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매체와 문화예술 |
너무나 심미적인 세계로서의 인터넷 이후의 세계
서동진 (문화평론가) 이젠 소름 돋을 만큼 세상의 모든 미디어는 인터넷을 찬미하고 열망한다. ‘인터넷 강대국’이 되어야 한다는 주문 속에 깃든 섬뜩한 망상은 커다란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태진 듯 티비 화면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광고들은 반쯤은 과장으로 또 반쯤은 이미 겪고있는 현실로서, ‘인터넷 이후’의 세상을 재현하고 있다. 이 글은 그런 변화의 폭풍 속에서 문화와 예술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물론 이런 물음은 별로 주의력이 깊지 못한 채 던지는 강박적인 물음이라 해야 옳을 듯 하다. 왜냐면 그런 물음 자체가 상당한 문화정치적 전제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물음은 문화와 예술이란 따로 떨어진 현실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런 현실이 마치 인터넷 이후의 세상이란 배경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묻는다. 하지만 인터넷 이후의 세상은 문화와 예술의 배경이 아닐 것이다. 인터넷 이후의 세상이란 현실을 구성하고 체험하는 주관성의 변화를 가리키고, 아울러 그런 주관성의 변화가 표상하는 세계의 이미지 혹은 그런 이미지들의 질서와 규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를 모호하게 뭉뚱그리며, 인터넷 이후의 세상에 대한 물음을 압축하는 범주가, 아마 “가상 현실 virtual reality” 그리고 “가상 정체성 virtual identity”일 것이다.
인터넷 시대의 문화와 예술의 정체성
이런 말들은 문화와 예술이라는 ‘분리된 현실’의 존재를 의문에 품는 도발적인 물음들을 뒤섞고 있다. 이를테면 가상 현실에서 혹은 그런 가상현실을 주도하는 대표적 종목(種目)인 인터넷에서, 모든 이미지와 텍스트, 사운드, 심지어 물질화된 관념에 속하는 모든 것은, 그저 간단히 ‘컨텐츠 contents’라 불린다. 이를테면 인터넷 콘텐츠 비즈니스란 말은 전통적인 문화, 예술의 계보도로는 투시될 수 없는 세계를 가정한다. 인터넷 영화 사이트에서부터 음악 사이트, 증권 정보 사이트, 유머 사이트, 핸드폰에서 사용할 이모티콘emoticon 기호를 서비스하는 사이트가 제공하는 모든 정보는, 한마디로 컨텐츠일 뿐이다. 전 같으면 저자, 예술가, 작가로 불리웠을 이들은 콘텐츠 제작자일 뿐이며, 출판업자, 화상(畵商), 흥행업자, 극장주, 언론사들은 모두 컨텐츠 공급업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문화와 예술을 분류하던 많은 경계와 그 경계 설정을 가능케하던 규칙이 사라지고 만 지금, 우리는 컨텐츠란 이름으로 단조롭게 통합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기우이다. 우리는 컨텐츠란 낱말을 매일 아침 조간 신문에서 수십 번도 더 조우하고 있다. 그만큼 그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인터넷 이후의 세상이 만들어낸 희한한 미디어들과 서서히 화해하고 있다. 우리는 핸드폰으로 전철 요금을 결제하고 물건 값을 치르며, 노래를 주문해 듣고, 편지를 보내는 세상에 이미 접어들었다. 보고 듣고 읽는 것들에 접근하는 데 대한 전통적인 제한의 소멸은, 우리를 문화와 예술에 대한 과거의 가정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침식하고 있다. 미술대학교를 졸업하고, 그러면서 교과 과정에서 동시대의 미적 규범을 익히고, 미술전람회에 입상하거나 대개 같은 범주에 속한 이들의 알선으로 적당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그리고 그런 검증된 문화자본을 체현한 그림을 사기 위해 비평가와 화상이 꾀어들고, 그 결과 그(녀)는 화가가 되고, 예술가가 되고, 섬세한 영혼이 되고, 탁월한 천재가 되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제도적 규정은 와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 소프트웨어와 전화선과 인터넷 브라우저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따라서 수없이 많은 인터넷 사이트들이, “당신도 작가”, “나도 예술가”, “당신이 감독으로 향하는 첫걸음” 같은 쑥스러운 슬로건을 내걸고 사용자들을 현혹하는 것은 사기가 아니다. 