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현상읽기 / 영화

북한, 일본 영화를 문화의 용광로에 넣어 세계성 있는 영상문화 창출의 기회로 삼아야 - 북한, 일본 영화 수입문제

정용탁( 한양대 교수)

지난 6월 남북 정상회담은 우리의 정치, 사회, 경제, 국방,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50여년 이상 적대관계에 있었고 남북한 정부 상호간에 적대감 고취에 선전 매체를 동원했던 과거의 관성에 젖은 국민들로서는 기쁨과 동시에 당혹감을 또한 피할 수 없다. 국민들은 남북정상회담을 환영하면서도 북한측 진의에 대해 다소 의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북한 측은 국민의 의심을 살 만한 많은 정치 군사적 행위를 해왔다. 따라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 답방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며 진실이 실린 남북화해안이 나올 때까진 국민들이 회의적인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적인 사항이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상이 서울 방문을 진정 남북의 주적 개념을 바꾸고 민족화합과 점진적 통일방안을 내놓고 이를 남북 국회를 통해 인준 받는다면 북한은 적이 아닌 가장 가까운 우호적인 국가가 될것이다.

현재 지구 상의 나라 중 유일하게 영화수입이 금지된 곳이 북한이다. 그동안 통일원과 문예진흥원 자료실을 통해 북한에 대해 관심이 있는 시민들을 위해 참고자료로서 북한 영화의 비디오가 관람 허용되긴 했으나 상업적 영화상영은없었다. 그러나 방송에선 <임꺽정>, 또 얼마 전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춘향전을 각색해서 만든 <사랑 사랑 내사랑>을 SBS를 통해 방영했다. TV PD 협회가 북한 영화를 반입, LG 쌍둥이 빌딩 시사실에서 세미나 형식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현재 많은 국내업자가 비공식적으로 북한 영화를 수입, 국내 세관에 보관 중이다. 만일 북한이 관계 법령을 통해 주적개념에서 제외된다면 북한 영화의 국내 수입은 금년부터 실현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음성거래에 따른 부작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영화의 상업적 일반공개에 앞서 북한 영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계몽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계몽활동이 없으면 북한 영화는 국내에서 상업적으로 전멸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영화본질은 이윤을 위한 상품이고 사회주의 국가의 영화는 정치적 계몽물이기 때문이다. 자주적 재미만을 추구하는 요즘 한국 관객들에게 북한 영화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낡은 영화처럼 보일 것이다.

 

북한 영화의 이해

북한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하게 정리하겠다. 한국영화사는 일제시대인 1919년 신극좌에서 김도산이 연출한 단성사에서 공연한 연쇄극 <의리적 구토> 중 야외장면을 10여분 찍은 필름으로부터 출발한다. 연극 관람 중 스크린을 치고, 연극내용 중 야외장면을 찍은 10여분짜리 필름을 돌리고 다시 연극을 계속하는 연극의 보조 수단으로서 이용되는 활동 사진에 불과했다. 이날 단성사의 공연에는 경성의 풍경을 찍은 <경성전시의 경>도 함께 특별 상영되었다. 극영화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영화는 1923년 조선총독부에서 저축장려 계몽 영화로서 찍은 윤백남 감독의 <월하의 맹서>이다. 한국 영화 당시는 조선 영화는 일제와 저항과 타협을 반복하며 제작되다가 해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의리적 구토>가 남북한 영화의 효시가 된다. 그러나 북한은 북한 영화의 시발점을 <의리적 구토>에 두지 않고 해방 후 첫 기록영화인 1949년 <우리의 건설>과 <내 고향>에 두고 있다. 일제 강점시절의 조선영화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도 좌파영화 당시 경향영화라 칭하던 김유영 감독의 <유랑>(1928), <황혼의 거리>(1929) 등이나 나운규의 저항적 <아리랑>(1926) 같은 작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영화사에서 이를 배제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북한은 최근 들어 일제시대의 몇몇 영화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진행 중이며 나운규에 대한 저술을 출판했다. 이 글 중 많은 부분을 조희문 교수의 나운규 연구서를 그대로 표절 그것도 조희문 교수가 자인한 잘못된 부분까지 표절한 것으로 보아 이들에 대한 연구는 기초수준에 머문 듯 하다.

