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문화예술관련 논문형황분석 3/ 민요학 관련연구논문 |
민요의 연구 흐름 점검: 문제의식의 추이와 현황의 분석
강 등 학(강릉대교수) 우리 민요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신석기시대에는 벌써 노동요가 출현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는 새로운 노래들이 거듭 출현되면서 민요의 발달이 본격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민요를 대상으로 한 연구활동은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다. 당시 식자들이 우리 민요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면서, 민요채집의 필요성과 우리 민요의 가치를 논하는 글들이 작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후 민요연구의 역사는 1920년대부터 해방 이전까지의 입문적 단계를 거쳐,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학문적 기초를 마련하고, 1970년대 이후부터 보다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느 분야이건 연구의 사적 전개는 선행작업이 안고 있는 미진한 점을 보완하면서 새로운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민요연구의 사적 흐름을 파악하는 작업도 결국은 각 시기 연구물들이 추구한 문제가 무엇이고, 또 그 문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따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 글은 민요연구가 전개되어 온 단계에 따라 문제의식의 추이를 분석해보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해야 할 민요학의 과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민족 고유의 가요인 민요에 관심 기울인 제 1기 (1923-1945) 민요에 관심을 두고 작성된 글 가운데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가장 앞선 것은 C.C.S.생(1923. 6)이다. C.C.S.생은 이 글을 통해 <삼삼는소리>, <놋다리밟는소리> 등 몇몇 노래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설을 싣고, 아울러 주석도 붙여 놓았다. 그러나 이 글은 민요를 알리고 소개하는 해설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어서 학문적인 의미를 부여받기에는 미흡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광수(1924. 12)에 이르면 벌써 학문적 탐구의 색채가 뚜렷해진다. 이광수는 이 글에서 민요는 외래적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민족 고유의 사상과 리듬, 정조를 지니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고, 아울러 민요의 리듬과 정조를 찾아 신체시에 반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민요연구는 양명(1925. 8)과 이은상(1926)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확산되어 간다. 양명(1925. 8)은 지배계층이 중심이 된 옛 문학은 문이재도(文以載道), 권선징악 등에 얽매어 있으나, 민요는 천진난만하고 얽매임이 없다고 하면서 문학적 가치도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은상(1926) 역시 민요는 시의 뿌리로서 그 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고서, 일찍 홀로 된 여성들을 소재로 한 민요를 대상으로 그 형식과 정서를 논하였다. 그런가하면 우리 민요에 대한 관심은 일본인들에게서도 나타나서 시산성웅편(1927)과 같은 단행본이 나오게 되었다. 이 책에는 민요를 대상으로 한 글 14편이 실려 있다. 글을 쓴 사람들은 총독부 관리, 일본기업 서울 주재원, 교원 등 일본인들이 대부분인데, 최남선, 이광수, 이은상 등 당시 우리의 지식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식자들과 일본인들이 민요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이광수(1924. 12)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초기 연구자들이 민요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그것이 외래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우리 민족 고유의 가요라는 시각에서이다. 