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평론/ 평론의 본질을 말한다. 2 문학 |
언어와 위기의식, 그리고 문학비평 장경렬(문학평론가, 서울대교수)
문학작품의 존재양식과 비평 작가나 시인의 창작 행위와 문학 비평가의 비평 행위 사이에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작가나 시인의 창작 행위에서 일차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 세계라면 문학 비평가의 비평 행위에서 일차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작가나 시인이 창작해 낸 문학 작품이라는 점에서 양자의 행위는 범주를 달리하는 작업이라는 사실에 초점이 맞출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나 시인의 창작 행위 역시 주어진 세계에 대한 비평적 이해를 지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작업과 비평가의 작업이 근원적으로 다른 것일 수는 없다. 말하자면, 일차적 관심 대상이 다르더라도 지향하는 바는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비평(criticism)이란 무엇인가. 이는 넓게 보아 위기(crisis)에 직면하여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모든 시도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crisis’와 ‘criticism’이 동일한 희랍어 어원을 갖는 개념임에 유의하기 바란다.) 따라서 문학 비평가뿐만 아니라 작가나 시인에게도 위기를 의식케 하는 상황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동의어 반복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작가나 시인에게 위기를 의식케 하는 것이 그들이 몸담고 있는 현실 세계라면, 비평가에게 위기를 의식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작가나 시인이 창작한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나 시인이 창작한 문학 작품이 어떤 면에서 문학 비평가에게 위기의 원인인가. 물론 이를 파악하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지극히 일반화하는 경우 문학 비평가에게 위기를 의식케 하는 것은 바로 문학 작품의 존재 양식이다.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긴 하지만, 문학 작품은 언어 텍스트로 존재하며, 따라서 비평가의 위기의식은 바로 이 언어 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운데 구체화 되기 시작한다. 아니, 언어 텍스트로 들어가 언어와 만나는 가운데 비평가의 위기의식은 구체화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작가나 시인이 현실세계로 들어가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겠지만, 비평가가 문학 텍스트에 들어가 언어와 만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언어 텍스트로 들어가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작가나 시인이 ‘현실 세계로 들어가는 일’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일이 아닌가. 작가나 시인이 잠에서 깨어 세상사로 들어가듯이 비평가도 의식의 잠에서 깨어 문학 텍스트로 들어가면 되는 일이 아닌가. 물론 이와 같은 수사적 표현에서 현실 세계와 언어 세계는 동일한 차원의 것일 수 있다. 아울러, 우리의 관념과 의식 속에서는 현실 세계와 언어는 동일한 것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내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의 한계”라고 했을 때, 세계에 대한 인식이 곧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 또는 세계는 곧 언어적 심상(心象)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고, 이런 점에서 현실 세계는 나에게 곧 언어적 실체일 수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볼 때 언어와 현실세계는 결코 동일한 것일 수 없다. 예컨대, ‘현실 세계 속의 사과’는 누군가가 직접 깨물어 먹을 수도 있지만, ‘사과라는 언어 기호’를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이처럼 언어와 현실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인 양 ‘의식’될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요컨대, 언어는 현실 세계와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같은 것인 양 착각하게 한다는 데 문학 비평가의 근원적 위기 의식이 존재한다. 그 위기 의식이 문학 비평가에게 의식적인 것이든 또는 무의식적인 것이든 상관없다. 문제는 구체적으로 언어의 어떤 측면이 문학 비평가를 근원적 위기 의식으로 몰아가는가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언어란 이념적으로 순수한 중립적이고 투명한 실체가 아니며, 의미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가 불러일으킨 환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데리다(Derrida)의 어투로 말하자면, 언어는 ‘언제나’ 그리고 ‘이미’ 순수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현실 세계와 현실 세계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다시 말해, 무언가의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를 숨기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스스로를 신비화하는 것이 언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화를 특히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있다면 이는 바로 문학의 언어이다. 과학의 언어가 현실이나 인간의 삶이 갖는 섬세한 측면을 담기에는 지나치게 일반화되어 있고, 철학의 언어가 진술이 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에는 지나치게 관념화되어 있고 추상화되어 있다면, 문학은 인간의 삶이나 현실에 대한 섬세하고도 예민한 반영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바꿔 말해, 문학은 언어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장치로서, 언어의 세계에서 일종의 특권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요컨대, 문학을 신비화하는 것이 다름아닌 문학의 언어인 것이다. 이 신비화된 언어 앞에서 문학 비평가는 의식의 차원에서든 무의식의 차원에서든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언어의 신비화와 문학비평의 과제
