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지킴이  단청잔 이치호 선생

숱한 불화를 그려본 다음에야 손 댈 수 있는 예술

심상교(부산교대 국어교육과)

 

단청이 이렇다. 단청은 종교의 장엄함 때문에 오묘하고 스스로 지닌 밝음과 어둠 때문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이처럼 단청의 세계는 대가람을 등지고 선 봄목련의 자태와 닮아있다.

단청은 고건축의 기둥과 처마에 색동옷 입히듯 선을 따라 색칠하는 작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청은 숱한 불화를 그려 본 다음에야 손댈 수 있는 예술이다. 사원의 외벽을 장식하고, 법당 안을 채색하며, 부처상에 옷을 입히고 점안하는 극치의 종교행위 모두를 일컫는 것이 단청인 것이다. 때문에 단청과 불화(탱화)는 서로 남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단청의 거장으로 거명되는 첫 번째 인물은 만봉(萬奉)스님이다. 그는 단청부문 최초의 인간문화재 기능보유자이자 서울 신촌 봉원사의 승려다.

봉원사에 다다라 봉원사를 바라보고 서면 오른쪽으로 난 길이 있다. 그 길 잠시 따라가면 고목에 몇 개의 줄이 달려 있고, 작은 돌들이 쌓여 있는 성황당을 만난다. 그 옆집에 만봉스님이 살고 있다. 봉원사에 온 이래 거기를 떠나지 않고 있다. 그 집에는 고희가 된 만봉스님의 딸과 단청기능의 전수조교인 50살된 아들도 살고 있다. 태고종 스님이라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다. 맏아들은 미국에서 승려직분과 단청화원의 생활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운명처럼 다가온 단청만봉스님은 1909년생이다. 현재 91세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한국을 합병하려는 야욕을 극도로 드러냈던 1909년 그는 서울 종로에서 연안 이씨 이윤식(李潤植)의 5대 독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이치호(李致虎). 어린 아이였던 치호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같은 예언이 내려 진다. 단명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치호의 운명을 두려워한 어머니는 치호를 불전에 바친다. 어머니의 서러운 발원이 받아들여져서인지 치호는 만봉이라는 법명으로 큰 탈없이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운명처럼 불가(佛家)에 들어온 그는 다시 운명처럼 단청을 접하게 된다. 남달리 손재주가 뛰어나지도, 그림을 잘 그려 주위의 관심을 집중시킨 적도 별로 없다고 한다. 그냥 운명처럼 단청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들과 산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놀 여섯 살 때 서울 안정사에서 금어 김예운(金藝云) 화상을 만나 불화에 입문하였다. 그리고 나서 일제강점하, 한국전쟁, 많은 정변 등이 지나간 격동의 근현대사를 살며 그는 오직 단청만을 생각하고 단청만을 그려왔다. 단명에서 장수로 바뀌어버린 운명에 감사라도 하듯, 단명의 업을 잊어버기라도 하려는 듯 오롯이 단청만을 그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 년 전 사고로 엉치뼈를 다친 이후 거동이 불편해 단청작업을 하는 시간도 줄었다. 나이가 들고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들을 생각하거나 과거의 추억에 가슴을 쓸어 내리기도 하련만 만봉은 그렇지 않다. 친구 생각도 별로 안나고 가슴 시린 애틋한 추억도 없다고 한다. 불필요한 정서에 억압되어 자신을 흐트러뜨릴 수 없음이리라. 오직 단청만이 그에게 삶의 절대가치이며 존재이유인 것이다.

그런 운명과 그런 성격탓인지는 몰라도 그는 단청외에 다른 어떤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그의 비범한 그림 재주를 고려한다면 산수화나 인물화 몇 폭은 그리고도 남았을 법하다. 하지만 그는 단청에 바친 자신의 순결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았다. 만봉스님이 처음 봉원사에 왔을 때 신촌로타리는 일본인들이 길만 내놨을뿐 집 한 채 없는 밭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봉원사에서는 자연스레 한강이 보였고 그 위로 지나다니는 황포돛배도 보였다한다. 이런 풍경 한 장면정도는 그의 화폭에 담길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그리지 않았다. 그럴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한다. 다만 하나의 단청을 완성하고 나면 그 다음을 생각하고 또 다음을 생각하며, 더 잘 그려야 겠다는 생각외 다른 생각은 없었다 한다.

