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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몸의 담론 고 충 환 (미술평론가)
몸에 대한 인식은 몸과 정신으로 구분된 이분법적 세계관을 봉합하고, 그 구분을 봉합하는 매개로서 몸을 전면화하는 한편, ‘차이’를 개입시켜 동일시를 비동일시로 탈바꿈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지평을 기초로 하거나 그 연장선에 있는 여타의 동시대 미술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현상이 되고 있다. 몸의 담론 최근 들어 미술계 내외부에서 활발하게 진척되고 있는 여러 형태의 몸의 담론은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단순히 소재적 차원에서 몸을 이해하던 종래의 방식과 구별된다. 소재적 차원에서 정체성의 문제에로의 이러한 변화는 표면적인 변화 이상의 보다 본질적인 변혁을 요구하고 실천하게 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소재적 차원에서의 몸은 주체가 대상화한 객체의 일부이며 이는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 나와 세계, 그리고 중심과 주변과의 이분법적인 관계 위에 있다. 이분법적인 도식은 이들 양자간의 봉합하거나 만날 수 없는 거리(소외)에,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소실점(시각)에 타자를 포섭하는 원근법적인 시지각 방식에 기초한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시지각 방식의 습성이며, 시지각 방식에 기초하는 한(시지각 방식이 운명인 한) 나와 세계와의 관계는 소원해진다. 이렇듯이 소원해진 관계로부터 의문들이 생겨난다. 나와 세계는 만날 수 없는 것일까. 나의 몸과 세계의 몸은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일까. 흔히 그렇듯이 나는 세계의 지평을 조망하는 정신이며, 이에 반해 세계란 한낱 물질의 퇴적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나의 실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몸인가, 아니면 정신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몸과 정신이 공존하는 어떤 차원인가. 이러한 반성을 거쳐서 자연스레 이른 것이 지금의 정체성이다. ‘내가 누구인지(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란 말로 대변되는 정체성의 위기 의식이 몸의 담론을 중심으로 한 동시대 미술의 한 현상이다. 동시대 미술에서 몸은 정체성을 확인하는 매개 이상의, 정체성을 실천(실현)하고 구축하는 과정이다. 정체성을 소여된 것이기보다는 일종의 생성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몸이 소재 이상의 나의 정체와, 나의 삶과 동격이 된 것이다. 나는 소여된 것이기보다는 생성 중에 있는 한 과정이며, 세계는 나의 몸이 처한 순간순간의 지각의 장이며 지평이며 전망인 것이다. 이렇듯이 생성 중에 있는 과정으로서의 정체성에서 몸은 더 이상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 나와 세계, 그리고 중심과 주변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대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동시에 모든 장(소)에 속하는 ‘차이’를 개입시킴으로써 이러한 이분법적인 도식을 결정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방해한다. 동일성의 습성을 비동일성의 지평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분법적인 도식이 기초하고 있는 시지각 방식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난 감각들, 이를테면 촉각과 청각의 지위를 복원시킴으로써 시지각 방식에 의해 생겨난 거리를 봉합한다. 거리로부터 접촉으로의, 시지각 방식으로부터 통감각적인 방식으로의 이러한 변화는 정신의 권위로부터 몸의 권리 회복에로의 변화와 일치한다. ‘억압된 것들이 귀환’하면서 정신의 습성인 정전화를 방해하고, 대신 탈정전화를 획책한다. 동시대 미술에서 몸의 담론이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외관을 띨 수 밖에 없음은 이렇듯이 ‘차이’의 의식적인 개입 탓이다. 몸의 운명이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은 그 자체 비결정화된 삶을 구축해가는 과정과 동격이 된다.
