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현상읽기 - 문학

미에 대한 집착, 그 활홀경의 의미

강 진 호 (문학평론가)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 90년대의 탐미주의

미(美)에 대한 동경은 어쩌면 인간의 본원적인 욕망에 속한다. 동양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 덕목의 하나로 진선(眞善)과 더불어 미를 내세우는 것이나 미에 대한 몰입으로 생명까지 내던진 서양의 나르시스 신화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미에 대한 동경과 집착은 동서양에서 두루 발견되는 인간의 근본 속성이다. 문학 또한 미의 추구과정이고 작가들의 고뇌는 그것의 실존적 구현과정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미적 착상을 얻기 위해서 방화와 살인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동원하는 백성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광염 소나타」(김동인)는 우리 문학사에서 발견되는 탐미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주인공 백성수는 우연한 기회에 사소한 복수심으로 방화를 했고, 그 때문에 ‘광염 소나타’를 작곡하게 되었다. 이런 예술적 쾌감을 맛본 그는 착상이 막힐 때면 서슴지 않고 방화와 살인을 하면서 훌륭한 작곡을 내놓는 병적 탐미주의자로 변모한다. 또 자연과 성에의 관능적 몰입과 탐미를 보여준 이효석 역시 이런 문학사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는 작품에서 성과 자연에 대한 집요한 탐미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칠피단화에 나비장식을 한 구두를 신고 다닌다거나 풋사과를 삶아서 예쁜 유리그릇에 담아 먹는 등 고아한 탐미주의자의 취향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런데 이런 탐미적 성향이 어느 한 시기에 족출한다면, 그 이면에는 단순히 개인적 취향을 넘어선 미묘한 정신사적 징후를 내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90년대 이후 문학에서 빈번하게 목격되는 탐미적 성향에서 당대인들의 시대적 고뇌라든가 방황의 그림자를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회 현실을 그리는 대신에 인간의 영혼 깊숙한 곳에 내재된 미에 대한 열망을 집요하게 천착하거나 아름다움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인물을 자주 등장시킨다는 것은 미를 추구하려는 그 자체의 의도 외에도 그것을 통해서 시대 현실을 문제삼는 작가들의 숨은 의도가 깃들어 있다. 사람들은 사회와 타협하지 못하거나,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을 갖고 있지 못할 때 대체로 즉물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경향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사회의 종교나 도덕, 정치가 사람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주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의지할 수 있는 정신의 거처나 창조의 지반이 없다는 뜻이고, 그런 까닭에 육체적 쾌락이나 탐미주의, 절망적인 세계관 등을 통해서 그런 심경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기에 90년대 이후 목격되는 탐미주의 경향의 작품에는 80년대의 경직된 문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반동의 의미와 아울러 지리멸렬하고 혼탁한 현실에서 진정성을 추구하려는 작가들의 실존적 고뇌가 깃들게 되는 것이다. 탐미주의가 병적이고 감각적인 유희의 차원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숨겨진 미에 대한 광기와 작가의

실존적 고민이 투사된 심상대의 「美」

심상대의 「美」는 고향마을에서 일어난 미장원 살인 사건을 회고하는 형식을 통해 인간에게 숨겨진 미에 대한 광기와 본능을 천착해 들어간 작품이다. 성년이 된 뒤에 유년을 회상하면서 미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것을 동시에 인간의 삶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에는 작가의 실존적 고민이 동시에 투사되어 있다.

작품의 배경은 작가가 유년시절을 보낸 동해안의 작은 항구도시, 무연탄과 양회 수출항이다. 색채를 띤 별다른 구조물이 없는 무미 건조한 동네, 겨울이 되면 눈과 곳곳에 쌓인 탄분 가루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장소가 곧 작품의 무대이다. 그런데 이때의 세상은 흑과 백이라는 단 두 개의 색으로만 존재한다. 작가는 이 무채색의 공간을 통해서 단조로운 일상을 표상해 내는데, 여기서 일상이란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다양한 욕망을 소유한 인간에게 그것은 공포 그 자체로 다가오게 된다. 늘 바다에 나가 있는 늙은 남편을 둔 어머니가 벌이는 화냥질이나 그것을 눈감아주며 만화에 빠져드는 화자인 ‘나’의 행동은 이런 공포를 이겨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볼 수 있다. 화냥질이란 일상에서 용납될 수 없는 비정상적인 행동이고, 만화에 빠져 가정과 학교를 외면한다는 것은 초등학생이라는 현실의 조건을 부정하는 특이한 행동일 수밖에 없다.

