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현상읽기 / 미술 |
빛과 매체미술 - 이용덕과 유성일의 경우 김영호(미술평론가, 중앙대교수)
최근 우리 화단에서 자주 거론되는 단어가 '매체(Media)' 또는 '매체미술(Media Atr)'이라는 것이다, 매체란 본디 저널리즘에서 나온 말로서 대중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도구나 수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예술의 범주로 들어와 사용되면서 표현과 소통을 위한 갖가지 재료나 방법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고 이에 따라 물감이나 돌, 나무, 청동 등 회화와 조각을 위한 재료와 그 수단 모두가 매체가 되었다. 그러나 단어의 뜻은 시대 상황이나 문화조건과는 함께 변하는 법, 전후 현대미술의 실험적 방법들이 테크놀러지와 결탁하고 정보화 사회가 진행되면서 미술에 있어 매체란 대중전달의 도구와 수단을 지시하는 의미로 정착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매체 미술이만 비디오, 사진, 영화, TV, 컴퓨터 등을 표현의 도구나 수단으로 사용하는 미술을 뜻한다. 위에 언급한 매체들의 공통적 특징은 빛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빛의 독특한 성질 즉 굴절, 반사, 흡수, 편광(偏光), 간섭(干涉), 회절(回折) 등의 현상이나 야광작용, 형광(螢光)작용, 전리(電離)작용, 사진작용 그리고 투과작용 등의 광학적 효과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캔버스화의 기본적 조형요소가 색이라면 매체미술의 기본적 요소는 빛이라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미술사를 되돌아보면 빛의 예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실험되어 왔고 다양한 경향의 미술운동을 통해 나름대로의 업적을 남기고 있다. 광선주의(Rayonnisme)회화에서 키네틱 아트에 이르는 미술사조가 그것이며, 최근 들어서는 홀로그램이나 네온, 형광물질 뿐만 아니라 레이저나 X광선 등의 전자파를 이용한 작업들도 눈에 띠게 늘고 있다. 국내외에서 개최되는 미술이벤트에서 소개되는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면 이러한 전자기기와 빛을 이용한 영상설치 작업들이 독점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 글은 최근 개최된 전시회들 가운데 빛을 매체로 삼고 있는 두 작가의 작품들을 분석하려는 것이다. 이용덕(모란미술관, 6.10~7.9)과 유성일(토탈미술관, 4.1~4.23)의 작업이 그 대상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의 작품에 쓰이는 빛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표현재료로서 슬라이드와 비디오 그리고 사진기 등의 광학적 장비들과 야광도료 등의 물질로부터 온 것이다. (이용덕은 전통적 조각의 형식인 양각과 음각의 기법과 합판 등의 복합재료를 사용하고 있고, 유성일은 청진기나 링겔팩과 같은 의료 오브제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의 형식을 빌려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에서 빛의 사용은 필연적이다. 한편 이들의 작업을 한 지면에 소개하는 이유는 빛을 매체로 사용한다는 점 이외에도 주제의식의 동질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들 개인전에 붙여진 주제를 보면 이용덕은 ‘존재의 양면에서’ 유성일은 ‘존재의 이중구조’이다. 우리는 두 작가의 작품을 통해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어떻게 빛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존재의 양면에서’ - 이용덕의 실루엣 작업 이용덕의 작업에서 사용되는 빛은 관객과 자신의 그림자 사이의 관계를 주목하도록 유도하는 매체이다. 일상적 견지에서 빛은 그림자의 원인이며 실루엣을 만들어 냄으로써 대상을 실체와 그림자라는 두 개의 형상으로 분리시킨다. 이때 실체와 그림자는 하나의 시간대 위에서 불가분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림자가 신체와 종속적인 관계를 지니는 이유는 하나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상관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조각가 이용덕이 개입하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빛의 독특한 성질을 이용해 신체와 그 그림자를 분리시켜 독립케 함으로써 하나의 공간 속에서 두 개의 시간대를 연출시키는 것이다. 이용덕의 작업은 몸에서 그림자를 떼어냄으로서 관객들에게 낯설은 체험을 유도한다. 