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현상읽기 - 문학

여성작가의 존재방식

 

-강진호(문학평론가)

최근 문단에 두드러진 현상이 있다면 ‘여성작가 밖에 없다’는 말이 들릴 정도로 여성작가들의 활약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1999년도 ‘교보문고’에서 집계한 연간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신경숙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은희경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전경린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 공지영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박완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 여성작가들이 윗자리에서 독자들의 사랑을 한껏 누리고 있다. 오정희, 이경자, 양귀자를 비롯한 중견이나 80년대 이후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김인숙, 공지영, 이혜경, 공선옥 그리고 소위 차세대 주자로 평가되는 배수아, 하성란, 조경란, 정정희, 한강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성작가들이 문단을 주도하며 문예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근래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여성 당선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현상 역시 가히 ‘여성작가의 전성시대’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여성작가들이 이처럼 양산된 배경에는 지난 세기가 이룩한 고속성장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와도 관계가 있다. 즉, 가사로부터 상대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자기 계발에 몰두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한 고학력 여성의 수적인 증가와 사회적 욕구의 팽배가 여성 고유의 섬세함이 집요함과 만나면서 빚어진 문화적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90년대 이후 우후죽순으로 개설된 문예창작과를 통해서 배출된 문학예비군의 대량 생산 역시 여성작가들의 번성을 촉진한 중요한 요인이다. 이는 소위 명문 사립대학에서까지, 전문대학에서나 개설되는 학과로 여겨졌던 문예창작학과를 개설하게 되었고, 심지어 배출 문인 수가 마치 그 학과의 등급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회자되는 현상을 낳았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원인은 사회 전반의 민주화에 따른 가부장적 권위의식의 약화와 그에 따른 여성들의 사회적 욕구의 증대에 있다. 이제 여성들은 가정 속에서만 안주하는 비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과감하게 자신을 주장하고 당당하게 내세우는 사회적 존재로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사회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야기된 물신풍조와 경직된 사고는 여성의 시각과 감성을 통해서 사회를 새롭게 이해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않을 수 없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낳았다. 이런 사회 환경의 변화 속에서 여성작가들의 활약이 그 어느 때보다도 두드러지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 현상이다. 물론 모든 여성 작가들을 단일한 경향과 의도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 작가들은 저마다 개성적인 작품 세계를 보이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의도적인 비판과 적의를 내보이는 부류도 있고, 그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일상을 천착하면서 삶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는 작가들도 있다. 인간관계의 이면을 날카롭게 통찰하는 은희경의 소설, 삶의 심연을 통찰하는 깊은 시선, 그렇지만 결국은 무위(無爲)로 돌아가는 삶에 대한 회한을 주조로 한 배수아, 여성이라는 비극적 존재가 벌이는 치열한 몸싸움의 흔적을 곳곳에서 보여주는 전경린, 그물로 짠 듯한 정교한 문체와 삶을 응시하는 충실한 시선을 특징으로 하는 이혜경, 아직도 80년대의 격변기의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벌이는 고투를 소재로 한 김인숙 등은 어느 하나의 경향으로 묶을 수 없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이면을 투시하는 날카로운 시선과 집요한 문체다. 남성작가에게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섬세한 감성과 기지에 찬 시선은 타성에 젖어 있는 일상을 철저하게 해부하여 감춰진 진실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와 역사라는 거시적 시각의 조율을 받지 못하는, 즉 원근법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아직은 불안하다. 이 글에서 살피고자 하는 하성란은 여성 작가의 이와 같은 장점과 한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작가라 할 수 있다.