이와 달리 일본인들의 우리 민요에 대한 관심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식민지 문화의 이해라는 시각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연구자들이 민요를 통해 읽고자 했던 주요 관심사는 민족적 고유성의 발견이었고, 일본인 연구자들이 우리 민요를 통해 읽어내고자 하는 주된 관심사항은 식민지 문화의 향토성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민족의 고유성과 향토성이라는 것은 시각의 차이가 존재할 뿐, 실제적인 내용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1920년대 민요연구는 서로의 시각이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측이나 일본 측 모두가 결국은 사설의 내용을 분석하고 민족의 고유한 정서와 기질, 사상, 그리고 각 지역의 생활상과 향토성을 읽어 보고자 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그런데 제1기의 민요연구는 엄밀히 말한다면 학문적이기보다는 논평, 또는 논설적인 것이었으며, 그것도 거의 대부분 문학적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아니 하였고, 또 민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식자들 중에는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민요가 안고 있는 민족적 고유성과 향토성의 발견은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므로 민족적 고유성과 향토성의 이해에 제1기 민요연구자들의 관심이 몰려 있었다는 것은 이 시기 민요연구의 문제의식이 그만큼 단조로웠던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1기는 민요의 가치를 발견하고, 또 민요수집과 연구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어 가는, 곧 민요연구의 입문적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1기의 성과물 가운데에도 문제의식과 논술의 체계에 있어서 상당한 진척을 이룬 선진적 연구물들도 없지 않다. 이재욱(1931. 12)와 고위민(1941. 4)가 그것이다. 이재욱의 글은 백제 노래로 알려진 <산유화가>와 경상도의 민요 <어사용>, <미나리> 등의 장르적 교섭관계를 노래명을 중심으로 옛문헌과 현지주민의 증언을 활용하여 검토하였는데, 제1기의 글로는 드물게 분석적이며 논증적인 기술을 해 보였다. 또 고위민의 글은 창자와 내용, 기능 등의 기준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실제로 민요를 분류하여 제시하였다. 이것은 최초의 본격적인 민요분류 업적으로 제2기의 연구자들도 이를 크게 수용하였다. 민요학의 기초가 마련된 제2기(1946-1969) 제2기에 들어서도 제1기의 연구 흐름은 그대로 이어진다. 예를 들면 임헌도(1949), 이병기(1952. 4), 장경학(1954. 12), 임동권(1955. 8), 이재욱(1956) 등이 그러한 것인데, 이것들은 모두 민족성과 향토성에 대한 관심을 보이거나, 아니면 논설적이며 해설적인 성격을 가진 기술물들이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으로 들어가면서 이같은 기술물들은 점차 줄어든다. 그 대신 민요현상 자체에 관심을 보이며, 문제를 분석적이며 논증적으로 다루려는 글들의 비중이 늘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1960년대로 들어서면서 보다 뚜렷하게 전개되어 제2기의 민요연구는 제1기와의 차별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해설적이며, 논설적인 기술이 줄고, 분석적이며 논증적인 기술이 증대된 것은 제2기 민요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이 그만큼 깊어지고, 또한 구체화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곧, 그저 피상적으로 민요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거나, 아니면 민요를 발굴해 널리 알리고자 하는 데서 벗어나, 민요의 이해에 필요한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끌어내어 이를 해결하고자 함으로써 분석적이며 논증적인 기술이 늘어난 것이다. 이같은 문제의식의 변화에 따라 제2기 민요연구는 다음과 같은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먼저 제2기에는 민요에 대한 제반의 문제를 총괄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하려는 노력이 일어난다. 이러한 작업물로는 주왕산(1947)의 {조선민요개론}, 고정옥(1949)의 {조선민요연구}, 임동권(1964)의 {한국민요사} 등이 있다. 주왕산(1947)은 민요에 관한 개론서로서는 최초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논제들은 이미 제1기에서 제기된 사항이며, 그 기술내용에 있어서도 제1기의 연구보다 크게 나아간 것은 없다. 주왕산(1947))의 이러한 문제는 고정옥(1949)에서 상당히 극복된다. 이 책은 민요의 기본적 이해에 필요한 사항들은 두루 검토하고 있으면서, 특히 민요의 기능과 분류 등에서 체계적인 기술을 하였고, 민요를 문학 일반론과 문학사의 맥락에서 검토함으로써 연구시각에 새로움을 보였다. 임동권(1964)는 민요사를 본격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업적이다. 