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상업성과 예술성 하재봉(영화평론가)
무엇이 한국 영화의 흥행성적을 이렇게 올려놓았을까! 한국 영화의 흥행 성적이 심상치 않다. 이것은 지난해 초 「타이타닉」의 흥행을 「쉬리」가 압도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을 제외하고 전세계 그 어디에서도 자국 영화가 「타이타닉」의 흥행을 앞지른 나라는 없었다. 헐리우드 영화의 세계 지배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지난해 한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40%에 육박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수치이다. 문화적 자존심이 강하고 헐리우드 영화에 지배받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프랑스의 경우 자국 영화 시장점유율이 27% 내외이며, 일본은 30%, 영국 14%, 독일 9.5%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한국 영화 시장 점유율 40%라는 수치는 미국을 제외하고 세계 최고 수준이며, 전세계 영화시장 판도에 있어서도 기록할만한 수치인 것이다. 90년대 초만 해도 한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15%를 넘지 못했다. 시장 점유율은 93년 15.9%, 94년 20.5%, 95년 20.9%, 96년 23.1%, 97년 25.5%, 98년 25.1%를 기록했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1백만 신화를 거둔 93년 이후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눈에 띄게 상승해서 94년에는 20%대로 뛰어 올랐고, 97년부터 25%내외의 안정적 흥행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즉 불과 3,4년전부터 한국 영화는 관객동원에 있어서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IMF가 불어닥친 시기와 맞아 떨어진다. 무엇이 한국 영화의 관객동원력을 높인 것일까? 스크린 쿼터 지키기에 목숨을 건 영화인들의 모습을 보고 애국심이 발동해서일까, 아니면 한국 영화의 질이 높아지고 시장경쟁력에서 우위를 확보했기 때문일까. 우선 지난해 성적을 보자. 99년 한국 영화 제작편수는 불과 50편. IMF로 어려웠던 98년보다 3편 늘어난 수치이지만 관객 점유율은 98년의 20%에서 두 배 가까이 신장된 40%로 증가되었다. 개봉편수는 제작편수보다 적은 43편에 불과하다. 한해동안 개봉된 외국 영화 220여편의 1/5밖에 되지 않는 영화로 40% 가까운 점유율을 기록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더구나 99년은 미국의 통상압력에 따른 스크린 쿼터제 폐지 위기, 충무로에 들어왔던 삼성, 대우, 현대 등 대기업 자본의 철수, 그리고 영화진흥위원회 구성을 둘러싸고 신구세력이 충돌해서 신세길 위원장과 후임인 박종국 위원장의 연이은 사퇴로 우리 영화계가 내분에 빠져 자중지란을 겪었던 것을 생각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99년 개봉된 전체 영화 흥행 톱 10에는 1위인 「쉬리」(245만명)를 비롯해서 「주유소습격사건」 「텔미썸딩」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 4편의 한국 영화가 들어 있다. 이에 비해 외화는 「미이라」 (126만명) 「매트릭스」(90만명) 「식스센스」(88만명) 「타잔」(82만명) 「스타워즈 에피소드1」(75만명) 등 다른 해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동안 충무로에서는 10만명만 넘어도 박수를 쳤으며 20만명을 넘으면 대박이라고 만원사례 봉투를 돌렸다. 그런데 지금은 30만명을 넘어도 대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웬만큼 영화를 만들면 30만명 이상은 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50만명이 넘어야 대박 소리를 한다.
99년 한국 영화 흥행 톱 텐을 보자. 1. 쉬리(245만명) 2. 주유소 습격사건(100만명) 3. 텔미썸딩(75만명) 4. 인정사정 볼 것없다(68만명) 5. 용가리(50만명) 6. 자귀모(42만명) 7. 유령(37만명) 8. 태양은 없다(33만명) 9. 링(33만명) 10. 해피엔드(30만명) 순이다.
