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자연으로 돌아가기 |
예술의 생태학적 개입과
녹색문화 만들기
정 정 호 (중앙대교수) ‘예술’이라는 용어를 그 근대적인 무(無)사회적이고 ‘자족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태적 법리학 속에서 ‘중세에서처럼’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 문법, 수사학, 그리고 변증법적인 새로운 공간들을 배분하는 방향으로 예술에 대한 새로운 체계화가 발전될 필요가 있다. - 웨인 허드슨 (126쪽) 생태미학을 향해 예술은 본질적으로 환경생태학적이다. 예술은 인간이 만든 문화 중에서 가장 자연친화적이다. 예술의 기원이나 생성 자체가 인류가 지구에서 생활을 시작한 이래 생겨난 가장 자연스러운 관습적 행위이며 제도이다. 인간의 기본적 율동과 동작은 모두 예술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통합예술이었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문학, 음악, 미술, 연극, 무용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삼라만상이 함께 하는 자연 속에서 인간이란 동물이 그 성정(性情)에 따라 느끼고, 말하고, 움직이고, 놀이를 하고, 노래하고, 춤추며 일했던 과거 시절의 인류들은 자연의 일부였지 자연이 인류의 일부가 아니었다. 예술의 기능과 역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자연의 모방’이다. 예술은 자연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인간에게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작품을 통해 일정한 보상을 주어, 이제는 자연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들을 심리적 정화도 해주고 즐거움과 가르침도 준다. 인간 최고의 추동력은 자연으로 돌아가거나 자연을 회상함으로써 생겨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자궁회귀 본능으로 풀 수 있다. 이것은 포스트·구조주의 정신분석학자 자끄 라깡이 말하는 ‘거울의 단계’에 대한 그리움일까? 자연에서 스스로 자신들을 추방한 고단한 인간들에게 자연은 언제나 포근하고 안락한 어머니 품속이다. 문화를 만들기 시작한 원시 시대부터 자연과 소외되기 시작한 인간은 이미 예술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예술은 따라서 만물의 영장으로서가 아닌 동물로서의 인간의 자연회귀본능 또는 삼라만상의 대고리 속으로 다시 복귀하려는 잔인한 포식자 인간의 겸손의 집단무의식일까?예술은 자연에서 벗어나려는 인간문명의 구심적 작용을 제어하고 언제나 인간을 자연 속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원심적 작용을 동시에 하는 이른바 나선형의 반복구조를 실천한다. 우리는 예술의 이러한 기능을 좀더 자연친화적으로 확산시켜야 할 것이다. 자연의 원대한 섭리, 즉 16세기 화란의 놀라운 생태철학자 스피노자가 범신론적인 ‘신(자연)에의 이성적 사랑(amor intellectualis dei)’이라고 칭한 것을 우리는 되찾아야 한다. 스피노자의 시대보다 400년이나 지난 오늘날 근대적인 도구적 이성을 따르는 개발논리에 의해 ‘자연에의 반이성적 사랑’으로 자연은 급속도로 황폐해졌다. 나이가 50억년이나 되는 지구가 단지 지난 200-300년 사이의 서구 근대문명으로 심각한 환경생태 위기를 맞고 있다. 다양한 종으로 이루어진 자연 속의 삼라만상은 인간이란 동물에 의해 매일 수백 종씩 멸절의 길을 걷고 있다. 이제 예술은 독특한 느낌, 감성, 비전, 통찰력으로 인간이 생태학적 계몽주의 시대로 돌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자연과 환경문제를 어떻게 환기시켜야 할까? 이제 하나 뿐인 지구의 환경생태 문제를 생태학자, 환경공학자, 환경운동가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되고 인간문명의 현 단계에서 예술가들은 이 환경생태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시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인간중심적 근대(물질·과학) 문명이 가져온 이른바 ‘위험 사회(risk society)’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외부 자연인 사회와 문화의 위기만이 아니라 인간의식 자체의 내면적 위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자연, 문명, 사회, 문화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인간중심주의가 총체적 인식론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의 위기에서 무엇보다도 병든 지구의 생태학적 관계망 전체를 건강하고 균형 있게 회복시키는 ‘생태학적 상상력’이 중요하다. ‘생태학적 상상력’이란 근대 문명을 근본적으로 다시 읽고, 새로 쓰는 저항과 개입과 대안 제시의 사유방식이다. 