이 단조로운 일상 세계와 대척되는 지점에 ‘미장원’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이 놓여 있다. 내가 속한 세계는 색깔 없음의 세계, 즉 어미의 화냥질, 동네사람들의 손가락질, 애꾸눈 동생으로 표상되는 암울하고 추한 세계이지만, ‘나’의 눈에 들어오는 ‘미장원’은 그와는 대립되는 어떤 세계, 밝고 화사한 색깔로서 드러나며 ‘아름다움을 위한 성지’처럼 의식되는 곳이다. 물론 미장원의 주인은 깡마른 체구에 볼품없이 키가 작은 노처녀 미용사로 현실적으로는 초라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장원에서 뿜어 나오는 붉고 환한 불빛과 난로 연통에서 피어나는 김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그것과 상관없이 현실적 존재가 뿜어 올리는 열망과 욕망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미장원은 변신의 장소이고 동시에 미에 대한 욕구이자 변화에 대한 열망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작가는 미장원을 “다른 모든 단조로운 풍경에 항거하는 도발적인 장식”으로 표현하며 “암울한 세상에 억압당하고 있는 육신의 충동을 이끌고자 하는 한 점의 등대불 같은 의미”로까지 묘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특이한 공간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을 통해서 작가는 미에 대한 광기어린 집착을 표현한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읍내에서 흔치 않은 여대생이자 대단한 미모를 갖고 있는, 그래서 동네의 모든 청년들이 짝사랑하는 인물인 읍장의 딸이 있다. 그녀는 서울로 가기 전에 머리 손질을 하기 위해서 미장원에 들르게 된다. 그런데 여대생의 머리를 손질하던 미용사는 점차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급기야 차시간을 맞추어야 한다는 여대생의 요구마저 묵살하고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 몰입의 상태에서 그녀는 느닷없이 면도칼을 여대생의 목에 꽂게 되고, 여대생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다듬는 손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미에 대한 광적인 집착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광염 소나타」의 백성수를 연상케 한다. 물론 미용사의 광기는 미 자체만을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백성수와는 달리 일탈과 변화가 불가능한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탈출욕망을 여대생에게 투사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그녀의 살인은 어머니의 화냥질이나 화자의 만화에 대한 탐닉과 동궤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의외로운 것은 ‘나’가 보이는 태도이다. 화자는 미장원에 들어가기를 그렇게 소망했으나 끝내 들어갈 수 없었다. 화자는 유일하게 미장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엄마와 아우를 내심 질투하며 미장원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일생동안 품고 지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의 다음과 같은 언술은 그 광기가 한편으로는 악마적 탐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아직도 그 미장원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곳에서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미용의자에 앉아 있고, 그녀의 목에 꽂힌 은빛을 반사하는 조그마한 미용가위가 손잡이로는 가느다란 한 줄기 피가 흘러나오고 있으며, 불붙은 이십사공탄 구멍에서 피어오른 붉디붉은 스물 네 개의 불꽃이 무더운 열기 속에서 날름대며 춤추고 있으리라 믿고 있다. (중략) 하지만 나는 어린아이를 지나 어른이 되도록 기어이 그 미장원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말았다. 세상은 내가 품고 있던, 열기와 환희의 장소로 들어가려는 치열한 욕망을 철저하고 냉정하게 말살했다. 그 미장원은 헐려버리고 말았으며, 다시는 지어지지 않았으며, 다른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미장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미용의자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자의 목에 꽂힌 은빛 가위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나오고, 이십사공탄 구멍에서 피어오른 붉디붉은 스물 네 개의 불꽃이 무더운 열기 속에서 날름대며 춤추고 있는 장면이란 미에 대한 집착이 광기와 결합된, 우리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섬짓한 광경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 집요한 집착으로 인해 작품 전반은 탐미주의적 분위기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의 인간이 두 부류로 갈라진다는 사실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즉 미장원이라는 상징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갈라짐이다. 이러한 갈라짐은 정상과 비정상, 광기와 이성의 갈라짐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곧 미장원에 들어갔다 나온 엄마와 아우, 들어갈 수 없었던 나의 갈라짐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말을 바꾸자면 그 차이란 광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인간과 광기를 다만 꿈꿀 뿐인 인간으로 나누어진다. 화냥질을 일삼는 어머니나 애꾸눈의 동생은 정상인과는 구별되는 광기의 상징인 셈이고, 그래서 이들은 미장원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소설 속에서의 시간은 현재가 아니고 과거의 것이다. 현재가 성년의 세계라면 과거는 유년의 세계이다. 유년에서 성년으로의 진입 과정이란 광기가 이성에 의해 제압 당하는 사회화·합리화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을 속에서 미장원이 놓여 있듯, 이성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광기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반사회적 존재다. 성년의 세계에서 광기는 금기사항이다. 그런데 ‘나’는 성년의 강을 건너왔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나’의 역할이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추억하는 존재로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제 다시 들여다본들 그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세계이다. 과거의 세계 속에 놓인 그것들은 이성 밑바닥에 놓여 꿈틀거리는 관능, 그 본능이 새겨 놓은 미묘한 기억들, 그리움과 갈망의 형태로만 간절히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보자면 이 작품은 미에 대한 집착과 열망을 그리면서 동시에 일상 현실에서 그것이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표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란 일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데는 광기가 요구된다는 점, 작중의 화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 그 세계를 회억(回憶)하고 동경할 뿐이라는 사실은, 삶에 대한 허무와 비감이 화자의 현재적 삶을 짓누르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우리가 일상적 삶의 무의미성, 어떤 고상한 이념이나 정열도 무용할 뿐이며 사랑이나 우정, 가족애 같은 타인과의 유대도 가능하지 않다는 시대적 비감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어와 문장으로 구현된 미의 추구 천운영의 「바늘」

