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21세기 문화예술과 영상이미지-총론

태초에 이미지가 있었다 이후에도 이미지가 있으리라
-이미지가 문화와 예술을 주도한다

 

박 신 의 (미술평론가)

 

이미지에 대한 이해 혹은 오해

최근 들어 이미지란 말은 그야말로 어디서건, 예술과 과학을 비롯한 학문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광고에 이르기까지 매우 자연스럽게, 그리고 지극히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 대중적이고도 보편적인 사용을 보면 이미 이미지란 말을 사람들이 대체로 잘 이해하고 있는 듯 해서 우선 놀랍다. 하지만 그것이 딱히 어떤 하나를 지칭하는 것도 아니고, 또 개념과 의미에 있어서도 다양한 맥락을 갖는 것이어서 하나로 정의내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보통 우리는 이미지하면 일반적인 그림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림에도 고전적인 회화만이 아니라 어린이 그림, 삽화, 낙서, 만화, 포스터, 벽지 문양 등에 이르는 수공적인 제작 방식에 따른 것이 있고, 사진에서 영화, 비디오, 홀로그램, 컴퓨터 등 기계적 과정을 통한 이미지 제작방식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자체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제작방식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나누고 향유하는 배급과 수용방식에서도 매우 다르고, 그 효과 역시도 엄청난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지를 일정하게 만들어진 ‘형상’의 상태로, 다시 말하면 제작방식의 차원에 국한하여 이해하게 마련이지, 실제로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유통되는지, 그리고 그것에 따른 문화적 효과가 얼마나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화인 아츠에 해당하는 순수미술의 경우 배급과 수용에서 가장 제한적이고 반매체적인 방식으로 제공된다. 대개의 경우 미술작품은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통해 대중과 만나왔고, 그 방식 자체가 참으로 동시대적이지 못한 낡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낮은 기술의 출판매체를 통해 이미지가 배급될 경우, 일테면 ‘아티스츠 북’ 같이 대중이 책 형식으로 된 작품을 사서 언제고 감상의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경우는 미술관 컨텍스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갖게 된다. 게다가 실험영화나 예술 애니메이션 작품이 TV나 비디오 카세트로 방영되고 배급되는 경우라면 그것이 파급효과란 엄청난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이미지라는 것이 그 제작방식에서부터 그것의 배급방식에서 무수한 차이를 가지고 있고, 그 다양한 방식 자체가 전혀 다른 내용의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그것은 대중문화일 수도, 고급문화일 수도 있으며, 순수예술일 수도, 산업일 수도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이미지가 어떤 단일한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대중적 접근과 그 언어 개발이라는 지점에서 매우 다양한 층위를 갖는다는 것이고, 그 자체로 중요한 문화현상을 주도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잘 알고있는 바와 같이, 50년대 말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대중매체의 발달로 인해 문화의 지형이 완전히 변화한 사실과, 이로 인해 수많은 가치개념과 인식론적 구조 등이 많은 변모를 겪은 것을 상기할 만하다.

다른 한편, 우리가 이미지에 대해 갖는 오해로는 대체로 움직이는 이미지에 집중하여 고정된 이미지와의 관계를 경시하거나 혼동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현대적 이미지는 미디어 이미지이고, 미디어 이미지는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데에는 사실 사진, 회화, 일반적인 그림, 판화 등 모든 정적인 시각적 표현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잊고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최근 디지털 이미지에 관한 쟁점과도 관련한다. 흔히 우리는 디지털 이미지가 정보화의 과정을 거친 것이어서 그 자체로 아날로그적 드로잉과 수작업을 단절하고 있다고 보는데, 실제로는 양자간의 연속성에 근거함을 잊지말아야 할 일이다. 일례로 사이버 캐릭터가 정확한 수치로 그려졌음에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고, 화가의 부정확한 손과 주관적 정서로 그려진 드로잉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을 생각하면 일말의 단서가 잡힐 듯 하다.