페미니즘 미술 몸에 대한 인식은 몸과 정신으로 구분된 이분법적 세계관을 봉합하고, 그 구분을 봉합하는 매개로서 몸을 전면화하는 한편, ‘차이’를 개입시켜 동일시를 비동일시로 탈바꿈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지평을 기초로 하거나 그 연장선에 있는 여타의 동시대 미술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현상이 되고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중심과 다중심의 논리, 그리고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란 논리에 힘입고 있는 페미니즘 미술에서 몸의 담론은 정체성의 탈구축, 즉 기왕에 인정된 정체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재구축하는 일련의 과정과 관련된다. 결국 페미니즘 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과 일치하는 것이며, 따라서 내부적으로 그 논리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페미니즘의 논리 가운데 일정 부분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의 몸에 대한 인식은 무엇보다도 정신과 비교되는 감각으로서의 정체성을 특징으로 한다. 특정의 감각 요소를 우위에 두는 대신, 이를테면 시지각의 감각 경험을 편애하는 대신 모든 가능한 감각을 인정하는 통감각적인 성질을 갖는다. 시지각에 대한 편애는 정신과의 동일시에 다름 아니며, 동일시는 ‘차이’로 대변되는 몸의(감각의) 비동일시와 배치되기 때문이다. 흔히 페미니즘 미술의 소통 방식이 단순한 시지각적 코드를 벗어나 공(통)감각적 형태를 띠는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다. 페미니즘의 이러한 통감각적 성질은 ‘눈은 세계를 읽는 창’이라는 한정적인 개념을 ‘감각은 세계를 듣고 느끼며 냄새 맡는 통로’라는 전방위적 개념으로 대체한다. 페미니즘의 감각적인 몸은 무엇보다도 성애적이다(호모 에로스). 성애적 인간은 그 자체로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호모 파베르),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호모 로쿠엔스), 그리고 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보다 우선적이다. 그의 몸은 자기를 실현하려는 욕망의 덩어리인 것이며, 무엇보다도 몸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습성이다. 그럼으로써 페미니즘은 ‘육체에 대한 금기에서 구체화된 지식과 권력의 도구로서의 성 관념’을 해체하고, 대신 감각과 성애와 욕망과 차이를 산종(散種)함으로써 금지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리고 ‘즉자와 대자’의 이분법적인 공식에 기초한 실존주의의 성 관념(주체가 객체를 대상화하고 소유함으로써 마침내 객체를 부정하는 자아율)의 일방 통로를 쌍방 간의 소통 채널(타자율)로 열어 놓는다. 성애적 인간으로서의 페미니즘의 몸은 ‘성차’(性差)의 형태로 나타난다. 성차에 대한 인식이 페미니즘의 인식론적 형태적 근간을 이룬다는 말이다. 성차란 원래 Sex(생물학적 조건으로서 결정화된 생리적 생래적 개념)와 Gender(사회문화적으로 강제된 이데올로기적 후천적 의미로서의 성 개념)로 구분되며, 이 가운데 페미니즘이 문제시하는 성차는 당연히 Gender가 된다. 성차에 대한 이해 여부에 따라서 페미니즘은 자유주의와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 구분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남성과는 구별되는 여성의 생물학적 조건에 주목하고, 그로부터 여성의 특수성 즉 여성성{아니마(Anima), 프랑스의 현상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아니마를 시적 언어의 원천에 귀속시키고 있다. 남성성을 의미하는 아니무스(Animus)와 비교}을 전략적인 차원에서 견인해 내는 입장, 즉 ‘성차’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입장을 말한다. 이는 성차 이전의 성 관념을 시정하는 형태를 띤다. 그러니까 성 관념을 특수성이 아닌 보편성의 관념과 동일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보편성과 동일시되는 남성의 성 관념만 있고 여성의 성적 정체성이 없는 현실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그 자체 무차별적인 보편성으로서의 성 관념으로부터 여성성의 특수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모토로 한 히피와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접함으로써 자유로운 성 관념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자유연애, 동성애, 성 도착(倒錯), 복장 도착, 유니섹스 등에서 보듯이 성 관념이 관습의 틀로부터 놓여나는 계기가 된다. 자유주의 성 관념이 복장에 대한 이해와 일체를 이루는 점이 특징이다. 복장에 대한 이해가 자유주의 성 관념의 이면에 존재하는 일탈의 정신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일탈의 정신성이란 안정된 정체성의 환상을 중단시키고, 드러내고, 도전하는, 그럼으로써 기왕에 틀 잡힌 인식론적 존재론적 보편주의를 전복시키는 전략을 말한다. 