이 책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해방이후의 민요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민요를 시기별로 검토하였다. 그러나 임동권의 이 작업은 각 시기별 민요자료의 정리 및 확인에 머물렀을 뿐, 민요의 시대별 상황과 사적 전개에 대한 기술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그런가하면 제2기에는 특정지역의 민요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작업이 본격화된다. 예를 들면 임헌도, 김영돈이 제주도의 민요를 대상으로, 정익섭이 전남의 민요를 대상으로 행한 작업들이 그것이다. 제1기에도 제주도의 민요를 비롯한 지역민요의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처럼 특정 지역의 민요를 문제삼아 그것을 다각도로, 그리고 전문적으로 정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임헌도의 1949, 1957, 1963, 1964, 1965, 김영돈의 1960, 1961, 1962, 1963, 1964, 정익섭의 1962, 1965, 1966, 1968 등이 그러한 작업의 사례에 속한다. 또한 제2기에는 음악학적 시각의 연구도 이루어진다. 김성태(1966), 김진균(1967), 조복열(1968), 김진균(1969), 윤양석(1969) 등이 그것이다. 민요에 대한 음악적 관심은 제1기에도 안기영(1931. 5)를 통해 나타난 바 있다. 안기영은 이 글에서 민요의 합창과 반주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제1기에서 민요의 음악적 연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민요의 연구사적 측면에서 보면 위의 연구물들이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2기에 나타난 민요에 대한 음악학적 관심은 서양음악 전공자들에 의해, 그리고 서양음악의 작곡을 위한 문제의식에 따른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양음악 작곡을 위한 한국적 소재의 대상으로 민요를 주목한 것이다. 이것은 제1기의 서구적 문학을 수용한 문인들이 민족적 고유성이라는 측면에서 민요를 주목한 것과 동일한 양상이다. 한편, 제2기에는 민요를 다룬 석사, 박사의 학위논문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그 동안 전개된 연구흐름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가늠해 보는 연구사도 작성되었다. 제2기의 석사학위논문은 박인식(1956)을 시작으로, 강상신(1959), 임동권(1960), 지춘상(1961), 신두헌(1962), 임헌도(1963), 김동준(1964) 등이 이어져 나왔고, 박사학위논문으로는 임동권(1968)이 나왔다. 그리고 연구사에 대한 논문으로는 임동권(1963), 장사훈(1968)이 작성되었다. 검토한 대로 제2기에 들어 특정 지역 민요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 그리고 음악적 연구가 보태지면서 논의의 깊이가 더해지며 동시에 민요의 연구는 전문성을 보다 뚜렷이 할 수 있었다. 또한 제2기에는 개론과 사에 대한 작업이 수행됨으로써 학문적 얼개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처럼 민요의 학문적 탐구는 제2기에 들어서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민요연구의 제2기는 민요학의 기초가 마련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석사와 박사의 학위논문, 그리고 연구사가 작성됨으로써 이제 민요연구가 하나의 독립된 학문범주로 존재하는 것임을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다양한 양사의 제3기(1970-1999) 이미 다룬 바처럼 민요연구는 제2기에 들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연구의 실제적 내용에 있어서는 아직 개론적 성격을 크게 넘어서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이 시기의 민요연구가 이미 다루어진 문제를 보다 정밀하게 다듬는 일보다는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민요학으로서의 틀을 갖추어 가는 쪽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요의 학문적 탐구는 제3기에 들어 본격화될 수 있었다. 제3기 민요연구의 주요 흐름은 총괄적 연구, 내용연구, 음악학적 연구, 시학적 연구, 현장론적 연구, 문화사회학적 연구, 비교연구, 계량적 연구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제3기의 민요연구가 제2기와는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다양한 양상을 띠며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각 범주별로 보다 자세한 상황을 살펴보도록 한다. 총괄적 연구는 전국, 또는 특정지역의 민요 전반을 대상으로 민요의 기능, 성격, 분류, 형식, 내용, 연구사 등 민요의 일반적 문제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작업을 말한다. 