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현상읽기 - 미술

이미지, 삶의 장과 일치되는 경험의 총체로 이해해야
-미술과 시지각의 반성적 이해

 

고 충 환 (미술평론가)

 

정지 화면과 동영상 이미지

현재 미술계 일각에서는 20세기를 지배한 이미지로 여타의 인쇄 매체와 평면 회화에 기초한 스틸 이미지(정지 화면)를 든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21세기를 동영상 이미지로 대변함으로써 이미지의 변별성과 차별화를 꾀한다. 스틸 이미지는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정적인 성질로 인해 오리지널리티와 개성적 표현(아이덴티티)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으로, 그리고 이로 인해 주로 미술/예술의 장에 한정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스틸 이미지에 비교해볼 때, 동영상 이미지는 그것을 전달하는 통로인 상호 텍스트성과 함께 전에 없이 다양한 형태의 복제 이미지를 널리 침투시킨 원인으로, 그리고 이로 인해 미술/예술의 장을 삶의 장으로 견인해 낸 원인이자 가능성으로 간주된다. 스틸 이미지를 통한 다양한 형태의 정보가 여전히 물질적 감각의 형태에 머물러 있는 아날로그 방식과, 동영상 이미지를 통한 정보가 추상적 기호의 형태를 띠는 디지털 방식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적어도 동영상 이미지가 미술의 보다 일반적인 방법이 될 것이며, 그리고 미술/예술에만 국한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포괄적인 삶의 장을 배경으로 펼쳐질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달라진 이미지가 미술의 표현 가능성을 전에 없이 다양하게 하는 한편,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미술/예술의 장과 삶의 장을 구분하는 경계가 애매해짐으로 인해 이미지의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이미지의 본래 의미에로 소급 주목함으로써 이미지와 시지각 방식과의 관련을, 그리고 미술/예술의 장과 삶의 장과의 관련을 살펴, 미술이 기초하고 있는 이미지의 정체를 반성해 보고자 한다.

 

재현의 정체

예로부터 미술은 인간의 오감 중 특히 시지각 방식과 관련되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흔히 미술을 공간예술로 범주화하는 관례 역시 이러한 시지각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춤이나 연극에서처럼 일정 정도 지속되는 시간의 경과를 함축하는 소위 시간 예술과는 달리 공간예술이란 고정된(정지된) 한 순간의 포착에 한정된 미술의 성질을 말한다. 한마디로 미술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미래파에서 보듯이 미술에 시간의 성질을 도입한 동시성의 표현이나 칸딘스키에서 보듯이 음악/소리의 성질을 도입한 공감각의 표현이라는 예외를 인정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고정된 한 순간의 공간/형태 표현에 기초한 시각예술이자 공간예술인 것이다.

미술의 이러한 한계는 모더니즘 미술에서 보듯이 장르의 순수성을 보장해주는 경계이기도 하다. 미술에서의 형식적인 순수성은 전(前) 모더니즘 미술의 재현적 사실과 모더니즘 미술의 회화적 사실에서 보듯이 미술의 의미 내용 즉 미술이 재현하고 있는 상을 그 자체 의심할 바 없는 사실/진리/진실로 신뢰하는 도덕적인 순수성을 기초로 한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인 순수성은 전통적으로 미술에서의 재현을 문자를 대신하는 일종의 텍스트로 이해한 것에 기인한다. 고대의 암각화가 그렇고 성서나 불경의 일화를 도해한 종교화가 그러하며 상징이나 기호에 기댄 화법 역시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

형식적인 순수성과 도덕적인 순수성과의 이러한 동일시는 원래 삼차원적인 입체를 이차원적인 평면 상에 옮기는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미술이 고안해 낸 것에 불과한 원근법이 실제 삶 속에서 사물을 보는 시지각 방식으로 보편화한 것만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미술 고유의 재현 방식이 실제 삶 속에서의 시지각 방식을 견인하고 선취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회화에서 사진으로, 그리고 다시 영상으로 미술의 재현 방식이 달라지면서 각 매체 특유의 감각 경험은 물론이고, 지배적인 매체의 성질에 따라 일상의 시지각 방식마저 달라지거나 최소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정, 즉 미술의 재현과 삶의 시지각 방식이 갖는 영향은 지금처럼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를 필요로 하는 대중문화의, 광고의, 팝의 시대에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여하튼 재현이 사람들을 현혹시켜 그 자체 사실/진리/진실로 탈바꿈하는 과정 자체는 미술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 내용이 결코 순수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를테면 다양한 형태의 정서나 감정이나 계급의 정체에 호소하는 다양한 형태의 초상화/포스터/광고에서 보듯이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목적을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 미술의 재현 방식이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미술에서의 재현의 역사는 그 자체 현혹/착시/마술/신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이러한 현혹/착시/마술/신화의 역사를 사진이 이어받은 이후에는, 그리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더 이상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 추상 미술이 등장한 이후에는 사실상 미술이 재현하고 있는 상을 곧이 곧대로 신뢰하는 사람은 오히려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재현이 기초한 형식적인 순수성과 도덕적인 순수성과의 동일시에 대해 논하는 것이 불필요한 과거지사가 되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미술의 문맥에 새로이 편입된 무수한 새로운 형식들이 이미지의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으며, 이미지는 더 이상 시지각 방식에만, 그리고 마찬가지로 시지각 방식 역시 이미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지금처럼 이미지가 자유자재로 변신을 꾀하거나, 그 방식과 과정이 전략적인 형태를 띤 적이 없었다. 이렇듯이 변신을 그 본질로 하는 이미지는 마치 심장으로부터 발원되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는 피가 그런 것처럼 미술의 경계를 넘어 정치적인, 경제적인, 사회적인 맥락으로, 삶의 장 한가운데로 마구 자기를 침투시킨다. 마침내 이미지는 이미지가 아니고서는 더 이상 삶/경험이 가능하지 않는 몸의 최소 입자인 피/세포와 동일시된다. 이제 이미지는 미술의 장에 머물러 있던 종전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미술의 장을 포함한 미술 외적인 문제가 되었다.