하성란 소설을 중심으로…

하성란은 1996년 등단이래 지금까지 두 권의 소설집과 장편 하나를 발표하였다. 꾸준하고 성실한 활동을 통해서 그녀는 최근 젊은 작가들의 소설과는 달리 안정감 있는 고전적인 스타일의 소설을 지속적으로 창작해 왔다. 「루빈의 술잔」과 장편 「식사의 즐거움」에 이은 최근작 「옆집 여자」는 이런 기존의 장점을 한껏 유지하면서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작가의 남다른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하성란의 서사전략은 어떤 꼭지점을 향하여 육박해 들어가는 문체의 정교한 구축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어떤 형상, 즉 주제를 제시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그녀의 문체는 마치 사물의 성분을 하나하나 분석하는 현미경의 렌즈와 닮아 있다. 양파의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겨내어 마침내 그 속살의 실체를 보여주듯이 그녀는 환상과 가식으로 치장된 현상의 이면을 집요하게 천착한다. 섬뜩할 정도의 이 집요함이란 일찍이 문학사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이고, 바로 그런 점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을 새롭게 의미화하는 이 작가의 전략이자 강점인 것이다. 「즐거운 소풍」, 「옆집여자」, 「곰팡이꽃」은 이 집요한 시선에 의해 포착된 우리의 일상의 실체를 문제삼은 작품이다. 소설은 치밀한 언어의 구축을 통해 우리 앞에 인간의 숨겨진 단면을 제시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우리는「즐거운 소풍」에서 만날 수 있다. 「즐거운 소풍」의 마지막 대목에서 등장인물 전원은 카메라 앞에 모여서 단체 사진을 찍게 된다. 그런데 카메라의 렌즈 앞에서 웃고 있는 이들의 표정 이면에는 사실은 입주자 전원을 살해하겠다는 음모를 품고 있는 건물주와, 건물을 팔아버리려는 건물주를 살해하고자 하는 세입자들의 ‘동상이몽(同床異夢)’이 도사리고 있다. 낡고 냄새나는 5층 짜리 상가건물을 철거하고 고층 오피스텔을 지으려는 사장은 그것을 반대하는 입주자들을 소풍 길에 살해할 생각을 갖고 있고, 사장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세입자들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세입자들은 사장을 없애려는 살기를 내보인다. 그런데도 이들은 야외로 소풍을 나간다는 사실로 인해 들뜨고 즐거운 표정을 연출한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세입자인 학원 원장을 사장이 죽이는 ‘살인 모티프’를 뺀다면 이 소설은 우리의 모습과 흡사한 것으로 보인다. 회의석상에서는 예의바르게 인사를 교환하지만 사실 개개인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칼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다.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은 언제 동지에서 적으로 변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관계에 있다. 이것을 우리는 신문의 정치면에 실리는 사진들 속에서도 무수히 목격할 수 있지 않을까.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하고 있는 여야 정치인들의 얼굴 뒤에는 상호간의 이해득실을 따지며 교묘한 줄다리기를 벌이는 또 다른 얼굴이 가려져 있는 것이다. 웃는 표정 뒤에 숨은 또 다른 얼굴은 보통사람들 눈에는 불투명한 막 앞에 선 것처럼 여간해서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작가의 렌즈는 사람들의 웃는 표정 뒤에 숨은 또 다른 얼굴을 찍어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즐거운 소풍」이 보여주는 스냅사진은 하성란이라는 작가의 렌즈가 얼마나 교묘하고 정밀하게 계산된 장치인가를 보여주는 한 예일 뿐이다. 또 다른 단편 「옆집 여자」는 이웃이라는 가면을 쓴 타인의 정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즐거운 소풍」의 주제의식과 닿아 있다. 전업주부인 ‘나’는 507호에 새로 이사온 젊은 여자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마음을 터놓지만 그 여자가 보여주는 친절이란 사실은 가식적인 것이고, 그 친절 속에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협하는 흉기가 숨어 있었다. 웃는 얼굴로 물건을 빌려가던 여자는 단순히 물건만을 빌려가는데 그치지 않고 ‘나’가 갖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교묘하게 절도해 가고 있다. 아이와 남편, 그리고 나중에는 ‘나’를 정신병자로 치밀하게 몰아가는 행각을 통해 ‘나’를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명희와 남편, 그리고 내 아들 성환이는 마치 한가족처럼 보입니다. 남편과 내 아이, 다른 물건들처럼 이번에도 돌려주지 않을 작정일까요?명희, 저 낯선 여자가 누굽니까. 507호, 옆집 여잡니다.

「옆집여자」(창작과 비평사, 1999), 36면.

 

그런데, 이 507호 여자는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건설된 사회구조가 발생시킨 수 많은 인간군상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인간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허망하게 배반당하는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속지 않기 위해 상대를 속이는 배타적 인간관계에 길들여지고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곤두세우며 타인을 경계하고 심지어 가족조차 의심하며 스스로를 무장하고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웃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냉혹한 악마의 얼굴을 숨기고 있는 ‘옆집 여자’는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인간인 것이다.

