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현상읽기 - 대중문화

글로벌 케이-팝이란 가능한가?

 

서 동 진 (문화평론가)

일본의 대중음악의 혼성화와 또 자기정체성에 대한 집착과 지시는 우리와 무관한 일도 아니다. 장차 우리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할지 모를 일이고, 일본의 제이-팝처럼 케이-팝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대중음악을 따로 내세워야할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대중문화의 세계화(globalization)라 부를 수 있는 불가역적인 추세에 따르는 한 피할 수 없다.

 동경의 대형 레코드상점 이를테면 세계적인 초대형 레코드 상점 가운데 하나인 타워레코드 (Tower Records)같은 곳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흔히 만날 수 있는 코너들이 있다. 제이-팝이란 코너 역시 개중의 하나이다. 제이-팝이란 말을 곧이곧대로 풀이하면 일본 대중음악 혹은 일본 대중가요란 뜻이 된다. 하지만 제이-팝은 일본 대중음악 가운데 그저 한 부류이다. 그러니까 제이-팝 말고도 일본의 대중음악은 여럿 있다. 그래서 이게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의 눈에는 여간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대중가요를 한국 대중음악이나 케이-팝 K-pop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저 그냥 가요이다. 가요가 아닌 것은 그냥 팝, 클래식 이렇게 나뉘는 정도이다. 규모가 제법 커서 특별한 분류 체계에 따라 판매할 음반들을 칸칸마다 따로 진열하는 경우에도 역시 고작해야 장르에 따른 구별이 있을 따름이다. 예를 들어 팝이라거나 록 rock, 영화음악 soundtrack 아니면 요즘 한참 뜨고 있거나 열혈 팬을 확보하고 있는 힙합, 테크노같은 게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정도이다. 우리 나라의 대중음악과 다른 나라의 대중음악, 이런 느슨하고 희미한 구분이 있을 뿐이다. 일본의 레코드 상점에서 말하는 제이-팝은 일본풍의 대중음악을 가리킨다. 그것은 일본식 전통 가요라 할 엔카[演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저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게 제이-팝의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장르적 특성에 따라 나눠보자면 제이-팝은 록큰롤과 팝뮤직 사이의 어느 애매한 자리에 서 있다. 록큰롤이라기엔 멜로디 중심적이고 그렇다고 팝이라 하기엔 록큰롤의 비트가 적잖이 버무려져 있다. 그래서 제이-팝은 대단히 듣기 편하고 또 흥겹기도 하다. 만약 지금의 제이-팝이란 것은 이러저러하다는 정의를 하려든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에 덤비는 것이다. 제이-팝이란 얼마간 세월이 흐른 후 지나간 그 흐름을 소급하여 일반화할 수 있다. 즉 그 맘 때에 이런 저런 특별한 정조와 특색의 음악이 있었다 하면 그게 제이-팝이 된다. 제이-팝에 속한다는 음악들을 들어보면, 언뜻 곧잘 쓰이는 브릿-팝(Brit-pop)이란 말처럼 명징한 내용을 가진 개념이라기보다는, 지시의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임시변통의 말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브릿-팝은 영국의 뮤지션이나 밴드가 연주한 음악이란 것 말고는 딱히 무슨 분명한 특성을 정의하기 어렵다. 맨체스터 사운드니 브리스톨 사운드니 하는 말처럼, 되려 지역적인 씬(scene)에 따라 서로 다른 유형의 분위기의 음악을 정의하는 게 이해하기 훨씬 쉽다. 굳이 확인해 본 건 아니지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영국에선 브릿-팝이란 말을 쓰지는 않을 듯 하다. 그런데 유독 일본에서는 자기네 대중음악의 한 갈래를 제이-팝이란 별난 이름으로 부른다. 그 별난 취미는 무슨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마 성마른 이들은 이에 대해 몇 가지 성급한 비난거리를 찾아내려 할지도 모르겠다. 알다시피 “우리”는 언제나 일인칭일 뿐이다. 별나게 그 우리를 3인칭으로, 이를테면 한국, 한국인, 한국음악 같은 것으로 객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여간 거북하고 불편한 일이 아니다. 우리를 마치 ‘그들’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은, 말하는 사람이 취하는 자연스런 위치, 자신이 언제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자리를 거리를 취한 채 바라보게 만든다. 그래서 그것은 자신을 이미 주어진 것처럼 놓는 안락함을 내팽개치도록 만들고, 자신을 어색하게 바라보는 자기분열을 초래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상 속에 남다르게 우리라는 생각이 남다르게 강하다고 새겨져 있는 일본에서, 왜 굳이 제이-팝이란 말을 만들어 쓸까. 이제 그들도 우리라는 생각이 희박해질 만큼 스스로를 묶어주는 유대적인 신념이 느슨해진 탓일까. 아니면 도무지 앞뒤 가리지 않고 여러 나라의 대중음악과 분별없이 몸을 뒤섞은 탓에, 정체 없는 짬뽕식 대중문화가 범람하게 된 결과일까. 물론 위의 어떤 짐작도 엉터리 주장에 불과하다.