이러한 상상력을 키우는데 종교학, 생태철학, 환경학 등을 통해서도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예술이 중요하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탐욕, 오만, 편견의 결과로 생태무지증에 걸린 인간중심주의적 ‘근대’ 문명에 대한 반성이 새로운 천년대 또는 21세기의 새로운 인간들의 윤리적 책무라면 적어도 예술이 이러한 위독한 문명의 치유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환경친화적인 생태예술이론의 수립을 통해 예술의 ‘치유력’을 전방화시켜야 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예술과 자연의 상호개입을 위해 환경생태학적 맥락에서 공자가 편한 「시경」의 몇 편의 시편들과 아일랜드 화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의 미술에 관해 간략한 논의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예술과 과학 기술의 접속 문제를 살짝 건드려보기로 한다.
시경(「詩經」)을 타고 자연으로 건너가기 동북아시아에서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시경」은 지금부터 2500-3000여년 전 주나라 시대 중국 전역에서 불리어졌던 민요들을 기원전 5세기와 6세기를 살았던 공자에 의해 305수로 정선되어 편집된 것이다. 현실적 도덕주의자였던 공자가 이렇게 공을 들여 당대의 시가들을 수집한 사실은 중요하다. 공자는 군자가 되기 위한 인품을 도야하는데 노래와 시를 중요시했다. 이것은 주나라 때부터 내려온 전통으로 예교(禮敎), 낙교(樂敎), 그리고 시교(詩敎) 사상이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시경」을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思無邪)’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하였다. 주제와 기법이 다양한 「시경」을 읽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오늘 필자는 「시경」의 일부를 환경생태학의 시각에서 읽고자 한다. 지금부터 3000여년 전 중국인들이 노래했던 시편들에서 환경이 어떻게 다루어졌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시경」전체를 환경 문학의 텍스트로 읽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편들은 연애시가 주류이지만 군신관계, 가족관계, 인간관계, 제사법 등 그 당시 사회 정치, 문화 등에 관한 많은 주제들도 다루고 있다. 또한 당시에는 오늘날보다는 환경이 별로 문제시되지 않았지만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노래도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중 몇 편을 골라 읽어보자.
칡덩굴[葛草] 칡덩굴은 길게 산골짜기에 뻗어 잎새 무성한데, 누룩제비떼 날아와 떨기나무 위에 모여앉아 짹짹 지저귄다. 칡덩굴은 길게 산공짜기에 뻗어 잎새 더부룩한데, 잘라다가 쪄내어 고운 칡베 굵은 칡베 짜 베옷 지어 입으니 좋을시고. 보모님께 아뢰고 근친을 가려할 제, 평복도 빨고 예복도 빨아 모두 깨끗이 빨아 입나니, 돌아가 부모님께 문안들이기 위함이다. 「김 학주 역. 이하 동일」 이 시는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무성한 칡덩굴 위에 누룩제비떼가 노래하고 인간은 칡덩굴을 잘라서 칡베를 짜서 베옷을 해 입고 살아가는 모습이 나타난다. 인간-자연은 ‘칡덩굴’처럼 얽혀 있고 상호의존적 관계망 속에서 존재한다. 사람들이 자연물을 가져다가 가공해서 옷을 만들어 입는 등 문화를 이루고 있음에도 인간과 자연이 균형을 잃지 않는다. 오늘날처럼 인간의 지나친 탐욕이 자연을 쉽게 황폐화시키지 않으며, 삼라만상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살고 있다. 은거(考槃) 산골짜기 시냇가에 움막을 이룩하니 어진 은자의 마음은 넓네. 혼자 자다 깨어나 말하노니 이 생활을 못잊겠다 언제나 다짐하네. 울퉁불퉁한 언덕에 움막을 이룩하니 어진 은자의 마음은 크네. 혼자 자다 깨어나 노래하노니 딴 생각 안하겠다 언제나 다짐하네. 높고 평평한 땅에 움막을 이룩하니 어진 은자의 마음은 한가롭네. 혼자 자다 깨어도 그대로 누워 이 즐거움 남에게 얘기 않겠다 언제나 다짐하네. 이 시는 어진 사람이 자연 속에 은거하여 조용히 사는 모습을 즐겁게 노래한다. 