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매체와 문화예술 |
신생과 파괴의 측면 어느 한쪽에 치우쳐 균형 잃지 말아야 정호웅(문학평론가, 홍익대교수)
속도의 시대이다.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정보 전달의 속도는 갈수록, 급속도로 증대한다. 인터넷은 전세계를 공간성이 무화된 동시성의 차원으로 옮겨놓았다. 전달 속도가 빨라지는 것에 비례해 정보의 수명은 짧아진다. 새로운 정보의 생산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 생산과 전달, 폐기의 회로는 갈수록 더욱 더 빠른 속도로 회전한다. 어제의 새로움은, 오늘은 이미 더 이상 새로움이 아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중심에서 밀려나고 말 것이니 “가장 좋은 낡은 것보다 가장 나쁜 새로운 것이 더 좋다” 라는 구호를 좇아 앞뒤 돌아보지 않고 내달린다. 요컨대 이 시대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은 속도이다. 속도가 이 시대의 시대정신으로 지배하도록 뒷받친 것은 디지털 문화이다. 모든 것을 0과 1의 논리연산의 기호로 바꿈으로써 디지털 문화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짧은 시간에 처리하고 전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런 일은 논리 연산의 기호 메커니즘으로 인해 물질성의 구속으로부터 정보의 처리 과정 전체가 해방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간은 빛의 속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독일의 미학자 벤야민은 문학예술작품의 독창성과 일회성에서 생겨나는 아우라가 기술 복제 시대의 대량 복제 현실에 압살당하는 현상을 크게 우려하였다. 디지털 미디어의 놀라운 발전으로 인한 복제 능력의 엄청난 비약은 벤야민의 그런 우려를 아득히 먼 과거의 것으로 느껴지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대량 복제의 기술 발전이 가져온 양적 물신화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은 디지털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대량 복제가 훨씬 더 용이해졌으며 그 속도 또한 비교할 수 없는 차원으로 빨라졌으니 훨씬 더 강력한 비판성을 획득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무제한의 복제가 가능해진 현실은 원작의 개념 자체를 무화시킨다. 공장에서 생산된 생활 소비품과 다를 바 없는 예술작품과 수요자 사이에 강렬한 긴장이 형성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예술품이 아우라를 잃을 때 그것은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이용하는 실용품과 별다르지 않게 된다. 우리는 마우스 클릭 한번으로 순식간에 그 원작과 똑 같은 모조품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옆에 놓여 있는 수저를 들 듯이 눈앞에 불러낼 수 있는 예술품. 예술품과 수요자 사이에 가로놓였던 공간과 시간의 거의 완전한 소멸이다. 예술품에 다가가기 위해 거쳐야 했던 공간과 시간의 이 같은 소멸 현실은 공간과 시간의 매개 작용으로 예술품과 수요자 사이에 생겨나는 교감과 조응의 종류와 파장의 정도를 현저하게 줄인다. 그리하여 아우라를 상실한 예술품은 생활 소비재로써 ‘소비’된다.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은 예술작품의 창작과 향유 사이에 가로놓였던 공간과 시간을 최소화함으로써 향유의 불평등성을 크게 줄였지만 향유의 질을 이처럼 근본적으로 바꾸고 말았다.
