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예술인에게 듣는다/ 연극인 백성희

철저한 연긱자 정신 가져야 깊은 여기 할 수 있어...

만난사람:김미혜(연극평론가, 한양대교수)

 

김미혜:새해 들어 처음 뵙습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백성희:고맙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여성으로는 드물게 연기자로서 한 길을 가셨는데 배우가 되신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사실 동기가 제 자신의 절실한 욕구에서 나왔던 것은 아닙니다. 초등학교 상급반 시절 일본 유학 중이시던 외삼촌께서 다니러 오시면서 「一活가극단」의 팜플렛을 가져오신 적이 있습니다. 우연히 보게 되었지요. 그 팜플렛에 당시 소녀가극단의 최고 배우였던 미즈노에 다끼꼬의 남장 모습을 보았습니다. 실크 햇에 연미복차림으로 처음엔 남자인 줄 알았습니다. 또 라인 댄스 사진도 보았는데 너무 멋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 외삼촌께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가 핀잔만 들었죠. 그러나 그때의 기억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학교 졸업반 무렵 무용연구소의 훈련생 모집에 응모하게 된 것이 이런 잠재의식의 발로였을 겁니다. 경쟁이 몹시 치열했으나 합격을 했죠. 구체적인 계기는 서항석 선생이 이끄시던 「반도가극단」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가족들 몰래였습니다. 그 가극단은 우리 고전작품들인 「심청전」, 「춘향전」, 「흥부전」 등을 서항석 선생이 가극으로 각색하여 무대화하던 곳으로 꽤나 격이 있었죠. 「심청전」에서 뺑덕어멈 역을 맡았는데 마침 관람을 하셨던 함세덕 선생이 서항석 선생께 내가 배우로서 장래성이 있다고 하셨나 봅니다. 서선생께서 연극배우가 되라고 권유하시더군요. 허나 난 아직도 집안 몰래 하는 것이어서 이름도 이화자란 가명을 쓰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극단 「현대극장」과의 인연을 말해야 되겠습니다. 제 2 신극운동기에 신극운동을 하던 이 단체는 유치진 선생이 대표였고, 함세덕 선생이 작가 겸 연출로 활동하고 계신 곳이었습니다. 김동원, 유계선, 이영남, 김선영, 강계식 선생 등이 단원으로 있었죠. 우연히 이 극단의 「봉선화」 공연 포스터를 보고 관람하러 부민관에 들어갔습니다. 누군가 이화자란 내 가명을 부르더군요. 그리고선 마침 집이 멀어 오지 못하게 된 어떤 여배우의 대역을 해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 개막 5분 전이라 얼떨결에 거절도 못하고 꼼짝없이 한쪽에선 분장을 당하고, 한쪽에선 의상을 끼워맞추는 동안 대강의 줄거리를 듣고 꼭 필요한 대사 세 마디를 외웠죠. 떼밀려 나간 채 무대에 어떻게 섰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헌데 공연이 끝나자 어른들이 너무너무 칭찬을 해주시더군요. 그게 연극과의 본격적인 인연이었으니 참으로 우연이었고 마치 죽는 것같이 무서운 경험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대개 서울 공연 후 지방 순회공연이 있었고 다시 서울에서 재공연하는 게 관례였습니다. 「봉선화」도 그런 수순을 밟고 다시 서울 단성사에서 재공연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극단 사업부의 박민천씨가 집으로 찾아와 주역을 제의했습니다. 갑자기 대역으로 나갔던 때의 무서운 기억이 있었지만 연습기간이 일주일 있다고 하여 맡게 되었습니다. 유계선씨와 함께 주역을 맡았죠. 미술을 그리는 현대여성 역이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소녀”라는 중평이었고 그것이 데뷰작인 셈입니다. 그때가 1943년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주역으로 배우생활을 시작한 것이죠. 어른들의 격려와 귀여움을 독차지했습니다. 행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제 생각엔 배우가 되려는 의도가 없었으면서도 기초가 잘 된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무용으로 몸의 유연성이 훈련되어 있었던 데다 대사를 정확하게 발음했거든요. 게다가 꿈만 꾸던 세계에 뛰어든 과감함도 있었고요.

:그때 백성희란 이름으로 출연하셨나요?

:네, 그랬습니다. 이름은 서항석 선생이 지어주신 겁니다.

