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자연으로 돌아가기 |
문학예술에 나타난
자연과의 친화 ? 이 태 동 (문학평론가, 서강대교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서 환경의 의미와 역할 환경과 이데올로기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데올로기의 뜻을 명확히 알아야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흔히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이 계급의식과 관련된 일면을 지니고 있다고 자동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반드시 계급의식과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이 말의 근원적인 의미는 인식론적인 것으로서, 이념의 근원에 대한 과학에서 연유해 온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로크와 홉스 그리고 베이컨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종의 경험주의 철학에 속하는 것으로서 모든 이념이 지각에서 연유해 온 것으로 설명하는 과학인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또 다시 말한다면, 이데올로기는 이념의 사회적인 근원을 탐색하는 과학으로 사회학자들과 인류학자들에 의해서 사용된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는 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개인적인 혹은 공적인 이해관계에 의한 사상의 왜곡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 왜곡을 연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왜곡은 어떤 단일한 항목에 한정될 수 있으나, 전체적인 범위의 사상 및 사상의 형태 그리고 개별적인 집단의 표현, 계급사회, 광문화(廣文化)에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이데올로기는 모든 사유에 확대되어 있어서 반이데올로기적인 사유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대단히 불안한 것이다. 만일 모든 사상이 이데올로기라면 어떤 객관적인 말도 이루어질 수 없고, 또 객관적으로 알려질 수도 없다. 그래서 칼 만하임은 자기 자신과 같은 독립된 지식인들은 인간을 이념적인 오류를 강요하는 사회적인 요인으로 인해 동요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서 위에서 언급한 딜레마를 벗어나고자 했다. 또 맑스주의자들은 이념적인 오류를 계급사회의 징벌로 보고 혁명 후의 프롤레타리아와 미래의 모든 인간은 이러한 체계적인 착각의 오류에서 벗어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은 인류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관심을 갖는 것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계몽주의자들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런데 어원학적으로 이데올로기는 이념(idea)과 이성(logos)의 통합을 의미한다. 인간의 실존적인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상을 이성적으로 설정하는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이상론(ideo-logie)인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상징하고 있는 이상론은 데카르트가 말했듯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이념」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와 환경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성중심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이성중심주의를 낳았고, 그것은 산업사회를 출현하게 해서 환경파괴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성중심의 이상론, 즉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믿음의 바탕 위에서 펼쳐진 인간중심의 기술문명은 역설적으로 우리들의 삶의 터전을 황폐화시킨 결과로 나타났다. 이것에 대한 극단적인 예로 우리는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그리고 체르노빌 사건을 들 수 있겠다. 아우슈비츠의 사건은 유대인들이 선민(選民)으로서 유대교라는 특정한 종교를 믿었기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니고, 그 종교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자의적인 가치를 절대화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은 기술적 광신의 희생물이었다.” 이성중심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낳은 인간의 절대화는 아우슈비츠 비극을 통해 그것의 실체, 즉 ‘기술시대의 신’이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또한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 사건의 경우, 침략자와 희생자가 전도될 만큼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야기했다. 이러한 비극은 비록 핵이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가 아닌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평화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체르노빌 사고 역시 그것이 수많은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을 뿐만 아니라, 지구를 오염시킬 만큼의 위험을 보였다. 비록 과학자들과 일부 정치가들은 이러한 사건을 우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과학과 문명을 ‘신(神)’처럼 절대시 한 결과, 오늘날 우리들은 대기오염에 시달리고 있고 마실 물도 없게 될 만큼 생태계가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와서 인간이 거주할 공간이 날로 줄어들고 있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가 없다. 또 과학문명이 가져온 황폐한 현상은 오직 과학문명만이 치유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 역시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은 인간이 정복해야할 대상이 아니고 상호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친화해야만 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환경문제가 인간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거주지를 박탈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이러한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인간이 자연과 유기적으로 친화의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을 자연에 종속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가치 내지는 실체를 유지하면서 자연과 변증법적인 관계를 맺자는 북친의 주장과 일치되는 것이다. 