그의 설치작업 “껍질벗기”(도판1)는 이러한 상황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작업은 지름 650cm의 야광도료를 칠한 원형벽면을 마련하고 그 중앙에 투광기(投光器)를 설치한 것이다. 투광기는 일정한 시간마다 360도 회전시키면서 강렬한 빛을 벽면에 스캐닝(scanning)하도록 장치되어 있다. 광원을 떠난 광선은 공간내부에 들어선 관객의 그림자를 벽면에 비추는데 야광도료의 광학적 효과는 그림자를 벽에 고정시키며 관객의 움직임에 관계없이 머물게 한다. 관객은 벽에 각인된 자신의 실루엣을 바라보면서 신체를 떠난 또 하나의 자신을 체험하게 된다. 빛과 그림자 그리고 시간의 개념을 전치 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타자화(他者化)된 자아를 인식케 하는 작가의 의도는 원형벽면을 따라 새겨진 다음과 같은 문장들에 의해 상징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사과의 속에는 사과가 있다. 가방의 속에는 가방이 있다. 바늘의 속에는 바늘이 있다. 양파의 속에는 양파가 있다. 사람의 속에는 사람이 있다.…” 해석의 모호함이나 다중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존재의 이중적 속성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실체와 허상 나아가서 물질로서의 신체와 실루엣으로서의 정신의 구조가 그것이다. 인간의 존재를 신체의 알맹이와 껍질의 개념으로 분리시키는 그의 작업은 벽에 고정된 실루엣과 내부공간을 배회하는 신체를 둘러싸고 설정된 두 개의 시간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타자화된 자신’에 대한 작가의 실험은 또 하나의 설치작업 “마중과 환송”(도판2)에서 좀더 구체적인 텍스트를 지닌다. 이 작업은 야광 처리된 두 개의 스크린과 작가가 촬영한 일상이미지를 투사하는 두 대의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이용한 것이다. 일상이미지란 출생의 현장과 장례의 예식에 참여하는 인물군상을 뜻하며 이것들은 일정한 시간에 맞추어 벽면에 비추어지고 관객은 현장의 증인처럼 위치해 있다. 관객의 후면에서 순간적으로 비추어진 빛은 관객의 실루엣을 벽면에 동시에 드리우게 하고 앞선 작업에서처럼 슬라이드 이미지의 군상들과 동일한 공간에 편입되는 상황으로 전치된다. 빛이 꺼지고 흑백으로 벽에 고착된 자신의 실루엣은 군중들의 실루엣과 합치되며 이 대목에서 타자화된 자아의 드러내기에 효과적으로 반응한다. 관객은 생성과 소멸 아니면 존재와 부재의 간극에서 3인칭으로 떠도는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무심한 일상 속에 던져진 자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경험은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하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비교적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여기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투사된 컬러 이미지의 군상들과 그 위에 비추어진 관객의 그림자 사이 간극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슬라이드로 투사된 컬러 이미지의 현실과 야광효과에 의해 잔영으로 남은 흑백의 이미지 사이에 설정된 시간의 이동 역시 상황의 전이(轉移)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이와 함께 영상 앞에 서있는 자신과, 실루엣으로 화면 위에 머무르는 자신 그리고 화면의 영상에 동화되어 박제된 자신 사이에는 ‘하나 그리고 세 개의 나’라는 자의식의 다중적 의미구조를 실험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 작업의 의도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이용덕의 작품 “부재”(도판3)는 관객의 동참을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이 작업은 야광 처리된 벽면을 배경으로 두 개의 의자를 마주보게 설치한 뒤 하나의 의자에는 독립된 인체 조각상을 앉혀 놓은 것이다. 비어있는 또 하나의 의자는 관객들에 제공됨으로써 연극적 요소를 강화시키고 있다. 마주 앉은 두 인물은 스파크 라이트에 순간 노출되면서 벽면에 그림자를 남긴다. 다시 실내공간은 어두워지고 벽면은 머금을 빛을 토해내며 신체들의 실루엣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인체 조각상은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며 벽에 비추어진 그의 그림자는 역시 뚜렷하다. 그러나 관객이 떠나버린 의자 너머에 투사된 또 하나의 그림자는 주인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고정되어 머물고 있다. 