미술은 원래 기술(techne)과 허구(fiction, pseudo)의 두 축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로써 진작부터 기술로 대변되는 형식과 허구로 대변되는 내용과의 분리를 잠재적으로나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미술은 허구를 재현해내는 기술/능력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미지와 몸(지각)을 동일시하는 메를로 퐁티에서 보듯이, 이미지를 권력의 한 표현으로 간주하는 미셀 푸코에서 보듯이, 이미지를 주체(즉자)의 존재를 위해 한낱 사물의 위치로 전락해야 할 운명의 대상(대자)과 동일시하는 샤르트르에서 보듯이, 이미지를 현실보다 더한 메타 현실(simulacrum)로 이해하는 보들리야르에서 보듯이 이미지는 인간의 실존과 삶의 장 자체가 되었으며, 허구는 더 집요하게 사람들을 현혹하고 착시에 빠트리며 마술을 걸어온다. 그리고 신화를 생산해내기에 급급하다. 이렇듯이 동시대 이미지의 습성, 즉 현혹/착시/마술/신화의 역사는 미술이라는 이름의 긴 재현의 역사를 전제로 한다.

표면적인 차이를 제외한다면, 이러한 사정은 동양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인간이 내재한 기의 힘을 빌어 사물의 이치에 이르는 이기론(理氣論)이나, 그 실천 과정을 뜻하는 재도론(載道論),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과 인간을 관통하는 소통 가능성에 주목한 인물동기(人物同氣)의 계기를 들어 예술을 이해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서양 할 것 없이 예술/미술/이미지는 진작부터 삶의 장 속에서 이해되었으며, 삶의 행위와 예술의 행위가 구분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지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자체에 타자를 포함하는 비순수요 혼성에 다름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미지가 기초하고 있는 허구와 비순수를, 형식적인 순수성과 도덕적인 순수성과의 봉합할 수 없는 불일치를 노출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미지를 더 이상 시지각적인 맥락에 한정시키지 않는 일이며, 시지각적인 경험과 현상을 이미지에만 한정시키지 않는 일이며, 삶의 장 한가운데에서 자기를 실천하는 이미지의 정체와 습성을 살피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미지를 삶의 장과 일치되는 경험의 총체로 이해하는 일이다.

 

이미지의 기원

그 기원을 추적해 보면 미술은 원래 기술(techne)과 허구(fiction, pseudo)의 두 축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로써 진작부터 기술로 대변되는 형식과 허구로 대변되는 내용과의 분리를 잠재적으로나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미술은 허구를 재현해내는 기술/능력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실제하는 것이 아닌 허구를 재현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그리고 허구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시했을까. 어원적으로 허구는 죽음의 이미지와 관련이 깊다. 이러한 사실은 미술과 관련한 주요한 개념들이 처음에는 하나같이 죽음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미지(image)와 상상력(Imagination)의 어원인 이마고(Imago)는 원래 죽은 사람의 얼굴을 뜬 밀납 주조와 귀신(영혼, psyche)과 환영(phasma)과 그림자를, 가상을 뜻하는 시뮬라크룸(Simulacrum)은 유령을, 형태를 뜻하는 피규라(figura)는 귀신을, 그리고 재현이라는 말은 장례 의식에서 검은 포장이 드리워진 빈 관이나 고인을 대신해 빚어 만든 채색된 형상을 의미했다. 상징과 함께 인간 의식의 표현 가능성을 증대시킨 기호라는 말은 묘석을 뜻하는 세마(sema)에서 유래했다. 한결같이 죽음과 관련한 제례 의식을, 죽음을 대면한 삶의 공포를, 죽음을 대신할 삶의 대용물을 지시하고 있다. 심지어 플라톤이 절대이념(idea)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natura)을 해석하는 기초인 형상(에이도스, Eidos)은 원래 죽은 자의 망령과 유령과 우상(에이돌라, eidola)을 뜻했다.

이처럼 허구를 죽음과 동일시한 배경에는 아마도 죽음 자체를 삶의 과정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제를 부정할 수는 없는 죽음에 대한 특이한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의 이러한 정의는 미술의 본질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를테면 마치 죽음이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존재하지만 감각적인 실제의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 생각이나 상상력의 산물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의 정의가 그렇다. 그러고 보면 미술이 기초하고 있는 허구 역시 한낱 근거없는 픽션/공상/환영 이상의 어떤 이중적이거나 다층적인 존재 또는 애매한 존재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결국 미술/예술은 그 자체 근거가 없거나 허무맹랑한 기초와 비교되는, 자기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존재의 틈을 발견하고 그 존재의 다층적인 구조를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고 죽음과 허구와 미술을 관통하는 성질을 이해하고, 상징적인 죽음 속에서 허구를 추체험하는 일이다. 미술의 기초인 허구가 죽음인 것은 삶이 미술의 기초라는 말과 동격이다. 미술/허구/죽음의 이해가 삶의 이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재현/이미지/시지각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실의 인정은 비순수와 일탈에 다름아니다. 미술/재현/이미지/시지각의 경험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은 다름아닌 자기 외적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삶의 장 속에서 그 존재를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