흥행 10위인 「해피엔드」도 30만명을 넘어선 것이다. 「해피엔드」의 경우 90년대 초만 했어도 한국 영화 1위를 기록하고도 남았을 수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 영화의 흥행 성적을 이렇게 올려 놓은 원인이 되었을까? 첫번째, 영화시장 배급의 변화이다.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배급이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시내 중심가의 좋은 극장을 잡지 못하고 제대로 배급을 하지 못하면 관객 동원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배급전쟁이라고 불릴만큼 좋은 극장을 잡기 위한 영화사의 노력은 필사적이다. 그동안 극장들은 일정한 라인에 의해 배급사와 밀착관계에 있었으나 이제는 각 극장들도 직접 시사회에 참석해서 상영 작품을 고르는 등 각개전투에 들어갔다. 우노의 「유령」과 시네마서비스의 「인정사정 볼것없다」가 맞붙은 지난 여름, 당초의 예상과는 다르게 시네마 서비스의 압도적 후원을 받은 「인정사정 볼것없다」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동안 한국 영화 시장은 직배사 위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영화를 배급하는데 있어서 한국 영화를 배팅할 수 있는 주도적 세력이 등장했고 이것이 한국 영화 흥행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헐리우드 직배가 허용된 88년이후 한국 영화 시장은 워너 브러더스, 콜럼비아, UIP, 디즈니, 20세기 폭스 등 5개 직배사 중심의 독점체제였다. 88년 UIP의 직배 영화 「위험한 정사」가 상영된 이후 99년까지 직배사를 통해 배급된 영화는 모두 598편. 98년의 경우 직배사가 배급한 영화에 모여든 관객은 2천만명을 넘어 섰다. 특히 서울극장의 곽정환 사장은 폭스, 워너, 디즈니 등 3개 직배사의 지방 배급을 대행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동안 강우석 감독은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등의 흥행 성공으로 독자적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강우석 감독은 영화감독에서 제작자 및 배급업자로 변신해서 「투캅스 2」 「넘버3」 「 편지」 등 한국 영화의 배급에 손을 댔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90년대 중반까지 삼성, 대우, 일신창투, 시네마서비스가 군웅할거했으나 대 기업의 구조조정 여파로 충무로에서 대기업 자본이 철수한 가운데 99년말 강우석의 <시네마 서비스>가 한국 영화 배급을 독주하고 있다. 99년 한국 영화 개봉작 43편중 <시네마 서비스>는 10편을 제작 배급했다. <시네마 서비스>의 배급망에 도전을 던진 세력은 제일제당의 CJ엔터테인먼트. 제일제당은 스필버그와 함께 공동투자한 <드림웍스>의 자사 지분을 매각하는 등 한때 영화산업에서 철수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제일제당은 다시 영화산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올해는 「해피엔드」의 배급에 이어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강제규필름의 「은행나무 침대 2」 등 한국영화와 「드림웍스」의 영화들을 배급할 계획이다. 그동안 직배사의 영화 배급 횡포에 시달려왔던 극장들로서는 한국 영화를 주도적으로 배급할 수 있는 세력이 등장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흥행이 예상되는 「타이타닉」이나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같은 직배 영화에다가 미국 내 흥행 성적이 저조했던 영화들을 끼어팔기로 떠넘겼기 때문에 각 극장들로서는 할 수 없이 B급 영화들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두번째 다양한 자본의 유입이다. 전통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충무로에 대기업 자본이 유입된 것은 90년대 초중반이다. VCR을 팔기 위한 소프트웨어 확보 차원에서 영상물을 눈여겨 본 대기업들은 케이블 TV 방영과 함께 영상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현대, 삼성, 대우, SK 등 대기업들은 충무로에 자본을 대면서 한국영화 제작 환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영화는 예술이면서 동시에 산업이다. 거대자본의 후원없이는 절대 성장할 수 없는 장르인 것이다. 그러나 IMF로 98년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영화산업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 빈 자리를 메꾸고 들어온 것이 금융자본이다. 90년대 중반부터 일신창투같은 금융회사에서는 영화 제작에 투자해서 막대한 이익을 보았었다. 일신창투의 선전을 눈여겨 본 미래에셋, 국민기술금융, 산은캐피탈 등 다른 금융회사들이 충무로로 뛰어 들어 충무로 자본을 다양하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국민주라는 이름으로 영화제작에 일반 국민들의 소액 투자를 시도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으며, 「박하사탕」의 경우처럼 일본 NHK의 후원을 받는다든가 「이재수의 난」처럼 프랑스 자본을 유입하는 등 다양한 제작 환경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한국 영화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마케팅을 확대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이런 제작 환경의 변화는 그동안 10억에서 15억원 수준에 머무르던 제작비를 크게 확대시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으로 대형영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쉬리」 「유령」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자귀모」 「이재수의 난」 등 25억원 안팎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들은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한 영상실험, 거대 제작비가 투입된 화려한 액션, 공격적인 마케팅을 가능하게 했고 관객들의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세번째, 인적 자원의 변화이다. 이미지로 사고하고 이미지로 표현하는 본격적인 영상세대가 영화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같으면 예술적 재능이 있는 우수 인력이 문학이나 미술계로 진출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영화판으로 모이고 있다. 감독을 비롯해서 조명이나 촬영 등 스텝들의 인적 자원도 풍부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한국 영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의 개원이라든가 90년대만 해도 손꼽을 수 있었던 대학의 영화과도 이제는 50개 이상의 대학에 개설된 것이 인적 자원의 확충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외에 고독한 작가주의 감독들의 선전도 한국 영화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있다. 관객 동원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지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의 홍상수 감독, 「아름다운 시절」의 이광모 감독, 「초록물고기」 「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처럼 영화를 예술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감독들의 작품들은 우리 영화에 대한 관객의 신뢰를 확인시켜 주면서 여타의 상업영화의 흥행에까지 심리적 여파를 미치고 있다.