본체는 빛이 남긴 그림자 앞에서 유령처럼 배회하고 그림자는 시간을 머금은 채 본체를 상기시키고, 시각적 혼돈은 대중을 개념적 차원으로 이끈다. 이상의 작업에서 보듯이 이용덕이 탐험하는 대상은 예외 없이 인간이며 그 작업은 철학적 사유의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 작가는 현상과 본질 사이에 놓인 문을 쉴새없이 넘나들며 존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한다. 그러나 그의 탐험은 사변적이면서도 매체라는 구체적 리얼리티에 근거하고 있으며 존재의 실체를 부재의 상황과의 대질을 통해 확인하려 한다. 양극으로 나뉘어진 형상의 실체를 파악하는 방식은 결국 모순의 경계선상에서 존재를 발견하고 이를 수용하려는 자신의 세계관과 작업태도로부터 온 것이다. 존재의 양면적 속성을 드러내는 이용덕의 빛 작업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우선 방법적인 측면에서 그의 작업은 빛을 흡수해 머금고 천천히 내뿜는 야광도료의 광학적 현상을 이용하여 비확정적 이미지를 생산함으로써 표현의 주안점은 완결된 조형물 자체에 두지 않고 매체와 관객 사이의 관계를 주목한다. 두 번째 이용덕의 작업은 몸과 그림자의 분리를 통해 주체와 객체 사이의 혼란을 야기시키며, 이를 통해 빛의 시각적 체험을 넘어 물질과 정신 사이의 모순적 상관성을 밝혀낸다. 세 번째 감상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용덕의 작업은 빛의 과학을 유희적 또는 연극적으로 수용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다양한 실루엣을 연출하여 스스로의 행위와 결과에 대한 지각체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용덕의 빛 작업은 결국 조형공간에 시간을 대입시킴으로써 4차원적 세계를 드러내며, 부재상황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개념적이다.
‘존재의 이중구조’ - 유성일의 X광선과 투사이미지 유성일의 작업에 쓰이는 빛은 보다 과학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빛은 X광선이며 이를 이용한 사진촬영 장비의 힘을 빌리기 때문이다. X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짧은 파장의 고속도 전자파로서 투과, 굴절, 반사, 간섭 등의 현상을 일으키며 이 때문에 물체의 내부를 떠내는 의학적 장비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유성일은 자신의 두상이나 손발 등의 신체를 X선 촬영기로 접사하여 그것을 일반 사진과 대치시킴으로써 두 개의 이미지를 합성한다. 작가는 신체 이미지 드러내기의 두 구조,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대질시킴으로써 물질과 정신이 분리된 인간의 이원적 속성을 예술의 이름으로 밝혀낸다. 그의 제작방식은 육화된 몸의 이미지와 영혼을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면서도 두 개의 관계를 상보적인 것으로 제시하며 궁극적으로 삶과 죽음이 마주하는 접점으로 관객의 의식을 이끈다. 좀더 포괄적으로 살펴보면 유성일의 작품에 나타나는 외형과 내면의 융합은 X선을 포함해 다양한 ‘의학적 오브제’의 사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슬라이드 프로젝터의 사용은 그의 설치작업에 있어 중요한 매체이다. 신체의 내부를 탐지하는 청진기와 부자유한 신체를 이동시키는 휠체어와 목발, 그리고 생명의 연장과 원기를 회복시키는 링겔팩과 주사기 등은 그가 사용하는 또 다른 오브제이자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틈을 파고드는 상징적 도구들이다. 이와 함께 소금이나 용액 그리고 식물 등의 자연오브제 들은 시간에 의한 사물의 가변성을 나타내는 사물로 제시되고 있다. 설치공간 역시 전시장의 내부뿐만 아니라 도살된 가축을 저장하는 냉동창고나, 수목과 언덕 등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작품으로 끌어드리기도 한다. 그 중 X선 촬영기는 전기했듯이 전자파를 인체의 살에 투사시켜 몸 속의 지지체인 뼈의 구조를 포착해 내는 장치로서 작가가 자주 사용하는 장비이다. 이번 토탈미술관에서의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 가운데 “대화”(도판4)는 자신의 인체두상 이미지와 그를 X선으로 떠낸 이미지를 하나의 평면 위에 마주보게 배치한 사진작업이다. 작가는 신체의 외형과 내부구조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양자를 하나의 화면위에 상호 대질시킴으로써 두 개의 대립된 세계에 대한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이때 청진기는 드러난 외형과 감추어진 내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작용하며 이를 통해 자아는 또 하나의 자아와 만남을 이룬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은 결론을 지시하지 않고 있으며 하나의 상황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불확실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검증의 알레고리로 이해될 수 있다. 