이러한 연구로는 장덕순외(1971), 임동권(1974), 정동화(1981), 정재호(1981), 김영돈(1983), 김무헌(1987), 최철(1992), 강등학(1995)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총괄적 연구는 제2기의 주왕산, 고정옥 이래의 연구흐름을 이은 것으로, 대부분 고정옥의 작업을 보다 새롭게 보완하거나, 확장시킨 것이다. 그러나 장덕순외(1971)은 민요가 가지고 있는 구비문학적 성격을 보다 뚜렷이 부각시키면서 기능, 가창방식, 장르구분 등의 문제에 있어서 새로운 진전을 보였다. 그리하여 이 책의 논의는 제3기 민요연구의 기초적 이론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강등학(1995)는 장덕순외(1971)의 시각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문제를 보완하여 제3기 총괄적 연구에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내용연구는 사설에 나타난 내용적 성격과 의식을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말한다. 민요의 내용을 연구하는 일은 민요를 전공하지 않는 연구자들도 비교적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면이 있다. 그러므로 이 분야의 연구는 제1기이래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 성과물도 다른 연구범주와는 비교가 되지 않으리 만큼 많은 양의 것이 축적되어 있다. 제3기의 성과물도 모두 갖추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들이 나와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가운데 제3기에는 임동권(1982), 김무헌(1986), 장관진(1988), 이현수(1991), 손종흠(1993) 등이 단행본, 또는 박사학위논문으로 작성되어 두드러진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연구내역은 대체로 평이하여 보다 깊이 있는 논의를 위한 방법론적 모색이 요구되고 있다. 시학적 연구는 사설구성방식, 사설의 시적 구조와 특성 등에 주된 관심을 두고 민요를 검토하는 작업을 말한다. 이러한 연구물로 중요한 것은 김대행(1981), 고혜경(1980), 좌혜경(1992), 한채영(1992), 권오경(1997) 등이 있다. 시학적 연구 역시 제1기 이래의 지속적인 관심사항이지만, 일차적으로는 제2기에 들어서 임동권, 지춘상 등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제3기에서는 김대행에 의해 그 작업이 두드러지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민요를 포함한 시적 기술물의 일반적 틀을 찾고자 하는 시각이었고, 고혜경(1980) 이후 점차 민요의 시적 양상을 기록문학으로서가 아니라, 구전문학으로서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나아갔고, 권오경에 의해 특정장르의 시학을 밝히려는 작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현장론적 연구는 검토대상을 특정한 노래, 또는 노래군으로 한정하고, 각 노래, 또는 노래군의 기능, 성격, 구조, 사설의 구성방식과 내용의 특징, 그리고 노래의 연행양상 등을 파악해 보는 작업이다. 요컨대 대상과 범주는 한정하여 집약적으로 검토하되, 현장적 실상을 중시하는 연구태도가 그것이다. 이에 대한 주요 연구물로는 조동일(1970), 강등학(1988), 류종목(1990), 나승만(1990), 이창식(1991) 등을 들 수 있다. 이 논문들은 검토대상을 일정하게 한정하는 대신 그 자료는 현장적 실상이 드러나는 것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그 결과 종래 전국의 민요를 대상으로 개론적 항목을 점검하여 얻었던 피상적 성과와 달리 이들 연구는 민요의 현장적 실상에 바탕을 둔 보다 체계적인 논리의 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시각은 조동일이 서사민요를 대상으로 한 작업에서 선보인 뒤, 강등학에 의해 서정민요를 대상으로 하는 작업으로 새롭게 이어졌고, 이후 제3기 민요연구의 중심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문화사회학적 연구는 민요를 하나의 문화물로 보고, 그것이 갖는 사회적 성격과 기능, 그리고 문화적 의미 등을 따져보는 작업이다. 이에 대한 주요 연구물로는 김시업(1985), 나승만(1994), 이보형(1994) 등을 꼽을 수 있다. 김시업은 민요 <아리랑>이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거쳐 일제강점기의 민중예술운동으로 전개되어 가는 과정과 그 사회적 기반을 다루었고, 나승만은 민요 담당집단의 사회적 성격과 사적 변화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보형은 민요 담당집단의 문화적 행위와 그 의미에 대하여 논하였다. 