「곰팡이꽃」에는 자기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쓰레기 봉투를 매일매일 집으로 가져와 해체해 보는 남자가 나온다. 평범한 회사원일 뿐인 남자가 밤마다 목욕탕에 틀어박혀 욕조 안에 펼쳐놓은 쓰레기를 들여다 보며 수첩에 “4월 23일 오비 라거 맥주뚜껑, 풀무원 콩나물, 신라면, 코카콜라, 참나무통 맑은 소주…”식으로 꼼꼼하게 적어나가는 모습은 기이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작가가 ‘망가진 시계의 부속품을 핀셋으로 집어 올리는 시계수리공’으로 비유할 만큼 지극히 진지한 행위로 그려진다. 남자는 왜 쓰레기를 분석하기 시작했을까. 그는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직원을 사랑했지만 그 여직원이 후배직원과 결혼함으로써 사랑을 잃는다. 실연의 기억은 상처가 되었다. 남자는 나중에야 여자의 숨겨진 성향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여자가 코발트색에 약하고 입심이 좋고 단정한 옷차림의 남자에게 끌린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남자가 쓰레기의 성분을 분석하면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취향을 파악하는 행위는 그의 좌절된 욕망에 부응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만약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의 쓰레기를 볼 수 있었다면 그 여자의 숨겨진 성격을 알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여자를 잃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일방적이기만 한 것이어서 상대방에게 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코 진정으로 아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지극히 상대방의 취향을 잘못 알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기에 근본적으로 소통되지 못하고 불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가령 남자의 옆집에 사는 507호 여자는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 여자를 짝사랑하는 남자는 여자가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니까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믿었던 여자의 진실은 쓰레기통 속에서 손도 대지 않은 채 문드러져 있는 케이크의 의미 속에 상징적으로 용해되어 있는 셈이다. 작가가 인물로 하여금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쓰레기를 뒤지게 하는 까닭은 진실의 소재지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쓰레기 봉투 속에서 썩어가고 있었다’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다. ‘쓰레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쓰레기야말로 숨은 그림 찾기의 모범답안’이라는 해답은 현대 사회가 지니고 있는 단절적 인간관계의 일면을 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이들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만나지 않을 수 없는 서글픈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이 보여주는 표리부동한 모습일 것이다. ‘저 사람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지 모른다.’ ‘내가 믿고 있는 이것은 사실은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는 사실의 확인, 그것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 힘든 현실에 대한 절망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매일 대하는 현실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일은 우리의 힘에 부친다. 우리 자신은 이미 거대한 톱니바퀴를 한 구조 속에서 하나의 부속품이 되어 있고 인간관계 또한 오래 전에 자연성을 잃고 사물화되어 가고 있다. 일상적으로 대하는 광고판의 내용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듯이 거품처럼 떠도는 현상의 홍수 속에 저도 모르게 휩쓸린 채 서서히 마모되어 가야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운명인지 모른다.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현대인들의 보편적 욕망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는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욕망이다. 사회 구조가 점차 정밀해지고 고도화되는 반면 인간의 삶은 한층 규격화되고 왜소화되는 게 오늘의 일반적 현상이다. 더구나 매일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 현대인들은 그 타성화된 삶에 길들여져 자신의 본 모습을 잃고 관성적인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규격화된 일상의 이면에는 그 두꺼운 관성의 벽을 뚫고자 하는 충동, 곧 ‘탈주(脫走)’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 「깃발」은 이 탈주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 소설이다. 「깃발」에 나오는 ‘나’의 삶이란 매일 상습정체구간을 지나는 만원버스 안에서 광고탑을 올려다보는 모습으로 상징된다. ‘나’는 외제차를 파는 영업사원이지만 한 대도 팔아 보지 못한 채 영업소 유리창만 열심히 닦고 있는 신세이다. 나의 이런 일상을 내려다보듯 늘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광고탑 속에 그려진 낙원의 모습은, 아파트 한 채 값이나 되는 외제차처럼, 늘 볼 수 있지만 멀고 먼 현실이라는 점에서 ‘그림의 떡’과 같은 존재다. 그런데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할 때마다 광고판을 올려다보는 나에게 이상한 일이 생겨난다. 언제부터인가 광고판 속의 처녀가 ‘웃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림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이 느낌이란 실상 그의 내재된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 광고판의 실제 모델이 영업소에 나타났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 여자와 관계를 맺는 환상은 내가 버스 안에서 잠깐 졸았을 때 꾼 꿈일 뿐 현실적으로는 외제차를 구매하려는 고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침내 현실적으로 차를 팔 수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돌발적인 사고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 꿈은 백일몽에서 깨듯이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해프닝 같은 사건 이후에도 일상은 똑같이 반복된다. 나는 여전히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하와이로 여행 올 것을 유혹하는 광고탑의 처녀를 쳐다본다. ‘나’가 전신주를 타고 오르면서 육신의 옷을 하나하나 벗어 놓는 것, 곧 자신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기면서 전신주를 올라가는 모습은 곧 탈주에의 욕망에 다름이 아니다. 그런 일탈적 행동을 통해서 그는 이제, 화자의 말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내는 태초의 인간 아담의 모습”(41면)으로 돌아간 것이다. 액자 소설의 형식으로 구성된 이 소설 속에서 전기기사인 ‘나’는 세일즈맨인 또 다른 ‘나’와 겹쳐지는 인물이다. 대부분 3인칭 또는 작가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다른 소설에 비해 이 소설에 1인칭 화자가 등장하는 것은 두 개의 ‘나’가 지닌 공통점을 통해서 ‘현실의 나’와 ‘내면의 나’를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이다. 전신주 꼭대기에서 사라진 남자와 사라지고 싶은 남자. 전신주 꼭대기에서 차례차례 걸린 구두, 양복 상의, 와이셔츠, 넥타이, 양말, 그리고 깃발처럼 나부끼는 팬티. 이것은 이 사회가 그려낸 서글픈 자화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탈주에의 욕망이 일렁이는 무의식의 창고 속에는 또 다른 욕망이 검은 늪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올콩」에 나오는 남자는 생일을 맞은 애인을 만나기 위해 차를 몰고 가는 길에 오토바이를 탄 ‘퀵 서비스 배달원’을 치게 된다. 이후 남자의 행로는 내리막길에 들어선 자동차처럼 위태롭게 질주하는데 이는 이성의 제어장치가 풀린 욕망의 궤적에 다름 아니다. 남자가 병원 응급실에 누운 배달원을 대신하여 서류봉투를 배달하러 길에 전철 안에서 ‘검정콩’ 같은 눈을 한 여학생을 만나는 것은 그가 조금 전에 겪은 교통사고만큼이나 우연적인 만남이다. 스물 여섯의 건강한 청년인 그는 교복치마 밑으로 드러나는 여학생의 다리에 호기심을 느끼게 되고 곧 그것이 연상시키는 은밀한 곳까지 상상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애인과의 약속까지 깨고 이 여학생에 무작정 끌려가게 된다. 모범생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영악하기 짝이 없는 여학생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처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금간 거울 속으로 모자이크처럼 조각 조각난’자신의 얼굴이었다. 깨어진 거울 속에 드러나는 얼굴이야말로 자아의 또 다른 얼굴이자 진실의 맨 얼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치밀한 계산을 통해 욕망의 덫에 걸린 한 인간을 철저히 해체해서 보여준다. 교통사고, 검정콩 눈을 한 여학생과의 만남은 모두 ‘예고 없음’ ‘기습적’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메타포(metaphor)를 갖고 있다. 이것은 남자가 차를 몰고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중에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고 ‘번개’라고 칭하는 복선처리에서도 암시된다.