 

순발력을 너무 믿는 배우는 생명력이 짧다

:배우로서 모델이 되는 분이 있다면요?

:김선영씨를 예술가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합니다. 평소때는 화장기도 없이 평범한 가정주부 모습이었지만 일단 무대에 서면 훌륭했습니다. 음색이 고운데다 대사를 아주 예쁘게 구사했습니다. 난 어느 틈에 그 분을 모방했던 것 같습니다. 눈을 감고 들으면 내가 하는 대사인지 그 분이 하는 대사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고들 했습니다. 예술이란 처음엔 모방으로 시작해 자기의 것을 찾는 것이니까요. 그 분은 개막 두 시간 전에 벌써 도착하셔서 분장도 손수 하셨습니다. 자기가 형상화한 캐릭터에 맞는 분장이라야 하는데 분장사가 그걸 알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투철한 배우 정신을 가진 분이셨죠. 나도 손수 분장을 합니다.

:그간 출연하신 작품 수가 많다보니 여러 상대역과 공연하셨을 텐데 가장 호흡이 잘 맞는 분은 누구입니까?

:총 4백여편에 출연했습니다. 롱런의 관습이 없는 나라이다보니 그렇게 출연편수가 많은 건데 자랑이 못됩니다. 어쨌든 최소한 2백여 명의 상대역과 공연을 했습니다. 김동원, 이해랑 선생님을 비롯해 현재의 중년 세대까지 무수히 많습니다만 역시 김동원 선생님과 호흡이 가장 잘 맞았습니다. 김선생님과의 인연은 해방 후에야 이루어졌지만 상대역에 대해 매우 세심한 배려를 해주시고 편안하게 역을 형상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젊은 세대가 상대역일 경우엔 사실 불만족스럽습니다. 키워서 상대역을 맡기는 셈이라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요즈음엔 장민호 선생과 호흡을 잘 맞춥니다. 작년에도 「무의도 기행」과 「운상각」에서 공연했습니다.

:굉장한 행운이십니다 (웃음). 자신은 어떤 유형의 배우라고 생각하십니까?

:배우엔 두 유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중 인물의 자기화, 자기의 작중 인물화, 두 가지로 보는데 전자는 헐리우드 배우들로 대표되는 상업극 배우들의 유형입니다. 그러나 난 후자의 유형이라 생각합니다. 배역이 주어지면 그 인물 속으로 들어가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젊어서는 가꾸고 꾸민 아름답고 지성적인 역들을 많이 했지만 난 원래 평범한 역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개성있는 역을 맡아 도전하고 그 역과 싸워 내 것으로 했을 때 배우로서의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배우의 순발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순발력을 너무 믿는 배우는 생명이 짧다고 생각합니다. 환자로 치자면 응급치료를 해주는 격이니까요. 연기에는 정석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배우의 표현 도구인 몸을 건강하고 순발력있게 유지하기 위해선 나름대로 노력을 합니다. 젊었을 때부터 몇 가지 동작을 운동삼아 합니다. 나이들어 시작하기는 어려운 동작들인데 아직도 매일 아침 40-50분 정도 합니다. 건강하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며 타고난 건강을 잘 지키려고 합니다.

 

