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주의 영화와 소설쓰기는 같은 일이다. 대담일:
2000년 1월 20일 하창동 : 감독으로 데뷔하시기 전에 박광수 감독이 만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초록물고기>를 만드셨던가요? 이창수 : 아니오.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시나리오와 조감독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는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하 :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시나리오와 조감독을 맡으시기 전에는 영화계와 어떤 관계가 있었습니까? 사실 이선생님이 영화와 관계를 맺을 거라고는 거의 상상을 못했습니다. 문단에 나와보니 단순한 메니아가 아니라 ‘영화쟁이’ 뺨칠 정도의 전문적 지식을 갖춘 작가들이 적은 숫자는 아니었는데, 제가 기억하기로는 거기에 이선생님은 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요? 이 : 영화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관련도 없고, 제가 영화를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 : 그동안 리스트에 올랐던 몇 사람이 영화와 관계를 했었죠. 가령, 시인 유하가 자신의 시집을 토대로 해서 영화를 만든 적도 있었죠.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선생님께서 메가폰을 잡았고, 첫 작품부터 대단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영화계는 물론이고, 문단을 깜짝 놀라게 만들 정도로 말입니다. 이 : 그 평가라는 것, 특히 영화 쪽의 평가라는 것은 다분히 과장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매체의 특징이라고 봅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보편성에 입각합니다. 즉 지금의 독자라는 것보다는 시간의 무게를 얼마나 견디느냐를 중요하게 보는 것입니다. 글쓰는 사람, 읽는 사람이 그렇듯이 예술의 불멸성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학이라는 매체가 단기적인 평가를 하지 않는 특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항상 단기적인 관객을 상대로 만들며, 시간의 무게를 이겨서 불멸의 작품으로 남을 것이라 생각하고 만드는 사람들은 별로 없고, 또 그것에 큰 의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때의 평가가 좀 과장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 : 소설이나 영화나 자기세계,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세상에 대해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하나의 모델처럼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이선생님은 굉장히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두 장르에서 모두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냈다고 보여지니까요. 이번의 <박하사탕>을 보고 나서는 이선생님이 행복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솔직히 질투까지 느껴졌습니다(웃음). 무엇보다도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장르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는 게 이선생님을 행복하게 보이게 하고 제게는 질투까지 느끼게 만듭니다. 이 : 예, 그것은 자유롭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은 자유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 하선생도 비슷하겠지만 아마 우리 세대만큼은 강하게 체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80년대를 거쳐오면서 작가로써 당면한 것이 나의 내면에 억압되어 있었고, 또 바깥으로 억압되어 있었습니다. 소설이라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그 당시의 내 또래의 작가들에게 비슷하게 내재되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영화 쪽에 와서 매체가 바뀌다보니 내 자의로 매체를 선정해가면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한테 있어서는 매체를 바꾼데 불과하고, 그 억압은 영화 쪽에서 훨씬 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야기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화는 그런 점에서 그 얘기가 굉장히 적습니다. 이 영화라는 매체자체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작가로 인정해주는 시각도 물론 있으며, 전통도 있지만 이는 특이한 경우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작가주의’ 영화라는 말이 있는 이유는 작가주의 소설이라는 말이 없듯이 작가주의 영화라는 말 자체가 특별한 경우를 의미합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작가가 되기는 실제로 매우 힘이 들며, 특히 한국의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이제 영화는 오락이고, 관객도 오락을 즐기기 위해서 극장에 옵니다. 환타지를 찾으러 관객들은 극장에 오지 어떤 작가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정서를 받아들이려 극장에 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 억압은 굉장히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저 사람 소설을 써서 잘 안되니까 매체를 바꿨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하 : 제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한 5년쯤 되었을 때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것인데, 저뿐만 아니라 제 또래의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소설 쓰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좀 세속적인 얘기입니다만, 그 힘겨움은 바로 소설의 독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데서 옵니다. 물론 선생님의 말씀대로 소설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독자를 대상으로 씌어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책을 발간하고 나서 초판도 잘 나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맥이 빠지죠. 