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예 - -중국 귀지의 나희

신을 위한 사람들의 잔치
- 귀지(貴池)의 나희(儺戱)

전경욱(고려대교수)

귀지는 오랜 역사를 가진 성읍으로 원래 지주(池州)라고 불렀는데, 안휘성의 양자강 중류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귀지는 진한(秦漢) 시기부터 청동 채광 및 제련, 동전 주조, 조선업 등이 발달했고, 물고기와 쌀의 고장(魚米之鄕)으로 알려졌다. 귀지라는 지명도 이 지방에서 나는 물고기 귀어(貴魚)에서 유래했을 정도이다.

 

이국 땅에서 존경받는 한국의 성인

귀지에는 중국의 4대 불교성지로 유명한 구화산도 있다. 기암괴석과 희귀목,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해서 이백·두보 등 많은 문인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해발 1342미터 꼭대기에 산사와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룬 사람들, 그들 속에 우리 신라국 왕실의 근친 김교각이 있었다. 김교각은 바다 건너 중국에 와서 구화산에 머물며 70여년간 수행했다는 전설적 인물이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원적하자 골짜기가 무너지고 뭇 새들이 구슬피 울었으며, 불길이 솟구쳐 오르는 등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3년이 지나도록 시신이 변하지 않자, 승려들이 그를 지장왕보살의 화신으로 받들어 육신탑을 세워 모셨다고 한다. 그후부터 구화산은 지장왕보살 도량으로 되었고, 한때는 승려들이 운집하고 사원이 숲을 이뤄 향불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김교각과의 인연 때문인지 귀지 사람들은 한국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가면이 곧 신, 마을마다 모신 신 달라

명나라의 「지주부지(池州府志)」에 이미 귀지의 나희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청나라 낭수가 편한 「행화촌지」에는 8월 15일 지주 사람들이 소명회(昭明會)를 하는데, 네 향의 나희팀이 관우·성황·이랑(二郞)·칠성으로 분장하고 소명사(昭明祠)로 향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현재도 귀지의 나희에 등장하는 배역들로서, 이번 조사에서도 볼 수 있었다. 예전에 귀지에는 ‘나희 없는 마을이 없다’고 할 정도로 나희가 성행했다. 귀지에는 마을에 따라, 종족에 따라 나희의 내용이 다르다. 이는 그 종족이 어느 지방에서 이주해 왔는가 하는 차이 때문이다. 귀지의 나희는 마을 주민들이 공연한다. 귀지의 마을들은 동족마을이기 때문에 종족마을 중심으로 나희를 공연하는 셈이다. 가면극인 나희는 향촌제사, 우리식 용어로는 동제(洞祭)에서 공연된다. 그래서 향촌제사가 마치 축제처럼 즐겁다. 향촌제사는 밖으로는 토지신에게, 안으로는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마을마다 조상 사당이 있고, 그 안에 가면들이 있다. 가면이 곧 신이며, 마을마다 모시는 신이 다르다.

이번 조사에서는 귀지의 두 마을, 즉 탕리요(蕩里姚)와 사촌(謝村)의 나희를 조사했다. 그리고 직업 극단이 공연하는 나희도 조사했다.

 

귀지의 향촌 제사 활동

귀지에서는 나희를 호도신희(豪萄神戱), 잡희(雜戱), 지희(地戱), 또는 남희(南戱)라고도 하며 통칭해서 나희라 한다. 나희를 포함한 제사활동 전체를 호도신회(豪萄神會), 나신대회(儺神大會) 또는 나희회(儺戱會)라 한다. 호도신희란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연원은 매우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귀지 나희는 매년 1회 정월 초이레부터 보름까지 열흘간 행해진다. 정월 초이레는 인일(人日)이다. 인일이 되어야 비로소 문 밖에 나가고 일이 시작되므로, 대부분의 나희회도 7일부터 시작된다.

나희는 각 종족 지파와 그 나희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조달한다. 제사와 나무, 나희에 쓸 도구는 대부분 한 번 사용 후 태워버리므로, 전 해 12월 말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나희의 무대는 대개 사당의 조상 신감(神龕) 앞에 임시로 무대를 가설한다.

 

제사의식 후에 거행되는 나무와 나희

의식을 마친 후의 연출은 나무(儺舞)와 나희(儺戱)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모두 가면을 쓰고 한다. 나무는 축사납길(逐邪納吉), 즉 나쁜 것을 쫓고 좋은 것을 받아들이기를 기원하는 의식적 가면무이다. 나희는 고사 등에서 소재를 취한 가면극이다.