자연과의 합일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생활로부터 우리는 지금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자연 그대로의 ‘울퉁불퉁한 언덕’에 움막을 짓고 사는 은자의 생활은 얼마나 단순 소박한가! 자연을 훼손하거나 개발하지 않는 그는 인간이기보다 자연 그 자체이다. 즐겁게 노래하며 사는 은자의 마음은 크고 한가로우며 그가 사는 곳이 바로 무릉도원인 것이다. 근대적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면서 엄청난 물질과학 기술 문명을 이룩했지만 그는 과연 행복한가? 오히려 근대세계는 더 위험하고 불안하며, 오염으로 가득하고, 분주하기만 한 세상이 아니던가! 최근 법정스님의 수상집 「오두막편지」에서처럼 ‘어진 은자의 마음’이 자연에서 멀리 떨어져 각박한 도시적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지혜, 통찰력, 상상력을 가져다 주는지를 일깨워준다.
묘문(墓門) 묘문 밖의 대추나무를 도끼로 자르고 있네. 저이의 착하지 못함은 백성들이 다 알고 있네. 아는데도 그치지 않고 예대로 그 모양이네. 묘문 밖의 매화나무엔 올빼미가 모여들었네. 저이가 착하지 못하니 노래로서 알려주었네. 알려 줘도 거들떠보지 않으니 신세 망치는 날 나를 생각하리.
이 시는 자연을 마구 훼손하며 나쁜 짓을 일삼는 관리들이나 개발주의자들을 원망하는 노래이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백성들이 다 알고 올빼미도 자연을 대표해서 노래로 알려주건만 그는 자신이 하는 짓이 옳지 못함을 알려 하지 않는다. 그는 언젠가 자연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멸망하리라. 이 노래는 자연훼손을 일삼아 홍수, 폭설 등 기상이변을 일으키는 현대인들에게 죽음을 상징하는 ‘묘문’처럼 섬뜩한, 아니 절대절명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대지를 여성에 비유하는 최근의 에코페미니즘이 남성주의적인 자연개발과 착취를 거부하고 자연과의 화해를 강조하며 인간들 사이의 평화정치학을 주장하고 있음은 남성 중심의 개발주의에 깊은 지혜와 예리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하겠다. 탐욕과 오만으로 가득찬 인간은 자연의 이치나 섭리, 즉 생태체계를 위반하고 무시하게 되면 언젠가 벌을 받는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자연을 정복하지 마라. 자연의 지붕 밑에 살려면 자연을 마구 개발하고 훼손하려는 마음을 바꾸고 자연에 대한 외경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19세기 영국의 낭만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경우처럼 자연은 우리에게 삭막한 도시적 삶의 고단함을 달래주고 축복을 가져다 준다. 자연은 인간을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인간이 끊임없이 자연을 배반할 뿐.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 여행하기:「기관 없는 신체」와 생명주의로의 회귀 1992년에 타계한 아일랜드 출신의 탈근대적 화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주로 제한된 내면적 공간 속에 놓인 기괴하게 왜곡된 자세를 가진 인간들의 ‘형상’을 그렸다. 베이컨은 추상형식주의나 추상표현주의의 전략들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예를 들어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어떤 형상을 비틀어 만들어낸다. 무엇 때문에 비트는가? 그것은 허위의식이나 껍데기를 버리고 그대로의 모습 또는 속살 드러내기이다. 추상성 속에 은폐된 억압이나 현실도피를 거부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비틀어서 우리로 하여금 실재를 더 잘 드러내 보이게 만든다.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 기법이고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의 전략이다. 삶의 무섭도록 진실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일종의 자연주의이며 생태학적 전략이다. 우연한 붓의 놀림이나 채색에 의해 유도된 변이의 선을 따라가고 그것이 형상을 일그러지게 만든다. 베이컨이 궁극적으로 그리는 것은 가시적인 형태를 통해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의 망상조직이다. 