번개는 예고가 없다. 번개를 피하기 위해서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거나 번개를 유인하는 피뢰침을 세우는 일뿐이다. 미로처럼 뚫린 골목들을 지날 때마다 남자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번개에 대비해 아예 한발을 브레이크 발판 위에 얹고 운전을 했다. (앞의 책, 222면) 그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자동차 사이를 총알처럼 달려가는 오토바이들 또한 번개라고 의식하며 경계한다. 주인공의 이런 경계심리를 읽어낸 독자로서는 그가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리라고 예상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돌발적인 사고는 이런 예측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만다. 예측과 빗나가는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경계했지만 결국 피할 수 없었던 사고를 만난 주인공의 운명에 대해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독자는 그가 엉뚱하게도 다리가 부러진 배달원을 대신해서 지하철을 타는 것을 보면서 의아함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상황은 전제에 불과할 뿐, 진짜 얘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지하철 노선표의 화살표를 따라 헤매는 인물의 모습은 욕망의 미로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심리를 상징한다. 머리 속으로 애인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맞은 편 자리에 앉은 여학생들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는 장면은 이성적 자아와는 별개의 본능이 동시에 작동하며 분열하는 모습인 것이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번개라는 이름의 오토바이 때문에 모든 것이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믿는 그이지만 뒤틀리고 있는 것은 그를 강제하고 있던 약속과 질서와 이성의, 즉 피뢰침으로 상징되는 세계였고, 그 뒤틀림 밑에 숨어 있었던 것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네스호의 괴물처럼 잠복하고 있던 붉은 욕망이었다. 그것은 번개처럼 예고가 없고, 경계하지만 기습적이어서 피할 수가 없다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사실 인간은 자신을 규율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든지 욕망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는 허약한 존재다. 이는 원조교제를 하는 여중생의 수첩 명부에 올라 있던 남자들의 신원이 일류대 출신의 고학력자, 대기업 사원, 사회의 중견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욕망은 억압되어 있다가 번개처럼 예고 없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올콩」은 우리들 속에 숨은 그 욕망의 덫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성란은 구조의 덫, 그리고 욕망의 덫에 갇힌 인간들을 언어의 메스로 해부해내고 그것을 파일로 하나씩 저장해 가는 작가이다. 그녀의 섬세한 해부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내면의 또 다른 인간을 만나고 당혹스러움을 느끼지만, 사실은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진실인 것이다.