사실 우리의 논의 자체가 언어라는 개념을 신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려울지 모른다. 이런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정체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데, 우선 우리는 언어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전혀 없는 투명한 언어의 존재를 가정해 볼 수 있다. 만일 그러한 언어가 존재한다면, 바로 그 언어를 통해 현실과 현실에 투영된 삶의 진리는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따라서 언어의 신비화란 또 하나의 허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언어가 존재할 수 있을까. 투명한 언어의 존재에 대한 회의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삶의 진리가 자신의 편에 있다고 주장하거나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그가 명석한 두뇌와 빈틈없는 논리의 소유자라서 완벽하게 누군가를 설득시켜 이를 상대에게 받아들이도록 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에 의해 설득된 상대방이 받아들인 것은 과연 진리일까? 이 물음과 관련하여 우리는 양쪽 입장이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설득’이라는 표현이 마땅치 않다면, 삶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누군가가 상대에게 그 진리를 문자 그대로 ‘전이’(轉移)했다고 가정해 보기로 하자.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여기에서 우선 수용자의 경우를 문제삼기로 하자. 누군가에게 설득된다는 것은, 그것이 유혹에 의한 것이든 증거에 의한 것이든 태도나 믿음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진리가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전이’되는 과정일 수는 없다. ‘설득’의 언어란 본질적으로 수사적 언어로서, 이른바 진리를 ‘전이’하기 위한 투명한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수사적 언어가 철학의 언어 또는 진리의 언어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철학의 언어 또는 진리의 언어의 투명성에 대비되어 수사적 언어의 불투명성이 문제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철학의 언어 또는 투명한 진리의 언어가 따로 있을 수 있는가에 있다. 이 같은 언어가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는 손쉽게 부각시킬 수 있는데, 철학의 근원으로 일컬어지는 소크라테스가 과연 투명한 언어의 소유자였던가를 묻는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수사학자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을 논박할 때 이른바 문답법이란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가 문답법을 통해 구사했던 언어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의 문답은 바로 수사적 언어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그는 이를 소피스트들을 ‘설득’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설득이 무언가 미덕을 지니고 있다면, 그의 설득이 유혹에 의한 것이 아닌 증거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답법은 여전히 진리의 ‘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피스트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요컨대, 누군가가 진리를 정말로 소유하고 있더라도, 그 진리를 믿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전이’할 수는 없다. 믿음을 벗어나서 진리를 전달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논의의 초점을 진리가 자기편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돌려보자. 우리는 먼저 그에게 진리가 정말로 당신 편에 ‘있는가,’ 아니면 ‘있다고 믿는가’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 그가 나의 믿음에 선행하여 진리는 진실로 나의 편에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하자. 이런 답변에 듣고 그에게 그렇게 믿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다고 하자. 그가 만일 신비주의자이거나 종교적 영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마도 그는 이러저러한 타당한 방법에 의해 진리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그 방법의 타당성을 ‘믿기’ 때문에 타당한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믿음과 관계없이 타당한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타당성이 자신의 ‘믿음’에 선행하여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논리를 전개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논리 자체가 그 자신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앞선 질문에 우리가 “그렇게 믿게 된 이유”를 묻듯이. 바꿔 말해, 진리가 자기편에 있다는 투의 주장은 다만 ‘믿음’에서 나온 것일 뿐이며, 그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도 역시 하나의 ‘믿음’일 뿐이다. 만일 논리학에서 말하듯이, 그의 믿음이 ‘참’된 것이라면 그의 ‘믿음’은 진실로 ‘진리’일 것이다. 즉, ‘참된 믿음’은 곧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일단 논리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경우 ‘참된 믿음’이 무슨 이유로 ‘참된 믿음’인지 증명해야 하나, 이를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역설적으로 다시 ‘믿음’의 세계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실제 세계에서는 이와 같은 희화화(戱畵化)된 질문과 응답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가정해 봄으로써 우리는 진리의 객관성은 주관적으로 결정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국의 비평이론가인 스탠리 피쉬(Stanley Fish)가 {이번 학기 강의에 정해진 텍스트가 있나요?