베이컨의 회화 미학의 토대는 구상성에 대한 거부라고 프랑스의 탈근대 철학자 질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격리는 재현과 단절하고 서술을 깨트리기 위해, 삽화성을 방해하고 형상을 해방하기 위해 충분치는 않더라도 필요한 가장 단순한 방법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사실에 매달리는 방식이다.(「감각의 논리」6-7쪽)” ‘형상적인 것’을 만드는 것이 어떻게 ‘사실에 매달리는 방식’일까? 여기에 베이컨 미술의 비밀이 들어 있다. 이것은 사실이나 실재에 도달하는 우회도로이다. 베이컨은 구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모두를 피하고 ‘형상적인 것’을 격리하여 그림으로써 재현, 서술, 삽화성 모두를 내던지고 자연 속에서 사물의 핵심, 삶의 본질로 접근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베이컨의 작품은 그림 속의 인물을 홀로 그리고 발가벗겨서 일상적으로 보이는 배경 없이 노출시킨다. (마치 자연과) 격리되어 있는 한 개인을 잔인하리만치 철저하게 추구하는 과정에서 편안하고 아늑한 모든 것은 사라져버린다. 왜곡과 변형을 통해 근대적인 인간중심 문명의 일상의 껍데기를 뚫고 오히려 자연 속에서 성정 그대로의 인간적 삶의 원형을 되찾으려는 힘인가?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베이컨의 그림은 결국 ‘감각을 자극하는 생의 힘과 리듬을 포착하여 독자의 감각을 통해 그림에 다시 재주입하려는 것이다.’(vi) 여기에서 들뢰즈의 유명한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이 도입된다. 원래 아르또가 사용한 들뢰즈의 이 개념은 자연의 일부인 신체의 유기체적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생태학적 아나키즘이다. 아르또는 “신체는 물질덩어리이다. 그는 혼자이며 기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다. 유기체들이란 신체의 적이다”라고 말하였다. 신체란 결국 살아있는 것이지만 유기체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동양의학의 말을 빌리면 이(理)가 아니고 하나의 기(氣)가 아닐까? 기관 없는 신체란 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구성적인 유기적 조직체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기관 없는 신체의 개념은 조직적 원리에 빠져 있는 우리 인간의 신체를 자연, 즉 카오스모스(chaosmos)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화는 어떻게 ‘기관 없는 신체’가 되는가? 회화는 선과 색을 재현으로부터 해방시키면서 동시에 눈을 그 유기체적 종속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고정되고 규정된 기관의 성격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눈은 잠재적으로 여러 기능을 가진 결정되지 않은 기관이 되고 기관 없는 신체인 순수한 현재로서의 형상을 본다. 회화는 눈을 우리의 어디에나 놓는다. 귓속에, 뱃속에, 허파속에 아무 곳에나 놓는다.... 회화는 우리 앞에 신체의 현실을 세우고, 유기체적 재현으로부터 해방된 선과 색을 세운다.(「감각의 논리」84-85쪽)이 얼마나 놀라운 기술인가? 회화는 ‘기관 없는 신체’인 몸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순식간에 삶의 한복판에 서게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모든 작위적이고 인공적인 외투를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채 지금까지 타자였던 생의 근원으로서의 자연과 대면하게 된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사슴처럼, 아니 나무처럼 부끄럽지 않다. 도구이성적인 근대적 인간은 이제서야 거대한 상호침투적인 카이오스모스인 자연의 리듬을 타면서 그 숨소리도 들을 수 있다. 이러한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의 개념은 예술과 환경의 주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이 개념은 자연에서 벗어나 영혼숭배에 빠져있는 인간이 ‘몸’을 중심으로 탈영토화하고 리좀(근경根莖)화할 수 있는 ‘탈주의 선’을 마련해 준다. 