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현상읽기 / 문학

한국문학의 국제화를 위하여

 김병익(문학평론가)

지난 5월말에서 6월초 일본의 아오모리에서 열린 한일 문학 심포지움은 국제간의 문학교류 행사로서는 매우 효과적인 진행을 보여준 사례로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두 나라의 소설가, 시인, 비평가들이 1-여명 씩 참석하여 양국 평론가의 비평가들이 10여명씩 참석하여 양국 평론가의 공동사회 아래 창작자 자신들의 작품을 낭독하고 창작의 의도와 경위를 밝히며 상대국의 카운터 파트 작품에 대한 코멘트를 가하고 토론을 벌인 방식은 아마도 처음 있는 일로서 이 같은 방식의 외국 작가들간의 만남은 의외로 서로의 문학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진지한 비교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적어도 지난 네 차례의 한일 문학 심포지움이 평론가 중심으로 자국의 문학적 전통과 주제, 현실과 창작의 양상을 소개했던 것과는 달리 시인-소설가 자신들의 창작적 현장감을 높이며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문학적 소통을 구했던 것은 이 회의를 활기차고 공감어린 자리로 만들었던 것이다.

 

창작자들의 직접적인 만남이야말로 가장 따뜻한 국제교류

가령 황지우와 동경대학 교수이며 전위적인 시창작을 하고 있는 후지이 사다카즈(藤井貞和)의 경우 같은 결착어인 한국어와 일어에서의 리듬 문제가 공통된 고민거리로 제시되며 그럼에도 뜻은 모르지만 소리의 효과로서 정서적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음을 확인했고 김원우와 중견 여류 작가 나카자와 게이(中澤ゲイ) 경우에는 근대성, 근대화의 착잡한 성격이 반성되었으며 서하진과 쓰시마 유코(津島佑子)는 설화적인 것, 전통적인 것의 문학성이 논의되고 김영하와 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는 현대인의 문명적인 삶에서 느끼는 피로와 파괴욕을 거론했다. 이것들은 이 심포지움에서 활발하게 발언된 여러 주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간에 공통적으로 느끼는 성격의 것이기도 하고 전통과 삶의 조건 및 방식이 다름으로써 빚어지는 해석의 차이를 낳기도 하는 것이었다. 가령 신경숙의 「들판 위의 빈 집」은 원초적인 삶의 공포감을 설화적으로 자아내는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그에 대한 후지사와 슈(藤澤周)의 해석은 사회와 현실 속에서의 삶의 공허감이었고 시마다의 「불타버린 율리시즈」를 김영하는 환상과 실제를 도치시킨 수법으로 읽을 수 있겠다고 설명했다. 일본 작가들이 한국 소설에서 구체적인 묘사의 효과를 획득하며 문체에 힘을 느낀다고 부러워하는 점에서 두 나라 문학간의 방법적, 분위기적인 차이를 이번에 확인할 수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대체로 한국과 일본의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번의 두 나라 문학 심포지움에서 나타난 이러한 공감과 상이한 해석은 옳고 그름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쌍방 소통이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호 조명이었다. 비평가들의 관념적인 토론을 지양하여, 한일 두 나라 창작가들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일종의 창작 워크숍 성격으로 이번의 심포지움을 준비하면서 그 성패에 대해 지녔던 우려를 깨끗이 불식시킨 정도를 넘어, 알찬 소득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던 이 심포지움은 기존의 낭독과 질의로만 그친 일방적 방식의 한계를 벗어나 작가와 작가, 작품과 작품, 주제와 주제간의 대면을 통해 말 그대로의 문학적 교류를 이루는 데 성공한 것이다. 평가받는 중견과 3명의 아쿠다카와상 수상자들이 포함된 일본측이 계제에 한국 단편선집 발간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게 된 것이며 9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한다고 보아도 좋을 우리측이 일본 작가들의 작품 번역을 제의한 것은 자리를 함께하며 문학적 소통을 활발하게 전개할 수 있었던 이 심포지움이 기대한 바람직한 소득일 것이다. 또 몇 차례의 사적인 만남과 술좌석을 통해 개인적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고 후일의 재회를 약속하는 장면은 창작자들의 직접적인 만남이야말로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국제 교류임을 실감하게 했다.