}에서 “누군가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믿는다면,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는 것이며, 자신이 믿고 있지 않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믿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아무도 믿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을 상기시키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믿음도 믿음으로 의식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믿음의 ‘옳음’에 대한 믿음 그 자체가 제기 가능한 모든 문제가 제기되기 이전에 이미 그 문제들을 무화(無化)시키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언어 행위란 본질적으로 ‘믿음’ 또는, 좀 더 일반화된 표현을 사용하자면, ‘이념’(이데올로기)의 바탕 위에 구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대나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문제시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이념을 통해 진리라는 환상이 싹트게 된다. 이념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그 이념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결코 관찰이나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바꿔 말해, 이념이란 문제삼는 것이 금기시된 믿음과 같은 것이다. 물론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 뒤돌아보는 경우, 이념의 정체는 드러나게 되고, 그 이념에 의해 구축된 가치의 주관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념이란 마치 공기와 같은 것이어서 보이지도 않고 전혀 의식되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 이를 제거하는 경우 인간은 삶의 방향성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앞서 암시한 바 있지만, 시대의 이념을 보이지 않게 하고, 그리하여 이념이 이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요컨대, 이념의 존재 가능성을 좌우하는 능동적 요인이 언어인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에게는 언어의 속성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볼 것이 요구되는데, 무엇보다도 언어를 통해 제시되는 모든 의미는 ‘허구적’인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언어는 나름의 질서와 체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때의 질서와 체계는 실제 세계의 질서나 체계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언어를 통해 세계를 제시하는 경우, 이때 제시된 세계는 실제 세계가 아니라, ‘허구적’인 진술의 세계라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언어를 통한 세계의 제시는 결코 세계와 같은 수 없는 나름의 질서와 체계를 지니는 것, 따라서 세계와 일 대 일의 대응 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마치 언어적 진술과 진술의 대상인 세계 사이에 일 대 일 대응 관계에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갖도록 유도한다. 바꿔 말해, 언어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서 우리의 인식 과정을 지배하고, 나아가서 우리의 세계 이해를 통제한다. 그리하여 언어를 통한 세계 이해가 ‘허구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게 된다. 이념이란 바로 여기에서 싹트는 것이다. 미국의 비평 이론가 폴 드 만(Paul de Man)이 「이론에의 저항」에서 말한 바에 따르자면, “우리가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 언어적 현실과 실제의 현실을 혼동하거나 또는 지시 작용과 현상을 혼동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역시 앞서 암시한 바 있지만, 이러한 혼동을 그 어떤 담론 체계보다 더 효과적으로 은폐함으로써 자신을 더할 수 없이 신비화하는 것이 문학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우리는 문학 비평의 과제를 말할 수 있는데, 문학 비평이란 무엇보다도 문학의 신비화된 언어를 탈신비화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비평 행위란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문학의 언어 앞에서 근원적 위기 의식을 느낌과 동시에, 그 위기 의식을 하나의 동인으로 삼아 신비화된 문학언어를 탈신비화하는 행위인 것이다. 요컨데, 문학의 언어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의 이념을 파헤치고 드러내는 데 비평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문학의 외소화와 위기의 문학비평 그러나 위기 의식은 다만 작가나 시인이 현실에 대해, 그리고 비평가가 문학 작품에 대해 느끼는 것일 뿐일까. 누군가가 문학 비평 자체에 대해 위기 의식을 갖는다면,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문학 비평도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작업이기에, 이에 대한 위기 의식은 ‘항상’ 그리고 ‘이미’ 예정된 것이다. 그러나 문학 비평에 대한 위기 의식은 무엇보다도 비평이 신비화된 문학의 언어에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하거나 또는 이를 탈신비화하는 일을 게을리 할 때 극대화될 수 있다. 그 예를 우리는 우리의 문학 현장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극히 우회적이긴 하지만 대단히 시사적인 예를 하나 들기로 하자.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우리의 학생들이 거쳐야 하는 관문이 바로 입학 시험일 것이다. 그 입학 시험이 학생들의 문학적 소양을 어떤 방식으로 측정하는가를 살펴보면, 우리의 문학 비평이 처한 위기는 쉽게 감지된다. 우연히 우리의 학생들이 치르는 전국 규모의 입학고사 시험 문제지를 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조 시대의 시조 한 편이 지문으로 제시되고 있었다.