이런 그의 신념은 제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단청을 해보겠다고 찾아오는 제자나 열심히 단청을 그리고 있는 제자에게 주는 스승으로서의 가르침이 무어냐고 물으면 그는 없다고 한다. 그냥 열심히 잘 그리라는 충고만 던져 준다고 한다. 초지일관 극점에 이를 때까지 일로정진 하라는 것이다. 한 길로만 걸어온 스님 자신의 인생을 엿보게 하는 가르침이다.

요즘은 금어가 되기 전의 만봉스님처럼 시왕초, 보살초, 여래초를 3천장씩 그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른 것 할 게 많은 세상이라 초안 그리기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한다. 죽도록 하나에만 정진했던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의외의 답변이다. 자신이 했던 공부 그대로를 제자에게 강요할법한 도제식 수련세계에서 상상하기 힘든 제자 교육관이 아닐 수 없다. 단, 시작한 일이라면 중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고통에 맞서기를 꺼리고 찰나적 만족에만 몰두하는 요즘 세태를 질타하는 엄숙한 죽비소리가 아닐 수 없다.

만봉스님이 근래에 완성한 작품으로는 작년 10월에 마무리한 봉원사 명부전 단청이 있다. 3달 걸렸다 한다. 기둥, 보, 도리, 서까래, 네 개의 벽면, 대공, 문, 법당내 불상과 장식물 등 명부전에 있는 일체의 채색이 그의 붓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새 천년을 맞는 명부전의 단청은 그래서 더욱 화사하고 종교적이다.

살펴보면 단청의 역사는 길다. 토기표면에 그어진 빗살무늬가 단청의 연원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렵생활시절 동물을 쫓기 위해 몸에 색칠을 하던 때부터 단청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우리 나라 고건축에 나타나는 단청은 일반적으로 불교의 수입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본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서역의 아라베스크문양을 원용한 장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담징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불교를 장식한 시기도 이때인 것이다.

삼국시대의 단청은 고분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고분의 기둥을 장식하고 있는 반용(蟠龍)과 기둥머리에 얹힌 앙련(仰蓮)에서 벽면을 장식하는 기예가 나타나고 있으며 고분벽화에서도 이런 장식들이 나타난다. 삼국시대에 나타나는 이러한 단청의 원류는 후대로 나아가면서 단청의 사상도 이어간다. 고분에 나타나는 이런 장식적 요소들에는 내세의 삶과 현세의 삶 모두를 중시하는 면이 반영되고 있다.

한편 내세의 복과 동시에 현세의 복 모두를 기원하는 장소로 기능하는 사원에서 삼국시대의 고분에서와 같은 장식을 두르고 있는 상황을 볼 때, 당시 고분에 표현되어 있는 사상을 후대의 단청들이 연면히 이어갔다고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단청은 그 시원부터 단순한 장식적 요소를 넘어 종교적 기능을 위해 바쳐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청이 내포하고 있는 종교적 기원적, 요소는 고려와 조선, 현대로 넘어 오면서 사찰뿐 아니라 궁궐, 누대, 정자 등의 건축물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단청은 양식적인 면에서 불교사상을 상징화하는데 치중했다. 천장을 드러내는 주심포양식에 쓰인 단청은 대개 화려하고 섬세하며 우아했는데 이러한 특징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극락정토 사상을 불경에 근거해서 그린 것이다. 안동 봉정사의 대웅전과 극락전, 여주 부석사 조사당과 무량수전 등은 모두 14세기 중반의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한국 최고(最古)의 건축물들인데 이곳 역시 고려인이 갖고 있던 숭고한 불교적 이념을 집약적으로 드러낸 예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단청은 임진왜란 이후 침체기를 벗어나 다시 융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양해졌다. 당시 단청은 사찰이나 궁궐, 향교, 서원 등의 개창, 중창 때 많이 이용되었는데 사찰이나 궁궐, 특히 궐내의 시설들은 왕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다른 어느 단청보다 화려하고 다양하게 채색되었다. 그러나 유교건축물들은 화려함이 배제된 검소한 단청인 모루단청이나 긋기단청, 가칠단청을 하여 유교적 엄숙주의와 겸양을 드러냈다. 특히, 종묘나 묘사, 가묘 등에는 가장 필요한 채색만을 입히는 극도의 절제된 단청을 시행하였다.

 

80여 년간 단청을 그리는 만봉스님만봉스님이 단청을 그린 지는 80여 년. 개인이 한 가지 일에 몰두했던 기간으로는 짧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수천 년 단청의 역사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다. 80여 년이 수천 년의 맥을 잇듯 그의 문하에는 지금 많은 제자들이 만봉단청의 맥을 잇고 있다.

