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논단/ 연극평

인간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
-셰익스피어와 박정희

 

이태주(연극평론가)

역사 속에 눈물과 영광을 동시에 적어 놓은 사람, 한 사람은 예술을 창조한 영국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한국의 정치가요 군인이다. 두 인간의 너무나 다른 생애를 그린 드라마를 거의 동시에 보았다. 서울예술단이 예술의 전당에서 2월 12일에서 20일까지 공연한 밀레니엄 뮤지컬 「태풍」 (셰익스피어 원작, 각색, 연출 이윤택)앵콜 공연과 2월 4일부터 27일까지 공숭아트홀에서 막을 올린 극단 즐거운 사람들의 「인간 박정희」(예술감독 권오일, 송영민 작, 김창래 연출)였다.

 

재미있게 만든 좋은 연극 「태풍」

「태풍」부터 얘기해 보자. 1막 1장의 무대에서 보여 준 태풍과 좌초 장면은 역동감 넘치는 무대미술(신선희)과 특수효과(에이스 특수효과) 때문에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문제는 배 위에 있는 갑판장, 곤잘로 일행이다. 그들의 모습은 좌초한 침몰 직전의 위기감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폭풍의 구경꾼들 같았다. 아수라장으로 변한 선상의 소동이 소리와 이미지로만 표현되고 있을 뿐 그 것이 선상의 사람들에게 처절하게 파급되어 연기로 표현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조난 장면의 대사처리 시간과 내용이 너무 길었다. 짧게 압축했어야 옳았다. 2장으로의 전환은 좋았다. 무대장치도 실감이 났다. 미란다(이정화)와 프로스페로(신구)의 등장이다. 프로스페로는 셰익스피어의 분신이라는 학설이 정설로 되어 있고, 각색자도 극 마지막에 프로스페로를 통해 “제 이름은 윌리암 셰익스피어! 이 것이 저의 마지막 무대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희곡을 쓰기 시작한 나이가 26세였고, 붓을 꺾고 고향 땅 스트랏트포드에 은퇴한 나이가 46세이다. 이 작품 「폭풍」은 그가 고향 땅에 와서 썼다는 설이 있다. 셰익스피어는 22년 동안에 36편의 희곡을 썼다. 그는 엘리자베스조시대 영국에서 연극 좋아하는 여왕의 총애를 받으며 런던의 인기작가가 되어 38세에 이미 고향 땅에 13만평 이상의 땅과 호화저택을 구입할 만큼 부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스트랏트포드는 지금 셰익스피어 예술의 박물관이요 문화산업의 황금벨트가 되어 있고, 그의 작품집은 지난 천년 동안 인류가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서 최고의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런던에는 그 동안 유실되었던 셰익스피어 극 전용 ‘글로브 극장’이 다년간의 복원작업이 끝나 개관되어 셰익스피어 시대의 무대를 재현시키고 있다.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셰익스피어는 너무나 “재미있다.” 그러나 재미 있게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이윤택의 「태풍」은 재미있게 만든 좋은 예가 된다. 「태풍」 속에는 세 가지 다른 세상이 있다. 하나는 프로스페로가 대표하는 초자연의 마술세계이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하늘의 소리 에러리얼(양재희, 정유희)이나 마녀의 피를 이은 반인 반수 캘러반(조정근,이기동)의 지하 암흑의 세계이다. 두 번째는 난파선을 타고 온 곤잘로(유희성)일행의 현실세계. 권력욕 때문에 약육강식(弱肉强食)을 일삼는 물욕의 세계이다. 안토니오(박철호)와 세바스티안(노동원) 등은 이에 속한다. 세 번째는 미란다의 세계, 순진무구(純眞無垢)의 사랑의 세계이다. 미란다는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미고, 아이를 낳고, 평화로운 사회와 국가의 이상향을 만들어나가는 행복한 일의 주역이 된다.

셰익스피어는 「태풍」을 통해 화해(和解)의 정신을 표현했다. 화해를 하는 인도주의 정신은 셰익스피어가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만년에 도달한 지혜였다. 한 시대의 과실과 죄악이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의 청순한 사랑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는 이 작품의 일관된 주제가 된다. 이 작품의 행동 시간이 수십년 또는 수 개월 이상이 되지만 셰익스피어의 「태풍」에서는 프로스페로가 섬에 오기 이전의 사건이 설명으로 끝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섬에서 상봉(相逢)하지만 복수는 용서로 바뀌는데, 이 일이 세시간 안에 처리되어 실제시간과 드라마의 시간 그리고 장소가 통일되는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 속에서 추악한 인간의 현실을 보기도하고, 초자연의 힘을 빌어 꿈의 세계를 몽상하지만, 중요한 것은 청춘의 사랑이 전하는 신뢰와 희망의 주제가 된다. 이 드라마가 지니고 있는 그런 도덕적 가치의 보편성과 현대적 의의를 재미있게 재구성해서 전하고 있는 드라마가 서울예술단의 「태풍」이었다.