그래서 독자의 입맛을 맞춘다느니, 상업주의에 기댄다느니 하는 얘기들이 나오게 되고, 그러면 또 힘 빠지고….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데도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 가령 다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오히려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자의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거라는 생각듭니다. 그런데도 <초록물고기>나 <박하사탕>에서는 그런 자의적 포기의 대목이 좀체로 발견되지 않거든요. 이게 작가정신이라는 거구나 싶은, 그런 힘을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요. 결국 작가정신이 생생히 살아 있는 영화라면, 사회적 효과라는 면에서는 소설보다 확실히 우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문학은 더이상 문화의 중심매체가 아니다 이 : 지금은 소설이 영화보다 소통 면에 있어서는 현저하게 떨어지는 장르가 아닌가 봅니다. 그것은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이며, 이미 문학이 문화로써 중심매체였던, 서사구조의 주역이었던 때는 지났다고 보여집니다. 이제는 영화나 TV드라마 같은 영상물이 대체하고 있습니다. 외국작가들의 경우도 순수문학은 초판이 소화되기 어렵고,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서점에 진열되는 것도 힘이 들어 우편주문판매하는 방식으로밖에 소화되지 않습니다. 문학이 스스로 걸어가는 길, 해체문학, 해체소설자체가 이야기꾼인 소설 쓰는 작가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소설이란 뭔가, 소설을 쓴다는 게 뭔가에 대한 소위 말하는 메타소설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소설이 이야기를 담아내는 주역이 될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영화도 문화라고 하는데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는 제가 보기에는 문화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문화라고 하는 것의 정의는 그 속에 진실과 아름다움, 선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바뀌게 되어야 문화이면서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그 기능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나마 문학을 할 때 제가 작가로서 가지고 있던 것을 매체를 바꿔서도 그대로 유지하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는 저의 운명을, 영화감독으로서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감독들과 특별하게 달라 보인다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오래 인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시장에서 저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설교를 한다면 누 가 좋아하겠습니까? 하 : 이선생님의 소설 얘기를 좀 해야겠는데…. 사실 저는 이 선생님께 빚진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집 「소지(燒紙)」가 나왔을 때가 제가 데뷔하던 그해 초겨울이었습니다. 거기에 <눈 오는 날>이라는 단편이 실려 있는데, 이런 대목이 있었어요. ‘묵직하게 차오른 수통의 중량과 뜨뜻한 온기를 손안에 느끼면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지킬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제 소설을, 특히 초기에 많이 쓴 군대를 소재로 한 소설들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저의 소설에서 이 문장이 어떻게 여과되었는가를 알 수가 있을 텐데요. 저는 군대에서 굉장히 고민스럽게 살아서 결국 소설까지 쓰게 되었는데 막상 제대를 하고 소설을 쓰려니까, 제 경험들이 잘 정리가 안되더군요. 너무 생경하게, 날 것으로 드러나버린다고나 할까요. 관념을 상황에 녹여내는 일이 너무 막막했던 거죠. 그럴 때 이선생님의 「소지」를 만났던 겁니다. 이 : 저의 글이 약간의 영향을 주었다는 데 기분이 좋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꼭 선배작가가 아니더라도 여러 군데에서 영향을 입습니다. 그 점이 책을 쓸 때에도 그랬고, 영화를 만들 때도 문학적 교통이라고 할까, 저는 하선생이 그랬듯이 얻어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지」의 문장에서 많은 것을 환기했듯이 저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방식이며, 그런 점에서 제가 보통의 영화감독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디에 다닐 때도 책을 읽고 있으면, 주위의 사람들이 왜 책을 읽느냐고 합니다. 책에서 눈을 들어 바깥을 보면 모든게 영화인데 왜 책에서 찾으려 하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책에서 영화의 소재를 찾습니다. 책 속에는 길이 있고,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아직 인문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삶에 대한 변화를 꿈꾸는 영화만들기 하 : <박하사탕>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겪은 시간대를 역으로 진행시키는 특이한 형식을 취합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일어나게되는 이유를 관객은 전혀 모릅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아, 그랬구나.” 하게 되죠. 이런 형식 때문인지는 몰라도, 관객들에게 뭔가를 암시하려 할 때 쓰이는 인서트 컷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가령 첫 장면에서 주인공 김영호가 철교에 올라가 죽으려할 때 과거의 일을 빠르게 스쳐보내는 인서트 컷이 들어갔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거든요. 이 : 인서트 컷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얘기하는 장면을 보여주기 전에 바깥에서 우리가 있는 장소를 보여주어 그 사람들이 이 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과 같은 설명입니다. 영화매체는 설명을 적절히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대중들과 빨리 소통하며, 대중들을 영화 속으로 빨리 끌어들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영화를 어떻게 찍느냐가 관건인데, 저는 설명은 필요 없다는 생각입니다. 