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망가, 아니메 - 만화 문화를 생각하자 -서동진/문화비평가 만화 열풍 언제부터인지 눈 깜짝할 새에 만화가 융숭한 대접을 받는 시절이 찾아왔다. 부천시는 스스로 만화 도시로 선언하고 만화와 관련된 문화센터를 열고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대학 입시에서도 왕년의 잘나가던 인기학과의 자리를 물리치고 만화 관련학과가 수위를 다툰다. 이미 14곳이 넘는 대학이 만화관련 학과를 두고 있다. 내노라하는 일간지들도 이제 너남할 것 없이 문화면에 만화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두고 있다. 고급스런 문학예술 전문출판사들도 이제 코흘리개 주머니나 탐내는 천박한 만화출판이란 혐의를 벗고 만화책 내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내세운 상품은 이제 얼마든지 즐비하다. 탐나는 만화주인공 인형을 갖기 위해 부러 어린이용 햄버거를 사먹는 어른들도 부지기수이다. 이런 만화의 성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만화 문화에 대한 생각은 희박하다. 그나마 만화에 대해 사회가 공식적으로 보이는 관심은 그저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만화의 잠재적 시장가치를 두루 확인한 자본의 관심이고, 또 하나는 만화가 갖는 의심스런 사회적 효과를 감시하는 법의 관심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각각이 들여다보는 만화가 한결같은 만화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듯 하다. 이 둘은 똑같은 만화 한가지를 두고 의견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만화에 대한 이미지를 맘에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가 지켜보고 집적거리는 만화는 똑같은 하나의 만화가 아니라 또 다른 두 개의 만화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자본은 만화가 애니메이션,캐릭터,팬시,컴퓨터 게임 등으로 연결되는 고부가가치산업이라 생각한다. 어느 한켠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듯 자본은 문화를 상품으로 다룰 뿐 심오한 내용과 가치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순전히 악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허튼 논리이다.
자본 앞의 만화 만화가 상품이란 것은 만화의 악덕이 아니라 만화 자체의 실존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만화는 전문적이고 배타적인 심미적 취향을 가진 한정된 소수의 사람들이 누리는 볼 거리의 세계에서 벗어나 평범하고 소박한 취미의 대중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볼 거리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런 표준적이고 평범한 볼거리의 세계를 빚어내고 또 그런 볼 거리를 볼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라고 할 만화의 시선을 만들어낸다. 이 때 말하는 시선이란 한 명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시각적 능력과 그 시각이 가닿는 대상 사이의 거리와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꽃 한 송이를 보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자연스레 느끼고, 그것을 곧잘 여성에 빗대며, 또 정원에 심거나 아니면 화병에 꽂아두고 음미해야 할 대상이라 생각하는 등등의 생각은 모두 그 꽃을 보자마자 튀어 오르는 습관같은 의식이다. 이런 습관같은 의식이 바로 시선이다. 물론 그 시선은 태어 나면서 함께 태어나는 타고난 능력인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사회 속에서 갈고 다듬어지고 또 조직되고 강요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선이란 무엇을 보고 난 후 그것을 볼 거리로 옮길 때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사회의 힘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을 보고 난 후 그것을 옮겨놓은 그림 혹은 시각적 이미지는 이미 그 사회가 마련해 놓은 알 수 있는 볼 거리의 규칙에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만화가 가정하는 이런 새로운 볼 거리의 세계, 새로운 봄(seeing)의 능력은 잘난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매하고 유별난 취미를 가진 아방가르드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대중의 것이고, 또 그런 점에서 대중의 것이란 말은 쉽게 상품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 된다. 상품은 수없이 많은 물건들에 새겨진 고유하고 각별한 차이를 지우고 그것 모두를 하나의 공통의 것으로 다룬다. 