천운영의 「바늘」은 ‘문신(文身)’을 소재로 한 인간에게 내재한 광기와 욕망을 밀도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김윤식은 이 작품이 표면상으로는 사모곡(思母曲)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부재하는 아비에의 지향성을 토로”(「문학사상」, 2000, 2)한 작품이라고 설명한 바 있지만, 작품의 중심은 언어와 문장으로 구현된 미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구조와 여러 상징적 장치의 활용을 통해서 작가의 의도가 피력된 까닭에 작품의 의미가 그리 명료하지는 않지만, 문장 하나 하나를 써 내려가는 작가의 의도에는 미에 대한 집요한 열정이 배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의 내용은 두 개의 축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문신사인 주인공이 문신을 새기는 일과 관계된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문신을 새기는 과정과 문신을 요구하는 남자들의 심리가 그려지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한복 만드는 일을 했던 어머니가 스님에게 끌려 출가하고 얼마 후 스님을 죽이고 자살했다는 사건이 서술된다. 이 두 축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는 까닭에 작품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나며, 특히 작품 곳곳에서 언급되는 관능적인 이미지와 욕망은 작품의 의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빨리 집에 들어가 커다란 들통에 고기를 삶아 입안 가득 육질의 맛을 느끼고 싶었다.” “육즙을 흡수한 마늘을 입 속에 넣는다.” 등과 같은 관능적 구절들은 이 작품의 의도가 섹스에 대한 탐미적 욕망을 추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낼 정도로 집요하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서사의 측면에서는 별 다른 내용을 갖고 있지 못하고, 문장과 묘사를 통해서 빚어진 관능적인 분위기와 이미지에 작가의 의도가 놓여 있다.