김일성은 해방이후 조선노동당을 창설, 정권을 장악한 뒤 당의 선전을 목적으로 당중앙위 선전선동부에 영화반을 두고 영화인을 모집했다. 빈약한 조건 속에서 출발한 영화반은 그 후 영화제작소로 다시 조선예술영화 촬영소로 1947년 발족했다. 조선예술영화 촬영소는 첫 작품으로 김일성의 항일 혁명사를 다룬 <내 고향>이란 예술영화(북한에서는 극영화를 예술영화라 한다)를 만들었다. <월하의 맹서>가 저축계몽물이라면 <내 고향>은 정치계몽물이다. <용광로>, <흙>,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 등이 6·25사변 이전에 만든 예술영화들이고, <인민위원회>, <남북연석회의>, <38도선>, <민주건설>, <8월 15일>, <친선의 노래> 등이 당시에 만든 기록영화이다. 6·25동란으로 조선영화 촬영소가 UN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전쟁 중에서 <소년유격대>,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 등 극영화를 <또 다시 전선으로> 등 기록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영화는 남북한 모두 전쟁계몽물이었다. 휴전이후 56년까지를 북한은 전후복구기로 보는데 천리마운동을 선전하는 계몽물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 시기에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촬영소를 재건하게 되고, 영화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소련과 중국에 파견한다. 56년 북한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작가 예술인들의 부르조아 사상 잔재 청산 문제가 제기되어 영화인들 특히 월북 영화인들이 크게 위축된다. 극영화의 제작 편수는 기하학적으로 급상승 59년에는 52편이나 제작되었다.

60년대 들어 북한은 기존 조선영화 촬영소와 조선기록영화 촬영소의 규모를 확대하는 한편 62년에는 2·8 영화 촬영소와 과학 영화 촬영소를 신설하였다. 60년대 북한은 연간 30∼40편의 극영화를 제작했고, 기록 영화는 연 2편, 뉴스 영화는 매주 제작하였다. 64년에 주민 1인당 년간 관람회수가 15회였다. 이는 북한 영화의 대부분이 정치선전 계몽물이므로 의무적으로 영화를 볼 수 밖에 없는 환경 때문이다. 60년대 북한 영화의 주된 유형은 김일성 가계 우상화물, 혁명전통극, 4대군사노선 및 호전적 전쟁물, 천리마 운동 계몽물, 적화통일 사상주입 계몽물, 공산주의 사상 우월 계몽물 등이다.

64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와 66년 영화문학작가, 영화연출가(감독)에게 한 김일성 교시인 “혁명 교양, 계급 교양에 이바지할 혁명적 영화를 더 많이 만들자”와 “깊이 있고 내용이 풍부한 영화를 더 많이 창작하자”가 60년 이후 현재 북한 영화까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70년대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화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북한영화에 대한 하드웨어에 대한 발전과 소프트웨어에 대한 경직상태를 가져왔다. 60년대 대표작으로는 <폭풍시절>, <청년권위>, <그들은 이렇게 싸웠다> 등 혁명전통물과 <승리자들>,<박달령>, <천리길>, <병사의 명절> 등 전쟁물과 <정방공>, <붉은 꽃>, <백일홍>, <인민교원>, <뜨거운 심정>, <새세대 처녀 중대장> 등 사회주의 건설물과 <길은 하나이다>, <보이지 않는 전선> 등 적화 통일물 등이 있다.

70년대부터 김일성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세습을 위한 정치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공산주의국가에서 유례가 없는 세습에 대한 주민의 반발과 당혹감을 무마하기 위해 김일성 가계의 우상화에 치중하게 된다. 이 시대의 영화는 오락성이 줄어들면서 사상성이 늘어나게 된다. 70년대 대표작으로는<한 자위대원의 운명>, <성황당>, <꽃 파는 처녀>, <조선의 별> 등 김일성 가계 미화물과 <이름 없는 영웅들>, <전선길> 등 호전적 전쟁물, <꽃 피는 노동가정>,<고압선>, <압연로>, <처녀 이발사>, <아내의 일터>, <여자 트럭 운전수>, <양지 마을 사람들> 등 경제 계몽물 등이 있다.