민요연구에 있어 문화사회학적 관심은 사설의 내용을 다루는 과정에서 간간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장르, 또는 담당집단을 대상으로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따져 보는 작업은 김시업에 와서 본격화 되어 이어진 연구들에 의해 민요를 바라보는 연구시각의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분야의 연구는 아직 본격화 되지 못해 연구성과가 다양하지 못한 상황이다. 음악학적 연구는 민요의 선율, 리듬 등 곡을 구성하는 제반 요소들의 문제를 검토하는 작업을 말하는 것으로,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1960년대 후반부터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2기 민요에 대한 음악학적 관심이 서양음악 작곡을 위한 것이었다면, 제3기의 경우는 민요학, 또는 한국음악학 자체의 논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민요의 음악학적 연구의 문제의식은 제3기에 들어서 제대로 설정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민요의 음악학적 연구가 본격화된 1970년대 연구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민요권 설정에 대한 것이었다. 한만영(1973), 이보형(1972), 권오성(1973) 등이 이같은 시각에서 작성된 결과물이다. 그러나 민요의 음악학적 연구는 198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이 다양해지고 작업의 양도 풍부해져 연구성과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 중에 여기서는 김영운(1987), 임미선(1992), 이소라(1998), 김혜정(1999)의 성과만 언급해두고자 한다. 다양한 성과를 고르게 다루기에는 형편이 알맞지 않기 때문이다. 김영운은 종래와 달리 다양한 채보를 활용함으로써 분석의 저변을 든든하게 하는 사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임미선, 이소라는 기존 연구물들과 다른 문제의식을 설정하여 민요학의 음악학적 논의의 장을 보다 넓게 확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소라와 김혜정은 현장론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논의를 진행함으로써 방법론적으로도 종래와 다른 면모를 보여 주었다. 민요의 비교연구는 우리의 것과 외국의 것을 견주어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 보는 작업이다. 이러한 시각의 연구는 제2기에 임동권(1960)이 있었으나 이어지지 못하다가 제3기에 들어 피천득·심명호(1971)을 거쳐 유재일(1986), 장정룡(1988)로 이어졌고, 이소라(1993)에 이르러서는 민요의 중심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농요를 비교하는 데까지 나아감으로써 민요의 국제간 비교연구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민요의 비교연구는 아직 그렇게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밖에 근간에는 새로운 방법론적 모색이 시도되고 있기도 하다. 계량적 연구가 그것이다. 계량적 연구는 되도록 많은 자료를 통계 처리하여 특정 국면의 동향과 의미를 읽어보려는 것으로서 강등학의 1997, 1999. 7, 1999. 11의 작업에서 이루어졌다. 이 중에 강등학(1999. 11)은 필자가 조사한 706편의 <아라리> 사설과 제보자 정보를 통계 처리하여 성과 연령에 따른 창자들의 정서적 양상을 파악하고자 한 작업이다. 이러한 시각의 연구는 상황의 전체적 조망과 정밀한 논의를 동시에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에 민요의 이해에 긴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 논의의 틀이 없이 사설 몇 편의 분석을 통해 전체적 양상을 쉽게 짐작해버림으로써 빚을 수 있는 오류를 상당 부분 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방법의 연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민요를 대상으로 한 논의는 내부적인 것도 있지만, 외부적인 것도 있다. 전자는 민요 자체의 이해를 위한 것으로 내부적 논의라고 하고, 후자는 민요 밖의 유관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으로 외부적 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민요의 외부적 논의는 내부적 논의와 달리 제3기에 와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현재 취급되고 있는 외부적 논의로는 민요교육론과 민요활용론이 있다. 전자에 대한 예로는 장영애(1983), 이동재(1993)을 들 수 있고, 후자에 대한 예로는 강등학(1999), 김삼진(1999)를 들 수 있다. 민요교육론은 고등학교까지의 학생들에게 민요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관한 방법과 요령을 다룬 논의가 주종을 이룬다. 