작품에서 문신하는 일을 직업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은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곱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둥그렇게 붙은 목과 등의 살덩이”의 외모를 가진 여자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목소리에다 말더듬이 증상까지 가졌다. 이런 여자가 문신 새기는 일을 하게 된 동기는 한복 만드는 일을 하던 어머니가 출가(出家)하면서 고아나 다름없이 세상에 버려졌기 때문이다. 바늘은 출가하기 전의 어머니가 옷감에 수를 놓는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여자가 육체에 수를 놓는, 곧 문신의 수단이 되었다. 여린 옷감을 아름답게 수놓던 ‘바늘’이 그 대상을 육체로 바꾸면서 피의 냄새와 인간의 광기와 욕망, 공격성을 함축하는 메타포로 변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인물의 심리적 전이과정도 아울러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연약하기에 쉽게 상처가 나는 인간의 살갗에 문신을 하러 오는 사람들의 심리를 통해서 확인된다. 문신이라는 인위적인 상처내기가 갖는 의미란 무엇인가. 여자에게 문신을 하러 오는 남자들은 대부분 ‘단단한 외피’를 얻으려는 사람들이다. 문신은 무력한 인간이 자신을 무장하는 도구로써 사용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히면서 거기에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는 배경에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전쟁터와 같은 곳이라는 데 있다. 무력한 개인은 세상이 주는 시련과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욕망한다. 그들에게 문신은 일종의 심리적 부적과도 같은 것이다. “당신 집에서 나온 남자들은 들어갈 때보다 훨씬 더 당당한 표정이지. 왜 그런 표정인지도 알아. 지난달에 당신 집에서 나온 남자가 내게 팔뚝에 새겨진 장검을 보여줬어. 그 사람도 알고 있는 거야. 무기들이 가진 힘을. (…) 넌 그걸 해줄 수 있잖아. 내 몸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가득 채워 줘. 칼이나 활 미사일 비행기 뭐든.” 여자에게 문신을 부탁하려 온 남자의 이런 진술은 일견 부질없어 보이는 피부장식에 불과한 문신이 부적과 같은 위력을 제공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주인공이 자신을 버린 어미와 그 어미를 출가하게 만든 스님에 대한 뒤틀린 반항심과 공격욕구를 바늘이라는 도구를 통해 용해하고 있는 사실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 말더듬이인 여자가 문신을 완성하면서 어눌증을 해소하는 것이나 여자가 전쟁기념관에서 보여주는 살의는 간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륵암에 머무를 때 새끼 고양이를 변소간에 던져서 죽이는 장면과 함께 피해자의 억눌린 정서가 가해자의 공격적 정서로 뒤바뀐 위태로운 순간을 섬뜩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바늘에서 칼로 이어지는 메타포가 함축하는 정서는 따라서 그 여자가 갖고 있는 욕망과 광기를 상징인 것이다.

 

살에 꽂는 첫 땀. 나는 이 순간을 가장 사랑한다. 숨을 죽이고 살갗에 첫 땀을 뜨면 순간적으로 그 틈에 피가 맺힌다. 우리는 그것을 첫 이슬이라고 부른다. 첫 이슬이 맺힘과 동시에 명주실이 품고 있던 잉크가 바늘을 따라 내려온다. 붉은색 잉크는 바늘 끝에 이르러 살갗에 난 작은 틈 속으로 빠르게 스며든다. 마치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들이 입 밖으로 시원하게 나와주는 듯한 기분. 바늘땀을 뜰 때에 나는 더 이상 말더듬이가 아니다.

 

그러면 이 광기와 살인의 궁극적 원인과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현파 스님의 죽음과 어머니의 자살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어머니의 느닷없는 출가의 배경에는 현파 스님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나중에 현파 스님의 죽음을 놓고 자신이 살해했다고 주장하다가 자신도 자살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남긴 유품에 끝이 모두 잘라진 바늘들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스님의 살해도구로 바늘이 쓰여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어머니는 왜 스님을 죽였고, 또 자살을 하게 되었는가. 합리적으로 보자면 어머니가 스님을 살해하고 또 자살한 원인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어머니는 스님을 따랐고, 그래서 출가까지 하게 된 인물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원인은 다른 데 있다. 곧 고양이 새끼를 죽인 것과 동일한 살의가 어머니에게도 발동한 것. 즉 화자가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변기통 속에 던져 넣은 것은 고양이로부터 받은 ‘여리고 아름다운 감정’ 때문이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과 순간적인 살의가 합작하여 새끼 고양이를 죽이고 만 것이다. 또 이 탐미주의의 다른 한편에는 스님에 대한 관능적인 욕망이 작용하고 있다. 스님의 복숭아 빛 맨 머리를 보면서 성적 충동을 느낀다거나 어머니의 자살 소식을 듣고 여자의 하얀 알몸을 떠올리는 주인공의 심리에는 인간의 욕망 속에 꿈틀거리는 관능을 단적으로 표상하며, 이런 심리의 연장에서 어머니의 살인과 자살이 이해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이 작품은 결국 두 개의 줄거리가 미와 관능에 대한 탐미라는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변주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신을 새기는 일도 결국은 화자의 욕망 속에 내재된 미와 관능의 표현인 것이고, 어머니의 출가와 살인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 전반에서 구사되는 관능적인 이미지와 상징, 살기와 죽음의 이미지들은 이런 작가의 광적인 탐미주의를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광기가 발동한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작품에서 그것의 현실적 원인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단지 그렇다는 것. 즉, 논리와 합리성의 피안에서 운명처럼 발동된다는 것. 감각적 묘사와 탐미의 집요한 추구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사회와 역사의 그림자를 읽을 수 없는 것은 이런 데 있다. 물론, 작품에서 그런 요소들은 문신의 상징성과 감각적 문장에 의해 교묘하게 위장된 까닭에 병적인 모습으로까지 나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서사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만일 유려한 탐미주의가 작품의 표면을 뚫고 나온다면 이 작가는 뛰어난 자질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지경에 이를 지도 모른다.