만인 창조자의 새로운 현실
광속에 육박하는 속도성의 확보, 물질성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등의 요인으로 인해 예술창작과 소비(향유)의 질서가 크게 바뀌게 되었다. 디지털 이전에는 전문적인 문학예술가에 의한 창작-전시회나 종이책 출판-소비란 창작에서 수요에 이르기까지의 선조적인 질서만이 존재했다. 이 경우, 비상한 능력을 지닌 문학예술가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낸 신적 존재로서 군림하고 수요자는 완성되어 고정된 창작품의 수동적인 소비자로서 그 선조적 질서의 마지막에 종속된다. 그런데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과 그 급속한 발전으로 이제 수요자가 창조의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전혀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되었다. 무한대로 개방된 문학예술의 정보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수정, 삭제, 첨가할 뿐만 아니라 조합함으로써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라 소비하며 창조하는,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창조자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공지능과 전문가 시스템, 공급 사슬 관리 분야의 전문 연구자인 한국과학기술원 산업공학과의 박상찬 교수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까마귀 이야기를 들어 이를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까마귀 이야기는 가장 아름다운 새가 되고 싶었던 까마귀가 다른 새들의 깃털을 모아 장식했다가 그 사실이 드러나 창피를 당한다는 내용이다. 거짓 꾸밈은 일시적으로는 통할 수 있으나 언젠가는 들통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담고 있는 우화로 읽힌다. 박상찬 교수는 디지털 문화의 시대에서는 그 같은 의미가 ‘반전’돼야 하지 않을까 하고 묻는다. 버려진 깃털까지도 원래 새의 것일까? 버려진 깃털을 모아서 새로운 모습을 창작한 까마귀야말로 디지털 문화의 창조적 수요자의 원형이 아닐까?(박상찬, 「디지털 문화의 공급 사슬 관리」, 최혜실 편, 「디지털 시대의 문화예술」, 문학과 지성사, 1999, 139쪽) 박상찬 교수의 진단대로 디지털 문화의 시대에서는 모든 사람이 문학예술의 창작 주체가 될 수 있다. 신적 권위를 지닌 창조자·수동적인 소비자란 기존의 위계적 질서는 만인창조자란 새로운 질서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문학예술의 창조자가 될 수 있는 현실은 만인 평등의 유토피아처럼 황홀하다. 그래서 바람직하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문학예술품의 창조와 향유에 새로운 차원을 덧붙였다는 점에서 그것의 의미는 높게 평가될 수 있다. 새로운 차원의 개척이란 마치 간척 사업을 통한 새 땅의 확보처럼 인간 삶의 영역을 보다 넓히는 것이며, 마치 새로운 과학적 원리의 발견처럼 볼 수 없었고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보고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품의 첨삭과 변형을 통한 창조적 향유는 전문 창작인에 의해 만들어진 본래 작품의 충실한 읽기를 가로막는다. 그럴 때 비범한 재능에 의해 창조된 한 세계로서의 예술품은 전체로서 향유되지 못하고 이른바 창조적 향유를 위한 한갓 재료로서 부분적으로만 수용된다. 창조적 향유자는 그 예술품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것,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고는 그 예술품을 떠나고 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낭비인가? 전문적인 창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잘 구성된 한 세계로서의 예술품이 이처럼 창조적 향유의 과정에서 한갓 파편적 재료로 해체되고 마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이는 예술가와 그 향유자 사이의 문화적 전승 관계가 파괴되고 만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기존의 문화적 전승 관계를 부정하고 그 바깥에서 다만 자신의 취향을 좇아 이른바 창조적 향유의 자기황홀에 페쇄되는 것은 무성번식의 불모성을 낳게 될 것이다. 이 같은 현실은 갈수록 강화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 사회의 특성으로 정보 여과 장치의 기능 약화와 정보의 홍수 현상을 손꼽는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움베르토 에코가 든 예는 흥미롭다. 인터넷 검색 엔진인 알타비스타로 ‘커피’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무려 1400만 개의 사이트가 뜬다는 것이다. 검색자는 이 어마어마한 정보의 홍수에 휩쓸려 마침내는 그 정보들을 차별화할 수 없는, 판단 능력 상실의 지경에 떨어지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세계적 차원의 통신망 구축과 정보 전달력의 놀라운 향상은 지식의 여과 장치들을 무력화시키며 사람들을 정보의 홍수 속에 내던진다. 공통의 토대 위에 사람들을 묶어 세우고, 개개인에게 체계적인 지식의 틀을 제공하던 지식 여과 장치의 무력화와 정보의 홍수 속에 내던져진 상황으로 인해 개별 삶은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시야를 잃고 갈수록 파편화되어 떠돌게 될 것이다. 이를 따라 창조적 향유의 자기황홀에 폐쇄되는 정도 또한 갈수록 커질 것임에 틀림없다.