지금 내가 먹고있는 오렌지가 캘리포니아 산인지, 제주도 산인지, 어떤 풍경의 자연 속에서 자라났는지, 이를 재배한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같은 것은 이 오렌지란 상품에 전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그 오렌지를 접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은 그 오렌지를 팔아 이윤을 남길 수 있다고 믿은 오렌지 가게 주인의 관심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처럼 상품은 물건에서 지금 여기라는 것을 지우고 그것을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떼어내 허공으로 띄워 보내고, 이 물건의 각별한 쓸모와 독특한 분위기를 모두 지워버린다. 즉 상품에게 남아있는 가치란 보편적인 교환 가치일 뿐이다. 그 탓에 과격하게 말하자면 그 물건은 그 물건값에 딸린 무엇으로 되어 버린다. 그런데 만화는 이런 상품의 세계와 닮아 있다. 만화 역시 볼 거리를 찾는 모든 이에게 한결같은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널리 일반화될 수 있는 볼 거리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만화는 일반적이고 소박한 취미의 사람들이, 네모 상자 속에 들어있는 2차원적인 평면의 이미지를 보고 그리고 말풍선 안에 들어있는 문자를 읽고 그 이미지가 말하고 의미하는 것을 능히 짐작하고 예측할 수 있는 세상을 전제한다. 그러기 위해 만화는 그것이 남녀노소 누구에게 쥐어져도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 알고 있는 대중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바로 만화가 그런 대중, 이미 무엇을 보든 그것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감동할 준비가 된 대중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점 때문에 만화는 자본의 관심사가 되고, 또 쉽게 상품이 된다. 만화는 처음부터 그런 대중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었고, 그 점 때문에 만화는 처음부터 상품으로 자신의 운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했듯 만화가 상품이란 것에서 중요한 것은 만화가 대중들의 것으로 자리잡도록 가능하게 했던 만화의 시각적 힘이다. 왜 우리에게 만화는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한 치의 혼란과 의심도 있을 수 없는 자명한 읽을 거리, 볼 거리로 되었는가 이다. 따라서 상품으로서의 만화에 대해 시비를 걸어봤자 얻을 것은 별로 없다. 되려 만화가 상품이 될 수 있었던 으뜸가는 비결이었던 만화의 엄청난 시각적 힘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만화가 그 어떤 볼거리도 비할 수 없는 수수께끼 한 점 없고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는 능력을 얻게 되었는가를 파헤쳐 보는 것이다. 자본이 만화가 돈이 된다고 군침을 흘릴 때 그 군침은 만화를 향해 흘리는 군침이 아니라 만인에게 읽힐 수 있는 텍스트로서의 만화의 능력에 대한 군침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만화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법 앞의 만화 한편 만화에 대한 또 다른 사회적 관심의 하나는 법의 관심이다. 법의 관심이란 만화가 그것을 보거나 읽는 이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그들의 의식을 선동해 나쁜 짓을 하도록 꾀어낸다는 의심으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이는 비단 만화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볼 거리와 읽을 거리를 향해 사회가 쏟아 붓는 관심이다. 유해한 볼 거리, 읽을 거리가 무엇이고 무해한 것은 무엇인지를 가늠하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단속하고 통제하는 것은 어느 사회나 끈덕지게 행해 온 일이다. 물론 그런 사회적 관습이 무엇이고,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따지는 것은 여기에서 다룰 얘기는 아니다. 검열의 사회학이라 부름직한 그런 문제는 아마 다른 자리에서 길게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당장 갖는 궁금증은 그런 법의 관심이 만화를 어떻게 구부리는가 이다. 즉 법의 관심이 어떻게 만화가 갖는 풍부한 잠재력을 지워버리고, 만화를 평범하고 밋밋한 하나의 피고(被告)로 둔갑시켜 버리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화가 죄를 짓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떤 만화는 특정한 사회집단에게 해가 되고 또 불쾌감과 모욕감을 줄 수 있다. 또 나쁜 정치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켜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우려와 불안으로부터 조급하게 법이란 망령을 불러들여 만화를 통제할 규칙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법이 만화에 대한 관심에서 보이는 무지와 편견은 만화가 볼 거리와 그 볼 거리를 읽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만화의 능력과 가치를 닫아 버린다는 점이다. 