장영애(1983)은 민요의 음악적 교육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이동재(1993)에 이르러 보다 구체적인 요령을 논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이처럼 민요교육론은 1980년대부터 시작되어,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보다 활기를 띠며 구체적으로 전개되면서 다양한 성과를 쌓아가고 있다. 민요활용론은 우리의 옛 문화를 자원 또는 소재로 삼아서 오늘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문제에 대한 논의이다. 강등학(1999)는 민요를 축제에 활용하는 것은 축제의 입장에서는 관광상품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고, 민요의 입장에서는 전승과 보존의 한 방책이 될 수 있는 것이기에 상호 유익한 것으로 보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과 원칙을 논하고자 하였다. 김삼진(1999)는 일노래인 <농산노동요>를 무대음악으로 변환시키기 위한 제반 문제를 다루면서 변환의 원칙을 마련하고 또 그 원칙에 따라 변환이 가능한 대상을 검토하였다. 그러나 민요교육론과 달리 민요활용론은 아직 활기있는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정리해보면 제3기의 민요연구는 1980년대 중반까지의 전기와 1999년까지의 후기가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제3기의 전기에는 민요학의 기초이론이 새롭게 마련되고, 또 각 연구범주의 선도적 논문들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후기에는 각 연구범주의 선도적 논문들을 바탕으로 여러 영역에서 지속적인 작업을 추구하여 각각 독자적인 연구범주를 구축하였다. 그런가 하면 제3기의 후기에는 새로운 방법론이 모색되고, 또 외부적 논의도 분야에 따라서 더욱 활기를 띠거나 새로운 작업이 전개되어 전체적으로 연구의 다각화를 이루어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제3기의 민요연구는 전기에 새로운 문제의식의 모색이 이루어지고, 후기에 그러한 모색의 결과가 뿌리내리는, 곧 모색과 결실의 순차적 상황으로 전개되면서 다른 한 편으로 미래를 예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요연구의 과제와 전망 192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는 동안 우리 민요의 연구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연구대상인 민요는 이와 반대로 존재환경을 잃으며 위축되어 왔으며, 지금은 전승이 사실상 단절되어 있는 상황에 이르러 있다. 그러면 이러한 환경에서 앞으로 민요학의 과제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그것은 민요의 전승상황과 관련하여 세 범주로 갈라서 생각할 수 있다. 현장이 남아 있을 때 해야 할 일, 현장의 유무와 관계없이 해야 할 일, 현장의 소멸 이후를 위해 해야 할 일 등이 그것이다. 민요의 전승현장이 다소나마 남아 있을 때 해야 할 일로는 자료의 확충과 현장론적 연구를 들 수 있다. 자료조사는 현장이 남아 있어야 가능하고, 또 현장론적 연구도 현장이 소멸되면 작업의 범주가 급격히 줄어들고 만다. 다음으로 현장의 유무와 관계 없이 해야 할 일은 기존의 연구들의 미비점을 보완하며, 아울러 새로운 연구방법의 모색이 꾸준히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민요학의 기술에 꼭 필요한 바이면서도 아직 연구가 활성화되어 있지 못한 문화사회학적 연구, 비교연구, 계량적 연구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현장의 소멸 이후를 위해 해야 할 일로는 민요교육과 민요활용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작업은 민요의 전승이 사실상 단절되어 있는 오늘의 상황을 극복하면서, 또 오늘의 문화와 호흡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는 일이기에 매우 중요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계, 문화계, 산업계 등의 민요에 대한 수요를 촉발하고, 또 각 영역에서 필요한 측면을 지원할 수 있는 바탕이론의 마련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민요학은 민요와 관계되는 모든 논의를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요학의 범주에 대한 연구자들의 감각도 다소 조정될 필요가 있다. 내부적 논의 중심의 범주감각으로는 현장이 없는 민요의 시대에 제대로 대응해 나가기 어렵다. 이제 민요학자들은 내부적 논의와 함께 외부적 논의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며, 양자를 모두 민요학이 감당해야 할 과제로서 인식해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민요학이 과거의 문제를 다루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의 문제와 보다 직접적으로 호흡하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민요연구의 현실적 의미를 증대시킬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