즉 그것은 인간을 좀더 자연스러운 상태로 되돌리고, 인간이 모든 이데올로기와 욕망이라는 규약, 구조 속에 억압되고 속박되어 있는 상태에서 탈주하여 일종의 무위 자연 속에서 ‘생태학적 숭고미’ 상태에 머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와 ‘생태학적 숭고미’의 접속은 회화를 통하여 자연으로의 회귀를 기도하는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런 점에서 본질적 의미의 생태학적 화가라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의 미술을 ‘생태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몸의 형상화 작업을 통해 자의식의 절대자유화라는 추상성을 구부려 나의 내부의 타자를 해체하고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이 타자를 통해 외부 자연과의 상호연계망 속에 있는 존재를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베이컨의 그림 그리기는 자본에 침윤되고 조직에 함몰된 근대적 자아로부터 벗어나 자연(성)으로 탈주하는 것이다. ‘몸(의 형상화)’을 통해 생명주의, 원시주의, 또는 생태적 아나키즘을 드러내는 탈근대적 화가 베이컨은 삼라만상의 자연 속에서 소외된 인간중심 신화를 탈영토화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주의 선을 마련하여 생태주의로의 재영토화를 꿈꾼 것이다. 이는 최근 미술평론가 김경서가 ‘미에 대한 인식론적 규정 이전에 창조적 생명체인 인간 행위 안에 <몸의 선험성>이 선재되어 있음’을 깨달아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생태주의>, 그리고 체험적 연장으로 드러내는 창조적 <생태미학>의 합치점으로서의 <생태 아나키즘 미술>’을 오늘날의 환경 생태 위기에 ‘대안’(108쪽)으로 제기하는 이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예술과 과학기술의 접속: 적과의 동침(?) 그리고 잡종미학 이제는 태생적으로 자연친화적인 예술이 근대 문명의 산물인 자연적대적 과학기술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환경생태에 관한 우리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생태중심주의는 개발주의에 반대편에 위치하고서 환경문제에 대하여 과격하게 근본주의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근본적 환경개선을 위해 환경 문제에 관한 인식을 급진적으로 바꾸고자 한다. 토지개발이나 자연훼손도 더 이상 진행시켜서는 아니 되고 인구증가도 현 수준에서 동결시켜야 하며, 자원 소비나 자연개발에 있어서 청교도적 생활을 요구한다. 둘째, 환경관리주의는 토지개발이나 자원소비를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억제하고 합리적으로 관리하며 환경공학 등의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환경문제를 지속적으로 개선시킨다는 생각이다. 생태중심주의나 환경관리주의 중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는 우리 각자의 문제이나 이 두 가지가 모두 현실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이 지금까지 이룩한 근대문명과 문화를 하루아침에 포기하고 자연 중심의 원시주의 또는 신비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환경관리주의도 언제나 개발논리나 경제효율주의에 밀리게 되므로 그것 또한 지키기 어렵다. 또한 환경공학이라는 것도 개발을 기정사실화하는 사후약방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갈 길은 이 둘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둘 사이의 어떤 지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또다시 야누스일 수 밖에 없다. 양쪽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중용의 지혜를 발휘하여 우리 문화를 ‘지탱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이 환경에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가? 예술도 궁극적으로는 어떤 한 입장을 채택하기 어려울 것이며 시대나 지역 상황에 따라 ‘인정받지 못한 입법가들’인 예술가들에 의해 환경생태 전략이 선택될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인류가 어린 시절부터 예술 양식을 창출하면서 살아온 이래로 자연의 타자로서의 문명은 꾸준히 또는 급격히 발전했으므로, 예술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편에 서서 문명에 저항하는 모습을 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예술과 과학기술의 새로운 관계정립이 이루어질 수 있다. 예술은 이미 언제나 커다란 적을 두었다. 