엄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볏뉘를 쬔 적이 없건만은 서산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이어서 출제된 문제 가운데 위의 시조에서 나오는 “해”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어 놓고 이 “해”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네 개의 보기에는 “부모”, “애인,” “임금” 등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문제를 보고 필자는 위의 보기들이 모두 답이 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또한 이 문제 자체가 지엽적인 정보에 학생들의 주의를 돌리도록 유도함으로써 시를 ‘시’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떤 이유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였으나, 대상의 떠남에 슬퍼하는 한 인간의 마음을 그린 시라면, 굳이 이때의 “해”가 가리키는 것이 무언인지가 문제삼을 만큼 중요한 문제일까? 우연히 옆에 있던 국문과 선생에게 물어 보았더니 답은 하나라는 것이었다. 즉, “임금”이 답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묻자, 이조 시대에는 “해”가 “임금”을 지칭하는 굳어진 은유였다는 것이다. 되풀이 말하자면, 굳어진 은유이기 때문에 해답은 객관적으로 하나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여기에서 몇 개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이조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굳어진 은유 속에 사는 ‘굳어진’ 사람들이었을까? “해”를 보고 ‘감히’ 자신의 애인이나 부모를 떠올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까? 위의 시조를 썼던 사람이, 아니 적어도 그가 아니라면 이 시조를 접하는 사람이 그러한 종류의 사람이었을 확률은 전혀 없는 것일까? 둘째, 이러한 문제를 이른바 문학 시험 문제로 제시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학 공부란 무엇일까? 과연 문학 공부란 굳어진 은유나 찾아 헤매는 사소한 작업이어야 할까? 이러한 사소한 작업을 통해 얻어지는 사소한 지식들이 문학 비평가, 학자, 교육자의 관심사이어야 할까? 셋째, 누군가가 이러한 종류의 사소한 지식을 물음으로써 문학적 소양을 측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나아가서 우리 사회가 그렇게 믿고 있다면, 그러한 믿음을 유도한 개인과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무엇인가? 넷째, 이러한 물음을 중요하다고 또는 물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자기 반성의 순간을 가졌을까? 만일 그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서도, 또는 어떤 종류의 반성이든 반성을 하면서도, 이런 식의 문제를 문제화하도록 유도한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 굴복하였다고 하자. 문제는 이 굴복을 강요하는 힘, 보이지는 않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념’에 어떤 방식으로 대처할 것인가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문제삼아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자명해진다. 요컨대, 어느 한 시대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굳어진 은유로 받아들여야 했다면 그 뒤에 작용했던 지배 이념은 무엇이었을까를 우리는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이어서 굳어진 은유를 ‘지식’의 한 형태라고 믿고, 이를 교육하는 것이 문학의 과제라고 믿는 사람들의 배경에 어떤 지배 이념이 작용하는 것일까도 문제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문제삼아야 할 것은 지배 이념 자체를 문제화하기보다는 사소한 지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 시대의 문학 비평가, 학자, 교육자들의 자세일 것이다. 말하자면, 기계적으로 습득한 지식을 문제삼고 이를 측정하여 문학적 소양을 판단하려는 관습이 문제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문학 왜소화의 경향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보이지는 않지만 특정 시대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념의 실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비판 정신의 필요성을 역설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비판 정신 자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비판은 종종 일방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고, 그리하여 파시즘적 역기능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판이 단순히 헐뜯기나 책임 전가를 위한 것이 될 때 득보다 해가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비판 행위란 양면성을 지니는 것이어서, 타인에 대한 비판은 자신의 이념을 강요하는 쪽으로 변질되기 쉽다.
자기 성찰과 문학비평의 의무 이런 우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문학 유산 가운데 비판 정신의 본질을 보여 주는 것들이 적지 않음에 우리는 위안을 받는다. 아주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전래 동화 가운데에는 늙고 병든 아버지를 헌 지게에 지고 가서 산 속에 내다버리는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할아버지를 내다 버리는 데 함께 갔던 그 사나이의 아들은 헌 지게를 다시 짊어지고 산에서 내려온다. 의아하게 생각한 사나이가 그 이유를 묻자, 그의 아들은 다음에 아버지가 늙고 병들면 산 속에다 갖다 버릴 때 다시 쓰기 위해 가져온다고 대답한다. 이에 사나이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산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에게 용서를 빈다. 또한 이러한 이야기도 있다. 성미가 고약한 원님이 있어, 자기 아래의 벼슬아치인 좌수에게 한겨울에 산딸기가 먹고 싶으니 구해 오라고 명령한다. 어쩔 도리가 없어서 고민하던 좌수는 몸져눕게 된다. 아버지가 무슨 이유로 몸져눕게 되었나를 알게 된 좌수의 아들은 원님에게 찾아가 말한다. 아버지가 산딸기를 따다 독사에게 물려 집에 누워 있다고. 겨울에 독사가 어디 있겠냐고 버럭 화를 내는 원님에게 좌수의 아들은 원님의 말대로라면 이 겨울에 산딸기는 어디 있겠냐고 반문한다. 