그러나 이 심포지움은 한국 문학의 외국 문학과의 교류를 위한 중간 단계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겠다. 가장 기초적인 교류는 심포지움이나 세미나를 통해 한국 문학 전반을 소개하는 것이고 가장 큰 성과를 거둘 최종적인 교류의 목표는 작품의 번역 간행을 통해 상대국의 독자를 확보하는 일이다. 이 세 단계를 비유하자면, 첫 단계는 한국에도 문학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한국에 이런 작가들이 있다고 보여주는 것이며 마지막은 한국에 이런 작품이 있다고 읽히도록 하는 것이다. 서울 올림픽 개최가 결정되면서 한국 문학의 국제화가 제창된 80년대 이후, 정부와 문예진흥원, 대산재단과 우경문화재단 등 문학 지원 기관들이 한국 문학의 해외 진출을 위해 노력한 작업이 대체로 첫 번째와 세 번째 단계의 일들이었다. 독일, 프랑스 등의 서구와 미국, 남미 그리고 일본과의 문학 교류 행사가 대체로 우리 문학의 전통과 현재, 그 성격과 주제를 소개하는 데 치중했고 박경리, 김원일, 오정희, 이문열 등 여러 작가들의 소설과 서정주, 고은, 황동규, 정현종, 김지하, 김광규 등 몇몇 시작품들이 불어,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 일어 혹은 러시아어의 권역으로 번역 간행된 것이 세 번째 단계에 해당된다. 이번의 아오모리 한일 작가 심포지움은 그 진행 방식이 성공적이며 그래서 첫 번째의 소개 단계를 넘어선 것이지만, 우리가 앞으로 더 진전시켜야 할 목표는 물론 세 번째 단계의 작품 번역 간행이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 문학을 해외에 번역 간행하는 작업은 많은 투자 속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왔지만 그 성과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것이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우선 외국 작품은 고율의 원작자 인세를 지불하면서 번역 간행되고 있는 데 비해 우리의 작품은 외국 출판사로부터 인세를 받는 경우가 예외적인 것이고, 아직은 대체로, 특히 유럽에서는, 출판 또는 번역의 지원금을 통해서야 그 간행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렇다. 외국의 문학과 작품에 대한 연구와 비평 작업은 오래 전부터 지속적이며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지만 한국 작품에 대한 외국의 평가는 거의 없고 드물게 신문의 신간 서평으로 처리되는 정도라는 사실에 이르면 사정은 더욱 비참해진다. 한국 문단이 꿈처럼 그리고 있는 노벨 문학상 수상이 서구를 중심으로 한 유럽 독자들을 확보하여 현지 출판사가 자진해서 인세를 지불하며 출판하고, 권위 있는 신문과 저널들이 본격적인 비평과 평가를 가한 연후에야 기대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한국 문학의 세계화란 아직은 요원한 희망에 그칠 뿐이다. 계제에 나는 한국 문학의 해외 진출을 위해 몇 가지 지적과 제언을 해야겠다.

 

한국문학 해외진출을 위한 몇가지 지적과 제언

우선, 해외에 소개될 작가와 작품을 전략적으로 선정하여 그 특정의 소수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번역, 출판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한국 문학의 외국 소개란 이름으로 개인적으로나 지원 기관으로나 방만하게 이루어져 왔는데 그것은 한국에도 문학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긴 했지만 어떤 뛰어난 작가 작품이 있는가로 초점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런데 가령 일본은 노벨상을 염두에 두고 서구에 자기들 작가들의 작품을 출판하는 데 노력하면서 그 대상을 몇몇 대표적인 작가로 한정하여 그들에게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그 결과가 구미(歐美) 이외의 지역에서는 드물게 단일 민족의 지역 언어라는 한계를 뚫고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와 오에이 겐사부로(大江健三郞) 등 2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이었다.