역대 한국 영화 흥행사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국 영화 흥행사를 살펴 보자. 우리 나라 영화의 날은 10월 27일이다. 10.26 다음날이어서 외우기도 쉬운데 지금부터 80년 전인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는 28막 3장의 영화 「의리적 구투」가 상영되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한국 영화 상영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 날을 영화의 날로 정한 것이다. 단 한 컷의 스틸 사진이나 필름도 남아 있지 않는 「의리적 구투」는 당시 영화제작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부호 박승필의 지원을 받고 「신극좌」라는 연극단을 이끌던 김도산이 제작했는데 가문의 명예와 재산을 둘러싸고 계모와 전처 아들간의 다툼을 그린 영화였다. 일제 시대의 영화 흥행 기록은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불분명하다. 해방후 대중적 사랑을 받은 영화로서는 1955년 1월 6일 국도 극장에서 개봉된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을 꼽을 수 있다. 서울 관객 12만명을 동원했는데 당시 서울 인구는 불과 150만명. 1961년 1월 28일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신상옥 감독 김진규(이도령) 최은희(성춘향) 허장강(방자) 주연의 <성춘향>은 36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최고 기록을 작성했다. 50년대 초부터 60년대 말까지는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년)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영화가 만들어졌다. 1964년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신상옥 감독의 「빨간마후라」는 25만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제 11회 아시아 영화제에서 감독상, 남우주연상(신영균), 편집상을 수상했다. 60년대는 문예영화 시대였다. 향기 높은 문학 작품을 영상으로 옮기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우수 영화에 대한 정부의 외국영화 수입쿼터 할당제가 문예영화 제작 붐을 일으킨 단초가 되었다. 1968년 국도극장에서 개봉된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드디어 36만명의 「성춘향」 관객동원 기록을 600명 상회하면서 역대 한국 영화 흥행 최고 기록을 작성했다. 4편까지 시리즈로 제작된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유부남과 미혼모, 그리고 그들의 어린 자식 사이의 갈등을 그린 최류탄 멜러 영화로서 전국의 극장가를 눈물바다로 만들었으며, 소위 고무신 관객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주부 관객들을 끌어 모았다. 신영균 전계현 문희가 각각 삼각관계의 한 축을 형성했고 아역으로는 김정훈이 등장했었다. 70년대는 호스테스 영화 전성시대였다. 당시 급격하게 이루어지던 산업화에 의해 농민층이 분해되었고 이들은 곧 도시빈민으로 거대도시 외곽 지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은, 남자들은 공사판 일용직 노동자였고 여자들은 술집 호스테스였다. 소비 향락 문화의 주범으로 등장한 호스테스들은 소위 70년대 작가군의 소설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조해일의 「겨울여자」 등이 각각 그런 소설들이었고 이것은 모두 영화화되어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4년, 46만명이라는 기록적 관객동원에 성공한 신성일 안인숙 주연의 「별들의 고향」은 이장호 감독의 데뷔작으로서 「경아」라는 여자의 인생유전을 슬프게 묘사했었다. 1975년 김호선 감독은 목욕탕 때밀이로 등장하는 송재호와 사창가 윤락녀로 등장하는 염복순 주연의 「영자의 전성시대」를 만들어 국도극장에서 36만명을 동원하였다. 