법은 언제나 자신이 감시하고 심판하는 대상이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에 관심을 쏟는다. 그래서 증인과 증거가 채택되고, 피고를 고발하고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피해자로서의 고소자를 전제한다. 그 때문에 법은 언제나 하나를 대상으로 한다. 혹은 더 쉽게 말하자면 일대일의 관계를 전제한다. 비록 피해자가 사회 집단이나 지역주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특별한 경계선을 가진 묶음 속의 사람, 그래서 결국 하나인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처럼 법이 만화에 대해 보이는 관심 역시 피고로서의 만화, 법 앞에 소환된 만화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만화는 하나가 아니다. 만화는 통제불가능한 사회적 효과로 흠뻑 적셔진 문화의 복합체이다. 그런 점에서 만화의 영향력은 예측할 수 없는 다수이다. 따라서 만화를 단속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래서 만화를 법이 감시하고 판가름할 수 있는 무엇으로 만들려면 만들수록 만화는 법망을 피해 달아난다. 이는 만화의 잔꾀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읽을 거리와 볼 거리로서 한 권의 만화와 그것이 그 만화를 읽는 독자의 행동에 미친 관계 식으로 만화의 힘을 좁힐 수 없기 때문이다. 만화의 힘은 누구도 모른다. 그것은 만화를 통해 예기치 않은 세계를 만들어내는 수없이 다양한 만화 독자들의 세계를 생각해보면 된다. 이를테면 코스프레(cosplay:코스츔 (costume)과 플레이(play)의 합성어로 만화나 만화영화의 캐릭터와 같은 분장을 하고 놀이하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는 만화의 효과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만화 자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코스프레를 하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은 만화에서 그저 캐릭터를 빌려올 뿐이다. 그리고 그 캐릭터의 말투와 몸짓을 인용할 뿐이다. 이제 만화의 바깥으로 튀어나와 살아있는 인물이 된 캐릭터는 코스프레를 하는 아이들의 분신(分身)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코스프레를 인정하고, 코스프레에서 특별한 재미를 만끽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코스프레의 놀잇감이 된 캐릭터는 그 코스프레 팀의 캐릭터일 뿐이다. 그것은 어떤 만화 속의 캐릭터를 닮아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바로 그 만화가 이미 그 의미와 성격을 결정하고 있는 캐릭터인 것은 아니다. 더 없이 충직하고 성실한 만화 속의 직장인 캐릭터가 코스프레에선 풍자되고 변형되어 실수 투성이에 끊임없이 사고와 말썽으로 좌충우돌하는 다른 캐릭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하는 아이가 맘먹은 대로 그 캐릭터를 아무렇게나 변신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코스프레 속의 캐릭터가 되기 위해선 이미 그 캐릭터에 대해 비슷한 감정을 느낀 이들이 그런 변신에 대해 동의하고 수긍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억압적인 사회의 규칙에 얽매인 채 반복된 갑갑한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가 있다고 치자. 그걸 읽은 한 무리의 아이들은 그 캐릭터에 특별한 애정을 쏟고 그에 대핸 동정과 반감으로 공감대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면서 그 캐릭터에 애착을 보인 아이들이 이런저런 수단을 통해 서로의 느낌과 생각을 확인하게 되고, 그 캐릭터는 만화를 그린 저자의 통제로부터 해방되어 아이들의 캐릭터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또박또박 틀에 박힌 삶을 살아가고 언제나 사회적 위계에 복종하던 그 캐릭터는 사고뭉치이자 무법자적인 코스프레의 캐릭터가 된다. 이런 점에서 만화의 효과는 만화와 독자의 관계가 아니라 만화로부터 얼마간 독립하여 만화를 읽는 이들끼리 만들어내는 복잡한 교감과 소통의 문화에 의존한다. 사정이 그렇다면 법의 관심은 언제나 만화를 오해할 수밖에 없다. 법 앞에서 만화는 한 명의 독자의 머리 속에 들어가 있는 만화가 되기 일쑤이다. 하지만 그 때의 만화란 그가 본 최초의 만화도 아니고 원본의 만화도 아니다. 그가 만화를 읽을 때 마주하게 되는 만화란 이미 그 사회에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알려준, 특정한 문화적 감수성에 의해 여과된 만화일 수밖에 없다. 또한 또래를 비롯해 얽히고 설킨 독자들의 이미 마음껏 의미와 주제를 주물러놓은 탓에 애초의 작가의 의도로부터 탈출하여 다른 속도와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떠돌아다니는 만화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만화에 대한 법의 관심은 만화에 대한 우리의 풍부한 관심을 좁혀버리는 수단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법이란 것이 갖는 관심 그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미 말했듯이 법은 만화에게 언제나 너의 본래의 의도는 무엇이라고 묻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또한 법은 만화를 읽은 이를 언제나 한 명의 독자로 가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논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칠게 이야기하였듯 만화는 언제나 그런 법의 관심 바깥으로 달아나 풍부한 문화적 문맥을 만들어낸다. 