일본의 이런 경우를 참작한다면 우리도 산만한 투자 방식을 버리고 몇몇의 기대 작가들을 선정해서 서구어로 번역 출판하는 작업을 집중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문학의 우수성을 해외에 소개하는 데 효율적이고 능동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어떤 작가의 무슨 작품을 선정하는가는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다. 작가 모두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뚜렷한 개성들과 그것들의 문학적 성취에 순위를 매기며 주관적으로 우열을 가른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선정의 기준은 약간 객관적인 것이다. 가령 노벨상을 최상의 목표로 삼을 때 우리의 수상 가능을 10년 후쯤으로 본다면 우리의 경우 60대 이하의 중견층 작가에 치중해야 할 것이다. 작품의 성향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으레 가장 토속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이유로 지역성이 강한 작품을 한국의 문학적 얼굴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 토속적 형상이 외국인에게 쉽사리 납득될 수 없고 그래서 공감되는 바가 적은 것이라면 그 좋은 의도는 우리만의 것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장르에서도 외국에서의 출판의 경우 독자가 거의 없는 시보다는 상품성이 높은 소설이 보다 좋을 것이며 그것도 장편소설이 더욱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장편소설이라 하더라도 여러 권짜리의 긴 소설은 비록 문학적인 평가를 크게 받고 한국인의 삶을 알려주는 데 효과적이긴 하지만 외국의 출판사들이 큰 부담을 안으며 선뜻 출판을 맡아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소설 문학에서 훌륭한 자산으로 평가받는 작품은 대개 5권 이상의 방대한 대하소설이 대부분이며 낱권 짜리 장편소설로서 문학성과 상업적 기대를 함께 가지고 있어 외국의 출판 품목으로 적절하게 생각될 작품은 의외로 적다. 그리고 사소하게 볼 수 없는 또 한가지는 번역 작품이 그 나라의 명문 출판사에서 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출판사의 신뢰도가 독자 확보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며 신문과 잡지의 지면을 얻어내는 데는 출판사 편집자의 역할이 크기 때문에 어느 출판사에서 우리 작품이 간행되는가에 따라 그 대우는 상당히 달라진다. 더구나 우리의 목표가 단순히 우리 작품의 번역 간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문학의 수준을 전달하고 그 독자를 얻어내며 그래서 문학적인 평가와 수상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 문학에 대한 서평과 연구를 유도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환경을 만들어내고 효과적인 미디어 관리를 하는 데는 물론 명문 출판사가 훨씬 유리하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외국 번역자와 출판사에의 지원은 지금 우리나라가 그러는 것처럼 공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이 해온 것처럼 음성적인 것이어야 한다. 어느 나라든 국가 기관이나 재단이 공공연하게 후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작품들에 대해서는 높은 신뢰를 보내지 않으며 그래서 그것에 대한 평가는 미온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기술적인 배려는 외국의 한국 문학 수용에 의외로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의 고려하지 못해온 또 다른 점은 상대국의 현재적 문학 경향과 소개할 우리 문학과의 조응 문제이다. 우리에게 중요하고 뛰어나다고 생각한 우리 작품이 다른 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평가와 반응을 얻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방적인 판단일 수 있음을 나는 경험적으로 확인한 적이 있다. 근 10년 전 처음으로 베를린에서 한국 문학 주간을 가질 때 독일인들이 분단과 독재와 전쟁의 피해를 입은 역사적 체험이 우리와 비슷하기에 홍성원, 김주영, 김원일의 그런 주제들의 소설 작품을 그들이 실감있게 받아들이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정작 그 같은 우리 소설들에 대해서보다는 오규원, 김광규, 김혜순의 시들에 대한 반응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독일에서는 한국의 리얼리즘적 소설들이 서술하는 역사적 현실을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그 같은 현실적인 것의 재현은 그들에게 있어 전시대의 기억 속으로 물러난 것이고 이제는 포스트모던적 경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래서 동시대적인 인간의 소외 문제를 표출한 우리 시에 더 공감한 것이었다. 이 경험은 문학적 기호가 얼마든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서로 다를 수 있는 것이며 우리가 그 다른 나라에 우리 문학을 수출하려 할 경우 그 나라의 문학적 분위기와 정황을 미리 파악하여 그들의 기호에 부응할 작품을 선정할 필요성을 환기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문학의 국제화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번역 문제이다. 가와바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사이덴스티커라는 뛰어난 번역자의 원작 못지 않은 훌륭한 번역 덕분이라는 사실은 자주 언급되었고 그래서 우리도 좋은 번역자를 길러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아무리 원작이 좋아도 외국어로 출판되는 한 훌륭한 번역자의 훌륭한 번역 작업 없이는 다른 나라에 제대로 수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쁜 번역은 오히려 원작의 작품성을 훼손하여 차라리 번역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박경리의 「토지」 프랑스어판이 졸역으로 오히려 한국 문학의 이미지를 구겨버린 것이 그런 예이다). 이런 때문에 한국 문학 번역자 양성이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어 번역문학기금을 조성하고 대산문학상이 번역문학상을 포함하게 된 것이지만 그 성과가 당장에 나타날 것은 아니다. 문학 작품 번역에서 가장 이상적인 동시에 일반적인 경우는 한국 문학 연구가이면서 자신의 모국어로 유창하게 글을 쓸 수 있는 현지인의 작업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라면 현지인과 한국인의 공동 작업이 바람직한데 지금 우리의 번역 작업의 단계는 후자의 수준에 멈추어 있다. 전문적인 한국 문학 번역자 양성은 시간도 오래 걸리거니와 한국 문학의 연구와 번역 작업으로 생활이 가능해야 그 지원자가 생겨날 것이어서 한 단계 뛰어오르는 과정에는 보다 장기적이고 적극적인 투자가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 투자는 단순한 문학 작품 번역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경제, 정치, 현실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의 정도가 커지고 문화적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높아지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어서 한국의 국력이 더 강해져야 그 효과가 실제적인 보람을 얻어낼 것이다.