물론 정적인 이미지와 동적인 이미지는 다른 맥락을 갖는다. 이 또한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부분인데, 가령 회화는 한 화면에 화가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그려진 오랜 시간의 결과물이고, 그래서 이미지는 기표적인 대상이 아니라 메타포와 상징을 담은 의미체로 일치된다. 반면 동영상의 경우 각 이미지는 순간의 기록이고 순간의 연속으로서 실시간의 흐름을 좇아 이야기의 흐름이 진행되는 것이어서, 하나의 이미지에 의미와 개념이 압축된 형식이 아닌 서사체로서 읽힌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이미지 읽기’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만큼 이미지의 다양한 의미작용을 잘 알고있으며, 그것이 형성하는 복잡한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주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문화연구 혹은 문화론의 영역에서 광고 이미지와 각종 현대사회에 범람하는 이미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접근, 의미론적, 기호학적 해석과 독해가 많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문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한동안 우리는 영상문화가 문자를 대체하리라는 식의 위기의식을 동반한 표어들이 무성했음을 기억한다. 이같은 발언에는 실제로 이미지와 문자를 대립적으로 구분하는데서 오는 오해가 자리하고 있음에 주목할 일이다.

대체로 이미지는 순수 시각의 문제로서 인식되고, 문자는 반(反)시각의 문제로 인식된다. 그러나 시각적 효과가 오히려 의미를 발생하고, 문자를 통한 연상작용이 차라리 시각적일 경우가 있다. 흔히 말하는 심상(心像)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연상작용으로서, 때로는 시(詩)가 유발하는 시적 이미지와 일치되기도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와 문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지, 단순히 영상문화가 문자를 대체하리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에서는 영상문화의 우위라는 문화현상을 통해 이미지의 풍부하고도 다양한 언어에 대한 인식이 주어진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 볼 일이다.

 

기술매체 발달과 이미지의 역사

인간에 대해, 문명에 대해 이미지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미지와 문자의 역사적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미지의 기원에서 비롯하는 이미지의 문자적 성격과 시각적 체험의 의미는 어떻게 통합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문자 발명과 그로 인한 문자문화의 형성은 이미지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 이미지 문화에서 기술매체 발달이 미학과 철학, 사회학, 인류학, 정치 경제학 등 전 학문의 영역에서 실질적으로 어떤 변화를 유발하였는가. 미래의 예술은 어떤 형상일까. 미래의 문학은…

무엇보다도 이미지는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어떻게 우리는 바라보는가? 당연히 단순히 눈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본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과 일치될 수 있다. 보는 것은 지식으로, 사유의 체계로 연결되고, 그것은 또한 믿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야말로 순수하게 본다는 의미로 작동하는 원시적인 눈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1) 이미지는 바로 그런 보는 행위로부터 결과하고, 그 과정의 복잡한 과정이 인간의 역사를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는 그 기원에서 인류 최초의 사유체계이자 소통의 의지의 결과라 할 만하다. 당연히 그림은 글보다 훨씬 먼저 나타났는데, 지금으로부터 무려 만오천여년 전 동굴벽화의 황금기 때 그려진 들소와 사냥하는 사람들의 형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수많은 그림들은 이른바 ‘문자 이전의 전령(傳令)’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문자 이전의 전령’은 실제적인 사물의 재현을 도식적으로 발전시킨 묘사-재현의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2) 그런데 그 자체가 상징적이어서 순수한 그림이라기 보다 언어적 성격을 갖는 기호와도 같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자신이 처한 세계에 대한 시각적인 도식화의 작업이다. 이는 사물에 대한 모방에서 비롯하지만, 실제로는 사물을 담고있는 세계에 대한 해석이자 인간 주체의 시선을 실어내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 시선이 철학을 잠재할 수도 있고, 종교를 잠재할 수도 있으며, 이미지의 대상을 의인화함으로써 자연과 대화하는 식으로 시작된 과학을 잠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자의 발명이란 것도 바로 이같은 이미지를 매개로 세계에 대한 접근과 해석을 거치면서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점차로 이미지는 그것을 지시하는 사물과 의미작용에 대해 의미를 압축하고, 만물의 근본원리로서 추론하려는 욕구로 인해 추상화(abstraction)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만들기 마련이다. 초기의 글자가 그 부모인 그림의 형상을 간직하는 것의 이유가 그것이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한자를 생각하면 쉽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오늘날의 글자들이 대부분 소리만을 표현하면서부터는 보이는 세계와 닮은 점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 게다가 인쇄술의 발명으로 문자의 발전은 엄청난 향상을 보였고, 그 속에 모든 인간의 생각과 이야기들을 담아내게 된다.