80년대의 북한 영화는 70년대 영화와 대동소이하다. 70년대 중반부터 북한영화는 사상성의 강화로 오락적인 측면이나 예술성에 있어 답보 상태에 빠져 국내외적으로 빛을 못 보게 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영화에 새로운 활력을 넣기 위해 신상옥 카드를 활용했다. 신상옥은 최은희와 함께 북한에서 <사랑 사랑 내사랑>, <불가사리>, <소금>, <돌아오지 않은 밀사> 등 다양한 소재의 영화를 감독, 북한 영화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최은희는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상을 수상, 강수연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 앞서 여우상을 수상했다. 북한의 많은 영화인이 당의 눈치를 살피느라 표현을 절제한 반면 신상옥은 해외 영화제나 시장 진출을 빌미로 북한 영화인들이 누릴 수 없는 표현의 자유를 누렸다. 당시 북한의 영화 잡지 「조선영화」에는 신상옥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글들이 실리기도 했다. 신상옥의 서방 탈출 이후 혼란에 빠진 북한 영화계는 90년대 들어 경제적 침체로 더욱 어려운 입장에 극영화 제작편수도 대폭 줄게 되었다. 황석영 작가의 북한 체류시 만든 황석영 각본의 광주 민주화 운동시 학생운동을 다룬 일련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으나 영화계의 침체는 계속 되었다.

이미 1917년 레닌의 주장에도 잘 나타나듯이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영화가 가장 중요한 선전매체이다. 따라서 사회주의국가의 영화는 정치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정치발전도가 곧 영화의 수준이 된다. 사회주의권 영화는 당으로부터 표현의 확장을 얻어내지 못하는 한 발전은 한계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북한 영화를 이해하는데에는 다음 사항이 매우 유용할 것이다. 80년대 중기 조선 예술에 실린 김룡봉의 글 ‘당의 령도 밑에 힘차게 전진하는 우리의 주체적인 예술 영화’에 ‘혁명적 이익과 당의 노선에 충실하는 것은 우리 영화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영광스러운 항일 문학예술 전통의 터전 위에서 싹트고 주체사상의 깃발아래 개화 발전한 우리의 영화예술은 첫걸음을 떼기 시작한 그 때로부터 우리 당의 로선과 정책을 견결히 옹호하고 적극 선전하여 왔다. 우리 영화예술의 이러한 특징은 해방 후 첫 기록영화 <우리의 건설>과 첫 예술영화 <내 고향>에서 벌써 뚜렷이 나타났다.’

또한 김일성 주석은 66년 교시 ‘길이 있고 내용이 풍부한 영화를 더 많이 창작하자’에서 “영화는 사람들의 혁명적 세계관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어야 하며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도 한 번 혁명적 주인공처럼 싸워보겠다는 결심을 가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영화가 사람들을 심도있게 교양하여 혁명적 세계관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원수들에 대하여 이를 갈고 치를 떨며 혁명을 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투쟁에 떨쳐나서도록 하여야 하겠는데 그런 작품이 얼마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 당의 혁명 전통을 주제로 한 영화들을 잘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혁명 전통 교양은 노동자들에 대한 혁명 교양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혁명이란 무엇이며 왜 혁명을 해야 하는가, 또 혁명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데서 지난날 혁명가들이 어떻게 혁명투쟁을 하였는가 하는 생동한 사실을 가지고 교양하는 것보다 더 위력한 방법은 없읍니다. 그러므로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잘 쓰는 것은 남조선 청년들과 인민들을 혁명적으로 각오시키는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오늘 우리 당이 나라의 살림살이를 알뜰히 꾸릴 때 대한 문제를 중요한 과업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 만큼 이 문제를 취급한 영화도 만들어야 합니다. 살림살이를 알뜰하게 꾸리는 문제를 가지고 교육영화들을 만들 때 대한 과업을 구었는데 교육영화와 함께 예술영화도 함께 만들어야 합니다.”

“남반부 인민들의 투쟁을 취급한 영화도 많이 만들어야 하겠읍니다. 남반부 학생들의 투쟁을 현상화한 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는 사람들의 혁명의식 발전과 세계관 형성과정을 비교적 잘 보여 주었읍니다. 남조선 혁명을 위하여 용감하게 잘 싸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투쟁자료를 가지로 영화를 만들어야 겠습니다. 남반부 인민들의 투쟁을 취급하는 작품들에서 남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좀 더 생동하게 그려야 하겠습니다.”

북한 영화는 기록 영화나 교육 영화도 정치적인 주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85년 조선영화에 실린 김룡봉의 글 속에도 이 점이 잘 부각되고 있다.