오래 전에는 철학, 역사, 도덕윤리주의가 적으로 존재했고, 근대에 들어오면서 과학기술이 그 적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경제주의와 효율제일주의 등 여러 적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예술은 도전과 응전의 논리로 적들과의 싸움에서 타협하고 배우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규범을 강조하는 철학자나 구체적 사실을 중시하는 역사가들에게 예술은 ‘있을 수 있는 허구’, 다시 말해서 ‘구체적 보편’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응하였고, 도덕주의자들에게는 예술은 ‘즐거움을 주고 가르치기도 한다’는 당의정설로 대처하였다. 서구의 경우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시대에도 문학은 ‘꿈의 비전(dream vision)’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종교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감싸안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과학시대인 근대 이후에도 인과관계를 최고의 원리로 채택하는 과학 정신을 본받아 서술구성(이야기 만들기)에서 ‘플롯’을 등뼈로 삼는 근대 ‘소설’이란 새로운 산문문학 형식을 만들어 중세의 ‘로망스’를 대체하였다. 그 후 20세기 전후에 사진, 활동사진, 영화의 도입으로 예술과 과학기술은 새로운 관계설정을 하게 되었다. 미술은 현실재현 양식에서 사진에 밀려 그 대응 전략으로 큐비즘과 같은 새로운 추상 예술을 만들어냈고, 영화 예술의 경우에는 예술의 모든 장르와 다양한 과학 기술을 통합적으로 사용하는 잡종적 종합예술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는 텔레비전, 비디오, 컴퓨터 등의 고도전자 영상매체가 도입되어 본격적인 동·영상 매체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현실 위에 위치한 ‘가상 현실’과 사이버 공간은 예술 각 분야에 새로운 도전의 영역을 제공하고 있다. 문자예술인 문학의 경우는 ‘새로운’ 현실을 문자로 재현하는데 한계에 부닥치게 되었고 젊은 영상세대로부터 외면당하는 수모를 당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위기는 동시에 이미 언제나 기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까지와 같은 문자문학과 책문화는 계속되겠지만 컴퓨터를 통한 문학 창작 방식이나 유통과 전달방식에서 엄청난 변모를 겪고 있는 문학은 조만간 새로운 형태의 문학생산양식과 유통구조 그리고 장르가 생성될 것이다. 새로운 문물 상황은 언제나 새로운 양식을 창출해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최근의 예술은 전 분야에서 컴퓨터, 레이저, 인터넷 등과 같은 고도의 전자과학기술과의 관계 속에서 기대와 우려를 지닌 채 새로운 관계설정을 모색하고 있다. 과학기술과의 도전과 응전의 관계 속에서 예술은 기존의 예술 양식과 내용을 탈영토화하고 탈주의 선을 마련하여 재영토화를 꾀했다. 예술이 과학기술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관계를 가지면서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독자적인 공 영역을 가지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잘 이용하면서 그것을 계속 넘어서는 일종의 ‘이이제이(以而制夷)’의 전략이 필요하다. 따라서 오늘의 주제인 예술이 환경문제에 어떻게 개입하느냐의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근대 문명의 타자인 자연과 환경 생태학의 문제를 예술을 통해 과학기술과 접속시키는 것은 대적의 논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술은 환경생태 문제의 저항담론을 위해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전화시켜야 한다. 자연과 과학기술이 적이라도 동침을 시키고 새로운 환경생태론을 위한 잡종미학을 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잡종적 생태미학만이 환경문제에 예술이 개입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 될 것이다. 예술이 자연으로의 꿈같은 퇴행도 문제이고 과학기술로의 겁없는 질주도 문제이다. 예술은 이제 극단의 지점에서 중간지대로 비상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자연생태중심주의와 과학기술 중심주의 모두를 타고 넘어가는 포월의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예술과 과학 기술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과 자연의 화해와 대화이다. 