사하고 있다. 시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생명체로의 활동적인 움직임을 거세당한 채, 이발소의 그림 속의 소재들처럼 정교하고 획일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도시와 관련된 것을 비판하는 시들에서 요청되는 것은 비판의 대안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일종의 유희에 불과하다. 우리 시에서 도시의 일상을 다루는 시들은 도시성을 비판하고 상실된 자연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도시적 서정시와, ‘압구정동’으로 표상되는 상품물신화를 해체적으로 비판하는 해체시 계열이 있다. 두 가지 계열체 모두 도시를 비판하고 나아갈 방향을 뚜렷이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때, 위의 두 시가 자신만의 시 세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두 계열체에 대한 정밀한 점검을 통해 그 특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지향점을 설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도시적 삶이 지니는 문제점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통해 스스로를 절망의 심연으로 내몰 때, 그 돌파구는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

모든 길이 걸어 들어간 바닷가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발을 씻는다

넘어온 수많은 들과 산을 물 위에 띄워 보내며

꽃잎처럼 하나 둘.

또한 마음의 길까지도

아직 나에게도 길이 남아 있을까

나의 길은 아직도 나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시인은 출근하지 않네

집 속엔 길이 없네

이리로 오게

이리 와 걸어가세

바다의 밑바닥을.

한번도 걷지 않은 가슴속의 황야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김규진, <집 속엔 길이 없다>

 

상품물신주의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이며 시가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를 문제삼고 있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시대에 있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싯다르타’나 ‘예수’처럼 고행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며, 그 고행을 통해 시가 나아갈 길은 “수천, 수만의 길을 열고 있는 꽃무리들”이 있는 세계라는 것, 따라서 시를 쓰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어떤 가시적인 측면이 아니라 ‘바다 속’의 심층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을 절제된 목소리와 간결한 이미지로 시화하고 있다. 그러나 시 쓰기에 대한 절망의 정도가 깊이를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강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단점을 노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삶의 고뇌와 번민을 표출하고 있는 시들

세번째 부류로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이면서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삶의 고뇌와 번민을 표출하고 있는 시들로, 박성우의 「거미」(중앙일보), 이승수의 「고래」(동아일보), 최영신의 「우물」(조선일보)이 여기에 해당된다.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生)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

-박성우, <거미>

 

(……)

기침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크르릉대며 전철이 서고

혈흔 같은 그의 딸이 손도 잡아 주지 않는

아비의 발자국을 지우며 뒤따라 나간다

병들고 괴팍한 선장과 헤어졌으니

선원들의 불만 섞인 술렁임도 이제 더는 없으리

저 사내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천 바다를 아주 떠나고 싶은 것일까

책을 주으며 무심코 올려다본 전철의 천장은

묘하기도 하지, 궁륭 모양으로 부풀며

제 흰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조금씩 깊어 가는데

남겨진 사람들

출렁이는 물살에 이리저리 내몰리다가

몇몇은 토해지고 몇몇은 그대로 잠이 든다

나는 가만히 책을 주웠다

-이승수, <고래>

 

「거미」는 양조장에서 실직 당한 듯한 한 사내의 죽음과 그 죽음을 둘러싼 비정한 세태, 그리고 살아있는 자의 삶의 고통을 ‘거미’에 대비하여 참신하면서도 압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고래」는 전철을 타고 가면서 책을 읽다가 우연히 마주친, 노숙자임직한 사내의 초라한 모습과 그를 따라다니는 ‘혈흔 같은 딸’, 이들에 무관심한 전철 안의 풍경을 절제 있는 어조로 차분하게 시화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고통받고 소외 받는 이들의 비참한 삶을 잘 제시하고 있다.

위의 시를 쓴 두 시인은 만만치 않은 시적 상상력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직접 경험이든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이든, 두 시인은 사회를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나름의 시적 안목과 그것을 한 편의 시로 엮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능력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가시적 측면이 아니라 그 본질적 측면에서 포착할 수 있는 확고한 세계관이 정립될 때 확보된다. 그런 세계관을 통해 우리 시대의 본질적 모순을 간파하고 그것에 고뇌할 때 시적 상상력은 강한 개성과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고요로 멈추어 선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물을 퍼올리다 두레박 줄이 끊긴 자리, 우물 둘레는 황망히 뒤엉킨 잡초로 무성하다.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신경이 눌린 곳, 깜깜한 어둠만 가득 고여 지루한 여름을 헹구어낸다.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려졌다 사라진다. 내가 서서 바라보던 맑은 거울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몇 겹인지 모를 시간의 더께만 켜켜이 깊다.