당시의 서울 인구와 비례해 보면 이런 숫자는 요즘의 백만명 관객동원을 상회하는 것이다. 1977년 김호선 감독은 다시 장미희 김추련 주연의 「겨울여자」로 58만명이라는 최고 기록을 작성하게 된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영화산업은 한바탕 구조조정을 겪게 된다. 칼라 텔레비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이미 TV의 등장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지만 칼라 텔레비젼 방송이 시작되면서 영화산업은 결정타를 맞았다. 극장은 문을 닫고 관객들은 떠나가기 시작했다. 80년대 우리 영화 중에서 흥행적으로 전시대를 압도할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년)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년)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년) 「씨받이」(1987년)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년) 등 수작이 나왔지만 흥행적으로는 빅 히트작이 나오지 못했다. 90년대의 흥행작은 임권택 감독 박상민 주연의 「장군의 아들」(91년)이 포문을 열었다. 임권택 감독은 그후 「서편제」(93년)를 만들어 백만 명 신화를 세우게 된다. 오정해 김명곤 주연의 「서편제」는 이청준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서 우리 전통 판소리를 소재로 감칠나고 구성진 소리의 세계를 향한 장인들의 눈물겨운 고행을 다루었다. 물론 「서편제」 신화의 수립에는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의 관심같은 국외적 요소가 작용하기도 했지만 한국 영화로서는 넘기 힘든 마의 벽처럼 생각되었던 관객 백만 명을 가볍게 뛰어넘음으로써 우리 영화 제작 전반에 대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도시 여피족인 신세대 부부들의 삶을 그린 최민수 심혜진 주연의 「결혼 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를 양산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후 「미스터 맘마」 「윗층 남자 아래층 여자」 같은 코미디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90년대 최고의 흥행작은 강제규 감독의 「쉬리」였다. 아무도 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 「서편제」 1백만 신화를 「쉬리」는 가볍게 뛰어넘어 2백만 명을 돌파했다. 「타이타닉」이 전세계에서 상영되며 각종 기록을 수립했지만 유독 우리 나라에서만 자국 영화에 뒤지는 기록을 남긴 것도 「쉬리」가 거둔 보이지 않는 성공의 하나였다. 강제규 감독은 이미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로 오십만 흥행의 벽을 돌파했었는데 두 번째 작품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확실히 요즘 한국 영화는 흥행이 잘되고 있다. 이제 10만 명을 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1백만 2백만을 돌파한 저력이 추진력으로 작용하면서 탄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근래에 제작된 영화만 해도 「편지」 「약속」 「텔미썸딩」 「주유소 습격사건」 「쉬리」가 모두 70만을 돌파했다. 물론 수 십 년 전의 인구에 비례하면 오히려 적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에 영화는 거의 유일한 오락적 수단이었다. 전후의 피폐된 삶에서 대중들은 영화를 통해 새로운 삶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대중들은 얼마든지 다른 오락적 수단을 통해 삶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미적 체험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영화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 어떤 매체도 따라올 수 없는 영화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 때문이다.