귀지 나무의 레파토리로는 「무산(舞傘)」, 「타적조(打赤鳥)」, 「괴성점두(魁星點斗)」, 「무재신(舞財神)」, 「무회회(舞回回)」, 「무고로전(舞古老錢)」, 「화관색전포삼랑(花關索戰鮑三娘)」 등이 있다.

귀지 나희는 「맹강녀(孟姜女)」, 「유문룡(劉文龍)」이 대표적인 레파토리이다. 그외 「파화장사저(擺花張四姐)」등 포청천이 나오는 작품을 공연하기도 한다.

 

귀지(貴池) 유가향(劉街鄕) 요가촌(姚街村) 탕리요(蕩里姚)의 나희(儺戱)

2월 11일에는 탕리요의 나희를 조사했다. 이 날이 음력 1월 7일이므로 나희를 처음 시작하는 날이다. 유가향은 8개의 촌이 있는데, 특히 나문화(儺文化)가 발전한 지역이다. 그래서 모든 촌에서 나희를 거행한다. 탕리요는 요씨들의 동족마을로서, 자연마을이다.

이 마을의 묘(廟)는 조상 사당으로서 안에 2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이다. 이 사당은 명나라 때의 것인데, 문화혁명(1966∼1976) 때 사당 안의 유물들이 파괴당했다고 한다. 원래는 조상의 위패 등을 모시는 사당이었지만, 지금은 나희 하나 정도만을 복원했다. 1992년부터 사당과 제사를 복원하기 시작해,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나희를 다시 놀기 시작했고, 1998년에 용정(龍亭)을 제작했다. 문화혁명 전까지는 계속 나희를 놀았으나, 문화혁명 이후 나희가 중단되었다. 현재 나희를 복원했다고는 하나 가면극의 규모나 수준이 옛날만 같지 못하다고 한다.

나무로 제작한 용정에는 황제씨(黃帝氏), 동자(童子), 부로(父老)의 가면을 모시고 있다. 황제 씨는 중국 최고의 조상신이고, 부로는 농민을 상징하며, 동자는 노(老)와 대조적인 소(少)를 상징한다. 가면들 바로 위에는 네 명의 효자가 조각되어 있다. 감실의 오른쪽 벽면에는 포청천, 왼쪽 벽면에는 관우와 조자룡을 조각해 놓았다. 관우는 재물신으로 인식된다.

용정 앞에는 제사상이 차려져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이 제사상 위에 향을 피우고 복을 기원한다. 농민들은 각자 집에서 마련한 여러 가지 물건을 가져와 젯상에 올리는데, 콩·달걀·물고기·돼지머리는 필수적이다. 신에게는 산 것을 바치고, 조상에게는 죽은 것을 바친다고 한다. 콩은 오곡이 풍성하길 바란다는 뜻이다. 달걀은 자손 번창을 상징한다. 물고기는 어(魚)의 음이 여(餘)와 같기 때문에 바친다고 한다. 여(餘)는 여유(餘裕)로서 재물과 부자를 상징한다. 물고기의 입에는 붉은 천을 물려 놓았는데, 붉은색은 길상(吉祥)을 상징한다. 또한 삼생(육·해·공)의 구색 맞추기라는 이야기도 있다. 돼지는 길상을 상징한다. 특이한 것은 돼지머리와 꼬리를 한데 올린다는 것인데, 신에게 온전한 한 마리를 드린다는 의미라고 한다.

사당의 좌측 벽면에는 용상(龍床)이 있다. 사당 안에 여러 신을 모셔 놓은 탁자를 용상이라 부르는데, 용상 위에는 신들을 상징하는 가면들이 놓여 있다. 높은 신일수록 뒤에 놓는다. 가면은 모양을 깎은 후 제사를 지내고, 얼굴에 있는 일곱 구멍에 닭의 피를 한 번씩 찍어야만 비로서 신이 된다. 이후로 가면은 아무 데나 놔서는 안되고, 오로지 얼굴에만 써야 한다. 가면을 만지는 사람 역시 따로 있는데, 반드시 먼저 손을 씻고 절을 한 후 가면을 만져야 하며 부부관계도 금한다. 가면극인 나희를 할 때 이곳에서 가면을 착용하고 의상을 입는다. 용상 앞에는 간단한 제사상이 놓여 있다. 그 위에는 원보(삶은 달걀)·콩잎·녹차·쌀·술주전자가 올려져 있다. 중국인들은 설이면 반드시 삶은 계란을 하나씩 먹는데, 그래야 비로서 한 살을 먹으며 재물 복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사당 안의 정면에는 나희의 무대를 설치하고, ‘구사축역’(驅邪逐疫)이라고 쓴 막을 세워 놓았다. 이는 사악한 것과 역병을 몰아낸다는 뜻으로, 향촌제사와 나희 즉 동제와 가면극을 거행하는 목적을 알려 준다. 향촌제사와 나희를 거행하기 전에 향을 많이 피우고 폭죽을 터뜨린다. 폭죽소리는 정말 대단했다. 필자는 자주 귀를 막아야 할 정도로 엄청난 소리였고, 폭죽 중에는 하늘로 치솟아 불꽃을 퍼뜨리는 것도 있었다. 폭죽을 터뜨리는 것은 큰 소리를 통해 잡귀를 쫓아버리려는 의도이다.

