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과 여행의 만남 1/ 백제의 고도 부여

자연, 역사, 문학이 만나는 테마여행의 즐거운 상상

 

 강진호( 문학평론가, 성신여대 교수)

장마의 초입이었지만 그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맑았다. 남북 정상이 평양의 하늘 아래서 만난 감격이 천지를 진동하는가 했더니,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의사들이 일제히 병원을 비우고 진료를 거부하는 사상초유의 의료대란 사태가 신문지면을 온통 도배하던 날이었다. 버스는 혼동스러운 도시를 뒤로 하고 백제의 고도를 향하여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신동엽 시인의 서사시 「금강」을 다시 읽는다. 소백산맥 밑에서 뻗어 나와 충북 남서부를 거쳐 충남을 남서 방향으로 관류하다가 강경에서부터 충남·전북의 도계를 이루면서 마침내 군산만으로 굽이쳐 흘러드는 강, 숱한 지류를 한 데 모아 흐르며 마침내 바다로 향하는 금강에서 역사와 민족을 읽어내었던 시인의 맑은 시혼은 대하의 흐름이 사라진 현실의 지리멸렬함 속에서 우렁차고 장엄하다. 분단이 깊어지면서 희미하게 묻혀가던 통일의 화두가 어느 순간 죽비처럼 우리를 내리친 것처럼, “껍데기는 가라”던 시인의 외침이 산사의 범종소리와도 같이 순간 또렷이 들려오는 듯하다.

부여는 내게 시인 신동엽의 고향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 때가 96년도니 벌써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그 해는 ‘문학의 해’였고 나는 ‘작가의 생가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문화예술」지에 글을 연재하고 있었다. 내 탐방지 목록에는 분명 부여도 있었다. 그런데 바쁜 일정 속에서 신동엽 시인 생가 탐방계획은 자꾸 유예되었고, 그나마 12명의 작가라는 제한된 정원에 묶이다 보니 부여에 이르기 전에 연재가 다 끝나고 말았다. 부여는 몇몇의 또 다른 미답지(未踏地)들과 함께 꼭 가봐야 할 아쉬운 지명으로 내내 기억 속에 머물러 있었다.

차창 너머로 ‘우금티 길’이라는 표지판이 스친다. “우금티, 무너미 황토고개엔 지금도 간간이 밭 매다 뼈마디 추려내는 일 있다.”(「금강」, 21장) 버스는 공주와 부여를 잇는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동학년의 아우성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꺽이면서 주검들 또한 그대로 묻혀버린 그 우금치 길이었다. 현지에서는 우금치가 아니라 우금티로 표기되어 있다. 백년 전의 역사를 아는 지 모르는 지 길가를 따라 개망초꽃들은 무리지어 서 있는 흰 옷 차림의 사람들처럼 사방에서 환하기만 했다. 부여는 먼 곳이 아니다. 서울 남부 터미널에서 3시간도 못 되는 거리이다. 국토의 한 중심에 놓여 있어서 전국의 어디에서도 가까이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떠나기 전 날 인터넷의 검색 엔진 심마니에 ‘부여’를 입력하자 놀랍게도 많은 사이트들이 떠올랐다. 개중에는 개인 홈페이지를 온통 부여에 대한 소개로 채워 놓음으로써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소리 없이 드러내는 사이트들이 있는가 하면 출발지를 입력하면 코스를 소개해주고 한 두 시간 또는 반나절, 하루 코스 등으로 나누어 친절하게 여행을 안내해주는 전문 사이트까지 생겨나 있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여행사나 책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부여 가는 길을 만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신동엽의 시세계를 잉태시킨 조용한 고도

부여 버스터미널에 내렸을 때 낡은 건물 안쪽의 어둡고 칙칙한 벽면에 액자처럼 붙은 인물사진이 눈에 띄었다. 신동엽 시인의 사진인가 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홍사준이다. 홍사준은 유물 발굴과 백제 문화 소개에 큰 업적을 남긴 향토사학자이자 시인으로 이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고, 사진 옆에는 그의 시가 같이 소개되어 있었다. 읍내에는 생가와 시비가 있다. 홍사준과 함께 신동엽, 정한모 시인은 모두 부여가 내세우는 인물들이자 자랑거리라 할 만하다.