북친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보기보다는 유기적 발전관계로 파악하는 변증법적인 사유가 서양의 문화적 토양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동양 못지 않게 유기적인 전통을 이루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북친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에 속해 있듯이 인간의 일부인 이성 역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의 다른 부분을 훼손하지 않고 그것과 친화하면서 우리의 생활환경을 보다 나은 상태로 진화하는데 균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변증법이라는 말은 결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하나의 친화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즉, 오늘날 우리들이 위협을 느끼고 있는 환경의 파괴는 자연과의 변증법적인 친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이고 도구적인 이성중심으로 자연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파괴하고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문제는 자연을 자연과 유리된 이성으로 착취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인 이성을 통해 우주와 자연이 지니고 있는 다양성과 잠재력을 진보적인 차원에서 변증법적으로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자연과의 친화는 인간을 현재와 같은 심각한 환경파괴에서 구해낼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문학 속 자연친화 기류 근자에 들어 우리 사회에서도 앞서 논의되었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서의 환경의 의미 내지는 역할에 대한 담론을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부터는, 그 하나의 예로서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자연과의 친화문제를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만일 우리가 한국 문학이 이성중심주의적이고 기계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지 않고, 새로운 환경 이데올로기인 자연과의 친화문제를 주제로 다루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문학의 전통 속에서 자연과의 친화라는 주제의식 및 모티브를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한국문학의 전통에 나타난 기류는 이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연적인 신비주의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자연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생명력을 확인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김동욱 교수는 그의 탁월한 논문 「한국문학의 기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논자에 따라 우리의 民族移動이 阿斯達族 → 眞蕃族 → 韓族으로 잡건, 高句麗族의 波狀的인 이동이든 간에 …이 民族移動의 성격은 살기좋은 樂園으로 부터의 축출이 아니라, 地政學的인 위치로 보아 보다 살기 좋은 땅에의 定住이기 때문에, 神話에 내재한 悲劇性이 희박한 것 같다. 解慕漱의 讓國神話나 朱蒙·溫神의 逃避神話도 그들은 보다 아름다운 땅에 정착하여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現實肯定的이다. 이는 南方으로 내려올수록 溫暖肥沃하다는 現實性 위에 서 있는 것이다.1) “민족문학의 효시이자 그 전통적인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는 건국신화가 이렇게 ‘현실 긍정적’인 것이 된 것은 지정학적인 요소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그의 지적은 한국신화와 무속(巫俗)이 범신론적인 차원에서 자연과의 친화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군신화의 중심적인 주제는 초월적인 세계를 상징하는 환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地上)이라는 현실세계를 상징하는 웅녀의 인간적인 변신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신화가 지니고 있는 다른 특징과 함께 한국문학의 특징을 원형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우주적인 차원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건국신화에는 많은 유사점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환웅과 웅녀, 그리고 마늘과 쑥 이야기가 나오는 단군신화와, 소벌공(蘇伐公)이 발견했던 알에서 나왔다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신화에는 희랍 문화의 기원을 말해주는 「레다와 백조」의 신화와 유사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신화는 신에게서 동물적인 것을 억제하는 지혜와 사랑을 피 속에서 전수받는 일원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서양의 그것은 사랑과 갈등이라는 이원론적인 구조로 되어있다. 희랍신화의 제우스 신은 백조로 변신해 레다를 급습해서 낳은 알에서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렌과, 남편인 아가멤논을 죽인 클리템네스트라를 낳았다. 그래서 희랍의 신은 파괴적인 불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啓示)했지만, 단군신은 사랑과 인내 그리고 기다림을 통해서 그 자신을 나타내려고 했다. 이러한 한국정신의 원류가 지닌 두 가지 특징은 텐느가 말하는 이른바 역사적인 시간의 자극을 받아 많은 변모를 해서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민족문학의 전통 속에 심층적으로 흐르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토착적인 한국정신이 웅녀가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현실세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현실 속에서 낙원을 추구하며 자연과 친화하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체계화된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자연사상과 불교철학에 의해 많이 굴절되었지만, 그것은 무속과 민요, 그리고 민중문학을 중심으로 한 저항적인 리얼리즘 정신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듯 하다. 