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50주년 특집/ 전쟁과 평화 |
사랑과 평화, 화해만이
삶의 유일한 보람이며 가치임을 선험적으로 깨우쳐 알고 있는 사람들 정 현 기(문학평론가, 연세대교수)
문학예술과 분노심 작가가 글을 쓰게 되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슬픔이기 쉽다. 슬픔이란 자아를 파괴하려는 못된 세력 타인에게 심한 상처를 입었거나, 모욕을 당해 존엄성에 심한 타격을 받았을 때, 마음에 고이는 마음의 병이다. 슬픔이 쌓이면 그를 그렇게 슬프게 한 대상에 대한 분노심이 일게 되고 이 분노심은 글 쓰기의 중요한 한 모티프가 된다. 분노심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정서이다. 그러나 그것은 꼭 개인적으로만 발생하지 않는다. 인간은 개인 속에 들어 있는 타인을 안고 살게 되어 있어서 남들의 슬픔을 보았을 때, 남들이 억울하게 손상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폭군이나 악당들에 의해 한 집단이 억압당하고 폭력에 시달리며 탈취 당하는 것을 목도하였을 때, 사회적 분노심은 극대화된다. 작가가 자아 속에 감추어진 힘으로 치미는 분노심을 바탕해서 작품을 쓰고, 인생을 재단하여 규정지으며, 슬픈 음색으로 이야기하고 웅얼거리거나 노래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문학의 정의이다. 인생의 슬픔을 찢어지는 가락으로 우는 '밤 꾀꼬리'를 시인에다 비유한 영국의 낭만파 시인 쉘 리가 읽은 작가의 운명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작가란 인간에게 슬픔을 가하는 분쟁과 갈등, 싸움과 폭력, 약탈과 살육을 미워하는 마음을 증폭시켜 지닌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랑과 평화, 화해만이 삶의 유일한 보람이며 가치임을 선험적으로 깨우쳐 일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 앞에 선 세계는 영 딴판이다. 그들을 포함하는 인간 내면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질투와 시기, 욕망과 파괴 본능으로 가득 차 있음을 지난 세기 동안에 우리는 너무 요연하게 보아왔다. 세계 제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치르는 동안 인간은 그저 욕망의 악귀일 뿐이며 호시탐탐 남을 노략질하려는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여러 실례들로 확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사실은 인간이 자신의 그런 성향에 대하여 아무런 반성도 자문도 없이 지나치고 마는 망각의 도구라는 것이었다. 악의에 무반응한 인간! 처참한 악행을 금새 잊어버리려는 나약한 동물! 인간은 언제나 악마와 동침하는 욕망의 악귀일 뿐일까? 프랑스에서 제작되어 유포된 폴란드 계 유태인 작가이며 ≪현대≫지 편집장 란쯔만이 만든 <쇼아(shoah)>라는 제목의 비디오를 나는 세 번 보았다. 원주 소재 [토지문화관]에서 30여명 문인들 초청 상영에서 한 번, 연세대학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대학원 학생과 교수 초청 상여에서 한번, 또 한번은 집에서 꼼꼼히 본 시간 여행이었다. 장장 11년 동안 아이슈비쯔에서 살아 남았거나 거기서 근무한 적이 있는 생존자들을 찾아 대담이라는 담론 형식의 영화를 만들어 낸 란쯔만의 집요한 정신은 인간의 괴물스런 모습을 재현하는 데 성공한 작품으로 나는 읽었다. 아홉시간 반 짜리 영상물에서 증언되는 이 담론 서사는 인간의 죄를 찾아 나선 일종의 율리시즈적 고향 찾기 여로였다. 하루 2천명에서 4천명 씩 치클린 가스로 570만에서 600만 여명의 사람들을 죽인 사실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행위는 야만스럽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오늘날 시를 쓰는 행위가 왜 불가능해졌는가를 설명하는 인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아도르노의 표현(《문학과의식》1999년 봄호, 이상빈, 문학과 수용소(1), 372쪽 참조)은 세계 제 2차 대전을 치르고 난 유우럽 지성사에 끼친 커다란 집단 상처에 대한 자문이고 성찰에 속한다. 인간은 그 존재의 인간됨으로부터 이처럼 참혹한 괴물성으로 변할 수도 있다. 