대중적 취향에 맞도록 극을 꾸미고 있다는 얘기는 무엇인가. 뮤지컬로 꾸민 것 자체가 이미 그것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퍼디넌트(남경주)와 미란다의 달콤한 사랑을 부각시킨 노래와 춤(안무 박일규)과 연기의 적합성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2막에서 보여 준 곤잘로 일행의 풍자적인 의상, 대사, 연기, 노래, 그리고 특히 경쾌한 음악과 춤의 연출적 책략이 또한 그것을 말하고 있다. 광대 트린큘로(고미경)와 주정뱅이 주방장 스테파노(김성기)의 희극적 장면의 풍성한 오락성이 그것을 의미한다(재미는 있었지만 이 시퀀스가 너무 길어 1막 이후 미란다와 퍼디넌트의 존재감이 희박(稀薄)해질 염려까지 있었다). 이들 두 사람과 캘러번과의 대조적 표현도 셰익스피어가 의도했던 대로 이번 무대에서 잘 표현되었으므로 대중적 흥미 조성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피트를 이용한 해안선 설정 등의 입체적 무대공간의 변화와 스릴, 화려한 의상, 군무, 공중비행, 푹풍 장면의 다이너미즘 등 볼거리의 재미를 배가(倍加)시켰다. 폭풍장면은 특히 관중들의 열띤 박수를 받은 부분이다. 이토록 옆가지 일들이 재미있어서 극의 본줄기가 옆길로 빠져드는 위험이 따랐다. 화려한 낙원 장면과 감미로운 음악의 설정은 낭만적 목가극(牧歌劇)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들어 더욱 더 오락적 흥미를 고조시켰다. 이윤택은 초연 무대의 장단점을 검토해서 신바람 나게 두 번째 무대를 멋대로 만들어나갔다. 이 경우 제 멋대로 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셰익스피어는 어디로 갔는가, 그런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가 제공한 소재만 남아있지, 셰익스피어적 언어가 상실되고, 셰익스피어적 인물의 성격 형상화가 때로는 잘못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프로스페로 역의 신구는 우리가 자랑하는 명배우이지만 이 번 역할에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래도 잘안 되고, 대사도 부자연스러웠다. 「한여름 밤의 숲」에서의 숲의 의미가 변신(變身)의 공간이었던 것처럼, 「태풍」의 섬도 마찬가지로 변용(變容)의 공간이 된다. 도시에서 묻은 모든 오점을 이 섬은 바닷물 속에서 뼈를 씻어주듯 정화(淨化)시킨다. 「리어왕」에서 보는 비극의 질풍과 노도의 바람이 이 작품 속에 일고 있다. 그것은 파괴적 요소가 된다. 프로스페로의 싸늘한 분노의 감정과 용서의 온정은 성격구축의 두 축이 된다. 복잡하고도 파괴적이며 부정적인 그의 인간관계는 미란다의 사랑의 과정과 곤잘로의 시련의 과정을 통해 단순하고 행복한 관계로 치환(置換)된다. 그 변화의 연기가 프로스페로에게는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인데, 그 일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스페로는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있지만, 그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거만해지고, 독설도 퍼붓는다. 복수심도 억누르고 극복해야 한다. 미란다가 연인이 생겼기에 딸에 대한 미련도 버려야 한다. 그는 고뇌의 과정을 지나 스스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일이 있다. 프로스페로의 연기는 이토록 복합적인 심리적 내용을 담고 있어야하는데, 그런 연기가 이번 무대에서 가능했었는지, 분장과 의상은 이런 성격을 표현하고 있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송용태, 남경주, 박철호, 유희성, 노동원, 김성기, 고미경 등은 모두 우수한 연기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여주인공 이정화, 그녀의 연기력, 폭발력, 가창의 아름다움은 뛰어났다. 다만 언제나 강성 이미지의 발성만으로 일관하면, 특히 듀엣인 경우에는 오히려 단조로워지고, 들리지 않고, 앙상블이 깨진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소프트한 발성, 작은 목소리, 조그마한 동작, 이런 디테일의 표현도 여간 중요하지 않다. 의상(천경순, 최영로)은 「태풍」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셰익스피어 극에 있어서의 의상은 성격의 사회적 위상은 물론이거니와 인물의 내면과 외면의 성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곤잘로는 말하고 있다. “다행히도, 믿을 수 없는 것은, 저희들의 의복입니다. 바닷물에 빠졌기 때문에 흠뻑 젖었는데도 여전히 새것처럼 윤이 나고, 새로 물들인 것처럼 소금물에 찌든 흔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2막 1장 56행 이하) 변용과 부활, 그리고 상생(相生)의 극에서는 의복도 “새로 물들인 것처럼” 되어 있다. 미란다가 “아 아름다운 신세계여”라고 감탄하는 것도 화려한 의상을 걸친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기 따문일 것이다. 세바스티안과 안토니오가 곤잘로를 비꼬는 말 가운데서 “진실을 호주머니 속에 감추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호주머니 속에는 바다 진흙이 흉측한 마음처럼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의상은 겉과 속의 단절을 말하는 비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되고 있으니 이 점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다 더 한국적인 색채, 형상, 연기, 무용, 소리, 빛이 필요했다. 셰익스피어를 현대적으로 수용하려면, 셰익스피어의 한국적 수용방법을 더 연구해야 한다. 글로벌 시대의 국제 경쟁력을 가지려면 한국의 소리, 한국의 빛이 더 투입되어야 한다. 이윤택은 이 일이 장기인 연출가이다. 이 번에는 어중간한 지점에서 멈춰선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 나라 뮤지컬 공연에서 마이크와 스피커의 개선은 언제 이루어질까. 우리 나라 셰익스피어 무대에서 번역자를 밝히는 양심은 언제 회복될 것인가. 한국 셰익스피어협회 신정옥, 김동욱, 오수진 교수들이 조사한 문헌(Shakespeare Review, Vol.35 No.4)을 보면, 1999년 우리 나라에서 공연된 29개 셰익스피어 공연 가운데서 번역자를 밝히고 있는 작품은 1개 작품뿐이다. 이런 사태는 엄연한 판권침해요, 예술적 불성실 행위이다.