한국의 무가(巫歌)는 언뜻 보면 낭만적인 성격만을 지니고 있는 듯 하나, 그것이 서양문학에서 볼 수 있는 로망스와는 달리 웅녀와 유사한 이미지를 지닌 무녀(巫女)를 중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은 리얼한 인간적인 상황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김윤식 교수가 한국문학의 특징이라고 지적한 ‘여성편향’2)을 김소월과 김영랑, 한용운 그리고 기타 한국 시에 전통적으로 나타난 ‘님’에서만 찾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형적인 민족신화와 그 전통적인 문맥의 흐름 속에서 찾아 볼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天.地.人’의 ‘삼재사상(三才思想)’을 설명하는 ‘乾道成男, 坤道成女’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이 하늘이 아닌 땅을 상징한다고 보면, 민족문학의 뿌리는 낭만적인 색채 뿐만 아니라, 리얼리즘적인 요소를 적지 않게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민족문학이 조선조에 와서 주자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나, 민간전승으로 이어져온 전설이나 혹은 민중에 의해 쓰여진 문학은 인제나 사대부와 부권적(父權的)인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풀이’와 ‘해체’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무속적인 색채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심청전」은 물론 「춘향전」이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주목할 만 하다. 「심청전」에서 생명을 나타내는 물의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하늘이 아니라 땅이고 자연 그 자체란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무속신은 결코 하늘의 신이 아니고 자연신이란 사실도 이러한 사실을 크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우리 문학 속에서 무가 혹은 민요 등이 유교사상보다 불교사상을 많이 흡수해서 융합하고 있는 것은 불교가 천명(天命)사상을 중심으로 한 추상적이고 이성적인 억압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기보다는 억압받지 않은 자연현상과 유사한 구조를 지닌 윤회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근대에 와서 다시 치열한 역사적인 시간과 외래문화의 억압적인 영향을 받아 소멸되거나 내부적으로 침잠해 들어갔지만, 한국문학 작품의 기본 구조는 언제나 억압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통이란 민족과 풍토가 존재하는 한 단절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문학이 일어난 후에도 한국문학 작품에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한국 현대문학 작품 속에 지배적인 감정구조는 서구사상에 중심을 이루고 있는 바이블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정신이나, 플라톤적인 ‘이데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기 보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因緣)의 그물이나 혹은 그것을 뛰어넘으면서도 그 속에 머물고 있는 이른바 ‘멋’이라는 이름의 ‘낯설게 하기’의 양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많은 수의 한국작품들은 서구의 그것들과는 달리 변증법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한 플롯보다 강심 밑으로 흐르는 물결 혹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도 같이 해체된 ‘놀이’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문학 작품의 주제와 구조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이 사회적인 문제를 취급하던지 혹은 존재론적인 문제를 취급하던지 간에 억압적인 것을 풀어내거나 아니면 억압적인 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움직임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사건이나 정서적인 현상이 서로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기는 하나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고 은하수에 흐르는 별들처럼 뚜렷하고 ‘낯선’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동안 적지 않은 국문학자들과 평론가들은 판소리와 민요 그리고 리얼리즘적인 고전소설 등에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토착적인 고전문학의 전통을 현대문학 속에 가장 성공적으로 수용한 김동리 문학을 지나치게 폄하시키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것은 작가 김동리에 대한 정치적인 저항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나치게 서구의 리얼리즘적인 입장을 취하는 비평가들이 불교사상이 결합된 토착적인 무속신앙을 합리적이지 못하고 황당무계하며 허무주의에 빠져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하나의 토속적인 상징체계로 볼 것 같으면, 그것이 초월적인 세계보다는 현실을 긍정하는 자연숭배 내지 자연과 친화하려는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본주의(神本主義)’사상이 아니라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과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김동리와 문학적인 입장을 달리하는 다른 고은이 김동리의 작품을 두고 ‘한국소설의 원점’이라고 지적하며 “아무리 우리소설이 서구의 소설전통에서 배워 온 것이라 해도 그것이 우리들의 토양에 완전무결하게 착륙한 것은 동리문학부터” 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 하다. 김동리의 작품 「무녀도」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주자학과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서양으로 들어온 과학문명에 의해서 추방된 무속을 중심적인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루고 있지만, 무속을 허무주의와 관련이 된 시대에 뒤떨어진 반이성(反理性)적인 낡은 미신으로 보았다. 