작중 인물은 스스로 형상화한 작품들이 인상에 남아

:인상에 남는 작품들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국립극단 생활을 50년 동안 했고 모든 역이 나의 분신이라 할 수 있으니까 몇 작품을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작품에 임하는 태도 때문에 몇 작품이 기억에 남습니다. 대표작으로 「나도 인간이 되련다」가 꼽히는 것 같은데 거기서 나타샤 김이란 여자 역을 했습니다. 유치진 선생이 그 여자를 내면, 외형 모두 그럴 수 없이 추하고 악하게 그렸는데 당시 극단 「신협」에선 최은희, 황정순씨가 선배여서 여주인공 복희역으로 더블 캐스팅되었고, 이 악역을 두 분 다 맡기 싫어 해 내 차지가 되었습니다. 난 악하고 추한 이 여자의 내면에서 동정의 여지를 찾아내려 애썼습니다. 소금배 타고 다니던 아버지가 블라디보스톡에서 소련여자와의 사이에 낳은 이 여자도 우리의 피를 가진 한국의 딸 중 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누구라도 손을 내밀어 구해 주고 싶은 여자로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녀의 장기인 노래와 춤을 이용하자고 생각했고, 그 역의 형상화를 위해 샤갈의 그림 「소」를 밤새도록 들여다 보았습니다. 또 그녀가 쓰는 지독한 함경도 사투리도 우리의 방언 중 하나로 승화하겠다는 욕심을 가졌습니다. 서울 토박이인 나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주선태씨에게서 사투리도 배웠죠. 결과적으로 무대에서 나타샤 김만 보이더라는 평을 받았고 객석의 폭소도 자주 이끌어냈지요. 1964년 「만선」에서의 구포댁은 그때까지의 이미지를 파탈해 본 최초의 역이었습니다. 천하고 찌들은 여자였지만 아들을 뭍으로 내보내기 위해 어려움을 감내하는 그녀의 내면의 힘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여주인공으로 해서 “한 편의 교향시”였다는 평을 들었고 오늘날의 백상예술상인 제1회 한국일보 예술상에서 본상을 탔습니다. 이 작품은 다시 20여년 만에 호암아트홀 개관 공연의 일환으로 재공연했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의 블랑쉬역에서도 난 그녀의 본질을 보려 했습니다. 파산한 가정으로 인해 거의 창녀가 된 여자이지만 본질은 광목이 아니라 실크같은 여자라 해석했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은 아름다운 여자로 본 거지요. 그게 1965년이었는데 1981년에 다시 캐스팅되었고 의상 싸이즈가 하나도 변하지 않아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노경식씨의 「달집」에서는 사십대 초반으로 칠십이 넘은,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성난 노파역을 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습니다. 목소리가 원래 철성(鐵聲)인지라 최저음을 내기 힘들었던 데다 객석에 들리도록 하자니 매우 고생했습니다. 작품을 끝내고 한 일 년간 고음이 나오질 않을 정도였습니다. 「파우스트」에서의 마르테 역도 국립극단에서만 두 번 했습니다. 모두 작품에 임하는 제 극성스러운 성격 때문에 인상에 남는 작품들입니다. 어떤 역이 되었든 나는 작가가 부여한 캐릭터에다 나의 해석을 덧붙이고 피와 살을 붙여가는 형상화의 과정을 갖습니다.

:같은 역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다시 맡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지요?

:그렇습니다. 아주 드물지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세월이 가면 변하기 마련이지만 외형적 모습이 많이 변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배역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 살찌우게 하는 나의 접근 태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철저한 연기정신이 가장 중요한 연기자의 조건

김: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들도 있으실 텐데요?

:역시 극성스러운 성격 때문에 기억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무녀도」 공연 때 주인공 모화가 경상도 무당이라 어떻게 형상화해야 할 지 걱정이 많았지요. 마침 문예진흥원 주관으로 경상도 무당들을 모아 굿을 하게 하며 채록을 하는 작업이 있어 그곳을 사흘동안 쫓아다녔습니다. 뙤약볕 아래서 녹음도 하는 등 열심히 쫓아다녔는데 막상 연습에 들어갈 때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잘 해보자던 것이 그만 공동작업에 지장을 초래했지요. 또 「딸들 연애의 자유를 구가하다」에서 막내딸 역으로 분했는데 “국회의사당 단상에 올라가..” 운운하는 대사를 그만 “국행의사당 당상에...”로 잘못 했습니다. 뜻이 통하니까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데 그러질 못하고 또 틀렸어요. 난 당황하고 틀린데 대해 짜증이 났지만 다른 배우들은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지요. 게다가 강계식 선생이 한참 뒤에 나와야 할 “풋내나는 처녀가...” 운운하는 대사를 치고 말아 객석에서도 알았고 모든 게 엉망이 됐습니다. 공연이 5분 중단됐죠. 이 모든 것이 다 내 원칙과 성격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우직스러운 철저주의죠. 그건 조부님이 관직에 계신 데다 집안이 엄해 배우가 너무 어렵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인 지도 모릅니다.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님의 허락을 얻지 못해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딸이 죽을까 조바심이 나신 어머니의 설득에 마지못해 허락하신 아버님께서 평생 연극을 하겠다는 딸의 당돌하고도 확고한 결심에 “광대는 내 딸이 아니다” 하시면서 “기왕 할 거 열심히 철저히 하지 않는다면 넌 사람도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사연 때문으로도 철저한 작업 태도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국립극단장을 지내셨는데 보람있었던 일, 어려웠던 일, 후회스러웠던 일은 없으셨는지요?