인간 속에 내재한 잔혹성의 파괴력이 얼마나 무서운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 실례, 그것이 세계 양차 대전을 치루면서 확인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문학이 이런 인간 됨의 반도덕성을 먹이로 삼아 그것을 수시로 확인하여 인간에게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되 그 효과 문제는 차안의 부재사항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종잡을 수 없는 폭력과 욕망에 침식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문학의 그런 기능은 또한 상존할 밖에 없다. [쇼아]를 처음 보고 난 날 <토지문화관>의 논의에서 러시아 문학 전공학자들의 발표를 통해 우리는 러시아 문학 장르 속에 수용소 문학이라는 항목이 있음을 알았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라는 불후의 명작을 비롯하여 솔제니친의 [수용소열도]가 이미 서방세계에 알려 주었던 반도덕적 폭력의 문제가 문학의 주요 모티프임을 증거하고 있었고, 인간을 살해한 실례로는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기도에서 저지른 600여만 보다도 더 많은 1200만여 명에 이른다는 내용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쟁은 광기의 불꽃이다. 그렇다면 광기란 무엇인가? 신념(信念), 믿음, 그런 정신활동의 하나가 광기로 나아가는 통로임을 양차대전은 너무 뚜렷한 흔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양차 대전의 중심에서 또는 변방에서 죽고 죽임을 당한 세계인들의 상처를 외면한 채 동시대의 문학은 성립할 수조차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은 이런 인간의 광기 또는 신념, 이데올로기에 의해 움직이는 파괴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증언의 파수대이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문학 작품들이 이런 광기로부터 벗어나 평화롭게 사는 인류를 꿈 꾸는 소박한 소망을 기초로 해서 씌어졌던 것은 우리의 현실이 양차대전은 물론이고 그 모방의 잔혹한 악마성을 드러낸 일본에 의해 더욱 엄청난 크기의 집단 상처로 얼룩졌기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 꾸는 평화 꿈과 한국 현대문학 한국문학은 남의 나라를 침공하는 내용의 글 쓰기 보다는 남에게 짓밟힌 아픔, 국토방위의 괴로움을 다룬 글 쓰기가 주종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 이래 남의 나라를 빼앗거나 남의 나라를 쳐들어 가서 그 나라의 국보급 유물을 탈취 약탈하는 만행을 별로 져지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월남전에 참전하여 상당한 악명을 덜쳤다는 월맹 쪽 인사들의 숨겨진 담론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한국의 역사는 그렇게 커다란 영토 넓히기 전쟁을 치루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상고사가 형편없이 인멸된 현재의 역사 마당에서는, 상고사 당시에 요동 벌을 누비고 다닌 흔적이 있다고들 말한 역사가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모두 인멸되어 망각 속에 잠겼으니, 이 진술이 맞을 수밖에 없다. [임경업전], [박씨전]이 병자호란의 후유증을 다룬 작품이라면, [임진록], [사명대사] 등은 임진왜란을 다룬 작품들로, 당시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인한 한국 산야 생령들의 상처가 극심했던 내용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이야기 문학들이다. 인간은 때때로 악을 실행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악이 행한 뒷자리에는 언제나 상처가 남고 이 아픔의 흔적은 유전하거나 번져 전파한다. 전파된 내용의 아픔으로 또는 직접 옮아 아픔의 체험으로 겪은 내용들은 문학작품으로 남는다. 이야기의 어둠 속에서 이야기의 빛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아픔의 체험은 생산한다. 전쟁의 뒷 이야기 속에 평화를 갈망하던 인간의 꿈이 어떻게 숨겨져 있었는지를 우리는 역대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억은 짧은 시간 저편에 있는 것일수록 선명하다. 우리는 5-6-7-80년 시간의 저편에 동족 전쟁이라는 생생한 전쟁과 관련된 문학 작품들, 그리고 동족끼리 억압하여 죽이고 죽는 아픔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산 역사의 유산으로 많이 가지고 있다. 1930년대 소설들은 일본의 잔혹 체험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한국의 현대문학 작품들이다. 