유성일의 작업에 있어 빛은 존재물의 배후에 숨겨진 이중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이다. 두개골의 기표가 지닌 기의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 의미들을 염두에 둔다면 유성일의 작업에 나타나는 상징이란 생명의 존재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 삶에서 파생되는 인간성의 상실이나 파괴의 관점에서 그가 사용하는 각색의 의료장비는 치유를 희망하는 자신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두 개의 대립된 세계를 하나의 작품으로 결합해 내는 유성일의 작업방식은 두 개의 슬라이드 프로젝트와 영상 이미지를 이용한 1995년의 설치작업 “인간”(도판5)에서도 효과적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빛은 보다 복합적인 요소로 다루어지고 있다. 방법적으로 보면 이 작업은 두상외형을 촬영한 일반사진과 X선으로 촬영한 동일인물의 두개골 이미지를 두 개의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통해 합성해 놓은 것이다. 프로젝터 사이의 공간에 겹겹으로 드리워진 망사천의 표면에는 광선이 통과하면서 남긴 이미지들이 스며든채 허공에 떠있다. 각각 다른 광원으로부터 떠나온 빛은 망사를 투과하면서 점차 약화되지만 양쪽의 빛이 마주치는 중간 지점에서 간섭작용을 일으키며 강렬한 이미지를 탄생시킨다. 작가는 합성이미지에 이르는 공간에 천을 여러 겹 설치함으로써 빛의 투사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동일 이미지의 토운을 세밀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광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미지를 확대시키는 렌즈의 원리는 제각기 다른 크기의 두상 이미지들을 천위에 자리잡게 함으로써 원근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 작업에서 제시된 두상과 두개골 이미지는 토운과 원근이 야기하는 가시적 세계를 넘어 은밀히 숨쉬는 환각과 몽환의 세계를 보여준다. 광원으로서 프로젝터를 떠난 빛은 인간의 내면과 외면 사이의 대립적 존재상황을 말해주는 정신적 매체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빛으로 떠낸 정신은 반복적 구조를 통해 두 개의 영역으로 갈라져 있다. 거기에는 인간의 육신과 영혼, 외면과 내면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끝없는 의문이 부유하고 있다. 유성일이 이러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의 범주를 넘어 새나 물고기 등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 이른바 생명현상에 대한 관심이며 표현의 소재는 인체를 넘어서 자연물로 확대된다. 예를 들면 전시장에 매단 다수의 링겔팩들 안에 금붕어를 집어넣고 용액을 튜브를 통해 바닥에 연결된 소금무덤 위로 조금씩 방출시키는 작업을 들 수 있다. 이때 링겔팩은 생명을 연장 또는 보호하기 위한 도구이며 금붕어는 생명 자체를 상징한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명백한 위기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시간과 함께 말라버릴 밀폐공간의 조건들은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학기술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비판적 성향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이 사용하는 의학적 오브제가 병든 사회현실에 대한 치료의 희망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표현의 매체로 사용하는 다양한 의학적 오브제들은 의료기구로서의 실용적 기능이 상실되어 있고 그 자리에 상징적 개념들이 자리잡는다. 작가의 작업 “무제”(도판6)에 있어 인간과 자연은 결합된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다. 숲속에 서있는 나무둥치는 인체이미지와 어우러져 제3의 의미들을 생산한다. 이때 제시된 인체는 부분적 형상으로 제시되거나 껍질 속에 존재하는 뼈를 포착한 X선 사진이미지 이다. 작가는 나무의 영혼 또는 영혼이 거주하는 나무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아니면 건강한 자연으로서의 숲에 대한 기원의 예식을 나타내려는 것일까? 