 

한국문학의 국제화, 양에서 질로 전환해야 한다는 테두리에서 재검토되어야…

민족언어로 창작을 해야 하는 문학이 반드시 국제화를 도모해야 할 것인가에는 얼마든지 반론이 있을 수 있고 나 자신도 굳이 외국에 우리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과도한 투자를 해야 할 것인지에 반드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국 문학의 한국 수용과 그 반대의 경우가 지나치게, 불균형의 대칭 정도가 아니라 일방적인 화살표 형태라는 것이 못마땅할 뿐 아니라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 한국 문학의 우수성이 언어적 한계 때문에 국제 문단 사회에서 소외되고 혹은 무시되고 있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나마 한국 문학이 번역을 통해, 교류를 통해 국제화되어야 한다는 의지에 나 역시 지지했고 그런 행사들에 참여해왔다. 다행히 문화정책 당국자나 지원 기관과 재단들이 이 작업에 적극적이었고 지난 20년 동안 외국 문학과의 많은 교환 행사와 한국 작품의 번역 간행이 이루어져왔다. 그리고 새 세기를 맞으면서 이제쯤은 국제화 작업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와 반성을 가해 앞으로의 효율적인 운영을 기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것은 한국 문학의 국제화가 양에서 질로 전환해야 한다는 큰 테두리에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을 뜻한다. 얼마나 많은 작품이 외국에서 간행되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작품이 간행되었는가가 검토되어야 하고 그 번역은 어땠는지, 그 출판사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지, 신문과 잡지와 독자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등 일련의 과정들이 스크린되어야 한다. 교류의 행사도 소개 단계에서 토론의 수준으로, 그저 발표만 하는 단계에서 상호 만남의 단계로 발전하며 작가와 작가간의 친분이 이루어지도록 적극화되어야 한다. 대표적인 작가들을 선정해서 번역, 연구를 위한 집중적인 투자를 하면서 그들을 해외에 장기간 체류시켜 그 나라의 문단과 친숙해지도록 유도하고 외국의 영향력 큰 문학인과 비평가, 연구자, 기자들을 자주 초청하여 우리 문학과의 친분을 키우면서 한국 문학과 문화의 진수에 친숙하도록 도모하며 한국 문학 연구자와 번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지원도 장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이런 작업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많은 투자들은 산만해지고 비효율적으로 되어 우리의 의도는 충분한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이런 국제화 작업을 위해 정부와 기관, 재단, 단체간의 협의와 연대가 아마도 필요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