몇 선배 학자들이 일본제품 '근대문학'이라는 용어를 빌어 억지로 뜯어 맞추어 정리해 놓은 1930년대는 한국 현대문학의 중요한 작품이 산출된 시기였다. 염상섭의 장편 [삼대] 서술의 모양이 비록 가족사 소설 틀을 갖추고는 있지만, 그 중요한 모티프는 일본론이고, 본질적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다룬 아프고도 슬픈 이야기 문학 유산이다. 그는 중편 소설 [두 파산]에서 친일의 더러운 옷을 입고도, 광복이 되자, 살아남기 위해 변신을 계속하는 한국인의 천한 모습의 전형을 형상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복이 이루어진 마당에서 절룩이며 귀국하는 일본인들의 비굴하고 누추한 변신 도한 잘 드러내 보여 주었다. 전쟁은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하는 가장 악랄한 마당이다. 이 마당에 일단 들어서면 어떤 인간도 그 품위를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굶주림과 휴식의 결핍, 생활의 기초를 순식간에 거세하는 시간이 전쟁 공간으로 펼쳐진다. 전쟁의 시간은 결핍 공간이며 상실의 공간, 폭력으로 일체의 가치가 마비되는 공간이다. 대부분 아다시피 1930년대의 염상섭이나 이기영, 채만식 등의 작품이 일본론 아닌 것은 없다. 채만식의 [탁류]가 일본 놈들의 약탈과 침식을 그림으로써 그 아픔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것이 아니었던가? 전쟁은 본질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거나 아프게 하는 마성을 지닌 광기의 불꽃이다. 조명희의 [낙동강], 안회남의 [쌀], [철쇄 끊어지다], 김남천의 [맥], [경영] 등 월북했던 이상주의적 꿈을 꿈꾸던 작가들 작품들이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암담한 후유증을 다룸으로써 평화를 웅얼거린 작품들이었음은 이미 깊이 연구되어 알려진 내용이다. 웅얼거림. 인간의 속 꿈이나 소망은 자주 웅얼거림 속에 녹아 번진다. 1950년 6월 15일 한반도는 북한의 침공으로 전쟁상황으로 빠졌다. 이 글을 쓰는 나의 나이 10살 때였다. 전쟁을 직접 겪되 그것을 놀이처럼 바라보는 세대, 또는 순식간에 부모라는보호막 울타리를 송두리 채 잃음으로써 하늘 아래 홀로 서게 되어, 자아를 혼자 지탱해야 하는 저리고 힘겨운 절망 속에 빠지기 십상인 세대, 그런 세대에 전쟁을 겪었지만 그 험하고 막된 세기에 이루어진 아픔의 내용들이 결코 남의 것이 아니었음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이 1950에서 1960년대, 1970년대에서 다시 80년대로 나아가는 수난의 길목이었다. 최인훈의 [광장]이 쓰여진 것은 1960년도였다. 50년대 민족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의 피맺힌 형이상학과 그 한(恨)이 이처럼 웅장한 구도로 이야기화 한 것은 한국 현대 소설사의 커다란 행운이었다. 집단 아픔의 상처가 그만큼 컸었기 때문에 이 작품의 깊이도 또한 클 수 있었고 이야기 시야가 그처럼 클 수 있었다. 36년간 일본이 마련해 놓아 깊게 팬 한민족 상처의 후유증이 가장 확실하게 눈에 띄는 증거는 남북 분단이다. 동족이 신념의 차이로 갈려 반 동강이 난 것은 한민족의 문화와 지성, 생각의 틀, 학문의 인식범위 등 여러 단계의 형이상학적 정신 내용들이 반 동강 난 것이다. 최인훈의 [광장]은 이 아픔을 가장 깊이 있게 형상화 해 놓은 작품이다. [광장]의 이명준은 우리들 모두의 정신상황으로 지금도 우리들 내면 속에 생존하는 상처의 흔적이며, 통증이고, 뿌리칠 수 없는 분신이다. 1960년대에 쓰여진 한국 전쟁의 아픔 증언들은 최인훈의 [광장]을 필두로 하면서 그 바로 밑 세대 김승옥의 [생명연습], [건], [환상수첩], [염소는 힘이 세다]로 연결되어 이야기 문학의 유산을 풍성하게 하여 놓았다. 6.25 전쟁과 관련된 작가들의 작품을 거론하려면 아마도 몇 세대의 작가들을 세밀하게 들어야 할 지도 모른다. 하근찬이나 강용준, 오상원, 박경리, 다시 염상섭, 박영준, 유주현 등 전쟁 직접 체험 세대의 작가 작품들이 망라되려면 이 글의 내용은 아마 부실한 주마간산이 되기 쉽다. 전쟁은 아무리 은밀한 수단을 동원해 수행하더라도 인간사로 표면화할 수밖에 없다. 거기 참여한 사람들이 지닌 이야기의 어둠은 어떤 형태로든 <말 씀>의 빛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작가는 그렇게 떨어져 세상에 돌아다니는 어둠 속의 이야기들을 동족어 사용권 언어로 <이야기의 빛>되게 한다. 소설은 이야기의 한 빛이다. 