:1972년부터 75년까지 명동시절에 최초로 선거로 뽑힌 단장이었습니다. 너무 뜻밖이어서 계획같은 게 없었습니다. 세계 최연소 여자 국립극단장이라고 떠들썩했죠. 그러나 난 무엇보다 배우였기 때문에 극단장 시절을 내 일생에서 가장 아까웠던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나더러 대사를 잘 외운다 하지만 첫 리허설에 가기 전 인물 분석을 하고 인물 형상화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대사는 저절로 외워집니다. 이런 작업방식 때문에 연습시간이 다른 사람보다 더 필요한데 많이 방해가 됐습니다. 그러나 단원들은 여극단장인데다 내가 체질적으로 권위적이 아니기에 가족적인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연기에 몰입하고 집중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물론 극단장으로서 좀더 충실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만. 91년부터 94년까지 장충동시절에 재임이 됐는데 몇 가지 일은 추진했습니다. 국립극장 전체 단원들의 처우 개선을 했고요, 공연법을 개선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해서 힘들었습니다. 또 ‘우리 명작 만들기’ 운동도 벌였습니다. 너무도 작품의 보고(寶庫)가 빈약한 우리인지라 그 문제를 절실하게 생각했죠. 해마다 공모형식으로 좋은 작품 발굴에 애쓰도록 했는데 그 성과는 아직 두고 봐야겠습니다.

 

무대에 설 수 있는 날까지 열심히 할 생각

:주로 과거 이야기를 했는데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넘아가겠습니다. 현재 전국에 40여개로 늘어난 연극영화과에 해마다 지원자가 늘어나고 있고 그들이 대개 배우 지망생인데 어떤 사람이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요즈음 학생들은 부모들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어 너무 부럽고 내 옛날을 생각하면 정말 격세지감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매체가 다양하여 연기의 장르도 다양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연극인, 예술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무대예술의 뿌리가 되고 싶은 사람, 그런 정신적인 각오를 갖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뿌리가 건전해야 잎이 무성하고, 꽃이 피고 좋은 열매가 맺어지죠. 관객은 이 열매, 즉 정신적인 자양분을 얻고자 합니다. 그걸 충족시키겠다는 각오가 있고 그것에서 만족을 얻어야 합니다. 더구나 평생을 ‘업’으로 삼겠다면 애착과 집념이 있어야 하죠. 흔히 유행이나 돈, 스타의 명성을 꿈꾸며 뛰어드는데 위험한 일입니다.

:연극배우가 영화나 TV 쪽의 작업을 하는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으로 연기를 튼튼히 한 후 그런 쪽으로 나가는 것이 젊은이들의 성향인 것 같은데 특별한 거부감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치열하고 철저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니까요. 저도 영화에 두 번, TV에 몇 번인가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만 여가를 이용한 것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 연극계가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했다고들 하는데 나름대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난 옛날의 춥고 배고픈 시절에도 연극을 하기에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경제적 발전을 위해 모든 것, 특히 문화예술을 뒷전으로 미뤘었는데 경제 성장을 어느 정도 이룩했을 때, 즉 70년대 쯤 그걸 제자리로 돌려놓지 못한 것의 후유증을 지금 겪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매체시대에 배우야말로 연극을 다른 매체와 구별되게 하는 가장 큰 특징인데 배우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원로배우로서 주고 싶은 말씀은? 특히 여성들에게 주실 말씀이 있다면요?

:연극 초창기부터 여배우는 희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남녀 구별은 없어졌는데 연극이야말로 다른 어떤 분야보다 여성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나 TV는 시간 생활이 무계획적이라서 가정생활과 양립하기 어렵지만 연극은 일정한 시간만 연습하고 공연하는 것이라 시간 관리가 용이하니까요.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이미 언급한 것 같고 일반론으로 말하자면 연극은 정말 해 볼 만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계로 생산되는 물건들이 넘쳐나도 수제품이 귀한 것과 같이 한 뜸 한 뜸 수를 놓듯 만들어져가는 연극이야말로 사람의 영과 육이 배어있는 것이고 그래서 해볼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난 연극을 사람이 하는 최상의 것이라 여기고 있고 그래서 무대에 설 수 있는 날까지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김: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연극배우가 되고자 하는 젊은 이들에게 유익한 이야기가 되었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