대중들이 보기에는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에 따라오기 힘들지만, 제 기준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영화의 기본적인 인서트 컷은 피해서 설명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 : 이제 광주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보다 앞서서 <박하사탕>을 본 어떤 사람이, 주인공인 김영호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가장 신성한 제물(祭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고나서 그 사람의 표현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하자면 광주에 대한 부채감, 우리의 무의식에 잠재한 죄의식 같은 것을 김영호가 모두 떠안고 죽어갔다는, 뭐 그런 뜻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렇다면 이 영화가 80년대 내지 광주라는 상처에 대한 치유책으로 봐도 될까요? 이 : 저는 치유는 없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죽고 상처 입었는데, 그것이 꼭 광주에서 당한 광주시민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제가 1980년에 경북대 4학년이었습니다. 그 무렵 정권이 바뀌는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저는 깊은 절망감, 사람을 못 믿게 되는 신뢰가 무너지는 절망감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 시절 전 젊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순진하게 믿고 있었던 게 있었고, 옳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있었으며, 그런 것들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당연히 공유하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저의 삶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거기에 대한 완전한 절망을 경험했고, 그 당시 이 절망감이 저의 평생을 지배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의 광주시민이 아닌 저를 놓고 볼 때 제가 그때에 입었던 상처가 치유되리라고 생각되십니까? 그 치유라는 말은 정치적으로 정치인들이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저도 치유가 되지 않는데 모두 치유되지 않습니다. 제가 그 뒤에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라는 것이 그때의 절망감에 비롯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 보편적인 한국인을 따로 의인화시켜 본다면 그런 일들을 거듭 당한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가지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아픔을 잊을 수도 어슴푸레하게 생각날지도 모르지만 이미 내상을 입었습니다. 그 숱한 내상을 입어 오면서 자기 변형에 들어가 있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적응해서 살고 있다는 것은 그 절망을 다시 사회화시키고 제가 자기부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과연 치유일까요? 하 : 그렇다면, 김영호라는 가장 비극적이라면 비극적일 수 있는, 그리고 감독의 생각과는 달리 치유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을 죽이지 않고 영화를 끝낼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이 :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고 그 상처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소설이나 영화가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소설을 쓸 때도 비슷한 고민을 했고,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의 고민은 꼭 광주가 아니라도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온갖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무슨 효용성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치유건 무슨 다른 말을 붙이던 간에 효용성이 있다면 소설이던 영화든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전이되는 순간에 나타난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반성의 기능으로 작용한다면 그 나름대로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삶을 변화시키기를 꿈꾸며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치유라는 말은 좀 이상하지만 반성을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새롭게 살 수도 그렇게 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저는 영화의 이야기의 구조적으로 주인공이 죽고 안 죽고는 저한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박하사탕>이라는 영화자체로 보면 죽는다기보다는 기차가 김영호에게 달려들어가는 그 짧은 순간의 시간여행이었으며, 시간이 정지되면서 역행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확인하지는 않지만 물리적으로 생각할 때 주인공이 죽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저는 현상이나 물리적으로 기차에 받쳐 죽는다기보다는 그 순간을 현실을 초월한 것으로 보자는 데 있습니다. 그때에 있어 기차라는 것은 시간이라는 것이 물화된 것입니다. 또 영화에서 김영호가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것은 ‘나 죽을래’라는 물리적인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지만 실제로 욕망은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며, 그 멈출 수 없는 시간에 부딪히는 것이고 그것을 역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보면 실제로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영호의 욕망이 내적으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호가 죽고 안 죽고는 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 : 소설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 말씀을 좀 하죠. 한국에는 <사랑과 슬픔의 여로>라고 소개된 볼커 쉘렌돌프의 영화가 있습니다. (쉘렌돌프는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을 영화로 만들기도 한 독일의 중요한 감독이다) 미국에서는 <Voyager>였죠. 