그런 의구와 혐의들은 이해할 만 하지만 그렇다고 설득력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런 일본의 대중음악의 혼성화와 또 자기정체성에 대한 집착과 지시는 우리와 무관한 일도 아니다. 장차 우리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할지 모를 일이고, 일본의 제이-팝처럼 케이-팝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대중음악을 따로 내세워야할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중문화의 세계화(globalization)이라 부를 수 있는 불가역적인 추세에 따르는 한 피할 수 없다. 과연 우리는 하염없이 언제나 느긋하게 편안히 우리를 우리라는 말 속에 숨은 채 수 없다. 범세계화라는 것은 단일한 세계적인 규약, 세계적인 기준, 세계적인 취향에 따라 문화가 획일화되거나 단조음화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세계화는 언제나 우리라는 말속에 파묻혀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은 문화적 습관을 위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을 우리라 말할 때 언제나 따라다니던 우리로서의 자명함에 빗금을 긋게 만든다. 다시 말해 스스로의 문화를 성찰하지 못하던 우리라는 위치를 벗어나 스스로를 ‘그들’이란 자리에 놓고 생각토록 하는 반성에 이끌리게 된다. 그것은 성찰(reflection)이란 말의 말뜻 그대로 자기 스스로를 되비추는, 즉 자신을 반영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되읽는 작업을 요구한다. 범세계화는 언제나 자신에게 들이닥치는 차이와 대질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마주친 차이에 대하여 어쩔 수 없이 그것과 다른 우리에 대해 설명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우리라는 것이 한결같이 같은 것이 아님을, 되려 우리라는 것이 수없이 서로 다른 우리, 다시 말하면 남들로 이뤄진 경계 없는 무리라는 점을 서글프게 혹은 즐겁게 확인하게 된다.

 