저만치 계백 장군 동상이 있는 사거리 못 미치는 길목에 ‘시인 신동엽 생가 70미터’라고 쓰인 표지판이 우뚝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난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니 주변 인가와는 다른 기와 담장과 기와 대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니 어찌된 셈인지 나무 대문 바깥쪽으로 자물통이 걸려 있다. 키 돋음을 하여 담장 위로 치솟은 석류나무 아래 놓인 사랑채와 문틈 사이로 비치는 안채를 기웃거리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시인이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낸 이 집은 주말이면 대학생 등 답사객들의 발길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관리인도 있다고 들었는데 평일이어서인지, 아니면 관리상의 다른 문제가 있어서인지, 이날은 문을 닫아 놓았다.

부여는 조용한 고도(古都)였다. 옛 이름은 사비, 또는 사부리. 지금도 읍내엔 사부리라는 간판을 단 가게가 있다고 들었다. 사비성 터 안에 자리잡은 부여는 동서남북 유적지 아닌 곳이 없다. 한 때 복고주의로까지 오해를 받던 신동엽의 시세계가 이런 태생지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점차 확연하게 느껴진다. 생가를 나와 향하는 곳은 북쪽이다.

 도보 20분 거리에 놓인 부소산성. 시인은 “부소산 낙화암 / 이끼 묻은 바위서리 핀 / 진달래”에서 궁녀들의 사랑을 읽었고, 숨결을 들었고, 손길을 만졌다고 했다. 시인의 걸음을 따라가는 양 유적지를 밟아나간다. 마흔을 앞두고 세상을 등진 신동엽의 생애는 민족의 수난사와 일치했다. 일제치하에서 났고 빈곤의 유년시절을 거쳤으며 전쟁을 경험했다. 그는 대학생이었던 동란 시절에 1년 동안 충남 일대의 백제 사적들과 갑오농민전쟁의 전적지를 답사한 적이 있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서 중대한 경험으로 기록된다. 이를 통해 얻은 역사의식이 뒷날 서사시 「금강」을 비롯하여 「껍데기는 가라」와 같은 일련의 시들을 낳는 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에서

북쪽에 있는 부소산을 중심으로 강이 읍을 활처럼 에워싸고 있다. 천연의 요새지라 할 만한 이런 요소가 백제 성왕으로 하여금 웅진, 즉 지금의 공주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기게 한 모양이다. “내 고향은 / 강 언덕에 있었다. (…) 지금도 /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신동엽의 「사월은 갈아엎는 달」), 산성을 타고 올라 절벽에 이르는 길을 시인은 그 언덕길이라 말한 것이 아니었을까. 금강의 천리 물길은 동학군의 함성이 깃들어 있는 곰나루를 스쳐 공주에서 부여, 옛 백제 땅의 한복판을 흐르다가 이곳에 이른다. 부소산 건너편 상류쪽 천장대 앞 범바위에서 남쪽 하류인 파진산에 이르는 금강이 곧 ‘백마강’이다.

낙화암 절벽 밑으로 강은 깊고 강 건너편으로 흰 모래톱이 여기저기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백마강 또는 사비강은 백제의 한이 맺힌 강이다. 678년이나 이어져 온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을 목격했으며 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삼천 궁녀가 꽃처럼 떨어져 내린 곳이 이 강이었다. 마한, 백제의 세월을 거쳐 수천 년 흘러온 강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역사였다. 저 강물 속에 민족의 갖은 풍상이 무늬져 흐르고 있는 것을 안다면 왜 조명희에게서 「낙동강」이 나오고 안수길로부터 『성천강』이 나왔는지를, 그리고 신동엽의 「금강」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떨어져 죽은 바위, 타사암(墮死岩)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낙화암(落花岩)’은 40미터 높이의 절벽이었다. 배를 타고 강 쪽에서 보면 절벽 밑으로 낙화암이라고 쓰인 서체가 보이는데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라 했다. 절벽 위에 얹힌 정자, 백화정 근처에 이르면 절벽 쪽으로 놓인 암석이 페인트 물감을 떨어뜨려 놓은 것처럼 부분부분 붉다. 들여다보니 분명 물감이 아니라 암석의 빛깔인데 핏자욱처럼 암석 윗부분만 불그레한 것이 기이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궁녀들이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쏟은 핏자국이라는데 그럴 듯하다. 그것이 피라고 믿으며 그 사무친 한을 기억해주고 넋이라도 위로하고 싶은 옛 선인들의 마음이 저런 슬픈 전설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정자가 올려다 보이는 길 어귀에 “사자수 내린 물에 석양이 빗길제 (…)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낙화암) 춘원(春園)의 시 한 수가 새겨진 비석이 서서 이곳에 들른 나그네들의 발길을 잠시 세운다. 부소산성 안에는 삼천 궁녀의 넋을 기리는 궁녀사가 있다. 백제의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의 신위를 모셔놓은 삼충사가 그 아래 있다. 모두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현대에 와서 지어진 사당들이다.