 

사회적 의미를 가진 탐미주의만이 진정한 탐미의 본질을 구현한다

탐미주의는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에서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때로 엽기적이거나 병적인 광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할 것이다. 고전적인 미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미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자 그것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본원적 모습이 그 속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고, 혼탁한 사회 현실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왜곡된 인간성을 바로잡으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망각된 채 미 자체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예술을 생활양식의 가치와 분리하는 도덕적 불가지론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부르디외의 지적대로, 예술이 개인적 인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사회적-역사적 진실을 복원해야 하는 것이라면, 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는 탐미주의란 환상과 감각의 자극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적 의무와 권리로부터 분리되고 결국 마음의 방탕함이나 정신의 타락으로 전락하기 쉽다(부르디외, 「구별짓기」, 88-93면 참조).

악마적인 잔인성과 난폭함, 빈정거림과 조롱, 고뇌와 절망과 저주의 외침이 뒤죽박죽으로 혼합되어 있는 「말도로르의 노래」(로트레아몽)가 악마적 탐미주의의 한 극단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것은 이런 함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비록 “신과 인생과 사회에 대한 반항의 투쟁을 찬미하는 광란적이며 반착란적이며 밀도 짙은 일종의 서정적 산문 서사시”라는 랑송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가족에 무질서를 씨뿌리기 위해 나는 매음과 손잡았다”는 외침이나 “인간의 자식이기보다는 차라리 암상어와 숫호랑이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았으리라”는 외침은 곳곳에 산재된 병적인 탐미성과 더불어 독자들의 이성을 순간적으로 마비시켜 놓는다. 특히, 보름 동안 손톱이 자라도록 내버려둔 뒤 어린아이를 침대에서 난폭하게 끌어내려, 그의 아름다운 머리털을 뒤로 쓸어주면서, 갑자기 긴 손톱을 그의 부드러운 가슴에 박아 넣고, 상처를 핥으면서 피를 맛있게 마신다는 구절(「말도로르의 노래」, 이동렬역, 민음사, 1977, 27면)은, 흡혈귀를 연상시킬 정도로 기괴하고 엽기적이다. 그래서 로트레아몽의 잔인성의 언어는 전통적인 언어와 전통적인 미학 속에 안주하고자 하는 소심한 정신에 심한 역겨움과 반발감을 일으키게 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높이 평가되는 것은 이런 반미학적이고 엽기적인 탐미주의가 기존의 질서와 사회와 인간조건과 인간을 창조한 신에 대해 격렬하게 반항하는 정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질식할 듯이 느꼈던 부르조아적 질서, 절대적인 지적 자유를 꿈꾸었던 모든 정신이 혐오했던 기존 질서에 대한 완강한 거부와 그것을 근저에서부터 송두리째 파괴해버리고자 하는 난폭한 반항의 의지가 이 작품 속에는 충만해 있다. 그렇기에 작품이 외견상 새디즘적인 잔인성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이고 문학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최근 탐미주의적 작품이 빈번하게 쓰여지고 읽혀지지만 그것이 과연 이와 같은 탐미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지 반문해 본다. 작가들은 미란 정신의 허전함이나 환상의 헛된 표현일 수만은 없는 것이고, 그 자체가 사회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