정밀한 묘사는 사회적 맥락에서 재구성되어야

많은 사람들은 진실의 맨 얼굴을 보기보다는 그것을 치장하고 있는 환상을 선택한다. 말초적인 감각과 쾌락의 추구가 진실과 대면하는 일보다는 훨씬 더 유혹적이고 덜 고통스럽다. 작가란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자율적인 존재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지극히 타율적인 존재에 불과한 인간의 허약함을 폭로하고 거짓말들의 이면을 섬세한 끌로 벗겨내어 숨겨진 진실의 얼굴을 보여주려 하는 게 바로 작가의 업이다. 물론 작가들은 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진실과의 싸움을 벌인다. 어떤 작가는 인간관계의 ‘짐작과는 다른’ 이면을 폭로하고, 어떤 작가는 자화상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에 숨은 진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하성란이 보여주는 방식은 일견 전통적이면서도 낯선 방식이다. 여성작가로서의 섬세함과 아울러 남성 작가들에게 발견되는 끈기와 집요함이 그녀의 소설을 구성하는 올실인 셈이다. 물론 하성란 소설에는 유사한 내용이 반복되는 안이함과 세밀한 묘사와 천착에 걸맞지 않는 평이한 내용과 주제, 그리고 삶의 세부와 그것을 거시적으로 조정하는 사회 현실과의 원근법 부재 등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악몽」의 분위기와 구성은 「촛농 날개」에서 느껴지는 그것과 유사하고, 「올콩」 도입부는 「곰팡이꽃」의 한 대목과도 같은 느낌을 주며, 여러 작품에 산재해 있는 인물의 성격 역시 동명이인이 아닌가 할 정도의 흡사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일상을 정밀하게 천착하고 주변의 친숙한 일상에 주목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문제점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세한 일상을 거시적 시각으로 조망하는 원근법의 부재에도 중요한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사란 주관보다는 현실의 모습이 더욱 우세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있고, 따라서 정밀한 묘사는 사회적 맥락에서 재구성될 때 한층 폭넓게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아쉬움은 단지 하성란 소설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여성작가들의 소설에서 두루 발견되는 공통점이기도 한 이런 문제점은 사실 향후 우리 소설이 극복해야 할 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세기 우리 소설의 진로는 이 미시 세계와 거시적 시각의 조화에 달려 있고, 그것이 곧 여성작가들의 장점을 한층 고양시키는 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