문화와 자연의 화해·대화인 예술은 타자인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새로운 접속지점을 만들기 위해 과학기술을 과감하게 포섭하여 인간이 자연과 기계 속에서 화해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이것이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가상공간과 같이 더욱 더 고도의 과학기술의 시대가 될 21세기와 새 천년에 예술이 짊어져야 할 책무이다. 예술은 지나친 개발주의나 도구적 이성, 효율주의에 저항하여 지구를 지탱할 수 있고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시공간으로 만들어내는데 앞장서야 한다. 녹색 윤리, 녹색 정치, 녹색 과학과 더불어 예술도 녹색화 작업을 강화해야 한다. 예술의 속성 자체가 자연의 미학화 또는 자연의 사회화, 자연의 문화화이다. 여기서 미학화, 사회화, 문화화라는 말은 모두 자연의 예술화이다. 예술화란 여러 가지 예술기법이나 예술사상을 가리킨다. 자연을 그대로 옮기거나 정제시키거나 확대·축소시키기도 하고 자연을 뒤틀기도 한다. 다시 말해 자연을 낯설게 하는 행위이다. 무엇 때문에 자연을 낯설게 만드는가? 그것은 자연을 단순히 훼손하거나 굴절시키거나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더 잘 보고 더 잘 의식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예술적 아이러니이며 모순어법이다. 굴절시켜 똑바로 보이게 하는 것, 숨겨서 더 잘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거짓말(‘가짜’)을 통해 추한 진실(‘진짜’)을 드러내는 방식이 예술의 생존전략이 아닌가?따라서 예술은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과학기술의 타자인 자연을 전경화시킬 수 있다. 예술과 과학기술의 제휴는 야합이 아니라 절합과정을 통해 예술을 자연과 환경생태문제의 ‘약’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술은 인위적, 기계적인 것을 벗겨내고 들어내어 오히려 그것들을 포용하는 이중적이며 모순적인 작업이다. 21세기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극단적 자연주의나 과학기술주의에 빠지지 않는 건강한 자연주의자와 건강한 과학주의자로 만드는 것이리라. 그러나 예술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며 그러나 또다시 중요한 것은 예술이 본질적으로 ‘몽상’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현실과 꿈의 ‘중간지대’이고, 하나의 ‘기억,’ ‘사유,’ ‘느낌,’ ‘흔적’ 또는 ‘에피파니’이다. 예술이 환경 문제의 구체적 대안이나 현실적 해결책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예술이 아니라 선전이나 운동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생태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을 훈련받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것만이 예술이 완악한 인간으로 하여금 이미 언제나 자연에 대한 외경심, 숭고미, 겸애, 돌봄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고 늘 환경친화적으로 깨어있게 하는 길이다. 예술적 ‘몽상’은 단지 중재자이며 촉매제이어서, 예술은 철학, 윤리학보다 환경 문제해결에 대한 훨씬 더 구체적인 추동력을 결여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몽상은 자연, 인간, 문화 속에서 상호연계성과 상호침투성을 몸으로 직접 느끼고 각성하고 배우게 만드는 참여의 미학과 정치학을 실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환경생태적 미래는 예술에 (매)달려 있다.
참고문헌 김경서 「생태아나키즘 미술의 가능성」 「오늘의 문예비평」 31호 (1998년 겨울). 들뢰즈, 질 「감각의 논리」(하 태환역) 서울: 민음사, 1995. 「시경」 (김 학주편) 서울: 명문당, 1973. Gablik, Suzi. The Reenchantment of Art. N. Y.: Thames and Hudson, 1991. Hudson, Wayne. Respacing Utopia. Brisbane, Australia: Institute of Modern Art, 1997. White, Daniel R. Postmodern Ecology. Albany: State U of New York P,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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