해가 진 후 용정에 모셔진 가면은 토지신 제단에서 참배하고 ‘나신대회’를 비롯한 몇 가지 기를 들고 마을 전체를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사당에 모셔졌다. 영신(迎神) 행렬이 집앞을 지나갈 때 수백 개의 폭죽을 터뜨리며 환영했다. 폭죽놀이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이어서 악기가 요란하게 연주되고, 마을사람들은 돈을 대신하는 지전을 바치고 향을 사르며 소원을 빈다. 우리가 요란한 쇠가락을 쳐서 잡귀 잡신을 내쫓는 것처럼 놀이공간을 정화시키고 놀이를 무사히 마치기를 비는 의도라고 한다.

이어서 나무가 거행되었다. 첫 나무는 축사납길과 신을 보호하는 의미의 ‘무산(舞傘)춤’이었다. 이는 우산 모양의 도구에 5색 천이 12겹으로 달린 무산을 들고 춤을 추는 것이다. 모양이 하늘을 덮는 형태로 되어 있어서 보호한다는 뜻도 있고, 거기에 신을 내림받아 모셔가기도 하고, 나쁜 것을 몰아내고 좋은 것을 끌어들이는 역할도 한다. 둘째 나무는 복록수재희(福·祿·壽·財·喜)의 다섯 가지 복을 준다는 ‘오성회(五星會)’였다. 셋째 나무는 농사를 방해하는 새를 잡는 내용의 ‘타적조(打赤鳥)’였다. 넷째 나무는 벼슬을 하게 해준다는 ‘괴성점두(魁星點斗)’였다. 나무는 샤머니즘 본연의 의식인 축귀제의(逐鬼祭儀)와 농경·어로·수렵의 풍성한 결실을 기원하는 풍요제의(豊饒祭儀)의 형식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상의 나무가 끝나자 나희가 시작되었다. 나희의 내용은 유문룡 이야기를 극화한 것이었다.

사촌(謝村)의 나희

2월 12일에는 사촌의 나희를 조사했다. 사씨들의 동족마을인 사촌은 포장촌(鋪莊村)과 협동적으로 나희를 거행한다. 두 마을이 해마다 번갈아 가며 가면을 공동으로 보관한다. 올해 사촌에서 나희를 거행하면 이 마을에서 가면들을 보관하고, 내년에는 포장촌에서 나희를 거행하고 그곳에서 가면을 보관한다. 사촌은 1966년 문화혁명 바로 직전까지 나희를 거행했고, 1995년에 나희를 복원했다. 그래서 창·연기·악기·반주 등 모든 면에서 탕리요의 나희보다 뛰어났다. 사촌의 주신(主神)은 이랑신(二郞神)이다. 이랑신은 수재(水災)를 막는 신으로 용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곤등도 수구(水口)에 모셔놨다가 나희를 할 때 가져온다. 작년에 포장촌에서 나희를 거행했으므로 가면들이 든 상자와 곤등을 포장촌에서 가져오는 것으로부터 제사가 시작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가면상자와 곤등을 가지고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폭죽과 화약을 터뜨려 엄청난 폭음 속에 마치 전쟁터를 방불하게 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을 입구에서 조상사당까지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집집마다 이랑신에게 닭을 제물로 바쳤다. 마을 사람들이 닭을 들고 서 있다가 칼로 닭의 목을 잘라 피를 냈다. 사당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닭의 목을 사당 앞의 작은 못에 던졌다. 닭머리로 용을 제압해 수재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혈제(血祭)가 이 마을 나신회의 특징이다. 또한 집집마다 한 상씩 젯상을 차려 사당에 가져다 놓았다. 이곳에서는 제물로 쌀, 달걀, 돼지, 생선, 두부, 술을 바치는데 칼을 올려놓는 것이 특징이다. 칼을 제물과 같이 놓는 경우는 중국에서도 지금은 보기 힘든데, 『주례』에 칼을 놓은 기록이 보인다. 이랑신의 가면을 쓴 놀이꾼이 곤등춤을 추어 공공연하게 이랑신의 현현을 알린 다음, 각 집에서 가져왔던 젯상을 도로 집으로 가져간다. 신들을 상징하는 가면을 모신 후에 탕리요에서는 우산춤을 추었지만, 사촌에서는 곤등춤과 회회춤을 추었다. 곤등춤[舞滾燈]은 사진과 같이 생긴 것의 안에 촛불이 켜져 있다. 곤등춤은 이미 신을 모신 후에 추므로 벽사보다는 납길의 의미가 강하다.