나중에 이 영화의 원작이 독일 작가 막스 프리쉬의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라는 걸 알고 소설을 읽게 되었어요. 아마도 영화를 먼저 본 영향일 수도 있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시종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 영화를 보면서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 - 이런 걸 감안한다면, 소설가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가장 합당할지도 모른다, 너무 엉뚱한가요? 이 : 그런데 저는 약간 다르게 생각합니다. 일단 우리가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작품을 보았을 때 대단히 불만족스럽습니다. 그것은 한국영화뿐만이 아니라 외국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작을 뛰어넘는 영화를 만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원작이 유명한 작품일수록 영화화하기 힘듭니다. 저는 그것이 매체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완성된 매체라 하면, 문학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독자가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문학에서 묘사는 되어 있지만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 주어지고, 독자마다 다 다르게 해석하여 자기화시켜 문학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독자가 어떤 문학작품을 생각할 때는 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 완전한 것이라는 관념 속에는 자기 것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다 만들어져서 보여지지만 관객이 봤을 때는 항상 불완전하게 보입니다. 영화라는 매체는 시간제약이 있습니다. 관객이 영화를 보기에는 특히 원작이 있는 것은 불완전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러기에 문학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독자에게 읽혀지면서 완성되는 매체이고, 영화는 완전한 상태에서 관객에게 가서 불완전한 매체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이미지이고, 소설은 관념이 주가 되는 매체로 차이는 확실히 있습니다. 저도 영화를 하면서 영화는 뭘까라는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서구에서 인류의 정신사를 보면 관념을 믿던 시대가 있었고, 지금은 관념이란 것을 믿지 않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지를 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서구문명의 자가당착일수도 있지만 이미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이미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영화는 소설보다 이미지가 훨씬 강할 수도 있기 때문에 소설과 근친관계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영화를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작가적 상상력이 무엇보다 영화를 만드는데 중요하다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너무 단순한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은 관념보다 이미지를 중시 하 : 5년 전에 어떤 문학 대담에서 제가, 지금 우리가 소설(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 있지 않아 테러리스트와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이른바 문학의 위기와 같은 맥락에서 한 얘기지만, 사실 제가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한 것은 그래도 희망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숨어서라도 살아 있을 테니까요. 작가주의 영화가 벼룩시장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테러리스트의 역할까지도 기대하기 힘들다는 건데, 그렇다면 완전히 없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까? 이 : 지금 추세로는 그렇다고 봅니다. 제가 <초록물고기>라는 영화 때문에 해외 영화제 같은 곳에 다녀봤습니다. 그곳에서 그전에는 몰랐고,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인데 상황이 좀 보였습니다. 굉장히 많은 영화제들이 있고, 그 중에서도 큰 영화제와 작은 영화제, A급, B급 등의 영화제들이 있습니다. 그 영화제에 보여지는 영화들이 전부 메이저시장이 아닌 마이너시장에서 유통되는 영화들이었습니다. 이미 시장기능이 없으며, 메이저시장의 기능은 벌써 미국영화들이 장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큰 극장에서 1년 열두 달 전부 미국영화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국영화가 살아서 미국영화와 경쟁할 수 있는 메이저영화들이 몇 편 있겠지만 소위 말하는 작가주의 영화, 영화를 하나의 예술 매체로 생각하는 영화들은 더 이상 설 곳이 없고 시장에서 유통되지도 않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런 영화들을 위해서 영화제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 : 너무 비관적으로 들리는데요. 저는 대중적이란 것을 좀더 넓혀서 생각했으면 합니다. 피카소가 등장했을 때 당시의 평론가들은 하나같이 “회화는 이제 대중들로부터 완전히 떠났다” 라고 입을 모았었죠. 하지만 지금 피카소만큼 대중적 인지도를 지닌 화가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자면 이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시장’이라는 것을 너무 좁혀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작가주의 영화만을 고집해서 보려는 이른바 메니아라는 사람들의 수도 결코 적지 않구요. 이 :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작가주의 영화는 시장기능에 의해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특정한 나라를 예를 들면, 그 나라에서 미국영화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면 그 시장을 빼앗기게 되고, 자연히 자국에서 영화를 만들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에서는 영화라는 것이 없어지면 안됩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기금을 형성하여 몇 편의 영화를 만들게 되고, 그런 식으로 지원하는 영화들이기 때문에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기 어려워집니다. 