하이퍼텍스트의 환상
참으로 놀랍게도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으로 컴퓨터가 인간을 대체하여 새로운 문학예술의 창조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예측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능·의식·감성 등의 요소를 모델링할 계산적 이론이 계발’된다면 컴퓨터에 의한 작곡, 로봇에 의한 그림 그리기가 전문 예술가의 수준으로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6,7년 전부터 미국에서 건너온 하이퍼텍스트란 괴상한 말이 떠돌아다녔다. 처음 듣는 말이라 문학판에 관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지만 눈앞에 실체가 없으니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최근 들어 하이퍼텍스트 서사 이론을 적용한 소설이 우리 작가에 의해 발표되기에 이르러 그 대강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요점은 독자가 서사 전개의 중요 지점에 개입하여 그 이후 전개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자의 적극적 개입은 아마도 「삼국지」 게임에서처럼, 매번 새로운 서사를 구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독자의 선택에 따라 예컨대 두 연인은 그 때 만나지 않을 수도 있고 만날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 문제로 싸울 수도 있고 싸우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두 사람의 행로와 관계 양상은 달라질 것이고 따라서 선택에 따라 구축되는 서사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특성을 가리켜 ‘하이퍼텍스트의 비선형적 서사 구조’(박상찬·신정관, 「하이퍼텍스트와 미래의 미디어 기술」, 앞의 책, 266쪽)라고 한다. 아마도 전혀 다른 현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이미 미국 등 앞선 나라에서는 이 같은 하이퍼텍스트 이론을 적용한 교육용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기존의 교육 방법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하이퍼텍스트가 소설, 연극, 영화와 같은 기존의 서사 형식을 밀어내고 서사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서사 형식의 출현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가 기존의 서사 형식보다 훨씬 우월한 서사 형식이라든가, 기존의 서사 형식을 포괄하며 더 경계를 넓힌 서사 형식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엄연한 한계를 지닌 형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환상이 안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대부분의 경우, 이 형식의 작동 메커니즘이 프로그램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삼국지」의 어떤 지도자가 여색을 가까이 하면 국력의 몇 퍼센트가 약해진다든가, 전쟁을 계속하는 시간에 따라 병사들의 충성도가 일정하게 내려간다든가 하는 식으로 선규정되어 변화하지 않는 규칙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작동 메커니즘이 프로그램에 의해 미리 정해지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데이터베이스에 많은 정보를 저장해 놓고, 독자가 그 정보를 선택하고 조합할 수 있도록 개방된 프로그램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정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직간접적 체험과 상상력이 구성하는 체험에 의해 확보되는 작가의 정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한된 정보만이 독자에게 제공되기 때문에 독자의 선택은 제한된 선택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처럼 제한된 선택의 연속에 의해 구축되는 하이퍼텍스트의 서사 또한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하이퍼텍스트의 운용 프로그램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극복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점이니, 하이퍼텍스트가 기존 서사 형식의 긍정적인 기능조차 포괄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낙관은 성급하며 위험하기조차 한 것이다.
새로운 시대와 교육의 역할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과 디지털 문화의 확산은 전문 예술가에 의해 창작된 예술품의 위상을 갈수록 낮출 것이고 주변화시킬 것임에 틀림없으며 일반 수요자들의 관심 또한 갈수록 멀어질 것임에 분명하다. 창조적 향유라는 멋들어진 깃발을 내걸고 자기황홀에 갇혀드는 파편적인 예술 향유의 형식이 지배적인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럴수록 대량 복제와 원전의 해체에 저항하는 일의 중요성은 커진다. 무엇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교육의 역할이 이에 참으로 중요하다. 옛것을 허물고 주변부로 밀어내며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내달리는 진보의 정신과 흐름은 한 사회를 거듭 신생하게 하는 근본 동력이니 참으로 소중하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파괴적인 속성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신생의 측면과 파괴의 측면을 함께 살펴 왔는데 어느 한쪽에 치우쳐 균형을 잃지 않는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지난 100년의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새로운 것만을 좇아 내달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