회회춤[舞回回]은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신들이 나와 축사납길하는데, 사계절을 대표하기도 한다. 이들은 옷에 기쁠 희(喜)자 두 개를 거꾸로 수놓았는데, ‘거꾸로’라는 뜻의 도(倒)자가 ‘온다’는 뜻의 도(到)자와 음이 같아 기쁨이 온다는 뜻이다.

이로서 신을 모시는 절차는 끝나고, 이른 저녁 식사를 한 후에 나희가 거행되었다. 무대 왼쪽의 뒤로 이랑호도지신을 모신 위패가 있고 사당에 들어오면 먼저 향을 태워 예를 표하고 공연을 본다. 위패 윗쪽에 가면들을 올려놓은 용상이 있다. 나희의 놀이꾼들은 용상 있는 곳에서 의상을 입고 가면을 쓴다. 의식 중 어린 아이를 비롯해 누구나 자유롭게 무대에 오르내리고 참여할 수 있지만, 여자는 올라가지 못한다. 물론 공연도 모두 남자가 한다.

나희는 처음에 보대(報台)라고 불리는 사람이 나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소개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방창(幇唱)이라 해 무대 옆에서 창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대 위 아래와 사람들이 모두 함께 창을 하는 것은 오래된 관습이다. 이 지방의 민간가락이라 모두 쉽게 따라할 수 있는데, 이것은 남방 계통의 유습으로 초기 나희에서의 방창 습관이 전해 온 것이지만, 무대극 가운데는 거의 없는 특이한 경우라 한다. 무대 뒷면에는 두 개의 커텐이 드리워져 있는데 왼쪽은 등장을, 오른쪽은 퇴장을 하는 문이다. 이것은 소동파가 말했던 ‘귀문도(鬼門道, 귀신들이 출입한다는 뜻)’라는 것인데,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의 인물들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후대에는 신들이 등장하는 문 앞쪽으로 북잡이가 앉아 북을 치고 있다고 해 ‘고문도(鼓門道)’라고도 했다.

나희는 「유문룡(劉文龍)」과 「장사저요동경(張四姐鬧東京)」이었다. 중국인들은 과거 급제를 최고로 치기 때문에 「유문룡」을 자주 공연한다. 문룡(文龍)에서 문은 과거(科擧) 문과를, 용은 급제를 의미한다. 특히 올해는 용(龍)의 해이기 때문에 나희를 하는 마을마다 「유문룡」을 많이 공연한다고 한다.

 

나희가 우리에게 준 것

귀지 나희에서의 무당의 역할은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원형은 무당이 신을 받아서 했던 것으로 돌아갈 수 있다. 원시시대에는 신이 내려서 무당이 그 역량으로 표현해 내던 것이 송대부터 가난한 시골무당이 도시로 진출해 생계를 위해 기예를 팔기 시작하며 신이 아닌 인간을 위한 것으로 변경, 무당에서 배우로 발전하는 변화를 촉진시켰다고 한다. 결국, 연극이 생기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은 신을 향한 인간의 순수한 마음일 것이다.

어느 곳을 가도 느낄 수 있는 중국적인 색채, 가난하지만 문화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일행은 중국에 도착하며 시계를 한 시간씩 되돌려 놓았다. 우리보다 한 시간이 느린 나라, 중국. 그러나 세계 역사상 유래없는 ‘사회주의 속의 자본주의’ 신화를 만들며 한 세대를 앞서갈 수도 있는 잠재력을 가진 나라.

뿌리를 찾는다는 건 미래를 찾는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시대, 정보화 시대, 세계화 시대, 그 가운데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남의 문화만을 추종하거나 자신의 뿌리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제2, 제3의 식민지를 자초하는 것이다. 시원(始原)문화, 그것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미래까지 이어주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