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림의 우리의 美를 찾아서

그리움과 원한의 불꽂, 등잔불  

 

최하림 (시인)

접시형의 용기에 기름을 담고, 그 기름을 빨아들이는 심지를 배치한 등잔은 심지에 불을 붙이면 기름을 빨아들이며 빨갛게 타들어간다. 그 불빛을 바라보며 한국 여인들은 긴 밤을 지새운다. 여인들은 바느질을 하기도 하고 다듬이질을 하기도 하고 베틀에 앉아 베를 짜기도 한다. 그 여인의 가슴은 심지처럼 타고 있다. 아직 돌아오지 않는 임에의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애태우고 있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권위가 주어졌던 한국의 남성들에게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부덕이 아니었다. 그들은 집을 나가 몇 날 며칠 술을 마시며 기생질을 하든지 기박을 하든지, 당파싸움을 벌였다. 독립운동을 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여인들은 남편의 외유와 외박을 받아들이고, 참고, 기다려야 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을 밝혀주는 것이 등잔불이었다. 여기서 여인과 기다림, 여인과 등잔불, 등잔불과 임이라는 하나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황진이의 다음의 시조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너었다가어른님 오신 날 구비구비 펴리라.

 

이 시조에 등잔불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어와 시어들은 등잔불이 어둔 방을 밝히고 있다는 전제 아래 전개된다. 시간은 애타게 똑딱똑딱 가고 있지만 임은 오지 않고, 임에의 그리움과 원망만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 배가 된다. 얼마나 그 기다림이 지극하고 애달픈 것이었으면, 기다리는 시간의 한 허리를 잘라내어 간직하고 있다가 임 오시는 날 밤에 구비구비 펴리라고 노래했겠는가.

그러나 한국의 등잔불이 매양 기다림이라든가 한숨이라든가 원한의 감정만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부장적인 권위를 질서화했던 유교문화가 지배하기 전까지 그것은 희망, 사랑 등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었다.

 

2월 보로매 아흐 놀이 켠 등불다워라만인 비취실 모습이셔라아흐 동동다리

고려 평민들은 등불을 그들의 희망에 비유했다. 하긴 등불이 희망, 이상, 사랑을 나타낸 것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고 인류 공통의 것이다. 불을 창조한 이야기를 담은 신화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 신화의 인문적 반신(半神)인 프로메테우스는 천상에서 불을 훔쳐 인간계에 가져다 주며,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신화는 불을 간직한 학에게서 주위의 동물들이 불을 훔친다. 대만의 신화도 한 사슴이 바다 가운데 있는 불의 섬에 건너가 불의 구슬을 훔쳐가지고 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불은 인간이 창조하지 않고 도둑질했다고 함으로써 신화학자들은 도화(盜火) 신화라는 항목을 만들어 연구할 정도다.

왜 불을 훔쳐왔다고 그들은 적었을까? 그들은 불을 도구처럼 만들어 쓰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신성시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산불과 같이 마을 밖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밖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는 뜻으로 도화(盜火)라 했을까? 신화의 내막을 우리는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어쨌든 고대인들이 불을 얼마나 중시했던가를 신화를 통해 잘 알 수는 있다. 그리스 신화를 변용한 로마 신화를 보면, 그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가장 순결한 처녀를 뽑아 불지기로 삼으며, 히브리 사람들은 “불행의 불”이라는 숙어를 만든다. 불이 이미 실생활화했던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불에 대한 신앙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조때 귀인 김씨는 그의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은근히 내수사에 부탁하여 황밀 5백근을 구한다. 밀초를 만들어 불전에 불을 켜 복을 빌자는 것이다. 이 소문이 퍼지자 대제학 율곡 이이는 선조께 “황밀 5백근이나 쓸 정도로 궁중이 사치를 부리면 이 황폐한 나라를 어찌 이끌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소한다. 그 항소로 율곡은 점차로 선조의 신임을 잃게 되고 벼슬을 떠나 낙향하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 등불이 성세를 이뤘던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연등회를 중시하라는 태조 ‘훈요10조’에 의해 4월 초파일이 오면 왕도인 개성은 물론이고 지방 사찰들도 사방 5리를 밝히도록 길과 나무마다에 연등을 달고 관리와 승려와 백성들이 함께 흥겨워했다. 고려시대에는 ‘각촉부(刻觸賦)’라는 시도 성행했다. 초에다 일정한 금을 긋고 초가 타서 그 금에 이를 때까지 시를 완성해야 하는 일종의 ‘시놀이’였다. 그 금에 촛불이 이를 때까지 완성치 못하면 시인은 벌주를 마셔야 했고, 또 완성치 못하면 또 마셔야 했다.

5리 밖을 밝히는 연등이나 각촉부는 조선시대에 이르면 자취를 감추고 촛불이나 등불은 여러 계층으로 다양하게 발전해 간다. 등불(촛불)에 대한 상징도 바뀐다. 혜원 신윤복의 한 그림을 보면, 한 남자가 오른손에 장명등을 들고 정인의 길을 밝혀준다. 그 위에는 “달이 깊고 깊은 한밤중, 양인의 심사는 양인만이 안다(月次次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라고 쓰여 있다. 등불이 내면화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민족의 내면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은 등잔불이다. 한국의 여인들은 그 불과 함께 살았다. 그 불을 보면서 그네들은 기다림과 싸우고, 원망과 싸우고, 연약해져가는 자신을 타오르는 불꽃으로 존재케 했다. 그때문인지 우리네 등잔불은 상고시대에서 한 말에 이르도록 모양에 있어서나 명칭에 있어서 별다를 것이 없다. 상고시대의 청동촉대나 조선시대의 광명두리(光明斗)나 등잔을 위에 얹고 거기에 불을 붙이는 면에서는 동일하고, 광명두리나 청동촉대를 등잔불이라 통칭하는 것도 매일반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심리가 등잔의 외양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은 기름을 만들어 오래 방을 밝힐 수 있느냐는데 쏠렸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등잔불의 불꽃은 구미의 그것보다 조금 어둡고 조금 무겁다. 우리 어머니나 누이와 같은 면이 그 불꽃에는 있다.

사진촬영에 협조해 주신 등잔박물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