이에 원님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위의 이야기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어린아이에게 화를 내는 사나이와 원님은 바로 우리들 자신일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남의 허물을 탓할 때나 어떤 고집을 펼 때, 우리 자신은 그러한 허물과 관계없는 양 행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야기에 나오는 사나이와 원님은 단순히 우리의 실제 모습이 아니다. 이는 동시에 ‘이상화’(理想化)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아버지에게 용서를 비는 사나이나 잘못을 인정하는 원님과 달리, 스스로의 허물을 인정해야 할 때에도 우리는 좀처럼 우리의 허물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어두운 밤 갑작스럽게 내비치는 섬광으로 인해 세상이 환하게 보이지만 바로 그 순간 역시 섬광으로 인해 우리의 눈이 잠시나마 멀게 마련이듯이. 다시 말해, 우리는 타인의 문제점을 파악하는 ‘예지’의 순간 자신의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하는 ‘무지’의 상태가 될 수 있다. 드 만의 말대로 이처럼 ‘무지’(blindness)와 ‘예지’(insight)는 함께 오는 것이다. 문학 비평 역시 이와 같은 ‘무지’와 ‘예지’의 논리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문학과 관련하여 ‘예지’를 포착했다고 믿는 순간, 문학 비평은 문학 비평의 ‘언어’가 지닌 한계 그 자체에는 ‘무지’의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문학의 언어가 감추고 있는 신비화에 눈을 뜨는 순간에도 비평은 자신의 언어가 감추고 있는 신비화에는 여전히 눈먼 상태에 남을 수 있다. 말하자면, 투명한 언어를 통해 영원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는 투의 미망(迷妄)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의 또 하나 임무는 비평이 자칫 잘못하여 빠져들기 쉬운 자기 신비화를 스스로 경계하고 밝히는 데 있다. 달리 말해, 문학의 언어뿐만 아니라 비평의 언어까지 ‘탈신비화’하는 데 있다. 비평이 자신의 언어까지 탈신비화할 때 비평은 마침내 비평 본연의 것이 될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문학 비평가가 취해야 할 길은 무엇일까? 그는 결국 사유(思惟, reflection)를 위한 마음속의 두 거울 사이에 갇히는 수밖에 없다. 즉, 문학의 언어를 탈신비화하기 위한 사유의 거울과 스스로의 언어인 비평의 언어를 탈신비화하기 위한 사유의 거울 사이에 자신을 내던져야 할 것이다. 물론 비평가는 두 거울 사이에 일어나는 현란한 반사 작용 속에 길을 잃을 수도 있으나, 싫건 좋건 간에 이것이 비평가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인 것이다. 미로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비평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두 거울 속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고서 집요하게 관찰하고 비판하는 일 뿐이다. 아마도 “비평이 그 자체의 근원에 대해 성찰하는 경지에 이를 만큼 스스로를 면밀히 검토하는 일에 진정으로 게을리 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드 만 자신의 물음이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의 말대로, 비록 표면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관찰이나 해명”의 형태를 취하지만, 무릇 모든 비평 행위는 “항상 자신에 대한 관찰을 유도하는 수단”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모든 비평 행위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 작업이어야 한다. 자기 확인이 없이 수행되는 비판 행위란 욕구 불만을 자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지극히 위험한 관념의 유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체코 출신의 미국 문학 이론가 르네 웰렉(Ren Wellek)이 ‘칸트의 미학과 비평’이라는 글에서 말하고 있듯이, 모든 비평 행위가 “자기 비판 또는 내적 성찰이나 검토”로 귀결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열린 사회를 향하여 따지고 보면, 어느 시대, 어느 곳에도 위기 의식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위기 의식이 막연한 피해 의식이나 불안감을 느끼는 것 이상의 진지한 정신 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데 있다. 또한 위기 의식이 다분히 감정적이고 자의적(恣意的)인 것이어서 일련의 공허하고 야단스러운 아우성과 함께 흐지부지되고 마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사람들이 위기 의식을 느낄 때 그 원인을 바깥쪽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즉,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모든 사태의 책임을 자신을 제외한 남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에게는 어떠한 비판의 눈길도 주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이런 종류의 정신 자세는 “나만 빼고 다 망해라”(채만식, 「태평천하」)라고 말하는 윤직원 영감의 정신 자세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나만 빼고 다 틀려다”라는 투의 사고 방식은 “나만 빼고 다 망해라”라는 투의 사고 방식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폐쇄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폐쇄된 정신들이 모래알처럼 모여 이룬 세계는 결코 바람직한 세계일 수 없다. 남을 생각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소중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요컨대, 남을 생각하고 남에 대한 비판에 앞서 자신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열린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문학 비평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열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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