그의 작업은 숲에서 호흡하는 신체이미지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숨결을 일치하려는 자신의 희망을 반영하고 있다. 유성일의 빛은 인간존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나아가 환경파괴와 문명의 위기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기 위한 기호이다. 이와 함께 작가는 자신의 신체 외형이미지 사진을 하나의 작업 위에 합성하고 대치시킴으로써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을 파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 나타나는 의미는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선택적이다. 그러나 적어도 존재의 이중적 구조를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는 효력을 가진다. 존재의 이중적 구조란 철학적 종교적 개념이지만 일상적 생활을 통해 언제나 접하게 되는 매우 평범한 현상이기도 하다는 것을 작가의 작업은 일깨워 준다. 종합적 시각에서 유성일의 빛 작업에 나타나는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우선 의료기술인 X광선을 이용한 촬영기법을 이용하여 내면과 외면의 경계를 넘어선 제3의 시각이미지를 생산해 낸다. 그러나 유성일의 작업이 보여주는 개성은 촬영된 신체이미지가 슬라이드 프로젝트나 전기조명 박스를 이용한 설치적 작품에서 한층 강조되어 나타난다. 유성일이 시도하는 빛의 연출은 결국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귀착되며 나아가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으로 확대되고 있다. 문명에 의해 훼손되는 자연에 대한 발언은 그의 작업이 공해나 환경의 문제까지도 관여하며 병든 현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대중들에게 소통시키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빛의 딜레마 이상에서 우리는 두 작가의 작업에 나타나는 빛의 형식과 그 지향개념에 대해 살펴보았다. 모두의 경우 빛은 매체이며 정신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대중 전달매체가 예술일 수 없듯이 빛 그 자체가 예술일 수 없다. 좀더 분명히 말하자면 빛은 예술의 조건이며 재료일 뿐이다. 빛과 빛의 체계의 관계는 명백히 분리되어 있으며 이 두 가지는 하나의 기호 속에 양립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광학의 영역에서 빛의 체계란 굴절, 반사, 형광, 사진 등의 성질을 통해 진행되는 물리화학적 현상을 지시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의 영역에서 빛의 체계란 의미부여의 형식을 뜻하며 여기에 표현과 해석상의 딜레마가 숨어있기도 하다. 이용덕의 경우 작가에 의해 제시되는 빛과 그 체계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프로세스의 미학을 취하며 오히려 가변적일 때 그 효과가 지속된다. 가변적 효과는 소위 ‘낯설게 하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장치된 전시공간에 들어선 관객의 태도가 예술을 완성시킨다 했을 때 작가의 몫은 무엇인가? 무대미술가의 그것인가? 이용덕의 작업에 있어 의미부여의 형식이란 관객들과의 공모를 통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관중을 기다리는 객석처럼 그의 예술은 항상 누군가를 고대하고 있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추가할 수 있다. 이용덕에 있어 빛의 예술은 놀이인가? 과학인가? 미완의 개념인가? 과정의 논리인가? 아니면 철학적 담론의 수단인가? 그렇다면 감성과 표현이 자리하는 지점은? 유성일의 경우 빛의 체계는 은유와 상징의 알레고리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개성적이다. 이는 그의 작업이 X선의 힘을 빌리고 있지만 테크니시앙의 기술적 견해와는 무관하게 작품 제작에 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대중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하이테크놀로지의 세계가 아니라 그것에 대응하는 예술적 대안이다. 그가 사용하는 빛은 역시 병든 사회현실에 대한 고발 아니면 치료의 희망을 나타내며 자기검증의 태도가 거기에 동시에 깔려있다. 디지털 기술이 첨단의 사이버 이미지들을 생산하고 가상의 리얼리티가 인간존재의 위상을 변화시키고 있는 현실에서 존재의 다중적 구조와 의미를 탐색하는 이들의 예술에 거는 기대는 위기의식의 크기만큼이나 크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