비록 김치수와 같은 비평가는 이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소멸의 미학이라는‘비극미(悲劇美)’까지 언급했지만, 무속에 대해서는 언급을 유보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무속을 허무의식에의 탐닉이나 무지(無知)의 표상으로서만 볼 것 같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나타난 샤머니즘은 어디까지나 샤머니즘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앞서 언급한 ‘자연과의 친화’와 깊은 관계가 있는 민족의 ‘얼과 넋’이 담겨 있는 샤머니즘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동리 자신이 「무녀도」에서 사용한 샤머니즘에 대한 그의 진의를 밝힌 데에서 선명하게 밝힌 바 있다. 나는 우선 우리 나라 무교(巫敎)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고대의 그것은 충분히 연구할 만한 정신 자원임엔 틀림이 없었으나, 그 뒤 불교, 유교, 기독교 등 완성된 외래 종교에 의하여 민속 내지 토속으로 밀려나가면서 개화가 되고 기독교가 밀어닥치자 경멸과 증오의 대상인 미신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민족의 근원적인 얼과 넋을 찾는다는 동기(모티브)였기 때문에 미신으로 추락된 샤머니즘을 대상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의 종교로서의 기능과 본질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완성종교와 대비시키는 길을 취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나는 내가 어릴 적부터 의지해 오던 기독교를 택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샤머니즘에 붙이려는 문학적 의미는 여기 그치지 않았다. 나는 일찍이 세계문학전집이란 것과 서양철학이란 것을 중심하고 이에 관계되는 책들을 광범하게 읽어왔다. 그리하여 그들의 소위 세기말(世紀末)이란 것과 20세기란 것의 의미를 나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당시도 흔히 20세기의 「불안과 혼돈」을 말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무서운 살육과 파괴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의 세기말의 위기 「허무와 절망」에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덧 잊고 있는 듯 했다. (그 뒤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이 지나가고 핵무기가 등장하고 우주시대가 시도되고 하는 따위, 이 모두가 같은 원리 속에 있지만).3) 이렇게 김동리가 「무녀도」에서 샤머니즘을 단순한 미신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연과 친화라는 한국인의 ‘얼과 넋’이 담겨있는 토착적인 종교로 보았기 때문에 그것은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와의 갈등에서 ‘문학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김동리는 기독교가 들어옴에 따라 샤머니즘이 빛을 잃고 소멸해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은 일제 식민지에 의해 억압받아 황폐화 한 민족의 토착정신은 물론 이성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과학문명에 의해 자연과 생명력이 파괴되어 가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김동리가 자연과 친화하려는 토착적인 샤머니즘을 니이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인 원리와 같은 문맥에다 놓고 그것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형상화해서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 속에서 어머니인 모화와 아들 욱이의 갈등이 샤머니즘과 기독교와의 갈등으로만 보이지만, 그것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 이상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것 이외에 그것은 대지(大地)를 나타내는 여성과 하늘을 나타내는 남성과의 갈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욱이라는 남성이 아니고 그를 낳은 무당 모화로 되어 있고, 이 작품이 끝난 후에 ‘살아남은 자’ 역시 남성이 아닌 여성, 즉 ‘수국 용신님의 딸’ 낭이라는 사실은 이 작품이 나타내고자 하는 근본적인 주제가 하늘이 아닌 땅과 생명력의 확인과 긍정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예수교가 들어온 후 영험을 잃었다고 하는 모화가 굿을 하면서 「심청전」에서처럼 다른 곳이 아닌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사라지는 것 또한 하늘이 아닌 자연, 즉 생명력을 지키고 확인하는 것인 듯 하다. 왜냐하면 물은 언제나 생명력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화가 죽음 앞에서도 정숙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굿을 통해서 수국용신님과 접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굿은 일종의 「풀이」로서 인간이 어떤 대상을 믿고 그 자신이 처해있는 실존적 상황과 극한적으로 대결함으로부터 오는 희열, 즉 신적인 경험이라고 볼 것 같으면 현실, 즉 땅과 생명을 상징하는 「수국용신님」에 대한 그의 믿음과 집착이 칼날 위에서 춤을 추듯 자신을 신으로 만들만큼 처절한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동리가 「무녀도」에서 토착적인 샤머니즘을 통해서 탐색하고 있는 자연과의 친화는 얼핏 보기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닫혀진 공간을 취급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그의 문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인 현실을 외면한 작가로서 비난을 해왔다. 그러나 샤머니즘은 그 자신이 밝혔듯이 ‘신본주의’가 아닌 실존주의적인 리얼리즘의 색채를 ‘인본주의’내지 생명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자연과의 친화를 표현하기 위한 상징적 은유로서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작가 그 자신이 밝혔듯이 세기말의 징후, 즉 1·2차 세계대전의 무서운 살육과 파괴를 가져오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무기의 사용을 가져온 ‘이성 중심주의’에만 지나치게 치우친 것에 대한 상징적인 저항의 몸짓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시점에서 볼 때 김동리가 샤머니즘을 문제시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비이성적인 무의식과 결합시키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산업화로 인한 자연파괴가 크나큰 문제로 대두된 지금에 와서 그의 문학이 재평가되고 있는 것은 위의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환경 이데올로기가 21세기를 지배하는 새로운 가치체계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존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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