한국 대중문화의 해외진출

요즈막 한국 대중문화의 해외 진출을 둘러싼 소식이 적잖이 들려온다. 유치한 국수적 민족주의자가 아닐지라도 이런 소식은 왠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듯 하다. 그런 쾌적한 기분의 음흉한 배경을 캐는 노력도 있어야겠지만 여기에서의 관심은 그런 것은 아니다. 좋게 보자면 그런 기분 좋음 뒤에는 동시대의 한 세대가 선택하고 빚어낸 문화적인 혹은 미학적인 선택과 취미가, 낯선 이들과 교감하기에 이르렀다는 만족감이 스며있을 수도 있다. 여튼 어떤 핑계를 들이대는가 여부와 관계없이 그런 소식에 유쾌해하는 이들을 위해 부지런히 소식은 날아들고 있다. 또 그 소식들은 대중문화를 둘러싼 소식의 앞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그렇게 당도한 소식들 가운데 몇 가지를 꼽자면 이런 것들이 있다. 먼저 한국 대중음악의 중국어권에서의 선풍이 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클론은 대만에서 확고부동한 스타이다. 심지어 클론은 대만에서의 인기를 넘어 위성방송을 통해 아시아나 미주, 유럽 지역의 화교들 사이에서도 소개되고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한다. 그런 클론의 뒤를 쫓는 뮤지션들도 줄을 잇고 있다. 엄정화는 자신의 히트곡 가운데 하나인 ‘포이즌’을 중국어로 녹음해 음반을 발매할 예정이라 하고, 김현정, 쿨, 유승준, 베이비복스 역시 중국어 음반을 냈다. 대표적인 10대 댄스그룹 가운데 하나인 코요테는 자신들의 곡인 ‘순정’의 인기로 중국 호남위성 티비의 오락 프로그램인 ‘쾌락대본영(快樂大本影)’에 출연한 덕에 올 1월에 중국어로 된 자신의 음반을 발매했다고 한다. 게다가 코요테는 장동건 등의 한국 남성 탤런트들이 인기를 누리는 베트남 지역에서도 커다란 인기를 얻어, 어느 연예 뉴스에서는 그들의 곡이 베트남의 나이트클럽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고 전한다. 베이비복스 역시 중국의 북경 티비에서의 라이브 공연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다. 그리고 물론 HOT의 중국 진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뒤이어 대중음악의 수퍼스타에 등극한 그들 역시 중국 시장에 진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HOT는 다른 뮤지션들과 달리 우리말로 부른 앨범을 제작 판매하였음에도 북경의 음반 차트 10위권 안으로 진입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들은 이미 10만장이 넘는 앨범을 팔아치웠다 한다. 그래서 그들과 더불어 역시 엄청난 인기몰이에 성공한 바 있는 여성 팝 그룹 SES가 소속된 ‘SM 엔터테인먼트’는 아예 스스로를 문화 상품을 해외시장에 판매한 기획력있는 문화사업가로 불러달라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개별적인 뮤지션들의 성공 말고도 여러 가지 소식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음악전문 케이블 채널인 ‘M-net’은 일본의 음악 채널인 ‘스페이스 파워(Space Power)’에 한국가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 공급을 계약맺었다고 한다. 이 일본 음악 채널은 약 300만 가구의 시청자를 가입자로 가지고 있으며 위성 티비와 케이블 티비를 통해 모두 시청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듯 일본의 방송에서 정규 프로그램으로 한국 가요 소개 프로그램이 채택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은 아닌 듯 보인다. 그 비슷한 일들이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이미 루퍼트 머독이 소유하고 있는 아시아의 독보적인 음악 전문 채널인 스타 티비 역시 자신의 채널인 ‘채널 [V]’를 통해 한국 가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 대중음악의 해외진출은 서구 대중음악에 의해 완전히 잠식되는 악몽을 꾸는 이들에겐 희망의 징조처럼 보여질 수 있다. 또 한국 대중음악의 특별한 가치와 능력을 보여주는 본보기로 추켜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한국 대중음악의 해외로의 유입은 대중문화의 세계화를 움직이는 역학의 한 측면으로 이해함이 옳다. 대만 타이페이의 번잡한 도심, 그 가운데서도 청소년들이 모여드는 대표적인 거리인 시먼띵[西門町]은 온통 일본의 대중문화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그 한 켠에 일본 대중문화의 위세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한국 대중문화와 관련된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들 역시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엔 대만에서 성공을 거둔 뮤지션이나 탤런트, 배우들의 사진과 브로마이드, 음반, 그리고 여러 가지 팬시 상품들이 즐비하다. 아마 그 상점을 찾는 청소년들 가운데 다수가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 자신들이 열광하는 뮤지션들의 음악을 듣거나 근황을 추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만 청소년들의 주변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몰입을 두고 왜색(倭色)이니 한색(韓色)이니 하는, 핀잔과 악담은 크게 들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짓궂은 말처럼 들리겠지만 한국의 대중음악이 우리의 대중음악이 아니라 대만이나 다른 아시아 지역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대중음악’으로 수용되고 또 자리잡고 있다 억측해 볼 수 있다. 그들은 특별한 민족적 정체성을 갖는 문화에 동조하거나 그런 문화적 표식을 선별하는 게 아니다. 혹시 그것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세련된 것, 진부하지 않은 것, 낯선 것에 대한 선택이지 어떤 문화적 산물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선호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선택은 이미 범세계적인 시민으로서의 선택에 가깝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많은 이들이 상상한 것처럼, 대중문화의 전지구적 미국화와 관계없이 전개되는 것일까 하는 문제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대중문화의 미국화라는 끔찍한 악몽에 허덕이고 있지만 우리 주변의 현실은 오히려 지역화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지역화는 세계화와 짝을 이룬다. 이를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조어를 사용하여 부른다면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세계화와 지역화가 동시 병존적인 움직임을 뜻하는 서투른 조어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세계화를 동일화, 획일화로 오인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비판의 힘을 갖는 말이기도 하다.