 

아쉬운 부분 많았던 연극 「인간 박정희」

「인간 박정희」는 작품의 구조면에서 볼 때, 제 1 부 혁명전야의 압축된 동작 중심의 표현은 좋았지만, 삼모리 장면 등에서 보여주고 있는 성장과정의 시퀀스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오히려 극의 발전과 긴장의 지속에 이 부분은 방해가 되었다. 극의 중요 내용을 박정희와 그의 측근 정치가들과의 관계, 특히 이들의 영구집권 획책, 음모, 배신, 갈등,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권력의 절정에 도달한 순간의 클라이맥스에서 액션의 하강 부분이 되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최후의 만찬 장면을 설정해서 암살 당하는 부분의 집요한 추구, 다시 말해서 권력자들이 몰락하는 비극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드라마로 구성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들의 몰락을 타율적인 파괴적 요소에 의한 것으로 설정하면, 극의 매력이 감소된다. 몰락의 원인을 이들 자신의 신념, 계획, 야망, 자체 반란, 상호충돌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런 와중에서 인간 박정희의 고뇌는 무엇이었는가, 그 권력의 실체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행복한 인간이었는가, 진실한 인간이었는가, 왜 군사독재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미국과의 관계는 순탄했는가 등의 문제에 대한 작가 자신의 분명한 입장과 해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의 제기와 논의가 없는 박정희 연극은 호소력을 잃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찬양 일변도의 연극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피소드를 줄여야 한다. 스토리가 잡다해지면 안 된다. 최후의 만찬 한 장면만을 설정해서 연극을 만들되, 인간 박정희의 최후가 충신들이 도망간 자리에서 자행(恣行)되고, 믿었던 사람에 의해 저격 당하는 장면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결국은 연회석에 불려 온 가련한 여자 가수의 품에 안겨 죽어야 했던 인간 박정희의 고독은 무엇이었는가를 서사적인 수법이나, 또는 에피소딕 플롯 구성의 기법으로, 그리고 때로는 잔혹연극의 방법으로 피터 브룩이 「마라/사드」에서 한 것처럼, 페터 바이스가 「망명지에서의 트로츠키」에서 했던 것처럼, 그런 방식이 그의 인간 됨을 그리기에 더 적합할는지 모를 일이다. 박정희라는 이름 앞에 “인간”이라는 말을 덧붙혀 강조하는 이유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작가가 사용하고 있는 극작술도 이런 방법과 그리 멀지 않다. 나는 이 드라마를 작가가 다시 써주기를 바라고 있다.

김창래 연출도 볼 만한 부분이 많았다. 박정희 역의 주진모는 박정희 대통령의 생전의 모습과 언동에 집착한 나머지 몸이 너무 굳어 있어 연기가 유연하지 못하고 발성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러니 때로는 들리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 대사의 템포를 좀 늦추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전국환(장도영 역), 고인배(미 대사역), 장기용(박상희 역), 유정기 (황태성 역) 등의 연기는 좋은 평가를 받을 만 했다. 그리고 갑작스런 대역으로 충분한 연습 없이 출연한 이경선(육영수 역)은 이번 연극의 발견이요, 수확이다. 대소도구와 무대미술은 더 연구해 봐야 한다. 음악(김성준)은 효과적인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독일방문”장면의 음악처리와 연출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