낙화암에서 내려와 고란사에 이르렀을 때다. 고란사라는 절 이름은 절 뒷곁 암벽에 자라고 있는 고란초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고란초는 양치류에 속하는 은화식물인데 제주도에서는 불로초로도 부른다는 것이다. 나는 불현듯 숨은 기억을 하나 찾아낸다. 신동엽이 남긴 산문, 「금강잡기(錦江雜記)」에 나오는 강가의 “백제 패망시의 애절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조그만 고찰”이 고란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시인이 살아 있던 60년대의 어느 날 새벽 부여읍에 난데없이 뇌성벽력이 쳤다가 곧 가라앉았다고 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차에 믿을 수 없는 얘기가 전해졌다. 고란사에 젊은 여승 셋이 찾아들어 조용히 묵다가 새벽에 바랑 주머니에 조약돌들을 가득 담아 매고 일렬로 늘어서 강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는 것. 그걸 우연히 마을 사공이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 청천벽력 같은 뇌성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졌다가 곧 가라앉았다는, 전설 같은 얘기지만 실화였다. 저 말없이 흐르는 강물 속에는 삼천 궁녀의 죽음뿐만 아니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저 여승들의 불가사의한 죽음을 포함한 온갖 사연들이 함께 묻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강이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고분일 지 몰랐다.

 역사의 무게를 지워내고 강만 본다면 백마강은 그저 범상한 강일 뿐이다. 부유물들이 떠다니는 강물은 조금 민망하기까지 하고 강 건너 풍광은 빼어난 절경과는 거리가 있다. 강 건너는 지도상으로 보면 ‘백제 역사 재현단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었지만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평이하기만 한 것이었다. 강변에서 부소산성을 잇는 입구의 ‘고란사(皐蘭寺)’ 또한 실제로 보면 지극히 작고 평범한 절이다. 그러나 오래되고 낡은 것에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면 그것은 보물이 된다. 보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무형의 보석으로 닦아내는 일은 분명 후손들의 몫이었다.

 부소산성에서 내려와 선착장에서 함께 배에 오른 이들은 모두 일본인관광객들이다. 시골 할머니들처럼 소박한 행색의 일본 노인들이 뱃전에 줄줄이 앉아 낙화암 쪽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의 행동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과는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 터미널 근처 식당에서 한 번 마주쳤었다. “사요나라.” 식당주인이 문 앞에 서서 식사를 마치고 가는 이들을 일일이 환송을 하는데 관광단이 타고 온 버스를 보니 서울 김포공항에서 직행한 관광버스였다. 왠지 그들이 단순히 볼거리를 찾아 물을 건너온 관광객으로 비치지 않는 것은 일본과 백제 간에 얽혀있는 특별한 인연 때문일 것이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무너져가고 있던 백제에 군선 1000여척을 출항시켜 백강지구전투라는 국제해상전을 벌일 만큼 당시 일본과 백제는 긴밀한 관계였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일본에서 살았다는 사실, 큐슈의 미야자키현에서 백제왕족의 고분이 발견되었다는 것 등은 일본과 백제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수많은 사례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백제멸망사와 관련하여 흥미 있는 대목은 최초의 의병운동이라 할 수 있는 백제 부흥군을 기리는 ‘은산 별신제’가 14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 부여 은산 지방에 전염병이 번졌는데 백약이 무효였다. 그런데 이 마을에 사는 노인의 꿈에 철갑옷을 입은 한 장군이 나타나 자신은 백제를 지키는 장군인데, 그곳이 나라 광복을 위해 죽음을 맹세하고 싸운 곳이라 했다. 많은 병사들의 원한 맺힌 시체가 어지럽게 묻혀 있으니 유골을 수습해주고 제사를 올려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제사를 올리자 전염병은 사라졌고, 장군과의 약속은 오늘까지 지켜지고 있는데, 그것이 ‘은산 별신제’였다.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후에도 백제 유민들은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다가 하나씩 쓰러져 간다. 나라는 사라졌으나 백제 유민들은 멸망을 인정하지 않고 무속신앙을 통해 그 마음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백제 부흥군의 넋을 위로하는 제례가 일본의 한 지방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갖게 한다.