복장에 대한 자유로운 관념과 자유주의 성 관념과의 조우는 이렇듯이 일탈의 정신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후 현대 미술의 소재 범주가 섬유나 의상류로까지 증폭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섬유나 의상류에 기초한 소재와 방법들, 이를테면 퀼트(자수)와 바느질과 매듭이 페미니즘 미술의 차별화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편으로 여겨지고 있다. 복장과 성 관념과의 조우에 대해 상업적인 가능성을 견제하는 한편, 고유의 일탈의 정신성을 극대화한다면 차후로도 여전히 Anti의 미학적 개념과 가치를 생산해내는 효율적인 기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차’에 대한 보편화·일반화·자연화한 인식 자체를 가부장제의 전통에 기초한 남근 중심의 개념이 낳은 왜곡된 산물로 인식하고 거부하는 입장을, 즉 ‘성차’를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입장을 취한다. 아예 ‘성차’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이 입장은 나아가 ‘성차’에 기초한 남근 중심의 세계관, 가치관, 문명의 성과, 방법 일체를 대체할 만한 어떤 새로운 관념, 세계관, 가치관, 방법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비유하자면, 남성의 역사를 대변하는 History와 비교되는 여성의 역사를 대변하는 Herstory를 제안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역사 다시 쓰기와 정전화한 모든 텍스트에 대한 재독서의 형태를 띤다. 이리가레이(L.Irigaray)에게서 이러한 차별성은 상징과 은유를 통한 압축적인 글 쓰기와 비교되는 ‘이야기, 곧 서사의 도입에 기초한 글 쓰기’로, 브룩스(Brooks)에게서 ‘이야기를 통한 육화(肉化)의 미학’으로, 그리고 길리건(C.Gilligan)에게서 ‘전후맥락을 고려한 이야기 식의 사고 방식’으로 나타난다. 서사의 도입을 통한 차별화의 방식이 단순한 글 쓰기로부터 삶의 방식으로까지 증폭됨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언어가 삶의 방식을 결정하거나 최소한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저변에 놓여져 있다. 데리다의 문자 중심의 글 쓰기와 비교되는 ‘음성 중심의 글 쓰기’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문자 중심의 글 쓰기가 시지각에 기울어짐으로써 남성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되는 것임에 반해, 청각적인(통감각적인) 음성 중심의 글 쓰기는 상대적으로 더 열려져 있어서 비동일시와 차이에 기초한 페미니즘의 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서사의 도입은 브룩스에게서 보듯이 글 쓰기의 문자적 의미에서 더 나아가 미술 고유의 작화 방식을 포괄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회화의 자율성과 순수 추상 회화, 그리고 형식주의로 대변되는 모더니즘 미학(압축적인 글 쓰기에 해당하는)을 거부하는 대신 모더니즘 미학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난 형상과 서술(서사적 글 쓰기에 해당하는)의 복원을 꾀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차별화의 전략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에게서 아브직 아트(Abject Art), 즉 비물질 예술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원래 저급의, 저속한, 천박하고 야비한 등의 의미를 갖는 아브직 아트 역시 그 자체 순수를 지향하는 모더니즘 미학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난 비순수를 대변한다. 진흙, 동물의 사체(死體), 부패한 음식 등의 저급한 요소의 물질과 배설물, 피와 정액, 월경 등의 신체 분비물과 머리카락 등의 신체의 일부로부터 채집한 소재를 통해 기성의 가치, 질서, 제도, 도덕에 도전하는 동시대 언더그라운드의 정신을 변호한다. 저급의 비물질 소재로서 여성의 정체성을 전면화하는 한편 정형화된 모든 체제와 질서를 교란시킨다. 아브직 아트는 저급한 물질에 반영된 무차별과 애매모호함으로 인해 성별을 구분하려는 관습에 저항하기도 한다. 아브직 아트의 비물질이 갖는 저급성은 이를테면 월경과 피, 배설물과 사체에서 보듯이 고대의 희생 제의에로 소급되는 여성의 자연성을, 여성의 신화를 복원하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폭력과 죄로 얼룩진 동시대의 삶을 피로 정화하는 죽음의 매개자 곧 현대판 무당으로서의 여성성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최근에는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환경 문제를 계기로 생태 페미니즘(Environmental, Biomorphic, Eco Feminism)의 형태와 접목되기도 한다. 환경은 진작부터 자연과 동일시되던(비록 남근 중심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부여된 불완전한 것이긴 하지만) 여성의 정체가 극대화한 것으로서, 생태 페미니즘은 결국 생명 현상에 기초한, 그리고 몸의 감각 경험을 매개로 한 여성의 특수성이 강화되고 전면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