나무로 틀을 짜고 광목을 고정시키고 아교칠을 한 다음 초안을 그리고 가칠하고 채색한다. 한 손에 두 개의 붓을 쥐고 아니면, 한 개의 붓을 쥐고 넘실대는 파도를 그리는가 하면 대자대비한 관음의 미소를 그리기도 하며 극락의 열락을 그리기도 한다.

서양화를 그릴 때 화가는 대개 화폭과 마주 앉는다. 그러나 불화는 세워놓고 그리지 않는다. 작은 크기라도 화폭을 바닥에 놓은 채 허리를 구부려 화폭과 화가의 몸을 밀착시킨 다음 그림을 그린다. 화신동체(畵身同體)라 할까. 화폭 위에 있는 화가의 몸은 가슴과 허벅지가 닿은 상태다. 그 상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붓끝으로 그림이 완성될테지만 온몸으로 그려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종의 헌신이다.

만봉스님에게 불심과 불력은 불립문자 염화미소의 세계인 것 같다. 80여 년간 수많은 단청을 해 오면서 무릎과 허리의 고통이 막심했을 것 같으나 특별한 운동도 달리 먹는 음식도 없이 지내 왔다고 한다. 무릎과 허리의 고통이 없었던 것은 불심과 불력의 덕이 아니었을까라고 물으면 웃으면서 그저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만 몰두해서 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에게서 불심과 불력은 이미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고 느낄 수 없는 무엇이 된 것이다.

아니면 단청을 그리는 동안 만봉스님은 종교적 황홀감 빠져 이승을 잊고 있지나 않은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며 연꽃을 든 석가여래와 그것을 바라보며 미소로 답하는 가섭의 모습이 바로 만봉스님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단청문양 상품화 차원에서 보호 육성해야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만봉스님의 불화중에는 청색비단에 금선으로 그린 관음보살도와 극락도가 백미다. 그의 관음도와 극락도에서는 바람에 날아갈 듯한 가녀린 선이 세상의 무게를 견뎌내는 종교의 힘으로 바뀌어 있음을 본다. 또 만봉의 여래상에서는 불도가 돋아난다. 청색비단에 그려지는 금선이 결국 극락을 만들어내고 희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누군가 석굴암 석가여래의 부조에서 구슬부딪치는 소리를 듣는다 했던가? 부조의 양감에서 살냄새를 느낀다 했던가? 만봉스님의 불화가 그렇다. 만봉스님의 관음도에서는 관음보살이 손을 내밀어 나를 오라할 것 같다. 그가 오라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는 알 수 없다. 구원의 세계일 수도 있고 아름다움의 극락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봉스님의 그림은 이승에서 접할 수 있는 드문 절대미의 세계라는 점이다.

관음도는 인간적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다. 관음도의 배광은 한치의 오차없이 그려져 완전히 동그란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다. 약간 비뚤어진 형태로 그려져 있어 기계가 그린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그렸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관음상의 인간적 면모를 느끼게 하는 동시에 인간의 손으로 그려지는 가장 완전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한다.

만봉은 우리를 경건하게 하고 우리를 성스럽게 한다. 우리를 아름다움의 황홀에 빠지게도 한다. 만봉이 만들어 준 아름다움의 수렁에는 빠져 그 멋을 한없이 느껴도 숨차지 않을 것이다. 만봉스님은 예불을 드리고 그림 앞에 선다. 신심이 깃들이지 않으면 그림이 아니라고 한다. 그림 그리는 과정이 곧 수행인 것이다.

이제 그의 등은 굽어있고 눈썹은 시었다. 90년 세월도 억겁속에서는 한 순간이다. 그러나 그가 그린 숱한 단청들은 억겁속에서 빛나는 광명이 되고 있고 그의 점정(點睛)은 세상을 밝히는 예지가 되고 있다. 불을 밝혀 그의 그림을 보자. 그의 가르침을 보자.

서양의 그림이 성경을 소재로 하던 화풍에서 벗어나자 그림은 새로운 경지를 열고 인간 정신도 자유로와졌다. 단청도 불법(佛法)을 벗어난 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리고 사족같은 생각이지만 이제는 단청의 다양한 문양을 상표등록하여야 한다. 외국 유명 디자이너 제품 중에 우리의 단청을 닮은 문양을 가끔 본다. 우리의 단청문양도 상품화 차원에서 보호하고 육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