 일본인 관광객들은 ‘구드레 나루터’에 내리자마자 바로 버스에 올랐고 또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들은 백제의 전설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닐까. 그들이 여기서 무엇을 읽고 갈까 궁금했다. ‘구드레 나루터’는 국민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는 중이다. 강가에는 활터가 있고 환하게 트인 주위에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배낭 여행객을 위한 유스호스텔도 조각공원 바로 옆에 있다. 조각공원 옆에 “백마강 고요한 달밤에 고란사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귀에 익은 그 가요를 새겨놓은 비가 세워져 있는데, 조금 떨어져 대학생들이 농민해방, 농업사수라고 다소 투박한 필체로 새겨 놓은 바윗돌 하나가 옆에 선 채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구드레 나루터와 함께 백제 무왕의 출생 설화가 깃들어 있는 남쪽의 ‘궁남지(宮南池)’도 서동요비가 세워진 뒤편의 언덕을 깎아 유적지를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현재의 궁남지는 연못 가운데 만들어진 인공섬 한 가운데 포룡정이 있어 고풍스러운 풍광을 자아낼 뿐 주변이 아직 정돈되지 않아 조금은 휑한 느낌을 준다. 입구에 세워진 ‘서동요비’에 의하면, 이 못가에 살던 과부가 못 속에 사는 용과 사랑하여 낳은 이가 서동이다. 나중에 무왕이 된 서동이 선화공주를 유혹하기 위해 만든 ‘서동요’ 전문이 비석의 앞면에 적혀 있다.

“善花公主 主隱 他密只嫁 良置古 薯童 房乙 夜矣卯乙 抱遣去如(선화 공주님은 맛동방을 남 그윽히 얼어두고 밤에 안고 간다)”

한편으로 포룡정이 보이는 궁남지 가에 세워진 비석에는 궁남지가 백제 무왕 때 궁의 남쪽에 못을 파서 물을 채우고 만든 왕궁의 정원이라고 되어 있어 탄생설화의 못과 나중에 무왕이 세운 못이 구별이 안 되는 모호함이 느껴진다. 아무튼 궁남지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연못이고 삼국 중에서도 백제가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뛰어났음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사적인 것만은 틀림없다.백제의 숨결 회복하길…

근래에 조성된 조각공원과 더불어 ‘백제 역사 재현단지’의 대역사, 궁남지의 옛 궁궐 복원 현장 등을 보건대 조용한 고도가 소리 없이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라의 고도 경주가 정책적 지원을 토대로 관광 자원을 개발해냈듯이 부여는 최근에 공주와 함께 새로운 관광단지로 개발되고 있는 중이었다. 단순히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유원지 창출이 아니라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유적지의 복원이라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파면 백제 기왓장 나오는 부여 군수리”(「금강」5장 중에서)라더니 부여는 옛 사비성 터에 자리한 지라 지금도 땅을 파면 백제 기왓장 나오는 일이 흔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능산리 고분’으로 가는 중에 택시 기사한테서도 똑같은 말을 들었다. 그는 이곳에선 건물을 지으려 해도 제한이 많아 5층 이상 올리기가 힘들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생활의 터전 삼아 살아가지만 그 땅 밑에는 아직도 많은 유적들이 잠든 채 있다. 능산리 고분 옆에서 백제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금동대향로’가 나온 것이 1993년이다. 그리고 1995년에 그 옆에서 또 다른 절터가 발견되었다. 이런 식의 발견이 있을 때마다 역사는 새로 쓰여지는 것이니 백제의 많은 것이 아직 베일에 묻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오지 않습니까?” 물었더니, “여행사에서 아무래도 경주 쪽으로 많이 데려가지요.” 현지인의 고충을 담은 말이 되돌아온다. 이것은 학생들의 수학여행 대상지가 대개는 경주인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그도 공주와 부여를 연계한 관광사업의 개발에 관심을 가지면서 앞으로의 전망에 기대를 갖는 눈치였다. 역사의 공기, 백제의 숨결을 회복하는 데에 부여가 갖는 정체성이 있고 이 정체성을 기반으로 지역경제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노력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인터넷에 ‘사비 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부여군에 자리잡은 여러 상점들을 지도와 함께 옮겨 놓은 것을 그 택시기사가 아는 지 궁금했다. 부여의 여러 특산물에 대한 정보도 제공해 주고 관광 지리 정보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곳의 날씨까지를 알려주는 사이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백제권을 상권으로 잡고 백제와 바다, 백제와 산, 백제와 벚꽃과 같이 자연과 연계하여 테마여행을 기획해서 여행객의 발길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도 있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기획은 그저 ‘백제’의 이름만을 비는 여행상품으로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좀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접근한다면 역사를 체험하는 여행이라는 심화된 주제의 테마여행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신동엽의 ‘금강’을 따라가며 서사시 ‘금강’의 해설을 듣는다