“우리 기록 영화의 화폭의 중심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영광찬란한 혁명역사, 우리 당의 노선과 정책의 승리로 노정이 빛나게 수록되어 있다.” 북한 영화를 보면 소재나 주제 이외에도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우선 전개가 서방영화에 비하여 완만하다. 카메라의 이동이나 편집의 템포 등도 느리다. 많은 경우 대사를 중시하여 줄거리를 끌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연기자들의 표정의 다양성이 결여되어 있다. 북한 사회체제가 다양한 표정의 발달에 장애를 주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음악이 넘쳐난다. 음악의 과잉은 음악의 깊이를 못 느끼게 한다. 이 또한 교시에 의한 연출 방향이므로 북한 영화에서 음악의 절제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떻든 북한 영화는 곧 들어 올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편법으로 중간 북한 문화관계 브로커(이 중에는 조선족도 포함되어 있는데)로부터 산 영화 판권이 북한의 공식기관에서 인준을 해주느냐도 문제이다. 일부 매매는 사기 브로커의 농간일 가능성도 크다.

북한 영화의 수입에 있어 관세도 문제이다. 남북한이 동일 국가라면 내국자 거래이기 때문에 무관세이며, 수입심의절차도 생략되기 때문이다. 또한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규정도 문제가 된다. 반사회적, 반국가적 소재나 주제를 다룬 영화는 등급보류에 해당하는데 북한 영화가 이 규정을 비켜가기는 힘들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사회주의 찬양이나 가치관을 담지 않은 북한 영화는 거의 없다. 따라서 만일 북한 영화를 상영하게 정부시책을 바꾼다면 북한 영화에 한해서는 북한의 사회상의 이해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반민주적, 반한국적이라 할지라도 상영을 허용하여야 할 것이다. 어떠한 작품이라도 한국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할 확률은 거의 없다. 한국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에 면역이 되어 북한 영화가 갖고 있는 선전성에는 극히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영향이 없겠지만 한국 영화의 북한 상영은 북한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줄 것이다. 따라서 한국영화의 북한 상영은 한동안 불가능 할 것이다. 그렇다고하여 우리가 상호주의를 내세워 북한 영화를 수입 반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북한 영화는 한국민에게 있어서는 오락물이 아니고 역설적으로 그들 영화의 주제와는 달리 정치적 반공 계몽물이 될 수도 있다. 북한도 중국정도로 개방된다면 남한의 자본을 끌어들여 장예모나 첸 카이거의 작품처럼 국내 상영이 안 되는 해외용 북한식 예술영화(극영화)가 있을 것이며 애니메이션 부문은 하드웨어가 발달하여 남한과 합작체제를 구축한다면 곧 흑자도 낼 수 있을 것이다. 남한을 비난하고 왜곡한 북한 영화를 아량을 갖고 봐주는 행위야 말로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 사람들을 신뢰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미국을 인종의 용광로라는 말을 쓰듯 프랑스를 문화의 용광로라는 말을 쓴다. 만일 북한의 정치 영화가 자연스럽게 관객들에게 보여진다면 적어도 영화에 있어서는 국제화와 다양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는 새로운 문화충돌에 의한 한 차원 높은 고차원의 문화창달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북한 영화의 수입자유화는 현재 규제 받고 있는 일본 영화에 대한 규제는 자동적으로 원인무효가 된다. 그 동안 이런 저런 구차한 이유로 일본 영화에 대하여 규제해 왔다. 표면적인 이유는 왜색문화 침투와 일본 영화가 폭력 외설적이란 이유였다. 그러나 국교정상화란 상대국가를 인정하고 그들 문화를 통해 상호 이해 증진과 친목을 도모하겠다는 의지이다. 한일국교정상화가 40여년 가까이 되면서도 그 동안 일본 대중 문화를 봉쇄한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정책이다. 북한 영화 개방에 앞서 일본 영화를 전면 개방하는 것이 그동안 부자연스러운 정책에 대한 마지막 배려일 것이다.