영화는 산업이면서 동시에 예술 역대 한국 영화 흥행작들을 훑어보면 그것들 나름대로 충실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중요한 것은 당시 대중들의 정서를 가장 예민하게 건드렸다는 점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한국적 전통이 살아 있는 작품과 누구나 알고 있고 친숙한 우리의 고전이 사랑을 받았고 전후에는 전쟁을 소재로 한 휴머니즘 영화에 관객이 몰렸다. 관객들은 영화 속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생각하고 공감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웃음을 터트렸다. 고도성장의 산업사회로 성장하던 70년대에는 역시 도시 주변부의 고달픈 삶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영화들에 관객이 몰렸다. 신군부가 집권한 80년대에는 사회비판 의식이 배어있는 작품이 주목받았지만 여전히 주류에는 진입하지 못했고, 영상정보화 사회가 진행된 90년대에는 관객들의 높아진 미적 안목을 충족시킬만한 튼튼한 이야기 구조와 미장센으로 다듬어진 영화가 높은 흥행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역대 최고 관객동원의 기록을 갖고 있는 「쉬리」의 성공 요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튼튼한 각본? 치밀한 연출력?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 남북분단이라는 금기된 소재에 대한 과감한 도전? 그 어느 것 하나로 대답이 충족되지는 않는다. 「쉬리」가 빅 히트작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영화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사실 「쉬리」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나란히 냉정하게 비교하면 아직도 우리 영화는 할리우드의 그것과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쉬리」가 우리 나라에서는 「타이타닉」의 기록을 능가했는가? 그 이유는, 영화는 단지 허구의 이야기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완벽한 거짓말을 전제로 한 허구의 예술이면서 동시에 현실보다 더 뚜렷한 현실같은, 즉 현실적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허구적 진실이다. 따라서 잘 만들어진 외국 영화보다는 우리의 땀 냄새가 배어 있는 우리 영화가 관객들에게는 훨씬 현실감을 준다. 물론 세익스피어의 희곡이 그렇듯이 인간 존재의 보편적 문제를 질문하는 영화들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폭넓은 보편성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의 절박한 삶이 절절하게 흐르는 화면보다는 관객들에게 체감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관객들이 우리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조건적인 애국심 때문도 아니다. 우리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보다 우월해서도 절대 아니다. 우리 영화 속에는 우리 자신의 삶이 녹아 있고 그것을 보는 동안 나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미학적 완성도가 예전보다 훨씬 높아지고 선진국의 영화들과 그 격차가 좁아진 것도 큰 이유가 된다. 그러나 99년 한국 영화 시장 점유율이 40%에 육박했다고 해서 그냥 장미빛 청사진에 들떠 있어서는 안된다. 여전히 미국의 통상 압력은 거세지고 있으며 스크린 쿼터 문제도 어떻게 결정날지 예측할 수 없다. 스크린 쿼터가 축소되거나 폐지된다면 한국 영화 상영에 대한 극장주들의 부담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작품 자체의 시장경쟁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이 순지 감독의 일본 영화 「러브레터」가, 이미 불법 유통된 비디오로 1백만명 이상이 보았을 것이라는 예측에도 불구하고 50만명을 돌파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영화 개방에 의한 관객잠식도 만만치 않다. 그동안 일본 영화는 「하나비」 「가케무사」 「우나기」 「나라야마 부시코」 등 칸느와 베를린, 베니스 등 세계 4대 영화제 수상작들에 한해 개방되었으나 일본 영화 2차 개방으로 전세계 대부분의 영화제에 입상한 작품들은 모두 국내 개봉이 가능해졌다. 올해만 해도 「철도원」 「자살관광버스」 등이 개봉되거나 개봉을 기다리고 있으며 머지 않아 애니메이션 영화까지 개방되면 「공각기동대」로 대표되는 소위 져패니메이션, 즉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우리 시장을 크게 잠식해 들어갈 것이다. 일본 영화는 정서적으로 헐리우드 영화에 비해 거부감이 적다는 점에서 향후 큰 위협으로 대두될 것이다. 또 국가 차원의 영화정책이 마련되어서 영화산업을 육성해야 할 것이다. 단지 영화 한 편이 자동차 수출 몇 만대를 상회한다는 등의 단순 숫자 비교의 환상에서 벗어나 영화가 갖는 문화적 전파력과 다양한 부가가치에 주목해야 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부 사이로」를 보기 전에 우리는 이란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러브레터」나 「철도원」을 통해 일본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증대되지는 않았는가? 마찬가지로 지금 일본에서 개봉되어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쉬리」는 단순히 외화를 얼마 벌어들였다는 차원이 아니라, 남북분단의 상처와 그 내상이 깊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며 한국 문화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단편영화나 독립영화의 육성, 상업적 흥행력이 약한 예술영화에 대한 정책적 지원, 등급외전용관의 설치 등 현안사항들이 해결되어야 할것이다. 이제 영상정보화 사회를 맞아 영화는 다매체 정보네트워크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우리들의 삶에 중요한 자장을 제공하는 매체로 발전하고 있다. 영화는 비디오나 케이블 TV, 혹은 시디롬이나 게임 소프트웨어, 캐릭터 산업 등으로 다양하게 몸을 바꾸며 높은 부가가치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고 산업으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영화는 산업이면서 동시에 예술인 독특한 장르이다. 그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절대 발전할 수 없는, 순수문화와 대중문화의 접점에서 형성된 폭넓은 영역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