(……)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그리움으로 멈추어 선 우물 속, 젊은 날의 얼굴을

비춰본다. 생은 시 한 줄 길어 올리기 위해 두레박 줄이 필요했던가.

인적이 끊어지고 잡초만 무성타 한들 그 아래 퍼올려지고 내려지던 환영들.

물그리메의 허사로 증발하는가. 깜깜한 우물 속 어디선가 끝없는 고행의 길로

일생을 바친 소녀의 빈 웃음들이 둥글게 받은 하늘에 기러기 한 줄 풀어 놓고 있었다.

 

그대의 우물은 아직도 갈증의 덫에 걸려 있는가?

-최영신, <우물>

 

이 시에는 한 여인의 삶이 우물 속에 용해되어 오롯이 담겨 있다. 이 시는 고도의 함축적인 이미지 속에 삶 전체를 용해시키고 있기에, 이미지 하나 하나가 한스러운 삶의 상흔을 깊이 있게 담고 있다. 잡초 무성하고 두레박 줄이 끊긴 우물은 이제 황혼기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일 것이다. 고통스러운 인생 유전의 길을 힘들게 살아온 뒤, 우물을 통해 바라본 자신에 대한 성찰은 세월의 풍파에 시달리면서 그것을 굳건히 이겨낸 모습이다.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신경이 눌린 곳, 깜깜한 어둠만 가득 고여 지루한 여름을 헹구어낸다.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려졌다”라는 표현은 이 시인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일 것이다. 두레박처럼 삶이란 고통스러운 하강과 행복한 상승이 수없이 반복되는 것이며, 그런 과정에서 심신은 지쳐 시신경이 눌려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어두운 삶은 계속 되풀이될 것이며, 그러나 이제는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들이 되풀이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세월과 시간의 더께를 통해 견뎌온 것처럼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위의 구절처럼 참신하면서도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시인이 지닌 능력의 일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시 한 줄기 길어 올리기 위해 두레박 줄이 필요했던가”라는 표현에서 보듯, 삶의 전부를 오로지 시에 바칠 때 가능한 것이다. 앞으로 이 시인은 시에 대한 끝없는 ‘갈증의 덫’에 시달리면서, “끝없는 고행의 길로 일생을 바친 소녀의 빈 웃음들이 둥글게 받은 하늘에 기러기 한 줄 풀어” 놓는 그런 시들을 쓸 것이다. 그런 신인의 시를 읽을 수 있다면 문학인으로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선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올해의 신춘문예 등단작품도 사소한 일상의 삶에서부터 우리 시대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측면을 다루고 있다. 거칠지만 신인으로서의 패기를 지닌 작품이 있는가하면 작품의 완결성은 확보하지만 신인다운 독창성을 결여한 작품도 있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이다.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신인으로서의 독창성이다. 독창적인 세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재 시단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어떤 시들이 쓰여지고 있으며, 왜 그런 시들이 쓰여지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관을 정립해야 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세기에 시인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위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설정하고 그것을 시로 쓸 때, 당선의 영광은 찾아 올 것이다.

이제 또 다시 신춘문예의 계절이 오면 많은 예비 문인들은 가슴 설레는 나날들을 보낼 것이다. 신춘문예는 자격증 시험이 아니다. 그것은 문인이 되기 위한 한 통과제의에 불과하다. 흔히 신춘문예 당선작이 대표작이자 유일한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당선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 당선 이후 얼마나 열심히 작품을 쓰느냐에 따라 문인으로서의 길이 달라질 것이다. 그만큼 문학에 이르는 길은 가시밭투성이이다. 그 길에 상처받으면서 그것을 열심히 헤쳐나갈 때, 자신만의 문학 세계라는 확 트인 열린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