우리 나라는 특이하게도 영화산업이 살아 있어서 오히려 정부에서 지원해서 예술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점을 만들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을 제외하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예술영화들은 시장기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하 : 영화일 하시면서 소설에는 미련이 없었습니까? 이 : 93년 이후로 집필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소설 쓰고 싶다는 생각은 솔직히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영화를 하는 태도가 소설 쓸 때의 태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도 얘기했듯이 저의 운명을 제가 압니다. 영화를 현실적으로 못 만들 운명에 처하게 된 뒤에 소설을 다시 쓸 수 있을지 불안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소설 을 다시 쓴다고 하면 저는 하선생과 같은 동료작가들에게 좀 미안합니다. 저는 소설 쓰다가 매체를 바꿔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영화를 외도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소설을 다시 쓴다면 영화했던 것이 외도가 될 것 같습니다. 하 : 현재와 미래에 대한 화두는 정보화시대입니다. 영화도 그런 사회의 변혁과 더불어서, 가령 인터넷을 통해 개봉관을 가지 않고도 집에서 편안히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머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혹시 작가주의 영화의 몰락도 기우가 되지 않을까요?
정보화 시대에도 지식습득 과정이 중요 이 : 저는 영화산업의 기본은 극장이라고 생각하고, 극장에 관객이 얼마나 들었느냐가 시장을 형성하게 됩니다. 극장이 곧 시장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 극장이 정보화시대에서는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예술영화의 관객층이 많아지지 않을까라는 말씀이신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정보화라는 개념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상적으로는 정보화시대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 개인적으로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갈 것이라는 필연적인 흐름, 정정 불가능한 것으로 맞추어 사고하는 방식은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컴퓨터나 정보라는 것도 이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컴퓨터에서 정보를 찾아내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보라는 것이 과연 유용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저는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정말 한심한 인문학주의자의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제 아이가 하는 말이 CD롬 한 장에 대학까지의 지식을 모두 담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CD롬에 담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불러내는 지식이 무슨 지식이냐는 말입니다. 저는 지식이라는 것은 자신이 직접 얻어내는 과정자체가 지식이지 정보가 지식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저를 형성했던 것은 컴퓨터식 지식이 아닌 지식을 얻어내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지도를 보면서 길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좌절했던 것들이 저를 형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정보 위주로 된다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현상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현상으로 보면 환경이 파괴되고,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것이 눈으로 보입니다. 그 속에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 또는 공동체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파괴되어 갈 것입니다. 영화만 하더라도 영화라는 매체가 극장에서 보여져야 중요한 것인데 안방의 큰 화면에서 보는 것이 무슨 영화의 맛이냐는 것은 표면적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영화뿐 아니라 문화나 예술을 수용하는 자세, 본질은 좀 다르다고 봅니다. 아까 피카소도 얘기했지만, 피카소는 물론 대중적으로 유명 합니다. 그런데 대중이 어떻게 피카소 그림을 볼 수 있겠습니까. 책에서 보는 피카소는 피카소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뿌려지는 예술 문화가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 : 제가 요즘 영화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것은 매스컴이든 평단이든 관객이든 영화의 내용은 젖혀두고 영화 외적인 것에 너무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흥행 영화라는 것에 더욱 그렇습니다. 제작비나 배우의 개런티가 영화의 내용에 우선될 수는 없죠. 우울한 것은, 문단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과대포장도 문제이지만, 우리의 관심이 점점 중심으로부터 물러나고 있다는 상황이 슬프기도 하고 겁나기도 합니다. 이선생님의 영화들이 담고 있는 그 내용들에 주목하는 관객들이 30만 명이 넘어서 앞으로도 꾸준히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 소설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들이 어떻게 독자와 소통하면서 자기 힘을 찾아가느냐, 이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지금 영화 쪽에 와있지만 그 절망감 같은 사정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마음의 출발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글을 쓰느냐는 것을 제가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만, 자기 부정에 빠져서는 안되고, 글쓴다는 행위 자체가 반성처럼 느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 <박하사탕>이 개봉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