적어도 그런 사이트를 찾는 이들은 더없이 진지하고 심지어 숭고한 표정까지 짓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문화와 예술의 장을 기웃거리던 또 하나의 미적 규범으로서의 “DIY 미학”과는 다르다. 그것이 일종의 전위적인 몸짓을 위한 가면이었다면 지금의 ‘인터넷 DIY’는 가면 없는 적나라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추가된 현실 혹은 달라진 현실
이처럼 문화와 예술에 있어 인터넷은 ‘추가된’ 또하나의 현실이 아니라 ‘달라진’ 현실이다. 그것은 문화와 예술이 표상하여야 할 세계가 확장되었다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이 자신의 감각과 체험을 표상할 수 있도록 하는 심미적 주관성 자체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이런 변화는 문화와 예술을 에워싸는 사회적 실천의 제도와 질서 자체가 커다란 변모를 겪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물론 필자는 이런 변모의 양상을 간단히 요약할 수 없다. 그에 대한 적당한 핑계를 찾자면, 이런 변모가 경계 없는 세계로서의 인터넷 이후의 세상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 이후의 세상은 ‘요약할 수’ 없는 세계를 가정한다. 비록 물리적인 세계의 끝을 한정할 수 없어도, 인터넷 이전의 시대의 지배적인 표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끝이 존재하는 세계’를 가정하고 있었음은 분명한 듯 하다. 이미 세계란 말 자체가 경계의 존재를 암시하듯이 말이다. 한국이란 세계, 혹은 아시아라는 세계, 또는 지구라는 세계는 모두 경계지워질 수 있는 세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인터넷은 너무 많은 세계, 너무 다층적인 세계를 전제한다. 그것은 세계와 그 너머의 공허, 혹은 무를 전제하던 이분법적 세계의 투시와 사뭇 다른 세계의 원근법이다. 즉 인터넷은 마치 무한한 주름처럼 계속 이어진 세계를 가정한다. 그런 터에 ‘인터넷 이후’의 문화와 예술을 가정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인터넷 이후의 문화와 예술을 둘러싼 쟁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인터넷은 자신이 예기할 수 있는 달라진 현실을 조망하기 어렵게 하지만 기존의 문화 예술을 구성하던 많은 문제(problematics)를 변형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먼저 우리는 인터넷 이후에 문화와 예술의 몰락에 대한 우려를 들을 수 있다. 이는 문화와 예술이 특별한 제도와 자격, 권한을 누리는 특별한 사회집단의 활동으로 정의될 수 없는 상황에 접어들었다는 소문을 접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둘러싼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구분 자체를 지워버리는, ‘일상생활의 심미화’라 불리울 만한 현상의 만연에 직면해 있다. 이는 문화와 예술이 갖는 독특한 인식론적 특성이 다른 사회적 활동의 특성으로 옮아가고 있음에 따른 일이다. 적어도 문화와 예술은 다른 종류의 사회적 활동, 즉 정치적 활동과 경제적 활동이 가진 나름의 인식론적 특성, 이를테면 경제-합리적 이성같은 범주와 구분되는 독특한 감정적, 인식적 특성을 갖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일상적 활동은 그런 정치, 경제적 활동에 의해 규정되고, 예술은 그런 합리성에 의해 잠식된 세계를 극복하는 대안이거나 비판의 역할을 맡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소박하게 말하자면 낭만적 시인은 냉혹한 은행업자의 세계와 대립한다는 식의 발상이 그런 것이었다.