최근에 서울지역의 문화센터에서는 유적지 답사 형식의 테마여행 상품이 많이 기획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런 테마여행 상품은 어느 만큼의 문화적 소양을 갖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그 세부적 내용이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백제와 바다, 백제와 산에 이어 백제와 갑오농민전쟁, 백제와 시와 같은 주제의 상품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가령, 문학을 주제로 해서 신동엽의 ‘금강’을 따라가는 길이 있다. ‘신동엽 생가 → 부소산성 → 시비 → 곰나루’로 이어지는 길을 밟으며 백제시대부터 동학년, 4·19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며 전문 가이드의 입을 빌어 서사시「금강」에 대한 해설을 듣는다는 상상을 해본다.(문학 전공자가 아니라 일반 가이드에 의해서 말이다) 자연과 문학과 역사가 한 접점에서 만나는 기가 막힌 순간이 되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다. 이런 상상은 그래도 즐거운 상상이다. 이왕 시작했으니 이런 상상도 해 본다. 이곳을 둘러볼 수 있는 투어 버스를 만드는 일이다. 정류장 이름은 다음과 같다. ‘정림사지 앞, 신동엽 생가 앞, 낙화암으로 가는 길목, 궁남지 앞, 홍사준 시비 앞’ 반듯하게 정리된 길에 붙은 이름은 어떨까. ‘계백장군 길, 황산벌 길, 서동요길’ 단순히 백제의 고도라는 간판만 내걸 것이 아니라 뼛속까지 역사와 문화의 공기가 스며들 수 있는 간판이라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외국의 어떤 명승지에서는 평범하게 생긴 언덕 하나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여행객이 몰려든다. 또 유명 가수가 태어난 미국의 어떤 고장은 이미 작고하고 없는 그 가수의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전 도시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발 딛는 모든 것이 유적이었다.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갈고 닦아 놓으면 누구든지 자꾸 찾아와 들여다보고 무언가를 배우고 가려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의 부여는 발굴이 된 후, 조금씩 옛 모습을 복원해 가는 유물들의 형상과 비슷한 지 모른다. 백마강을 따라 내려가다 백제대교 근처에 이르면 ‘신동엽 시비’를 만날 수 있다. “그리운 그의 얼굴 / 다시 찾을 수 없어도 / 화사한 그의 꽃 /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 맑은 그 숨결 /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산에 언덕에」중에서) 비문에 새겨진 시는 애틋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마흔을 앞두고 병을 얻어 세상을 등졌다. 그가 살아 있으면 이 시대를 어떻게 노래했을 지 궁금하다. 시인은 없지만 그의 시는 살아서 저 흐르는 백마강과 함께 여전히 흐르고 있다. 또한 백제는 멸망했지만 그 유적들은 여전히 남아서 오래 전 이곳에 존재했던 사비 시대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백제의 고도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길인데 문득 한 젊은이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글귀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부여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다른 유적지를 돌아보듯이 다녀간다면 부여는 단지 조용한 소도시에 불과하다. 부여에 오면 백마강이 보이는 부소산의 중턱에 앉아 백마강 너머로 지는 해를 지켜 보라. 거기서 숨겨진 부여가, 그리고 백제가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