 

현대 일본을 이해하는데 대중이 가장 접하기 쉬운 것은 영화이다

문화라는 것은 수압과 같이 높은데서 낮은데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어 있다. 이를 인위적으로 막을 수도 없으며 막는다 개방 시기에 처음 개방보다 더 큰 부작용을 낳게 한다. 대중문화보다 순수문화부터 교류하자고 하지만 역사를 통해 볼 때 대중문화가 타국에 먼저 전파되었지 순수문화가 먼저 전파된 적은 없다. 따라서 대중문화의 교류 억제는 진정 문화교류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이다. 대중 문화야 말로 대중이건 민중이건 서민들의 정서가 가장 잘 깃들어 있기 때문에 한 나라의 문화나 관습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습득하여야 할 키워드이다. 일본 대중 문화에 대한 한국민의 편견을 몇몇 오피니언 리더들의 편견과 정치적 의도에서 온 것이지 그들 문화를 접해보고 얻는 오해가 아니다. 일본 대중문화 반대론자들이 왜색, 왜색하지만 어느 때는 일본 문화는 한반도에서 전해주었다고 기염을 토한다. 그들 논리에 어폐가 있는 것은 한반도 문화가 일본에 전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일본 문화는 한반도 문화가 아닌가. 그렇다면 일본 문화의 한반도 진출은 한반도 문화의 회귀에 불가한데 이에 대해 과잉반응을 보이는 것은 콤플렉스의 소산일 뿐이다. 왜색, 왜색하지만 요즘 일본 사람들은 요즘 일본에 일본적인 것은 하나 없고 모두 서구적이라고 한탄한다. 일본의 젊은이들도 일본 전통적인 것보다는 구미의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다. 서구의 대중문화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아니 숭배하면서까지 받아들이며 서구화된 일본의 대중문화를 강경하게 애국심까지 들먹이면서 배척하는 것은 지성인의 자세가 아닐 것이다. 현재 일본 영화를 외국영화제에서 부분상까지 수상한 영화나 전체관람가인 영화만이 수입허가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영화이며 제작국만 프랑스인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이란 하드 코아 포르노 영화가 몇몇 장면을 삭제하고 예술영화라는 미명하에 수입되어 상영이 끝났다. 또한 부산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다 하여 수입 추천되어 국내 상영되었다. 정부의 규제 조치가 요령 피우는 수입업자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고 준법 정신이 투철한 수입업자만 손해보게 만들었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을 비롯하여 모든 일본 영화를 수입허가하는 것이 자연스런 상업질서로서 부작용을 덜 수 있을 것이다. 과거 70년대 외국영화 수입억제 정책이 외국 영화 특수를 만들었듯이 일본 영화의 제한된 개방은 일본 영화의 희귀성만 증폭, 흥행에 도움만 줄 뿐이다. 일본 영화의 폭력, 외설 문제를 말하자면 현재 미국, 홍콩, 한국 영화가 일본영화의 폭력에 못지 않으며 외설성 또한 유럽 영화는 일본 영화에 못지 않다. 폭력과 외설 문제는 현재 외국 영화 수입 관계규정으로도 충분히 규제되므로 폭력 외설문제로 특정 국가의 영화를 규제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정책이다. 일본영화가 국제 영화 시장에 미칠 영향을 이야기 하지만 일본 영화란 본질적으로 외국영화이므로 할리우드영화나 홍콩영화 등의 경쟁관계이지 국내 영향력은 일본 영화 수입 반대론자들의 주장만큼 크지 않다. 할리우드로 빠져나가는 막대한 외화는 문제 삼지 않으면서 일본으로 유출되는 외화만 부각시킨다면 이 또한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외국 영화로 인해 빠져나가는 외화도 일정하기 때문에 외국영화 배급업자들의 상호 경쟁 관계이지 국내 영화와는 큰 관계가 없다. 일본에서도 일본 영화가 외국영화에 밀려 흥행에 고전을 하고 있는데 그런 영화가 외국 영화가 완전 개방된 한국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우이다. 긍정적 의미건 부정적 의미건 우리는 일본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현대 일본을 이해하는데 대중이 가장 접하기 쉬운 매체가 영화이다. 영화를 읽는 방법만 알면 부작용 없이 현대 일본인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는데 일본 영화만큼 좋은 매체도 없다. 그동안 우리는 일본의 장단점의 균형 있는 평가보다는 식민지 콤플렉스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부정적 측면과 가해자의 측면만 강조해 청소년에까지도 무의식적으로 식민지 콤플렉스를 심어 준 감이 없지 않다.

일본 영화가 갖는 문제점이 있다면 외화수입심의위원의 양식과 저널리스트, 영화평론가의 도움으로 소화하면 일본영화도 장점이 많으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다른 외국영화와 같이 일본 영화를 맞이하자.

북한 영화와 일본 영화를 마지막으로 문화의 용광로에 넣어 세계성 있는 새로운 영상문화를 창출하는 기회로 삼자.