심미화된 세계로서의 인터넷 세계
하지만 인터넷 이후의 세상은 비록 디제라티 digerati2)나 지피족 the zippies3)같은 새로운 인구학적 종의 존재를 말하고 있어도, 전통적인 사회적 구분을 정당화하던 인식적 특성의 구분을 소멸시키고 있다. 자신의 신분적 표상을 전혀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채팅룸에서 혹은 전혀 새로운 언어 능력을 축적하고 사용해야 하는 머드 MUD 게임에서, 아니면 접근을 통제하고 선별하는 비서실과 보안 장치가 없는 전자우편에서, 우리는 이미 그런 세계에 익숙해 있다. 더욱이 인터넷에서 만들어지는 세계는 전통적인 활동의 형식을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취미taste에 기반한 사회의 출몰을 반복한다. 인터넷의 수없이 많은 장소들, 흔히 말하는 사이트들은 곧 다시 말하면 이런 범람하는 사회들의 군집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의 초대형 사이트들이 포털 사이트portal site란 말대로 그저 관문 역할을 하는 사이트일 뿐, 그 관문을 넘어선 이들은 곧바로 무한한 링크로 연결된 자신의 사회를 탐색하고, 또 그리로 이동해 버린다는 점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바로 취미의 감각이 사회를 구성하는 활동의 축으로 되어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 점에서 인터넷 이후의 세상은 ‘일상 생활의 심미화’라는 정의가 유효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문화와 예술의 일상생활로의 범람’은 이런 점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에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혼융을 낳는 바탕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지금으로부터 십 수년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자크 시라크는 프랑스 연방에 속한 국가들에게 인터넷의 만연은 결국 프랑스어의 쇠퇴와 몰락을 가져 올 것이며, 월드와이드웹에서 전체 정보의 90퍼센트가 영어로 전달되게 됨으로써 불어권 세계의 문화적 정체성 역시 상실되고 말 것이라 저주를 퍼부은 바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 이후의 세상을 ‘문화와 예술의 미국화’로 예언하는 이들을 만족시키는 증거가 충분함에도 우리는 인터넷 이후의 세상이 미국화된 세상이라고 추단할 수 없다. 인터넷은 이전 같으면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수 없는 언어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고, 그런 언어가 만들어내는 세계를 더없이 확장하고 있다.4) 이는 문화의 국지성을 확장하고, 그에 따라 세계에 대한 단일한 표상을 더없이 위협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일상 생활의 심미화는 단순히 개인적 일상에 머물지 않고, 전통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파고들어 그것을 새롭게 채색하고 있다. 알다시피 인터넷은 미국이 유료 포르노그라피가 지천으로 널린 사회이며 동시에 그 어느 사회보다 청교도적인 보수주의가 맹렬한 맹위를 떨치는 사회임을 보여준다. 수없이 다양한 소수들의 인터넷으로의 침투는 마치 서로 다른 문체와 음율을 가진 예술가들의 세계처럼 ‘진위(眞僞)의 세계’가 아니라 ‘연속적인 차이의 세계’를 펼쳐준다. 이는 인터넷이 문화 예술이 만들던 작은 세계를 세계 전체의 틀짜기의 방식으로 밀어넣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억측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이를 둘러싼 평가는 열려있다. 어떤 차이도 긍정되어야 하는 세계를 비판이라는 대문자가 소멸한 세계로 혹평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이것이야말로 마침내 규범적인 세계상으로부터 벗어난 세계의 출현으로 환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판단에 당장 답할 필요는 없다. 변화는 여전히 쇄도하고 있고, 우리는 그렇게 쇄도하는 변화들 앞에서 물음을 물을 숨가쁜 틈조차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터넷 이후의 문화와 예술은 열려진 물음을 위한 하나의 장소에 불과할 뿐이라는 궁색한 대답으로 우리가 물음에 대한 잠정적 대답을 마련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