글과 그림은 15세기에 이르러 완전한 분리로 결과하는데, 일테면 독일의 이야기 그림, 혹은 만화와 같은 형식의 그림에서는 글과 그림이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를 거부하고 있는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글은 점점 더 전문화하고 추상화하면서 정교해지지만, 그림과는 점차로 멀어져 가는 것이다. 반면에 그림은 추상성과 기호가 줄어들고 구상성과 명료성이 뚜렷해지게 된다. 19세기가 되면 서구에서 그림과 말은 훨씬 더 멀어지는데, 그림은 형상과 빛, 색,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몰입했고, 말은 보이지 않는 보물들, 감각과 정서, 정신 철학 따위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3) 현대미술에서 인상파에서 추상미술에 이르는 여정을 보면 바로 그같은 그림과 말의 극단적인 분리의 현대적 과정이 읽힌다.

그러나 대중매체 발달과 대중시각문화의 형성은 실제로 이같은 그림과 말의 분리에 대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도록 한다. 이제 이미지 역시도 말로서의 한 몫을 행하고 있음을 알게되고, 또 실제로 그같은 어법에 따라 이미지의 말하기 방식이 놀라운 속도로 변화, 발전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60년대 이른바 대중매체 시대의 예술이라 할 팝아트(Pop Art)가 갖는 의미도 실제로 이미지를 문화담론을 담아내는 일종의 의미체로 파악하고, 다양한 맥락으로 전개되는 언어적 양상과 구조를 해체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를 갖는다. 실제로 이미지를 순수 조형 형식 내지는 시각의 문제로 제한하지 않고 문화론적 시각에서 다루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존의 미술 개념에서 전적으로 다른 차원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미지의 역사에서 그림과 말의 관계라는 관점을 따르는 것과 동시에, 이미지의 제작과 유통의 맥락을 충족하는 기술매체의 발달이라는 지점을 적용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앞서 이미지의 기원을 말하면서 결국 이미지를 사물을 담고있는 세계에 대한 해석이자 인간 주체의 시선을 실어내는 수단이라 함은 곧 이미지가 인간의 역사의 흔적을 담는 것이라 할 만하다. 그 가운데 이미지의 역사에서 기계적 수단의 출현, 즉 1839년 사진의 발명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계기가 마련된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사진은 화가의 오랜 수공적인 이미지 생산의 방식을 기계적 방식으로 바꾸었다는 사실 말고도 그것의 적용범위가 예술만이 아니라 과학, 사회학, 인류학, 고고학, 지리학, 저널리즘, 산업 및 엔터테인먼트 등 사회 전분야에서의 문화를 주도하는 실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고 지낸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이미지가 예술의 개념을 바꾸고, 새로운 문화를 주도해 가는 데 실질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에 바로 기술매체의 발달이 관련한다는 점이다. 그 연속선 상에서 최근의 상황은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철폐된 사이버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고, 역시 문제는 기술매체 발달의 가속화가 문화와 예술에서의 급격한 변화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면 문제를 기술매체는 누구의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이며, 어떠한 가치론을 함유하느냐로 모아보도록 하자. 적어도 대중매체 시대와 인터넷 시대를 보면, 무엇보다도 문화와 예술의 창작주체가 누구냐의 문제에서 큰 차이를 볼 수 있다. 대중매체 시대에서 문화와 예술 생산자는 매체 종사자나 소수의 전문인, 산업과 자본주에 국한하고, 단지 그 배급과 수용의 대상이 무작위의 다수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반면 인터넷 시대에는 생산 자체가 대중의 손에 의해 가능해졌다는 차이가 있다. 이미 디지털 아트, 웹 아트, 미디어 아트라는 용어가 통용되면서 새로운 형식의 예술이 특별히 전문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에 의해 가능해진 사실이 주목할 부분이다. 대중문화라는 차원에서도 인터넷 신문과 방송, 자신의 사이트 개설을 통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회로의 형성 등 대중 스스로가 문화생산의 주체로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을 돌릴 일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그림과 말의 결합이 새로운 차원의 소통구조로 결과하고 있음에 유의할 일이다. 물론 여전히 자본과 권력의 구조에 의해 매체가 주도될 수 있지만, 그러나 더 이상 대중은 수동적인 문화 수용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문화의 새로운 층위가 거론될 수 있는 것이다.

이미지가 문화와 예술을 주도한다는 표어를 단순히 이미지 우위의 프로파간다적인 맥락으로만 이해할 것은 결코 아니다. 결국 그림과 말의 새로운 관계를 성찰하고, 이미지 생산을 통해 새로운 문화와 예술을 대중이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지점에 긍정적인 가치를 둘 수 있음에 대전제를 두자는 것이다. 태초에 이미지가 있었다. 그 이후에도 이미지가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