그들은 악마가 이렇게 우리들 머리 위에 횡행하고 있었음을 알림으로써 선한 사람들의 행복한 삶, 평화가 인간에게 줄 즐거움을 꿈꾸게 한다. 작가란 근본적으로 평화와 행복을 꿈꾸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염하는 광기의 상처 장장 25년이 걸려 완성된 박경리의 [토지]는 한국 현대 소설사의 거대한 한 산맥이다. 그 드높은 경륜으로 읽은 일본론이며, 전쟁론, 한국인 운명론인, [토지]라는 문학사의 산맥 위에는 거대한 두 봉우리가 있다. 그 하나가 최인훈의 [광장]이라면 또 하나는 이문구의 [장한몽]이다. 이 작품 [장한몽]은 1970년대에 쓰여진 이문구의 장편 소설 [장한몽]은 우리 현대 소설 문학사에서 최인훈의 [광장]을 떠받드는 가장 든든한 뿌리의 아픔 증언의 작품이다. 박경리의 [土地]가 일본론이라는 방대한 이야기 언술 행위를 통해 인간의 운명을 점검하면서, 일본이라는 악(惡)의 실체를 밝혀 후인들에게 거울로 내 보인 작품이었다면, 최인훈의 [광장]은 그들의 죄악이 잠복하여 한반도에서 벌이는 악마들의 게임을 절묘하게 형상화하여 놓은 작품이다. 그러면 현대 한국소설사의 높은 또 한 봉우리 [장한몽]은 무엇을 보여주려 한 이야기의 빛이었을까? 그는 인간의 삶을 두 도막으로 나누어 삶과 죽음이라는 형식으로 읽고 있다. 삶과 죽음은 떨어져 존재하는 형식이 아님을 그의 소설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픔이라는 반죽음 형식의 현상이 끼어 있음을 사람들은 모두 잊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죽음과 삶의 틈새에는 아픔이라는 형이상적, 형이하적 형식이 언제나 존재해 왔다. 이문구의 [장한몽]은 한민족이 동족전쟁을 치르면서 만들어 놓은 형이상·하적 상처, 아픔의 지형도를 <말씀의 빛>형식으로 이야기한 예술품이다. 그의 작품 속에 살고 있는, 줄여서, 세 인물들은 모두 현재 살아 있되 온전히 살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이 죽었다고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인물들이다. 이 작품 제 1 주인공이자 화자 김상배, 그리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 황승로를 삽으로 때려 덜 죽인 상태로 땅에 묻어버린 구본칠, 그리고 남자(男子系) 절멸의 가계운명 누명을 뒤집어 쓴 채 평생을 죽은 인생으로 치부하며 살아온 스물 아홉 살 먹은 노처녀 최미실(崔美實), 이 세 주인공은 처녀 최미실만 빼고는 한민족에게 집단 상처를 입힌 동족 전쟁을 그 원인으로 하고 있다. 전쟁은 그것이 어떤 원인을 하고 일어났든지 간에 인간의 인간 됨을 마비시키는 광기를 발휘한다. 살육, 고문, 말 막이 매질, 갖은 방법으로 모욕주기 등 못할 짓이 없다고 믿도록 만드는 것이 전쟁이라는 용광로이다. 화자 형 김상부가 경찰들을 고문하다가 전세가 뒤집혀 고문 경찰에게 당하는 고문 내용은 상상을 초절한다. 벤치로 열 손가락의 손톱을 뽑고, 바른 말로 항거하자 혓바닥을 잘라내어 피투성이로 만들어 놓은 일, 그 변심한 애인 귀대, 이미 인민군의 애를 밴 상부의 첫 여자를 맛 대면하여 놓고 상부의 성기를 잘라 '그녀 국부에 서류 엮을 때 쓰는 송곳을 써가며 고문,' 쑤셔 넣은 만행을 경찰취조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내용이 이 작품 [장한몽] 속에는 생생한 음색으로 살아 있다. 그래서 그들, 그 아픔에 전염된 채 살아남아, 겨우 생존을 부지하는 인물들은 유령처럼, 몽유하는 삶을 떠돌며 살고 있었다고 [장한몽]은 증언하고 있다. 언제나 아픔은 전염한다. 그리고 전쟁은 아픔의 집단 생산력을 지닌 악마의 장난에 속하는 광기이다. 작가가 평화를 꿈 꾸고 전쟁을 일으키는 악마의 마성에 저항하는 꿈꾸기 일종이 작품행위라고 읽을 때 우리의 현대문학에는 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아픔의 지형도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아픔은 누구나 피하고 싶어하는 감각 상태이고 죽음을 인지케 하는 징후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을 기죽인다. 작가는 매번 남 앞에 나서서 이 아픔을 이야기하고 아픔을 유발한 전쟁을 혐오하게 하는 평화의 증인으로 존속한다. 그들은 아픔이 인간의 죽음을 알리는 틈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아픔의 궁극적 형식은 죽음이다. 작가가 혐오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하는 해악이다. 전쟁이 악인 이상 작가들에게 멸시받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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