또한 변화무쌍하게 자신을 움직여나가는 그 문맥의 힘을 통해 만화가 애초의 의미를 잃고 자신을 끊임없이 진화시켜 나가도록 만들어 버린다. 과연 영국 런던의 카나비 거리를 거니는 세련된 여대생의 가방에 프린트된 ‘헬로 키티 Hello Kitty’와 서울 대학로를 부산하게 걸어가는 여중생의 다이어리에 박힌 ‘헬로 키티’, 그리고 텍사스주의 어느 소도시에서 인디 록밴드를 하는 한 대학생의 티셔츠에 새겨진 ‘헬로 키티’는 같은 것일까. 우리가 그 헬로 키티를 읽는 방법은 결국 그 사회에서 만화를 읽는 문맥과 문화를 새겨보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문화 속의 만화 망가(manga)와 아니메(anime)는 만화와 다른 울림을 갖는 말이다. 앞의 것들은 바로 이미 폭넓은 문화적 문맥 속에 자리잡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가리킨다. 망가와 아니메는 일본어이지만 또한 동시에 세계화 시대이 지금 만국 공통의 청소년문화의 토속어 the vernacular이기도 하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세계 어느 곳을 돌아다녀도 우리는 쉽게 망가와 아니메 사이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그 사이트 속에서 자신을 뽐내는 망가와 아니메란 원산지인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더 이상 아니다. 일본과 그 일본의 저자들이 그 의미와 해석의 범위를 결정하고, 그것이 향유되는 방식을 한정한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망가와 아니메가 청소년 문화 속에서 일본적인 것, 혹은 이국취미적인 것을 나타내는 의미심장한 기호로 사용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별난 취미는 동시대의 대중문화로부터 혹은 문화적 환경으로부터 자신의 차이를 기록하기 위해 일본의 만화를 사용한다. 따라서 망가와 아니메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적 문맥 속에 자신을 등록시키고 또 그 결과 자신이 그 문화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리키기 위해 인용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망가와 아니메의 열혈 팬들은 일본 만화의 매니아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자신이 보이는 차이에 대한 열광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주의해야할 대목이다. 그들의 새로운 감수성은 곧 그 사회의 문화를 구성하는 문맥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차별적인 감수성을 소개하고 또 다른 감수성들과 뒤섞여 또 새로운 문화적 문맥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망가는 이제 전혀 만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에 출몰하여 특정한 테크노 사운드를 가리키기 위해 쓰여지기도 하고, 특정한 패션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망가 테크노’가 나오거나 ‘망가 룩 manga look’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는 만화와 직접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는 망가 팬들이 공유하는 특정한 문화적 감수성과 그들의 몸짓과 어휘, 세계에 대한 태도, 또 그들의 자질구레한 취미의 목록과 범위를 가리킬 뿐이다. 따라서 만화는 아예 자신과 분리된 채 문화라는 직물 속의 씨줄과 날줄이 되어 그 자체의 일부로 녹아버리고 또 스며들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의 만화의 붐 역시 이런 측면에서 살펴져야 한다. 만화가 사회 속으로 물밀 듯이 들어오고 또 사회가 그 만화에 대해 더없이 깊은 사랑을 보인다는 것은 만화 책이나 만화 영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화의 붐은 우리들의 삶 속으로 들어온 만화의 힘을 가리킨다. 우리가 우리 사회의 문화적 문맥을 엮고 짜는 다양한 방식들 속에 만화가 중요한 매체로 자리잡았으며, 만화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힘으로 문화의 문맥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만화 문화에 대한 관심을 놓치고 있다. 만화 산업의 융성을 위해서도, 만화의 사회적 효용을 높이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런 만화 문화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법과 자본이라는 눈을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만화의 매력과 가치에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