글로컬라이제이션 시대의 대중문화

세계화는 차이의 소멸이나 삭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세계화는 자신들의 삶 속으로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차이와 마주하도록 이끌게 마련이다. 이미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와 간격을 뛰어넘어 서로 다른 세계가 반죽되어버린 세계를 체험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난입한 차이들의 꾸러미는 그 차이와 마주한 이들이 공유하고 있던 세계의 이미지를 이지러뜨린다. 그렇지만 이것이 대문자로 쓰여진 집단적 일인칭으로서 ‘우리’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 우리를 지탱하던 공통의 세계상을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거꾸로 그것은 우리와 다른 것 사이에 자리잡은 차이에 대한 질문을 더욱 촉진한다. 때에 따라 그것은 우리 문화의 종별성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내고 문화의 종적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정책과 캠페인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또 이런 움직임은 때로는 사멸되어 가고 있거나 아니면 관심의 저편에 밀려나 있던 전래 문화에 대한 관심을 북돋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특정한 문화적 관행이나 의식을 전통이란 이름으로 구성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근대의 민족국가적 틀이 만들어지며 늘 벌어지던 일이지만, 지금의 변화는 전에 없이 그 속도와 규모가 빠르고 또 커져가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이미 우리는 온갖 종류의 문화적 근본주의의 범람을 목도하고 있다. 다시 차도르를 뒤집어 쓴 이슬람 사회의 여성들이 해외 뉴스에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먼 나라의 일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지난 몇 해 사이에 수백 개가 넘는 지역 축제들의 융성을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지역 축제들은 한결같이 각 지역의 고유 문화라는 것을 내세우고 뽐낸다. 즉 이미 우리는 수없이 많은 우리들의 점들이 점점이 박혀서 이뤄진 희미한 윤곽의 또 다른 우리를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연유로 지금 한국 대중음악의 진출도 ‘한국’의 대중음악의 진출이라 단언할 근거가 없다. 그것은 차이들을 놀라운 힘과 속도로 흡입하고 또 뱉아내는 문화적 상호작용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것은 민족적 정체성의 이름으로 이뤄진 문화의 열고 닫힘이 아니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그 사회 내부의 다름들, 이를테면 전통에 들러붙어 있는 어른들과 외래적인 문화에 호응하는 청소년들 사이의 차이, 다시 말해 ‘우리’라 칭해지는 것 내부의 차이 가운데 하나인 세대적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선택되고 전유되는 한가지 우연한 재료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날엔가 새로운 차이가 필요함에 따라 새로운 기준을 찾아 다른 무엇으로 옮겨갈 수 있다. 아시아 주변 사회에서 그들은 우리의 대중음악을 우리의 대중음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의 대중음악은 그들에겐 말 그대로 그들의 대중음악이지만 동시에 그들 내부의 또다른 우리가 만들어지기 위해 불러들인 그들의 우리에 불과할 수 있다. 그들에게 그건 당신들의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에겐 절대로 다른 우리의 우리일 뿐이라 강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좀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의 우리’를 위해 그들에게 그들인 우리를 필요로 할 뿐이다. 그러한 그들과 우리들 사이의 차이, 그리고 그 사이의 복잡한 뒤섞임, 방금 말한 대로라면 글로컬라이제이션이라 부를 그러한 움직임이 지금 대중문화를 둘러싼 규칙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 마냥 우리의 승리, 우리 대중문화의 세계성을 자축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에 불과하다. 우리가 그들에게 그들로 비친 것이 아니라 그들 내부의 우리로 변형되어 버린 것, 즉 더 이상 우리의 순수성이란 것은 신기루처럼 언제 어느 때나 사라져 버리고 또 새로 도래하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 대중문화의 진출에 뒤얽힌 사정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해외 진출이 이렇다면 우리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우리 역시 언젠가 케이-팝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대중음악을 부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국 대중음악의 해외진출이 가능하게 된 조건 자체가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해외 진출을 가능케 한 문화적 규칙인 글로컬라이제이션은 한국의 대중문화에도 같은 힘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대중음악의 해외진출을 가능케 했던 그러한 문화의 세계화-지역화의 맥락으로부터 한국이 예외적으로 면역된 특수한 이색 지대가 되기란 전연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심지어 몰염치할 뿐 아니라 지독히 국수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인 발상에 불과하다. 우리의 성공은 또한 동시에 그들의 성공일 수도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그러한 차이를 즐겁게 맞아들이는 성숙한 문화적 윤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